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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子女)들의 어머니로서의 고통

by 【고동엽】 2022. 2. 16.

자녀(子女)들의 어머니로서의 고통

 

목사이기 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고 사모이기 전에 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인데 목회와 자녀를 어떻게 조화(調和)를 이룩해 나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지나가야 하는데 단편적으로만 보면 가정과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여야 되는 것 같이 성경은 힌트를 주고 있는데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하였다(마4:18-22).


이는 주님의 종이 되는 조건으로 직업과 가족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말씀이 기록되었고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는 상급이 많은 것으로 알도록 기록을 하였는데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하였다(막10:27-30).


주의 일하려고 가족과 전토 및 직장을 모두 버린 자는 백 배로 받고 라는 말씀은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복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했는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편적(斷片的)으로만 보기는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하였다(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한 말은 '자기 친족'(톤 이디온)은 구체적인 범주를 정하기는 어려우나 '자기 가족'(오이케이온)은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고 하였고(Guthrie). '돌아보지'의 헬라어 '프로노에이'는 문자적으로 '미리 생각하다', '준비하다', '공급하다'의 뜻을 갖는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고 한 말은 혹자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인데 자기의 직계가족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로서 전혀 복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 구절을 해석한다(Scott).
또한 여기에서의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고백되는 신앙 고백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배반한 것'을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Lenski).
결론적으로 본 구절은 일반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이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는 자이므로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주의 종들에게 하는 말이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하였다(딤전3:4-5).
이는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한 말은 감독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가정의 훌륭한 가장(家長)이 되어 자녀들을 복종시켜야 한다. '다스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스타메논'은 '앞에 서다' 또는 '앞에 두다'를 뜻하는 동사 '프로이스테미'의 현재 분사로 '앞서서 행하는'이란 의미를 지닌다.


감독이 모든 일에 자녀들의 모범이 될 때에 자녀들은 신뢰를 가지고 부모를 공경하며 예의 범절을 지킬 수 있다.
이는 또한 감독이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데 있어서 그 품위를 잃지 않고 자녀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에 힘쓰는 것을 의미하고 '단정함'(셈노테토스)은 '방탕'과 반대되는 말로서 행동이 정숙하고 기품과 규모가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Calvin).
그리고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께 교회를 돌아보리요) 한 말은 본 절에 괄호가 있는 것은 이 구절이 앞 절을 설명하는 삽입구임을 암시하는데 가정은 사회 집단의 최소단위인데 이 최소 단위를 잘 다스릴 수 없는 자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잘 돌볼 수 없다.
한편 '교회'의 헬라어 '엑클레시아스'는 '엑칼레오'('불러낸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본래 '정규로 소집된 시민의 정치적 집회'를 의미하였으나 점차 이스라엘의 종교적 집회에도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가리키고 교회는 가정과 유사점이 많아 복음의 사역자에 대한 권위가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비슷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모인 형제와 자매가 있는 것도 그렇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큰 가정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Barnes).


사모는 가정에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매우 큰데 목회자의 사모라고 해서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적당히 해도 되는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은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하였으니 가정에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돌아보고 그들이 남편의 목회 하는데 지장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들이 어떤 사업하는 가정의 아이들처럼 용돈을 풍성하게 쓰는 것도 아니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남달리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도 아니라 항상 아이들의 불만이 많은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주문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걸맞지 아니하게 주문을 하는데 이들이 어른답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 수 더 떠 목회자 집의 아이들을 목회자와 같은 언행을 요구하고 있으니 여기서부터 사모로서는 큰 심적인 부담을 안고 아이들만 보면 너희는 목회자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 욕먹지 않게 해달라는 주문을 기계적으로 계속하게 되는데 이에 아이들이 반발을 하는데 심하면 정반대로 역효과가 나타나 알게 모르게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는 반항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럴 때 서모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고 괴로움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고 혼자 눈물 흘리며 목회자의 부인이 되어 이렇게 애들에게 실행성도 없는 무리한 부탁을 해서 결과적으로 효과는 전무하고 도리어 아이들이 반항하여 자신의 속을 태우니 그 고통을 누구에게 털어놓고 속시원하게 말을 할 수도 없으니 그 고통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모라고 하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어보고 싶은 것은 보통 집의 아이들의 어머니 마음이나 마찬가지인데 교회에서 주문하는 것이 아이들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것들이라 자녀의 어머니로서는 너무나도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하여 친정에서 옷이라도 사서 주면 받아다가 입히면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생활도 넉넉한가봐 저렇게 좋고 고급스러운 옷을 사다가 아이들에게 입히니 하고 여기 저지서 말이 들려온다.
그러면 속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말이지만 사모님의 마음에는 못이 되어 깊숙하게 박히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목회자이지만 가정은 일반성도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고 아이들의 성격이나 행동도 아이들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일반 아이들과 꼭 같은데 목회자 집의 자녀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기를 펴지 못하고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숨통 막히는 일들을 당할 때는 정말 고통스러운 것 말로 다할 수 없다.
교회는 모두가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몇 사람이 괴롭히는데 상처는 여러 사람이 괴롭게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이 상처의 크기는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이들은 어른스럽지 못하고 아이들 본능대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이 많이 보급되지 못하여 교역자들은 가난하여 그와 같은 것을 구입할 수 없어 가정에 텔레비전 한 대도 없는 형편이었는데 그래도 성도들 가정에는 그와 같은 것들을 구해놓고 보고 있으니 철없는 목회자 자녀들이 방영시간만 되면 성도들의 눈치고 무엇이고 볼 줄도 모르고 깨끗하게 청소해놓은 방과 마루에 맨발로 뛰어 놀다가 텔레비전을 구경하겠다고 방으로 마루로 뛰어 다니다보니 집사님 아니라 권사님이라고 해도 자연히 그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되어 말이 밖으로 나돌게 되고 그 말이 사모의 귀에까지 들리니 그 마음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정도라 아이들의 발을 묶어놓는 방법은 매를 때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꾸지람을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새 것이 아니라고 해도 좋으니 중고품이라도 텔레비전 한 대를 구해놓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활도 어려운 가운데서 화면도 잘 나오지도 아니하는 흑백 텔레비전 12인치 한 대를 중고품 상회에서 구입하여 들여다 놓으니 아이들은 좋다고 깡충깡충 춤을 추면서 성도들 가정에 가지 않는데 문제가 또 발생하는 것은 칼라TV가 새로 나오니 아이들은 흑백은 보지 아니하고 컬러 텔레비전을 보러 다니는데 이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사모의 마음은 아프다 못하여 쓰린 것을 느끼며 아무리 아이들을 타일러도 막무가내인데 무엇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어 전파상을 하는 타 교회 장로님에게 부탁하여 월부로 컬러 텔레비전 한 대를 들여놓았더니 그 때부터는 성도들 가정에 무례하게 드나들지 아니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하였더니 이번에는 그 일로 인하여 어느 분이 장로님에게 찾아가서 목사가 먹고살기가 넉넉한 것 같은데 생활비를 낮추라는 주문을 해서 문제가 된 것인데 이쯤 되고 보니 사모의 마음은 갈래갈래 찢어지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목회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누구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할 텐데 그렇게 이해심이 없는가 하고 섭섭하게 생각할 때가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서운함을 금할 길 없었으나 그렇다고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일이고 목회자 사모가 되어 이와 같은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목사와 같이 사명감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평신도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정(情) 많은 순수한 자녀들의 어머니로서는 심적 고통(心的苦痛)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사모를 정이 많은 자녀들의 어머니라는 점을 이해하고 그럴 수 있겠다 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아 넘겨 사모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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