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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를 맺는 비결! (갈 5:16-24)

by 【고동엽】 2022. 2. 8.

성령의 열매를 맺는 비결! (갈 5:16-24)

 

 

인생의 성공은 세 가지 차원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목적에서의 성공입니다. 사람은 무엇보다 목적을 정하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먼저 좋은 목적, 영원한 가치를 지닌 목적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목적에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과정에서의 성공도 중요합니다. 목적을 세웠으면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거짓으로 목적을 달성한 것을 결코 성공이라 할 수 없죠! 가짜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입니다. 방법이 정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결과로서의 성공입니다. 그 수고와 노력의 대가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투자했는데 마지막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면 이보다 허망한 일이 없습니다. 결과로서 아름다운 열매가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성령에 대한 다양한 어떤 '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에서는 '나무와 열매'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이러한 '상'은 성령 자체가 바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성령의 삶'을 '성령의 열매'라고 한 것은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이 만들 수 없고 '오직 생명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할/ ◀제목소개!▶

 

그 나무의 진가는 열매에 있습니다. 이 세대는 타락한 인간의 열매(사단의 열매)를 맺는 세상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서 배가 열리는 일은 없습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만 열립니다.
신앙생활을 열매라는 개념으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열리고 육신으로 충만하면 육신의 열매가 열립니다. 마귀로 충만하면 마귀의 열매'가 열립니다. /믿/
나무가 바뀌기 전에는 절대 열매가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나무를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없이 살 때는 타락한 인간의 열매를 맺든지 사단의 열매를 맺었는데 예수를 믿게 되면 나무가 바뀐 것과 같아서 예수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아멘!/
그런데 열매는 많이 열고, 또 열매가 커야하며 때를 맞추어 열어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나무로 비유하면서 '신앙의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특히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로 혹은 감람나무로 비유'한 곳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는 이 세 나무가 가장 흔하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음료수를 무화과는 약용과 식용으로, 감람나무는 기름으로 쓰여집니다. 세 나무의 특징은 똑같이 열매를 맺는 나무들입니다.
열매의 용도는 다 각각 다릅니다만 열매를 맺음으로 나무는 나무의 구실을 다하는 것입니다. 포도가 열리지 않으면 포도원은 흉년이 들어 포도주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가 열리지 않으면 식용이나 약용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않으면 기름을 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 나무의 의미를 그 나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맺는 열매에 있습니다. 만일 그 나무들이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땅만 차지하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에 있어서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감람나무는 무엇이며 누구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며, 교회이며, 바로 나 자신입니다.

 

1. 열매를 요구하시는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①마3: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 말씀은 유대 광야 요단강가에 몰려나오는 유대 민중들에게 세례요한이 외친 말씀입니다. 나라가 어렵고, 민중이 고난 속에 빠져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예언자나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리고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대변한 하나님의 소리는 대게 4가지로 나타납니다.
⑴죄에 대한 책망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를 회개하라!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한 죄를 회개하라! 우상을 섬긴 죄! 주일을 빼먹은 죄! 또 악을 행하고 이웃을 억울하게 한 죄를 회개하라!'는 책망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⑵'너희가 만일 계속하여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이 너희 위에 임하게 되리라'는 심판의 경고를 전했습니다.
⑶고난과 시련 속에 빠진 채 절망하는 민족을 향해 하나님의 희망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것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⑷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전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가 오셔서 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백성들을 건져내고 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이 예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메시지에 기대를 걸고 그때마다 회개도 했고, 정신을 차리기도 했고, 소망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전 425년 경 말라기 선지자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400년 동안 예언자들의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학자들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사리고 합니다. 혹은 예언의 등불이 꺼져버린 암흑기라고 합니다. 이 400년 동안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그렇다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태평성세였습니까? 아닙니다. 전쟁도 있었고, 당파 싸움도 있었고, 정권의 변동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실은 암담한데 이렇다 할 소식이 없고,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유대광야에서 괴인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 젊은이는 약대 털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돌 뜸에 있는 꿀을 따먹고, 메뚜기를 먹으면서 거침없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선지자의 출현에 유대민족은 요단강가에 사정없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가 외친 복음의 일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리고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무슨 뜻입니까? 심판의 외침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찍힙니다. 그리고 불에 던지운다는 것은 회개와 심판을 의미하고 또 하나님은 열매를 요구하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이 맺어야할 열매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무화과, 포도나무 그런 열매가 아닙니다. 열매가 없으면 도끼도 찍어 불에 던져지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매들의 귀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②눅13:6-9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도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주인이 과수지기에게 말하기를 '내가 3년 간이나 이 나무에서 와서 열매를 구했지만 얻지 못했다. 이젠 찍어 버리고 다른 나무를 심도록 하라! 땅만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자, 과수원 지기는 '일 년만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시 한 번 거름을 주고 손을 봐서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그리해도 열매를 맺지 않는 다면 그 땐 찍어 버리십시오!'
마3: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지금 당장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것이고, 눅13장은 1년만 더 참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똑 같이 열매가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똑같이 찍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찍어버리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고, 오늘 우리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믿/

 

③요15:1-2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무릇 내게 있어'란 말은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영양분을 받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지는 나무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무 때문에 살아가는 가지에게도 의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만일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잘라버린다는 경고입니다.

 

④주님은 나무인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열매를 원하고 계십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의 심정은 자식이 꼴등하기보다는 일등하기를 바랍니다. 장사하는 사람의 하루 수입이 10만원보다는 100만원이기를 갈망합니다. 농사꾼은 한 해 수확이 쌀 20개보다는 100-200가마를 기대하고, 사과나무 주인은 사과 10박스보다는 100-1000박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심은 나무에서 풍성한 열매가 열기를 요구하시고 그 열매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믿/ 마13:8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30, 60, 100배가 아닙니다. 100배, 60배, 30배의 순입니다. 100원, 60만원, 30만원 하는 것과 30만원, 60만원, 100원 하는 말의 순서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100배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혹 안 되면 60, 더 안 될 경우에는 30배로 양보하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요구는 100%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풍성한 열매'를 요구하고 계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2. 우리가 읽은 본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체의 열매'를 말하고 있고, 또 하나는 '성령의 열매'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감나무처럼 생겼더라도 감이 열리지 않으면 감나무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열매를 맺으면 육에 속한 사람이요,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크게 기억하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요청은 언제나 대립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①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 비결의 첫 번째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입니다.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 안에는 두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입니다.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에 우리가 거듭나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 믿는 자 안에 계시는 성령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안에 욕심의 사람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원죄를 타고난 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②사람 속에는 두 가지 소욕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영의 소욕이 있습니다.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두 가지 소욕이 우리 속에서 서로 싸운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영의 소욕이 서로 거스리고 서로 대적한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육체의 소욕을 지원합니다. 육체의 소욕이 발동하기를 지원합니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마시고 더 많이 즐기기를 지원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향락하고 더 많이 타락하기를 지원합니다. 음란과 폭력이 강하게 발동하기를 지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 마귀를 따르도록 지원합니다.

 

③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롬8:5-6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 중에는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소속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한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저것을 생각하며 산다고 합시다. 동상이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이부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꿈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면 운명까지 달라집니다. 남편은 주일날 세상으로 가고 싶고, 아내는 교회를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은 지옥으로, 한 사람은 천당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소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의 사람이 아니고 영의 사람입니다.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좇아서 살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 '육신을 좇는 자'란 육신의 부패성을 좇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타락한 성품대로 사는 사람, 죄(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 삶의 중심을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을 좇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롬8: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고, 7절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고, 8절에서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갈5;19절 이하를 보세요! 육의 생각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이라고 했습니다.
'영을 좇는 자'란 예수 믿고 중생한 자로써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우리의 과거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육신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영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육신의 일을 생각하면 잘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롬8: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의사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신의 생각에 이끌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하며 이에 따라 육신의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의 실상입니다. 약4;4절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④하나님이 기뻐하는 생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시29;2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예배를 통하여 믿음이 오고 축복이 옵니다. /믿/
롬8:9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더 깊이 음미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아멘!/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엎드려 기도할 수 있습니다.

 

⑤'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명칭을 살펴보면 '⑴거룩한 영 ⑵하나님의 영 ⑶진리의 영 ⑷그리스도의 영 ⑸중재자, 위로자, 약속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성령을 쫓아 행하라!'란 무슨 말인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생활, 영적인 생활을 하려면 성령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길을 가야합니다. /믿/아멘!/

 

3. 육체의 소욕 따라 사는 사람의 죄를 네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19-21).

 

①성적인 타락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음행, 성적인 범죄입니다. 더러운 것, 이것은 성적인 행위 가운데 변태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호색은, 우리에게 성을 유발하는 많은 매체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하나님께 대한 죄는 '우상 숭배, 술수(미신)'입니다.
③이웃에 대한 죄는 '원수 맺는 것, 분쟁하는 것, 시기하고, 분내는 것, 당 짓는 것, 분리하는 것, 투기하는 것, 이단운동으로 남을 파멸시키는 것'등입니다.
④자신에게 짓는 죄는 '방탕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거나 방탕하면 우선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해가 돌아옵니다. 바울은 엡5: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4. 우리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는 9가지입니다.

 

①사랑의 열매입니다. 고전13: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주경학자 벵겔은 본문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가르쳐 사랑이라는 가장이 이끄는 아름다운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사랑을 네 가지 단어로 말합니다. ⑴에로스: 남녀간의 이성적인 사랑, ⑵필리아: 우정적인 사랑, ⑶스톨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⑷아가페: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이 바로 이 아가페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사랑은 모욕을 주어도, 명예를 훼손하여도, 창피를 주어도, 가진 것을 빼앗아도, 목숨을 앗아가도 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서 '이처럼 사랑하사'가 바로 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주시면서 까지 사랑한 사랑, 하나님이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눅23:34).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용서해 주는 사랑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할/
우리도 이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롬5:5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할/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부어지면 이 사랑의 실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일4:12절에서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포장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겉만, 외모만,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물건도 그렇습니다. 속의 내용물과는 관계없이 근사하게 포장해 주면 내용물의 진가를 육안으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용은 별것도 없으면서 겉만 포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경건의 모양만 갖추어서는 안 됩니다. 경건의 눈, 경건의 입, 행동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네 이웃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에 옮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은 사랑을 삶의 전부로 보았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것만이 곧 가치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 외모로만 보이는 충성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시작된 충성이래야 하나님이 열납하십니다.
여러분!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세요!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할/ 사랑으로 시작한 일은 마음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충성은 형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다 귀합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열매가 그 다음 열매들을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②희락의 열매입니다. 사랑을 품고 살면 내 마음은 항상 기쁘고 즐겁습니다. 인생살이가 천년만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짧은 인생살이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평생 원망하면서 살 것입니까? 아니면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살 것인가? 짧은 인생 기쁘고, 즐겁게 삽시다. /아멘!/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신앙생활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즐거운 마음에는 그 뿌리가 있습니다. 헬라어원의 희락은 '카라'인데 그 뜻은 '하나님께 근거를 둔 기쁨'이란 뜻입니다. 기쁨의 근거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이 기쁨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었기에 도망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시30: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할/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죄의 옷을 벗기시고 자유와 기쁨과 평강의 옷을 입혀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할/
▶한 집사님이 간증하기를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열심히 절에 다녀봤지만 불교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허무해지는데 예수님 앞에 나왔더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요15: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할/ 여러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기쁨을 주안에서 받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③화평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자연이 그 마음속에 화평이 넘쳐나게 됩니다. ⑴우리는 하나님과 먼저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십시다. 하나님과 화목을 깨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⑵이웃과도 화목해야 합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이웃과 더불어 화목할 수 있습니다. 화목한 우리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마5: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아멘!/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⑶내 마음 속에 화평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내 마음 속에 화평이 떠나지 않고 넘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화평을 내가 간직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살다보면 속상할 때가 있고, 신경질 날 때가 있습니다. 짜증스럽고 불만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469) /할/

 

④오래 참음의 열매입니다. 세상사도 참아야 덕이 됩니다. 신앙의 길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의 은혜도, 축복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가장 우리가 크게 기다려야 것이 주님의 재림입니다. /믿/ 농부가 결실을 바라보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너희도 오래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인내의 가치는 오래 참는데 있습니다. 9번을 참더라도 10번째 못 참으면 그 인내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예술도 오래 참지 못하면 못합니다. 운동도 그렇습니다. 참고 인내하는 자가 승리자가 됩니다. 학문도, 신앙도 다 그렇습니다.
물론 잠깐 참는 것은 쉽습니다. 한두 번 참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는 것을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할/

 

⑤자비의 열매입니다. 이 말은 ⑴부드럽다는 말입니다. 소금은 순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부드럽다'의 반대말은 '뻣뻣하다'입니다. 성경에서 뻣뻣하다는 말은 대개 교만의 뜻으로 쓰여집니다. 출32:9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⑵인자하다는 말입니다. 인자는 너그러운 마음을 뜻합니다. 인자란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용서받고 싶은 것처럼 나도 남을 용서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⑶친절하다는 말입니다. 친절은 남을 높이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비는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희생이 있는 친절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비의 현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예수님의 자비의 현장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비로우십니다.
시145:8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우리 모두 자비로 옷을 입고 소외된 이웃을 향해 자기희생이 있는 친절을 베풉시다. 눅10:36-37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할/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 더 큰 친절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잠14:21절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할/

 

⑥양선의 열매입니다. 자비라는 말과 비슷하지만 보다 더 적극적인 것입니다. 양선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가는 삶입니다. '마음에 악을 품고 행하는 선,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베푸는 선이 양선이 아니라, 말씀에 비추어서 의로운 선이 양선'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⑦충성의 열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충성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입니다. ⑴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충성은 그를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 그래서 히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⑵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자만이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눈가림만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⑶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최고보다 최선을 좋아하십니다. 계2: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할/
⑷충성은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열심입니다. 주인의 뜻과 상관없는 열심은 충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따라, 말씀을 따라 열심을 다하므로 사명을 주신 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잠25:13절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고전4: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또한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하며, 미루지 않고 '지금'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던지, 늘 충성해야 합니다. /아멘!/

 

⑧온유의 열매입니다. 온유란 말은 야성을 가지고 있는 사나운 짐승들이 훈련되어져서 길들어졌을 때 길들어진 모습을 표현할 때 온유하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호랑이나 사자들을 훈련시켜서 주인의 말에 잘 복종할 때, 잘 훈련되어진 개의 모습을 보고 온유해 졌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 온유라는 말이 성경에서 사람에게 쓰일 때는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훈련되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을 표현할 때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잘 길들여진 상태입니다. 훈련을 잘 받은 상태입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자의 마음이요, 겸손한자의 성품입니다. 마11:29절에서 주님의 마음이 온유와 겸손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키가 5척밖에 안 되는 작고 마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항상 검소하게 무명옷을 입었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온유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답니다. 그는 무저항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차래 투옥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늘 하나 들어보지 않고 돌 하나 던지지 않았으면서도 300년 동안 그들을 지배해 온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
어느 분이 그의 위대한 삶을 평가하면서 '그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다. 그토록 작은 체구를 가지고 이렇게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온유의 능력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솝의 우화에 해와 바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이서 서로 자기의 힘이 더 강하다고 주장하다가 지나가는 어느 신사의 외투를 누가 벗기는지 내기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강한 바람이 벗기려고 했지만 오히려 바람과 추위를 이기려고 더 잘 붙들었기 때문에 실패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해가 따뜻한 햇볕을 비추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은 스스로 외투를 벗었습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강하고 힘이 있는가를 우리들에게 잘 말씀해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강한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성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의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땅은 어떤 부동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땅위에 모든 범사가 땅의 복인 줄 믿습니다.

 

⑨절제의 열매입니다. 자기 조절의 능력입니다. 절제라는 말은 '절약한다.'는 말이요, '자제한다.'는 말이요, '자신을 억압하고 자신을 억누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나쁜 의미로 자신을 억압하고 억누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못된 것, 욕심이나 세상으로 향하는 헛된 생각을 절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한 것은 앞에 나오는 육체의 일들을 절제하라는 의미입니다.
말의 절제가 필요하고, 행동의 절제도 필요합니다, 저는 절제의 은사가 부족해서 먹다보니 자꾸 살만 쪄서 몸이 무겁습니다.

 

▶안데르센이 지은 동화 가운데 '분홍신'이라고 하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마술사가 예쁜 분홍신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 신을 신기만 하면 누구든지 끊임없이 아름다운 춤을 출 수가 있습니다. 한 소녀가 있었는데 유명하게 되고 싶고 또 박수갈채를 받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분홍신을 신었습니다. 그 때부터 소녀는 아름다운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계속해서 분홍신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추었습니다.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가 더 이상 춤을 추지 않고 집을 나가지 않도록 만류해도 소녀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세상으로 나아가 끊임없이 춤을 추다가 결국은 지쳐서 죽었다는 그런 동화입니다.
여러분, 바로 끊임없이 세상에서 춤을 추게 하는 욕망의 근원이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소욕입니다. 그냥 두면 이 육체의 소욕은 끊임없이 육체의 일을 만들어 냅니다. 멈출 수 없이 계속해서 15가지의 육체의 일을 만드는 육체의 춤을 추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의 춤을 추게 되고 결국은 육체의 일을 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을 해결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할/ 롬8장에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바로 우리 몸의 행실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 베드로 전서에도 말씀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구원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육체의 정욕을 이기게 해 줍니다. 성령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두개의 신발이 있습니다. 육체의 춤을 추게 하는 분홍신이 있습니다. 그 신발을 벗으십시다. 계속해서 육체의 춤을 추면 육체의 열매, 15가지가 우리 삶 속에서 맺혀지게 될 것이요, 결국은 패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신발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신발을 선택하는 자는 성령의 춤을 추게 될 것이고 천국의 춤을 아름답게 추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모셔들이며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다. 그러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우리 삶 속에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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