개척교회(開拓敎會)목회자 사모의 고통
주께서 명령하시기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하였다( 막16:15-16).
그리하여 주의 은혜가운데 목회자로 부름은 받았지만 기성교회는 가지 못하고 개척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큰 건물도 얻지 못하고 20평 내지 30평짜리 지하건물을 월세로 얻어 예배 실 및 사택을 꾸며 아이들과 지하(地下)에서 생활하면서 하루하루를 사는데 인간적으로 볼 때는 너무 초라하고 그 고통은 생각보다 훨씬 더하여 강대상 앞에서 엎드려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고 생활비도 모자라서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은 때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여 어른들은 그래도 참고 견디겠는데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이 굶어서 어머니 배고파요 할 때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다.
같은 목회인데도 큰 교회에서 시무(始務)하시는 목사님들은 그래도 생활비를 넉넉하게 받아 아이들 먹이고 가르치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넉넉한 모습을 볼 때는 자신들의 처지가 더욱 서글퍼지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 아이들을 끌어안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울어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말이 쉬워 개척이지 해보지 아니한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하고 있는 말을 무슨 소리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것은 성도들이 한 두 명 들어왔다가도 교회 모습을 보고 그 형편을 보고는 그 다음부터는 다시 오지 아니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개척에 동참하겠다는 정신이 결여되어 손해보는 예수는 믿지 아니하겠다는 계산인데 큰 교회 나가면 뒷좌석에 가만히 앉았다가 가면 누가 말하는 사람도 없고 편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큰 교회들도 처음에는 모두가 개척으로 시작하여 오늘에 대형교회를 이룩했는데 그들은 그렇지 아니한 것 같이 개척교회를 우습게 아는 버릇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교회를 출입하는 성도들도 큰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무슨 자랑인 것 같이 생각하고 개척교회를 보는 눈이 곱지만은 아니한데 하나님 앞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아니할 줄로 안다.
그래서 같은 기독교인들이지만 개척하는 목회자 가족들은 이방인 취급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에게 폐를 끼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나도 속상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수 없이 많았지만 그러나 주님의 종으로서 어려운 일을 시작했다는 것 외에는 죄가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며 욥기서의 말씀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을 때가 있는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하신 말씀인데(욥8:7) 지금은 이렇게 굶주리고 헐벗고 멸시와 천대를 받지만 나중에는 좋은 날이 올 줄로 믿고 위로를 받는데 더욱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말씀은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하였다(시118:5-9).
그러나 목회자인 남편이 힘을 잃고 축 늘어진 모습을 보는 아내인 사모로서는 더욱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어 그를 붙들고 울어 본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 초창기에 개척하는 분들은 그래도 보람을 느끼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개척교회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도움도 주고 협력도 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신학교에서 주의 종들은 많이 배출되고 교회들은 그들을 다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수요는 적은데 과잉 공급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른 것 같다.
그래서 너도나도 개척을 시작하다보니 부작용도 적지 않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어떤 전도사님은 개척을 시작할 때는 큰 뜻을 품고 시작하였는데 뜻과 같이 결과가 나타나지 아니하여 건물 세를 정리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발생하고 또한 개척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임자들과 돈 거래를 하여 교회를 물려주고 떠나가서 그것이 말썽이 되며 그 외에도 좋지 못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계속 터지니 순수한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자녀들까지 희생시키면서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참신한 교역자들까지도 직접적인 면으로 간접적인 면으로 피해를 보게되는데 개척교회 하는 목회자들을 위로대신에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 시선에 냉기가 돌고 기독교 냄새는 전혀 맡을 수 없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거리에 다니다보면 수많은 자동차들이 굴러다니는데 한 두 대가 사고를 낸다고 해서 모든 차들을 사고 내는 차로 보는 것은 잘못인 것처럼 개척하는 모든 종들을 사고 내고 도망간 그들과 같이 취급 내지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처음부터 경계하는 태도는 개척하는 순수한 주의 종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서글프고 어떻게 생각하면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밥벌이를 위하여 한 수단으로 개척하는 기분이 들 때는 더욱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전체 개척교회 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모두가 조심하여 말썽의 소지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전체적인 이미지가 좋을 텐데 몇 분들의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전체가 욕을 먹을 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고운 눈으로 보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아이들을 지하에서 재우니까 습기가 차서 얼굴들이 부어오르고 색깔이 누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는데 거기다가 개척교회가 어떻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은 인간인지라 화가 나서 견딜 수 없고 울고만 싶은 심정이다.
때로는 비가 오면 물이 차서 습기는 많아지고 공기는 탁해지며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을 느낄 때로는 주의일 하지 아니하면 못 먹고사는가 하고 남편에게 가슴아픈 말도 더러 하고 불평도 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이 사명이 있어서 하는 일인데 당장 그만두는 일도 아니라 참고 견디며 주 앞에 두 손 모아 기도 드리지만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매여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 왜 저는 이런 고통을 해야 합니까 아이들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잘 먹이지도 못하여 얼굴이 부어오르고 제대로 입히지 못하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도록 하셔야 합니까 하고 해서는 안될 기도를 드리기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런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도와는 주지 못하면서 도리어 가슴에 못을 박는 일들을 하는 것을 볼 때는 목회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자고 할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가 많지만 그래도 그럴 수 없어 참고 견디며 사는 것이 개척교회에서 목회 하는 사모님들이 당하는 고통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고 도우시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돕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낙심하다가도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는 주께서 내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언젠가는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큰 교회로 성장할 것을 믿으며 구약의 요셉을 생각하고 목회에 큰 힘을 얻는데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하였다 (창39:5).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라고 한 말은 마치 야곱으로 인해 라반의 집이 복 받은 것과 같이(창30:27). 이것은 일찍이 아브라함과 체결한 언약에(창12:3) 근거한 복으로서, 은혜 받은 자의 영적 영향력은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모든 부분과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내가 요셉처럼 주의 인정만 받으면 결코 굶주리거나 헐벗지는 아니할 것을 믿는 목회 철학(牧會哲學)을 가지고 현재의 고통이 장차 영광이 되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고 있으니 그 믿음대로 될 것을 믿고 고통스럽지만 참고 견디는 것이다 .
그러므로 개척교회 시작한 목회자들을 기도로 돕는 한은 있어도 그들을 불리하게 헐뜯고 해롭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개척교회 시작한 분들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여 울면서 기도하면 틀림없이 도우심을 받고 곧 자립하고 큰 교회로 성장할 것으로 믿는데 다만 개척교회일수록 무엇이나 분명하게 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들어오지 아니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전주 안디옥(깡통)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목사님은 14년 전에 개척을 했는데 지금 은 약 3천명의 성도와 년간 예산이 30억이 넘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그렇게 급성장했을까 처음부터 분명한 철학과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이 긍정할 수 있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떤 철학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게만 한다면 기성교회에 대한 실증을 느낀 사람들이 찾을 것이며 처음 교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라도 그와 같은 교회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도 사명감으로 개척하여 고생하시는 분들을 물질로도 돕지만 측면에서 기도로서 협력하여 속회 성장하여 고생하시는 사모님들의 고통을 덜어드리고 눈에 눈물을 닦아드리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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