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있습니까? (마 6:25-34)
한 성경학자는 신구약 전체를 연구하다가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는 말씀이 366회나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연구하다가 '아하 1년이 365일이니까 1년 내내 하루같이 근심하지 말고 살라'는 말씀이구나 생각했는데, 왜 366번을 말씀하셨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생각하고 연구하다가 전광석화처럼 깨달음이 왔습니다. '4년마다 하루가 더해지는 윤년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그 하루까지도 너희 믿는 자여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구나.' /할/ 얼마나 큰 관심이요, 돌보심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시는 분이십니다. /믿/아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이 염려 근심 걱정 속에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염려합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거나 재난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합니다.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합니다. 모두가 내 곁을 떠나고 나만 홀로 남게 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합니다. 이렇게 살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어떤 어부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자 아버지가 타던 배를 몰고 다시 바다로 나갔습니다. 이때 친구들이 염려해서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었고, 할아버지도 바다에서 죽었는데 너 마저 고기잡이를 하느냐?'고 걱정을 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은 친구들에게 묻기를 '너희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어디서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침대에서 죽었다.'고 하자 '그래? 자네는 어디서 자나? 여전히 침대에서 자겠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계십니까? 우리들의 염려가 다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할/
본문에 보면 염려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 등장합니다. 현대인은 저마다 염려가 내 뿜는 독소에 시달리면서 세상을 바삐 살고 있습니다. 시인 오우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불안의 시대, 염려의 시대, 공포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할/
이런 시대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좋은 재산은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은 재산 중에 재산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자신감을 갖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내게 자신감을 주십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현재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고, 미래에 대해서, 종말 앞에서, 운명 앞에서, 죽음 앞에서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감을 갖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멘!/
①왜 두려움이 오고, 염려가 오는가?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⑴'나는 혼자다'라고 생각될 때 두렵고 불안이 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이방선지자 850명을 혼자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때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 모릅니다. 아주 통쾌하게 이깁니다. 엘리야의 용기가 충천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엘리야를 향해서 이를 갑니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내일 이맘때 네 운명도 저 사람들과 같이 만들겠다'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비로소 눈을 뜨고 보니까 자기 혼자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용기를 잃습니다. 믿음을 잃습니다. 불안해집니다. 두렵고 떨림이 왔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그 당당하던 모습을 어디로 가버리고 이세벨을 피해서 도망을 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나 혼자'라고 느낄 때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왜 너 혼자냐, 아직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 7천명이나 있다'고 말씀해 줍니다. /할/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이 많이 세련되어졌습니다. 옛날에는 넘어지게 하고 깨지고 부러지게 했는데 오늘은 그런 서툰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늘 사탄이 구사하는 방법은 우리 마음속에 자꾸만 '너는 혼자야'라는 말로 속삭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외롭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고 겁나게 만들어 일을 제대로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피해 도망하다가 광야에서 혼자 잠을 잡니다. 생전 처음 집을 떠나서 광야에서 처량하게 웅크리고 누워서 잠을 잡니다. 그러니 그 밤에 잠을 잘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 밤이 얼마나 외롭고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까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천사는 이곳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알고 보니 나 혼자가 아니었구나'하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을 벧엘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기 전에 벌써 하나님은 여기 계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늘 동행해 주심을 믿고 강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⑵'장래가 불확실할 때' 두렵고 염려가 됩니다.
사업도 그렇고, 직장생활도 그렇고, 인생의 앞길이 불확실할 때 염려가 되고 두려움이 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때로 장래가 막연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자식들은 크고 빚은 늘고 집세는 올려달라고 하고 감당은 못하겠고 현실은 기댈 곳이 없고 가족들은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을 때 이때가 불안이 오고 두려움이 올 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합니다. /아멘!/
⑶'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걱정이 되고 두려움이 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의 열매 먹고 나서 얼마나 두려워했습니까?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오셔서 아담을 찾으십니다. 전 같으면 반가워서 뛰어 나갔을 것인데 이제는 두려워서 피해서 숨었습니다.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덮었습니다. 더 멀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리고 늘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죄인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수양대군이 형 문종 대왕의 충신 6명을 죄 없이 죽였습니다. 그리고 조카 단종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이 살아갑니다. 사람을 죽이고 숨어살면 잡히지 않아도 매일 스스로 고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죄인들의 형벌입니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마음이 편안해지려고 불교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고다 공원자리에 절을 지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다고 근본이 치유되지 않는데 편안해 지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에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사람을 두렵게 만듭니다. /할/
⑷'영적으로 무력해질 때, 즉 신앙이 내려갈 때' 염려가 오고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프랑스 요리 가운데 '삶은 개구리'로 요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요리를 시키면 버너와 냄비를 식탁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보는 앞에서 싱싱한 자연산 개구리를 삶습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튀어나오니까 냄비의 물 온도를 적당하게 해놓고 개구리를 넣습니다.
그리고 냄비에 불을 서서히 집히면 이 개구리들이 기분이 좋아서 헤엄치고 놀고 다닙니다. 그러다 물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면 개구리들이 고스란히 삶아집니다. 이 개구리들은 자신들이 삶아지는 줄도 모르고 따뜻한 물에 취해서 놀다 잠자듯 죽습니다.
이 이야기는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영적 무력증에 빠지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충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⑸왜 인생이 염려가 오고 두려움이 오는가? 한 마디로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흙이 고향입니다. 창3:19절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줍니다. 바로 흙이라는 것입니다. 또 사45:9절에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인생'이리고 했습니다.
질그릇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진흙을 구워 만든 그릇을 말합니다. 한자어로는 '도기'(陶器)라고 하고, 일본식 표기로는 '토기'(土器)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뚝배기나 옹기 그리고 항아리 같은 것이 질그릇입니다.
이 질그릇의 특징은 우선 값이 싸다는 것입니다. 재료가 그 흔한 진흙이기 때문에 비쌀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주로 서민들이 손쉽게 사용해왔습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재료가 아주 쌉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질그릇처럼 정말 싼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 소리를 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정말 싸구려입니다.
질그릇의 또 다른 특징은 약하다는 것입니다. 손에 들고 있다가 떨어뜨리면 깨집니다. 뚝배기는 떨어뜨리면 그냥 깨지고 맙니다. 항아리는 날아오는 돌에 맞으면 속절없이 깨지고 맙니다.
▶로널드 레이건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임기를 마친 미국 대통령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주와 공산 진영으로 양분되었던 냉전을 종식시킨 장본인으로서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미국 대통령으로 기억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얼마 안 돼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조차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끝내 자신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기억조차 못한 채 10년 동안 투병하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자녀들을 돌보지 못하여 척을 졌는데, 질병 때문에 끝내 자녀들과 화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어도 질병으로 한 순간에 인생에 금이 가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질그릇처럼 연약하여 조그만 충격에도 일그러지고 깨지고 맙니다. 질병 때문에 그 육체가 깨집니다. 스트레스나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 마음이 깨지고 맙니다. 우리가 대단한 것처럼 큰 소리쳐보지만 그 연약함은 숨길 수 없습니다. /할/
▶어떤 자매가 결혼을 했는데 부부 싸움을 한 뒤 친정으로 가버렸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단단히 별렀습니다.
친정에 온 딸을 보는 부모 마음도 편치는 않았습니다. 며칠 쉬게 한 다음 딸을 돌려보내며 친정아버지가 편지 한 장을 건넸습니다. '얘야, 두말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는 즉시 네 남편에게 이 편지를 전해 주렴' 집에 돌아온 아내는 편지부터 불쑥 내밀었습니다. 신랑은 편지를 받아 들자마자 기겁을 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취급주의! 깨지기 쉬움' /할/
▶고려청자는 부르는 게 값이랍니다. 그 중에 가장 귀한 청자가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라는 청자랍니다. 각이 진 작은 입 부분과 어깨에서부터 바닥까지 이르는 곡선미가 극치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게다가 문양은 6단의 동심원문 속에 운학을 상감처리하여 그 조형미 또한 극치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그 값은 도저히 매길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청자도 흙일뿐입니다. 자칫 떨어뜨리면 깨지고 맙니다. 그 때 그 가치는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일단 깨지고 나면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되고 결국은 흙이 되고 맙니다. 바로 인생이 그렇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높은 경지에 올라도 자칫 한순간의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불치의 병이라도 걸리면 한순간에 환자가 되어 쓸모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 결국 죽어 한 줌의 흙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인생의 본질을 잘 알고 살아야 합니다. 고려청자로 대단한 존재로 알고, 자기가 흙인 줄은 까맣게 잊고 살면,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교만하게 됩니다. /할/
⑹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해야 할 염려도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염려입니다.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487장 2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시험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누군가. 근심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걱정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에게 근심걱정이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염려의 실체에 대해 어느 분은 안개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광화문 일대를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가 실은 한잔의 물이 600억 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염려가 처음에는 한 잔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 전체를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염려로 가득한 사람의 심령에는 하나님도, 그의 약속도, 응답의 손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듭 당부하신 말씀가운데 하나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해야 할 염려도 있습니다. 염려하면 할수록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는 하나님께서 '염려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거룩한 염려'입니다.
히3:12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무엇을 염려하라는 것인가? 세상 적인 것 즉 육신의 일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다 맡기라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대한 염려는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는 것은 '분리되다, 떠나다, 배신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불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란, 마치 포도나무의 가지가 줄기에서 잘려 나간 것과 같습니다. 줄기에서 잘려나간 나무 가지를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말라질 뿐 아니라 나중에는 모아다가 불에 태워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실패요, 불행이요, 파멸입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도 그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들의 주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떨어져 나가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믿음을 저버리고 낙심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히3:1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⑺그렇다면 염려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염려는 헬라어원으로는 '메림나오'인데, '걱정한다, 근심한다, 마음이 찢어진다, 마음이 나누어지다. 분열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워리'라는 단어를 썼는데 '물어뜯는다.'는 무서운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사람의 목을 꽉 물어 숨을 틀어막는 것(질식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염려는 사람을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사실 염려는 우리에게 매우 해롭습니다. 그 옛날 지혜 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잠15: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할/
▶어떤 사람에게 딸이 둘 있었습니다. 그 딸들이 장성하여 시집을 갔습니다. 큰딸은 야채 장사에게 시집을 갔고 작은 딸은 옹기 굽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큰 딸 집에 갔습니다. '장사가 잘 되느냐?'고 물었더니 큰딸은 '그런 대로 잘 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는데 비가 오지 않아서 채소가 시드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큰딸은 아버지에게 비가 오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작은 딸 집에도 갔습니다. 작은 딸에게도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작은 딸도 그런 대로 잘 지내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비가 오면 옹기를 굽는 데 지장이 많다는 것입니다. 작은 딸은 아버지에게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이러 지도 못하고 저러 지도 못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아버지가 차라리 비가 오지 않으면 작은 딸네 사업이 잘 될 것이니까 좋다고 생각하고 비가 오면 큰 딸네 채소 농사가 잘 될 것이니까 좋다고 생각하면 염려할 것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할/
▶'어니 J 젤린스키'의 '느리게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 보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고, 22%는 사소한 사건들이며,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들이다. 겨우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문제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의 96%가 불필요한 것들이랍니다.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란 말씀입니다. 괜한 염려로 마음 상하지 마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기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열자(列子)에 보면 기 나라에 '만약 하늘이 무너지면 죽을 것이니 어디로 피해야 한단 말인가?' 하며 침식을 잊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무익한 염려를 '기 나라 사람의 근심'이라는 의미로 '기우(杞憂)'라고 했다고 합니다. 쓸데없는 염려를 가리킨 말입니다. /할/
②먼저 본문에서 결론을 찾는다면 예수님은 염려의 본질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⑴염려는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⑵염려는 비 신앙적인 것입니다. 30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뜻이 있는 사람마다 철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철학이라는 말을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철학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고 성별되고 거룩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생활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철학이 없으면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고,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선원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크리스천의 생활 철학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할/
③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5)
여기 '그러므로'는 24절의 말씀과 연결하는 접속사입니다.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여인이 두 남편을 섬길 수가 없듯이 성도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선택의 중요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무엇입니까? 재물보다는 하나님을 선택한 백성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리 주님은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의식주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기 위해 사느냐? 또는 입는 것이 인생의 목표냐고 물으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들 대답은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것들에 관심의 전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류 식당을 찾아다니고 메이커 상표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먹고, 잘 입으려고 보니까 따르는 결과하나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동적으로 물질에 대한 염려입니다. 돈이 있어야 잘 입고, 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추구하다보면 근심과 걱정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돈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돈 버느라고 교회를 멀리합니다. 이러다 보면 신앙은 한마디로 완전히 불 신앙에 빠지게 되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돈 때문에 영혼이 지옥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선택한 백성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음식은 목숨을 위한 것이고 의복은 몸을 위한 것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요합니다. 목숨과 몸은 목적이라면 음식과 의복은 수단입니다. 목적을 간과하고 수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눈을 떠야 합니다. 음식보다 목숨이 중요하고 의복보다 몸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그 몸에 필요한 의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먹고, 입는 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믿/
우리가 어떤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것은 바로 불 신앙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 적인 요인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의 본질은 하나님이 없다는 불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만 있으면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진다고 할지라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꽃처럼 지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할/
④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26).
'공중의 새를 보라'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방은 철새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날아다니는 그 많은 이름 모를 새들조차도 하나님께서 다 먹이시는데 '왜 걱정을 하느냐?'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또 이 말씀은 하늘에 나는 수만 마리의 새들 중 한 마리의 새에 대해서까지도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새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물건을 쌓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공중에 나는 새들도 주께서 먹이시고 돌보신다면 우리가 공중에 날고 있는 저 새들보다 더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쳐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굉장히 귀한 신분입니다. /믿/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창공을 나는 새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새들은 내일의 운명을 모릅니다. 언제 사냥꾼의 총에 죽을지, 사나운 날짐승의 습격 때문에 생명의 종말을 고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오늘 주어진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버리지 않습니다. 저들은 내일 염려 때문에 오늘의 삶을 포기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공연히 내일 일을 염려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중에 새들보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처분만 바라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만사 형통할 것이라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나무에 앉아 있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는 먹이를 찾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새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인 새가 날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먹이나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새는 스스로 날아다니며 먹이를 잡아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일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살후3:10절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되, 건강, 의욕, 꿈 등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먹고살게 하셨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야 수고에 대가가 있습니다. /아멘!/
같은 내용을 소개한 눅12:7절에서는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들의 머리털까지도 낱낱이 다 알고 있으니 제발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은 참새들보다 정말로 더 귀한 내 자녀들이 아니냐?' 라는 말씀입니다. /할/
여러분,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우리 머리카락이 몇 개 정도인지 아십니까? 10만개 정도 됩니다. 그리고 그 수명도 있습니다. 남자 머리카락은 4-5년, 여자는 6-7년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50-100개 정도는 빠지고 그 정도 숫자가 새로 납니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복잡한데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의 머리카락의 숫자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화무쌍한 너의 머리카락의 개수도 다 알고 계시는데 너의 지금 형편과 사정을 내가 모르겠느냐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염려를 내려놓지를 못하는 우리에게 다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27절에서 덧붙여 또 말씀하십니다.
⑤주님은 '염려가 비생산적'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27-28).
성경 밑에 '주'를 보면 '키'라고 하는 말 대신에 '목숨'이란 뜻이 있습니다. 즉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나 키울 수 있느냐? 또 염려함으로 너희 목숨을 한 시간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염려한다고 임의로 키를 키울 수가 없고, 염려한다고 임의로 목숨을 연장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염려한다고 키가 자라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산성이 없는 염려 속에 빠져 있는 당시 사람들의 처량한 모습을 주께서 바라보셨습니다.
특별히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열등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그들의 나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로마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로마 사람들보다 키가 더 작다는 열등감이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보다 키가 작은 열등감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키가 클까?' 하고 염려했지만 아무리 염려해도 키는 더 자라지 않습니다. 그처럼 염려는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살다 보면 이미 끝나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가지고 염려하는 것은 소용도 없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좋은 길과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행동에 나서는 것입니다. 긍정적 행동을 만들지 못하는 생각은 삶을 파멸시키는 무서운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지나가 버린 문제로 더 이상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로 부질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당시 자기 민족에게 이런 해학적인 메시지를 통해서 염려의 비 생산성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염려란 하나의 사건에 대한 반응일 따름이지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도 아닙니다. 여러분, 긍정적인 행동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염려는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힘 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할/
미국의 한 설교자는 염려를 가리켜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염려란 마치 흔들의자와 같은 것이다.' 마치 흔들흔들하는 의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의자에 앉아서 아무리 흔들어 보십시오, 여전히 제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염려를 해도 한발자국도 진전이 없는 그런 염려를 왜 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염려를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염려 대신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⑴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 버리라! 벧전5: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할/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처럼 염려가 많았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염려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잡혀가시면 어떻게 하나? 우리 선생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어떻게 하나? 로마의 군대에게 잡히면 어떻게 하나? 파도에 빠지면 어떻게 하나? 염려 걱정이 태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자기의 평생을 걸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통해서 염려를 해결하는 위대한 체험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의 마지막부분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맡기는 것입니다. 내 인생문제를 맡기는 것, 사업도 하나님께 맡기고 자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질병도 맡기고 환란도, 핍박도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염려를 맡기면 그때부터 우리의 염려는 우리의 염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실패하고 넘어지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생이 실패한다고 하나님도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엘로힘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었단 자를 살리는 권세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믿/ 베드로는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염려해야 할 모든 문제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맡겨 버리라고 당부합니다. 여기 맡긴다는 것은 흘러가는 강물에 보따리를 던져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한번 강가에 던져 떠내려간 보따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미련 없이 버립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해 주십니다. 여기 권고란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말로써 '일으켜 세우리라, 높여 주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할/
⑵염려대신 기도하십시다. 빌4:6-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염려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면 염려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아뢰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의 사람 '조지 물려'는 '신앙이 시작되는 곳에 염려 근심 두려움은 사라지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 신앙이 끝난다.'고 했습니다. 또 '모든 염려는 기도를 통해 제거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중세에 살던 '부루노'라는 수도사가 깊은 산에서 기도하는데 개구리들이 너무 울었습니다. 견디다 못해서 그는 창문을 열고 '시끄럽다!'고 큰 소리를 치자 잠시 조용했다가 조금 지나니까 이제는 언덕 너머의 잠자던 개구리까지 울어댔습니다. 너무 기도가 방해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개구리 때문에 기도가 안 됩니다. 저 개구리들을 어떻게 좀 해주세요.'
그때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부루노야! 지금 개구리도 기도하고 찬양하고 있단다. 같이 기도하고 찬양하라.' 그 음성을 듣고 그 수도사가 신나서 창문을 열고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해석하면 얼마든지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멘!/
영국의 대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은 '그대의 염려를 버리고 은혜 깊으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면초가에 있습니까? 기도의 통로는 열려있습니다. 기도는 지금도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역사가 동반됩니다. /믿/아멘!/
▶28절에서도 염려의 비생산적인 것을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만 하시고 그냥 내버려두는 분이 아닙니다. 관리하시고 간섭하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는 섬세한 사랑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십니다.
들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를 보십시오, 누가 그 꽃 하나를 위하여 거름을 주고 길쌈을 맵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꽃 하나를 위해서도 사시사철 태양을 주시고 바람을 주셔서 색깔을 입히시고 모양을 만드십니다. /할/
예수님은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들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의 영광을 이 지상에서 한 인간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영광을 누렸던 솔로몬의 영광과 비교하고 계십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지혜와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졌던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백합화 한 송이 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⑥염려는 믿음이 적은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29-30).
이어서 예수님은 30절에서 결론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꽃 한 송이가 '솔로몬의 그 큰 영광보다 더 귀한데 너희가 그 꽃보다 못하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째서 너희가 염려하느냐? 하나님이 너희 인생을 비극으로 마치게 할 것 같으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송이 들 꽃보다, 한 마리의 새보다 천사보다도 더 귀한 존재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은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롬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이든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약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30절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염려라는 것은 바로 '믿음이 없어서'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불 신앙에서 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사십시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⑦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채워주십니다(31-32).
31절은 25절의 중복입니다. 선택은 바로 하라는 경고입니다. 여기 '이방인'은 예수를 모르고 사는 세상 사람들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한마디로 불쌍한 존재입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 붙들고 '이제 놀고 먹어도 된다.'고 큰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왜 큰 소리를 쳤겠습니까? '하나님이 다 필요에 따라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믿음이 좋은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라고 했고, 구하라'고 했습니다. /아멘!/
여기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메시지라는 사실입니다.
염려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뢰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요, 그래서 똑같은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어떤 사람은 염려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뜻을 찾습니다.
예컨대 불이 났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이제 나는 망했다.'고 대성통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그 화제 속에서도 부인과 자녀들이 머리칼 하나 상하지 않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가 있습니다. 누가 신앙인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주실 줄 믿고 구하며 사는 자입니다. /아멘!/
본문에 보면 염려란 이방인의 특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⑧삶의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33).
염려 대신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무도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많이 들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해봅시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하라'입니다.
'그의 나라'는 통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천국 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 가정이, 내 사업장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의 전 영역을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늘 기뻐하고 깨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기쁘시게 보십니다(히11:6). 믿음이 있는 자가 예배 중심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봉사하고 충성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전도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쁘시게 여기는 것은 영혼구원입니다. /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한 말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철학을 주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과도 일치합니다. 소금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뜻하고 빛은 행실을 통하여 예수님을 나타내 전도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십시오, 요셉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자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산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어떤 복을 주십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여기서 '그리하면'이 귀합니다.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 /할/
기독교는 플러스 종교입니다. 더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건강, 믿음, 물질, 모든 것이 포함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대신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주님은 마7:7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재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뛰어가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소극적이고 패배적이고 절망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적극적인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향하여 뛰어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할/
빌4: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약속의 말씀은 결코 부도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가정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믿/
⑨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34)
한마디로 내일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당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할 것입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내일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일 때문에 염려하며 근심걱정하며 사로 잡혀있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내일은 언제나 절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내일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염려대신 큰 야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염려는 진실한 믿음이 그 해결책입니다. /믿/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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