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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 얻은 축복이 무엇인가? (요3:16-18/사12:1-2)

by 【고동엽】 2022. 2. 8.

예수 믿고 얻은 축복이 무엇인가? (요3:16-18/사12:1-2)

 

어느 초원에서 생긴 일입니다. 하루는 동물의 왕인 사자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 틈을 이용해서 굶주린 하이에나가 사자의 새끼 한 마리를 잡아먹고 멀리 도망을 갔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는 그 사실을 알고서 노발대발했습니다.
사자는 즉시 초원의 모든 동물을 한 자리로 불러모아놓고 '하이에나가 저지른 악행을 말하고 모든 하이에나를 전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또한 사자는 그 일에 초원의 '모든 동물들이 협조를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모든 동물들은 하이에나가 저지른 악행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걱정스러운 일은 이번 일로 인해서 '초원의 평화가 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컸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코끼리가 조용히 사자를 찾아갔습니다. 코끼리는 사자에게 조심스럽게 이렇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왕이시여, 물론 하이에나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는 마땅히 응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초원의 모든 동물들이 이번 일로 인해서 평화가 깨어지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번 일에 대한 노여움을 푸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사자가 화를 벌컥 내면서 말하기를 '무엇이라고? 나보고 지금 참으라고! 너 약 먹었나?' 그러자 코끼리는 다시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자기 힘을 휘두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절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왕께서 큰 아픔을 당하셨지만 그래도 분별력을 잃지 아니하시고, 평소와 같이 침착하고 위엄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초원의 모든 동물들은 왕을 더욱 존경하고 잘 따르게 될 것입니다.'
역시 사자는 동물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코끼리의 말을 듣고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사자는 자기의 분노를 참고 코끼리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초원의 평화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자 멀리 달아났던 하이에나는 그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크게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자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에 있는 동물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사자는 겁이 많은 동물이야. 나하고 싸우기가 싫으니까 나를 피하는 거야'
그 소리를 듣고 나이 많은 코끼리가 하이에나를 찾아가서는 코끼리의 큰 발로 하이에나를 사정없이 짓밟은 채 말했습니다. '이놈아! 똑바로 들어라. 사자가 너 같이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짐승을 정말 두려워해서 참고 있는 줄 아느냐? 사자는 모든 동물의 평화를 위해서 자기의 아픔을 억누르면서 참고 있는 거야!'
여러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평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툼이 있고, 싸움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화를 추구하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으로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일의 평화를 위해서 오늘은 싸우고, 다투고,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힘으로서는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시34:14절을 보세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할/ ◀제목소개!▶

 

여러분! 예수 믿고 얻은 축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집 없이 살던 사람이 APT한 채 마련한 것 정도입니까? 아니면 좋은 재벌 그룹에 취직한 기분일까요? 또는 딸만 다섯 낳다가 아들을 하나 낳은 기쁨일까요? 아니면 신랑신부가 결혼하는 기쁨 정도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까?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생의 전부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요,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할지언정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수 없다고 했는데 왜 그럴까요? '밀러'라고 하는 부인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라고 찬10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문제를 그토록 값싸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사해서 이익을 좀 얻는 정도로 평가하거나 고상한 취미로 생각하거나 이 땅에서 흔히 있는 어떤 문제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생명을 얻는 길이기에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믿는다는 것은 '멸망 받지 않고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또 17절을 보면 '심판 받지 않고 구원을 얻는 길'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인간들을 향하여 심각하고도 엄숙한 질문하나를 던지고 계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다 소유했을지라도 영생을 잃어버린다면 그 영혼은 불쌍한 영혼입니다.
▶어느 유명한 연극 작가가 '인생의 마지막 15분!'이란 연극 각본을 썼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한 유망한 청년이 30세 늦은 나이에 대학을 마치고, 박사 논문을 제출해 놓고 그만 폐암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최후로 진단하기를 '이제 15분 후면 죽는다.'는 사망선고를 내립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최후에 시간을 지나갑니다. 병상에 누워 최후에 순간을 기다리는 청년에게 우편배달부가 급한 전보 한 통을 전달합니다. 내용인즉 '억만장자인 삼촌이 죽었다는 부고와 함께 상속할 자가 없으니 와서 재산을 상속 받으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들 청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시간은 그의 생명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명은 이제 10분을 남겨놓고 있는데 그 때 학교에서 '박사학위논문합격' 통지서가 날라 왔습니다. 그의 생명 5분을 남겨 놓고는 애인에게서 '결혼 승낙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반가워야 할 애인의 결혼 승낙도 죽어 가는 생명 앞에서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억만장자 상속권, 박사학위 논문 합격증, 그리고 행복한 결혼 승낙서'를 손에 쥔 채 죽어 갔습니다.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그 청년은 30세에 평생을 분투해도 얻기 힘든 것을 다 얻었으나 그의 생명을 잃으니 그 모든 것이 다 휴지조각처럼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귀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죽음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과 세금은 면치 못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저마다 자기를 향하여 달려오는 죽음을 회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표 따라 살다가 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시간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당부합니다.
성경은 말하십니다. 약4:14절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또 벧전1:24-25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인생은 저마다 죽음의 밤이 홀연히 찾아온답니다.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나그네 생활이 끝나는 날이 옵니다. 그런데 인생이 죽어버리면 끝이 나고 맙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낳고 죽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난 사람이 없고, 죽고 싶다고 마음대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그 분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믿/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죽음 뒤가 더 무섭습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 무서운 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나의 행위를 밝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지나온 과거를 심판하신다면 누구 한 사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이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3:10)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만은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행여 사람 앞에 죄인이 아닐지라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덮어두시고 한 가지 죄만 가지고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요3: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무슨 말씀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믿지 않은 것이 죄이므로 그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죄라고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요6:29절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우리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습니다. 이 한 구절이 성경 전부의 대표가 되는 요절로써 복음의 요약이 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는데 독생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성인군자 영웅호걸들이 다녀갔지만 예수만큼 인류역사상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가는 곳마다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국가가 변화되었으며 개인의 인격이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심으로 역사의 연대가 AD와 BC로 나누어졌습니다.
또 우리는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쉽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이 하루를 쉽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쉬는 지도 모르고 쉽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한 날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주님을 나의 왕으로 나의 주로 모시고 예배하는 날'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그 날을 우리 덕분에 쉬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지 안 믿는지 역사의 연대는 예수님의 통치 안에 있으며 전 인류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생명의 날을 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①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도 태어나셨습니다. 그 분이 오신 것은 창3: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언의 성취입니다. 인류역사상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사7: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낳은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기 수백 년 전부터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고 해산한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씨가 남자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에 여자는 다만 길러서 내놓은 뿐입니다.
밭에 콩을 심으면 콩에서 콩이 나오지 밭에서 콩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밭이고, 남자는 씨입니다. 공자나 석가는 사람의 씨가 들어가 났지만 예수님은 날 때부터 사람의 아들로 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잉태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는 늘 신앙으로 고백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낳으시고...' /할/

 

②예수님의 생애는 보통사람이 수명절반 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청년의 나이에 33세를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30세까지는 가정에서 부모를 도우며 동생들과 함께 목수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입니다. 이 짧은 3년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로써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료하신'일에 생애를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외당하는 자에게 큰 소망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벗이 되기 위하여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들을 친구로 삼았으며 마지막에도 죄인 곁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전 생애를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기도의 중요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눅3:21-22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⑴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스데반이 기도할 때도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모든 문제에 하늘 문을 여셔서 응답하시고, 축복하시며 하나님과 만나는 최고의 복된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입니다. /믿/
이 세상에서 하늘 문을 여는 것은 기적입니다. 땅에 있는 문을 열 수 있지만 하늘 문은 결코 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하늘 문이 열려야 복이 쏟아집니다.
신28:12-13절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야 꾸어주고 위에 있고, 머리가 됩니다. 하늘 문이 열려야 비가 옵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3년 6개월 동안 가뭄으로 메마른 대지 위에 하늘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야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메이리라'는 기도의 축복 권을 교회 위에 주셨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만사형통입니다. 그러나 하늘 문이 닫히면 모든 것이 불통입니다.
기도는 역사가 일어나고 사건이 해결됩니다. /믿/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믿는 자들이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릴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⑵기도하실 때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기도하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최대의 복이 바로 성령강림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기도할 때 성령이 불같이 강한 바람같이 강림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승리는 성령 충만할 때 이루어집니다. /아멘!/
⑶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리라'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가운데 최고의 음성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리라'는 음성인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도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③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인류의 대속 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인류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서입니다. 사53:4-5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찔림을 받았으며 상함을 입고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은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것은 역사상 아무도 실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시면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우리의 죄 값을 짊어지고 죽어라'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④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국 땅에 가끔 죽지 않는다고 큰 소리 친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박태선이 죽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도 죽어서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없습니다. 대순진리회의 교주가 죽지 않는다고 큰소리치고 며칠 동안 신도들이 그 무덤 곁에 있었지만 썩어 냄새만 날 뿐이지 살아 나올 기미는 전혀 없고 지금도 무덤 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지 않는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그것은 자기 죄 값으로 죽은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대로 간 것입니다. 공자도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었고, 석가도 죽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신 대로 죽음 문을 박차고 살아나셨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죽음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확정하셨습니다. 롬4:25절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할/

 

⑤이러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드디어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친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14:1-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려고 먼저 승천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는데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의 무서운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요,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 값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신 분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분이요, 우리의 천국을 위하여 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믿/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오셨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말씀에서 세상은 무엇입니까? 이 땅이 아닙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은 사람 치고 가슴 설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이 사랑해도 가슴이 설레는데 보통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사랑한다는데 가슴이 설레지 않겠습니까? 부모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인생을 행복하게 삽니다.
▶지난 이야기지만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지존파에 이어서 막가파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막가는 세상 막 살아보자'는 것이 막가파입니다. 그런데 막가파의 이력을 조사해 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부모를 잃고 고생을 하면서 살아 세상에 대하여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세상을 막 살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지존파가 그렇게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지만 마지막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한마디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을 나가 버리고 우리 아버지가 술집 여자와 살면서 나를 두들겨 팼습니다. 나는 그 잔인하고 혹독한 설움 속에서 내 인생을 대하여 한이 맺혀 있었기 때문에 그 한을 사람 죽이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면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난 자마다 회개하고 새로워집니다. 여러분 인생은 짧습니다. 어떤 인생도 만족이 없습니다. 고대 왕실 높은 집에 살아도 출세해도, 성공해도, 그리고 영화를 누려도 해 아래 만족하는 자는 없습니다. 돈을 벌어도 만족함이 없는 것은 그 속에 만족해야할 한 가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한 공백을 두셨다. 그 공백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메우기까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이 깊은 공간은 돈으로 채워도 만족이 없고 이 세상의 그 어떤 향락과 그 어떤 것으로 채워도 만족할 수가 없는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이 들어오실 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영혼을 채울 때 우리는 만족할 수가 있고, 소망으로 살수가 있습니다. /할/

 

2. 요3:16절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①관계성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여기서 '저'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입니다. /믿/

▶그런데 요즘 보면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⑴욕망과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흔히 기복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은 욕망이나 목적을 성취하려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 회퍼'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믿음을 '싸구려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⑵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믿음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나 얻고 심리적인 위안이나 얻어 보자 해서 믿는 신앙입니다. 이것도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신앙이고 극히 수양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과 관련성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예수님과 관계될 때에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태 중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탯줄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하고 영양을 공급받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태아가 탯줄에서 떨어지면 끝장입니다.
피아노를 보십시오. 피아노의 생명은 줄입니다. 피아노가 겉에서 보면 화려하고 윤기가 나고 빛이 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줄입니다. 그 피아노가 아무리 값이 비싸고 화려해도 모든 줄이 붙어 있어야 할 곳에 붙어 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값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입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모두 예수의 생명 속에 연합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누리는 축복을 우리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영광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영광을 받을 것이고, 그가 승리했으니 우리도 승리할 것이고, 그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우리도 세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②바로 알고 인식하는 일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면 그 같은 예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선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믿음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값이 비싼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고 살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아주 비싼 보석 반지가 있는데 그것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알 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값이 비싼 최신 기계를 수입해 들여왔어도 그 기계를 만질 줄 모르면 그것은 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머리로 기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성경을 뜻도 모르면서 머리로만 많이 기억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요6:68절에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하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곧 체험입니다. 이 같은 체험이 있으니까 그를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3. 예수 믿고 얻어진 축복이 무엇입니까? 사12:1-2절에서 찾아보겠습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①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갑니다.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으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저는 지금도 TV 드라마의 장희빈 끝 장면을 잊지 못합니다. 왕이 장희빈에게 진노하여 사약을 내리는 장면입니다. 두 손과 두 발을 잡고 입에다 사약을 부어 넣는 장면입니다. 성난 숙종의 어명은 '여봐라! 사발을 더 퍼부어라' 왕의 진노는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더 무섭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제는 그 노가 쉬었다'고 했습니다. 언제 하나님의 노가 멈췄습니까? '그 날에'입니다. 어떤 날입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은 그 날입니다. /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그 날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멈췄습니다.
②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또 나를 안위하시매' '안위'는 '안심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위기와 괴로움이 지난 후의 평온하고 안심이 되는 상태, 한마디로 안위라는 말은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문제없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 문제없다고 자신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문제를 안고 사는 인생입니다. 문제없는 곳은 딱 한군데 있습니다. 무덤입니다. 죽기 전에는 우리 모두 문제 속에 삽니다. 건강문제, 경제문제, 자식문제, 가정문제. 세상은 원수마귀가 들썩일 때마다 질병이 있고, 실패가 있고, 배신이 있고, 한숨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염려, 근심, 걱정, 우수사레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그분의 조건에서 안위함을 받습니다. 즉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복음 송 가사도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까? 부모에게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아니면 친한 친구에게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위로를 주었다던 그 남편이 어느 날 배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헌신해 주었던 자식이 나 몰라라 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위로자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③구원의 축복입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끝에도 '나의 구원이심이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의 구원'이라는 1인칭 표현입니다.
2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1인칭이 강조됩니다. '나의 구원,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등 1인칭으로 신앙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천 번을 물어도 만 번을 물어도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 나의 힘, 나의 노래'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내 남편이라고 하지 우리 남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아내라고 하지 우리 아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남편이라고 하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1:1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할/
구원자를 누구로 믿느냐에 따라 신앙의 형식과 삶이 달라집니다. 과학도 물질도 권력도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고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죄에서, 사망에서, 질병에서, 실패에서, 악의 손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믿/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④예수 안에 사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같이 무섭고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행여나 적탄에 맞아 죽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자는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행7장은 스데반의 순교의 장입니다. 예수를 전했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은 거짓증인을 세우고 억울한 판결을 내려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들어 치려고 할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얼마나 무섭고 떨렸겠습니까?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을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죽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스데반이 눈을 들어 부활하신 주님께서 면류관을 손에 들고 하나님 우편에서 자신을 기다리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할/아멘!/
▶78세의 노 권사님이 음력 정원에 세상을 떠나시는데 이른 새벽에 큰며느리를 부릅니다. '빨리 물을 데워서 내 몸을 씻어라!' 앓아 누운 분이 몸을 씻으랍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물을 데웠습니다. 몸을 닦아 드렸더니 '너희는 여기 둘러앉아서 찬송을 불러라' 노 권사님은 자손들의 찬송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권사님은 천국의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할/
⑤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시18:1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사야도 다윗도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힘이 능력이고 파워입니다.
⑥예수 안에는 종국에는 승리의 노래,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나의 노래시며' 여기 노래는 찬송을 뜻합니다.
▶누가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몸에 병이 들면 신음소기라 나오기 쉬어도 노래 소리가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면 한숨이 나오긴 쉬어도 찬송이 나오기는 힘이 듭니다.
노래가 나온다는 것은 영혼이 강건하다는 뜻이고,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승리자가 노래를 부릅니다. 싸움에서이긴 자만이 개선가를 부릅니다. /할/
그렇습니다. 수도 셀 수 없는 축복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생천국을 얻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예수를 믿어야 영생천국을 얻습니다. ▶오래 전에 형과 형수를 죽인 한 무기 징역수가 죄를 깨닫고는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후 열심히 공부해서 6가지의 자격증을 얻고 일급 건축기사가 되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온 이 사람이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갈보리 산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했더니 주님께서 그 사람 마음속에 예수의 빛을 비춰주셨고, 그 영혼에게 예수님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 빛이 그를 이끌어 간 것입니다. 어디로 이끌어 갔습니까? 멸망이 없는 곳으로, 천국으로, 영생이 있는 곳으로, /할/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이끌고 갔습니다. 이 사람은 그 빛을 따라서 계속 소망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 후 그는 모범수로 석방되어 한 교회를 아름답게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이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마22:37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미치도록 사랑하라'는 말이요,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목숨 걸고 죽도록 사랑하라'는 말씀인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세에 대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로 요구하고 계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핵심은 '다하여'입니다. '다하여'는 '전부를 바치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의 전부, 뜻의 전부, 생명의 전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할/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은 이미 죽었다는 말입니다. 살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어야 가능한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더 크게 사랑하십니다. 잠8:17-18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지금도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 뿐 입니까? '너희가 네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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