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인생수업의 필수과목입니다! (요 21:1-17)
이솝우화에 보면, 어느 날 포수가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습니다. 그때 새가 포수에게 다급하게 애원하기를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당신이 나를 살려주신다면 많은 새를 데리고 오겠어요! 많은 새들을 잡는 것이 나 하나를 잡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습니까?'하고 사정을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포수는 냉정하게 말하기를 '그럼 너는 너의 목숨만 중하다는 말이냐? 네 목숨 하나를 구하기 위해 너희 동무와 이웃 새들을 다 죽이겠다는 말인가? 이런 나쁜 놈은 더욱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곧 방아쇠를 당겨 버렸다고 합니다. 세상이 '남을 죽여도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팽창해저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빛을 발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은 사명을 던져버리고 옛 직업을 찾아 갈릴리로 같던 신앙의 실패자 베드로와 그와 함께 한 예수님의 일곱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배경은 이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이 제자들은 제자답지 못한 제자들입니다. 사명을 팽개치고 세상으로 달려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도망치고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왔습니다. 본문 14절에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 날 주님은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후, 주의 날에 다시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또 제자들을 만난 것은 세 번째 만남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두 번이나 제자들을 만나주셨는데도 제자들은 부활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 보름 동안이나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땅에 계셨는데 40일 동안 주님은 제자들에게, 개인에게, 대중들에게 11번이나 나타나셨습니다. 왜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40일 동안 11번이나 나타났는가? 주님의 부활을 믿어야 될 사람들이 주님을 못 믿고 있기 때문에 믿도록 하시기 위한 주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40일 동안 주님은 이 제자들과 친척들과 그 당시 주님을 따라다녔던 신실한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도록 하는 작업을 40일 동안 하셨다는 것입니다.
못 믿고 있는 제자들, 도망쳐 나온 제자들, 옛 직업으로 돌아간 제자들, 스승의 뜻을 이루어 주지 못한 제자들을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못난 제자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상대합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과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예배 가운데 오십니다. 우리 찬송 중에, 기도 중에,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회중가운데 성령으로 임하십니다. 말씀으로 임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처럼 도망치고 부인하고 세상 것에 집착하고 있던 우리들을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 변함 없이 찾아 주십니다. 이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멘!/
사49: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잊지 못하듯이 나는 너를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너를 도울 것이라.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야곱아. 택한 내 백성아.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축복이요 우리들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베드로를 보세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출발했다가 물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 왔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주의 사역을 하겠다는 원대한 소명을 가지고 나갔다가, 이제는 다 내버리고 본래의 세속적인 직업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주의 일을 하겠다는 높은 이상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가장 처음으로 부른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12제자 중 가장 '선임 제자'입니다. 유대인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게 첫 번째는 의미가 많습니다. 첫 번째는 권위가 있고 특권이 많습니다. 장자가 그렇고 첫 열매가 그렇습니다. 그런 베드로이기에 실망이 더 큽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사 실패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 실패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실패는 누구나 경험하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 뒤에 더 큰 성공의 금자탑을 세운 분도 많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도 합니다. 실패는 일상적이며 보편적인 삶의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실패가 노출되거나 지적될 때마다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수치감을 감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탈린이 집권을 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어린 시절에 알았던 친구를 하나씩 둘씩 다 죽여 버리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의 실패했던 과거를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흔히 실패할 때마다 사람들은 두 가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과거의 실패를 잊어버리자 또는 묻어두자'고 하는 사람과 또 하나는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에게 어떤 기자가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 존경을 받습니까?' 묻자 그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실패를 감추거나 미화시키려고 안 간 힘을 쏟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저 '김일성, 김정일'부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정직성 앞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실패 앞에 정직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사람마다 그 사실에 먼저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경의 인물들의 생애에서 그들의 약점과 부끄러운 실패를 성경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한 땅,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흉년이 들어 다시 하나님의 명령과는 상관없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의 아내 사라가 굉장히 잘생긴 미인이었는데 그 아내를 탐내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이때 애굽의 바로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바로에게 꿈으로 계시해서 뒤늦게 깨달은 바로가 황급히 아브라함에게 아내를 돌려준 사건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실패도 감추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당대의 의인 노아가 술 취해서 벌거벗고 드러누워 있는 실수로 추적해서 적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을 받은 다윗이 하나님의 계명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를 범한 밧세바의 사건도 숨김없이 실어놨습니다.
여러분! 실패의 본보기는 어쩌면 우리에게 더 요구되는 삶의 본보기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실패를 통해서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는 모든 사람들이 겪습니다. 누구나 실패를 합니다. '나는 실패를 모르는 인생이다'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없습니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큰 소리쳤던 나폴레옹도 그의 마지막은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우리 주변에 실패했다는 사람들의 경우를 많이 봅니다. '다이어트 실패를 했다, 증권투자에 실패했다, 고시를 하다 실패를 했다' 그런 것들입니다. 우리 송은영 자매님이 좋아하는 작가 이문열씨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문열씨는 고시에 응시했다가 실패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누가 이문열씨를 이 시대에 실패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는 법조인이 못하는 큰일을 하고 있고 이 시대의 문인으로서 우리들에게 날카로운 많은 문제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문열씨의 고시실패가 자신의 문학 속에 어마어마한 어떤 진 액을 짜 내어주는 훈련의 기간이었다고 봅니다. /할/
미국의 야구사에 전설 같은 인물이 한 사람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야구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오는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그가 바로 홈런 왕 '베이브 루스'입니다. 베이브 루스는 선수생활을 하면서 통상 714개의 홈런을 친 사람입니다. 물론 행크 아론은 이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그렇지만 행크 아론보다 홈런 왕 하면 베이브 루스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베이브 루스가 그렇게 존경을 받는가 하면 그가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714개의 홈런을 치기 위해서 그는 1,330개의 실패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실패를 딛고 714개의 홈런을 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아닙니다. 실수는 수치가 아닙니다. 대학입시 재수를 한다고 그게 수치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재수 삼 수 한 사람 중에 앞서 가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실패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공통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실패 중에서 실패를 극복하는 이 지혜를 우리 모두 배우시기 바랍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보십시오. 아주 결정적인 실패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극복했습니다. /할/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포기하기 전까지는 실패가 아닙니다. 포기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실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8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잠24: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실패는 인생수업의 필수과목입니다. /믿/ 실패는 쓰라린 경험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훈련입니다. 그렇다고 실패를 사서하지는 마십시오. 실패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실패를 당하거든 인생의 훈련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천지창조를 작곡한 하이든은 66세에 그 대작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800번이나 그 작품을 뜯어서 손질을 했다고 전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남겼습니다. 8년 간 2,000번의 스케치를 했다고 합니다. 꿀벌 한 마리가 꿀 한 방울을 만들기 위해서 꽃과 집을 드나드는 횟수가 학자들이 연구한 발표를 보면 평균 4,200번이라고 합니다. 꿀 한 방울을 얻기 위해서 꿀벌들은 4,200번의 노력을 해야 됩니다. 대작을 만든 이 예술가들이 하루아침에 작품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작품을 몇 번이나 포기할 만큼 온갖 역경을 돌파하고 대작을 만들어냈습니다. /할/
▶오늘 본문에는 이 실패의 본보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베드로를 비롯해서 도마, 나다나엘, 요한, 야고보, 그리고 두 제자, 그리고 장소는 디베랴 바닷가였습니다. 베드로는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붙잡히게 되자 안나스 법정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했습니다.
다음날 들리는 소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우리의 꿈은 깨어졌다고 낙심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옛 직업인 고기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옛 경험대로 출렁이는 파도를 넘어 갈릴리 바다 가운데서 그물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다면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한 밤 동안 얻은 것은 육체적인 피곤이요, 마음의 초조요, 실망과 실패와 한숨뿐이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만나 부름을 받은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바로 갈릴리 바다입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위대한 약속을 주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래서 그는 물고기를 잡다가 사람을 낚는 '인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주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취한 행동은 3절에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옛날처럼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하며 과거로 돌아갑니다. 여기 영적 사역에서 실패한 베드로의 모습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비유해 보면 '그래 이제 나는 주님 따라 가는 것이고 봉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이고 무엇이고 간에 다 집어치우겠다.'는 것입니다.
딤후4장에 보면 '세상을 사랑하다가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평생 세 차례 세계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세계 여행이라야 그 당시는 지중해 연안이었고, 좀 더 넓게 말하자면 로마까지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 3차 여행을 하는 동안 여러 사람들을 대동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끝까지 잘 동행해 준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도중에서 실패하고 탈락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탈락한 그 대표적인 사람이 '데마'입니다. 성경에 보면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처음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곳까지 함께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그곳에서 데마는 사도바울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같이 당했습니다. 처음의 데마는 아주 신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사도바울이 두 번째로 감옥에 들어 갈 때는 그만 탈락하고 맙니다. 왜 탈락하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거기다 더 악센트를 붙여서 '세상을 사랑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물론 세속사회를 말합니다. 데마는 옛 친구와, 옛 생활과, 옛 추억에서 헤어나지를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데마는 끝내 신앙도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자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데마라는 사람입니다.
▶다 팽개치고 옛날로 되돌아간 베드로를 보겠습니다. 그의 고기잡이가 성공했습니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실패에서 도피한다고 성공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또 실패하고 맙니다. 베드로는 영적 사역에서 뿐 아니라 육적인 삶의 현장에서도 또 다시 실패의 고비를 마셨습니다.
이 진리는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믿음으로 영적으로 실패한 자는 육적으로 성공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 예수님을 따라야 할 사람이 교회를 받들어야 할 사람이 봉사하고, 전도하고, 충성해야 할 사람이 그 자리를 벗어나면 편하고 무언가 잘 될 것 같지만 분명한 것은 밤이 맞도록 수고하고 노력해 봐도 아무 대가를 얻지 못하는 쓰라린 실패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예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수가 없는 밤은 빈 그물의 밤이요, 실패와 절망과 좌절의 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패를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또 알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는 우리의 지혜의 부족함을, 경제적인 고통을 통해서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도 자기의 부족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4절에 '날이 밝아 올 무렵'에 실패의 현장으로 우리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상한 마음에 오시고, 실패한 현장에 오시고, 무너져 버린 것 같은 절망 가운데도 성령 님을 통해서 오늘도 우리 곁에 주님이 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5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어떤 경각심을 심어 주는 물음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해서 실패가 성공으로 바꿔질 줄 알았더냐?' 이런 물음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주님은 실패를 성공의 방법으로 방향을 제시해 주십니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러면 고기를 잡을 것이다' 여기서 오른편은 하나님의 품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지 말고 나의 품으로 믿음 안으로 은혜 안으로 다시 들어오라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오늘 6절의 교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⑴눅5장의 처음 체험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체험은 다시 같은 장소에 오면 옛날이 기억나고, 그 때의 일들이 하나씩 다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다시 옛날의 체험을 회복해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에서 만나주셨습니다.
⑵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는가? 오른 편은 항상 유대인들에게는 축복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께서 말씀하시면 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다 그대로 됩니다. 오른 쪽이든 왼쪽이든 주님께는 거릴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명하시면 다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할/
⑶순종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의 핵심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할/ 순종하면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진리입니다. /아멘!/ 스펄전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비유해서 '수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행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발행한 수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수표책이라고 했습니다. 그 수표에 서명을 하면 자기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고 기도로 순종으로 서명하면 그 약속들이 모두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인간의 방법으로 하지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편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우편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오른편의 능력으로 선을 이루어주십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날도 이 말씀을 붙잡는 사람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감사의 기도가 되고, 원망이 변하여 감사가 되고 실패는 성공으로 바꿔지는 역사가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합력하여 잘 된다더니 안 되는가? 왜 하나님이 안 해 주실까? 예수 믿으면 잘 된다더니 뭐가 잘돼'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에는 두 가지의 영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아무나 선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에 중심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가 아무리 큰 부자라 해도 그 부모와 관계가 불편한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약한 믿음, 빈곤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부족한 믿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오늘 예배드리다가 불같은 믿음이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또 하나의 조건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선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 선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그 길에 고난도 오고 어려움도 오고 환난과 시험도 옵니다. 그러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은 하나님은 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욥을 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으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틀림없이 자동적으로 보너스로 삶의 모든 형통함이 따르는 줄 믿습니다. /아멘!/
▶'오른편으로 그물을 내려라' 그 말씀대로 제자들이 따랐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고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또 11절을 보니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려놓고 보니 큼직한 고기가 153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는데 그물을 찢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 속에서 생각나는 사건이 없습니까? 3년 전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시던 때 그 날도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주님이 오셔서 '깊은 곳으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순종했더니 두 배가 물 속에 잠길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한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큰 실패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그곳에 개입하시기만 하면 실패는 한 순간에 성공으로 축복으로 바꿔진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여,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다만 믿음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세상으로 되돌아간 베드로를 다시 믿음으로 불러드려 사명을 주시는 주님의 한없는 용서와 사랑과 자비로우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9절 이하에 보면 주님은 죄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실패를 추적해서 다시는 그런 실패를 범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십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숯불이 등장합니다. 주님이 왜 숯불을 등장시켰을까요? 이 숯불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을 추억하게 합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베드로가 불가에서 주님을 부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추적합니다.
요18:18절에 보면, 그곳은 가야바의 법정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드디어 이 제사장 앞에 끌려와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 어떤 병정 하나를 만납니다. 그 장면 속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이 장면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합니다. 숯불 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어 놓으신 이 숯불을 보통 숯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실패할 때 실패한 장면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되돌아 봐야 그 문제를 뛰어 넘는 삶의 도약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운전으로 생활하는 운전사가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냈습니다. 사고를 내면 그 다음 어떻게 됩니까? 운전대를 잡고 싶지도 않고 특히 사고 현장 근처는 지나가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운전대를 놓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직업인으로서 완전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운전을 하셔야 합니다. 한번 운전에 실패했어도 다시 해야 합니다. 운전대를 쳐다보지 않는 것만이 해결의 전부는 아닙니다. 떨려도 운전대를 잡아야 하고 사고가 일어난 그 지긋지긋한 현장에도 다시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숯불을 다시 등장시킨 이유가 뭡니까? 숯불 가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배신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던 그 숯불 가에서 베드로는 다시 서서 주님의 손을 붙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다시는 넘어지지 말라'는 사랑의 표현으로 숯불을 피워 놓고 생선을 굽고 떡을 구워 먹이고 있습니다. /할/
▶오늘 여기 숯불과 떡과 생선을 또 다른 영적인 의미가 부여됩니다.
①숯불을 피워 놓으신 또 다른 의미는 곧 성령의 불로 의미하며, 다시 한 번 베드로에게 성령에 충만한 자가 되어 다시는 실패하지 말라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 믿음은 능력입니다. 능력을 받지 못하면 또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②생선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불 위에 올려져 있는 생선은 자기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또 자기가 생선처럼 온전히 자아를 죽여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너를 마음대로 쓸 것 같다는 무언의 의미입니다.
③떡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떡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귀합니다. 이 말씀은 영혼의 떡입니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믿음의 실패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실패자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선을 먹이고 떡을 먹이고 나서 다시 한 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5-17절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본문은 상당히 의도적인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4절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세 번 나타나신 것을 강조하시고 그 다음에 세 번째 나타나신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캐물으십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주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상황을 다시 한 번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베드로를 과거의 실패 앞에 다시 세우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 한 번 베드로의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얼마나 지금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있겠습니까? '네가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지금 주님은 배신한 베드로와 처음 상면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일 주님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 그럴 수가 있나? 나를 저주하고 부인한 너 베드로 잘 만났다'며 멱살을 움켜잡을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가 아니더라도 '왜 부인했어, 나를 저주한 이유가 뭐냐?' 이 정도로는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문 방문은 달랐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는 사랑을 확신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잘못한 사람, 억울한 사람을 만나면 다짜고짜 따지기 먼저 합니다. 그러나 따지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의도는 베드로를 회복시켜 그가 다시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실패하고 가책 때문에 도망가는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해변에서 생선파티를 열어주신 주님의 놀라우신 솜씨를 보고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녹았겠습니까? 깊이 녹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그 가슴을 다 녹여 논 다음 묻습니다. '사랑해? 나를?'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제 우리도 원수를 만나면 우선 따지려고 하지말고 같이 음식을 대접합시다. 먹여 놓고 나면 사람의 생각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식사초청을 해 놓고도 처음부터 따져대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막 숟갈을 들라고 하는데 바가지를 긁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 방법을 바꾸십시다. /할/ 본문에 보면 주님은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십니다.
15절을 보세요!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소화가 다 된 후에 그 다음에 물으십니다. '내가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마음속에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사명의 동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물으십니다.
지금 베드로의 잘못을 책망하시기는 하는데 그 책망이 감동적입니다. 여러분! 책망은 감동적으로 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왜 부인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물어도 소용없는 질문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물어야 할 질문은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만 하면 그는 다시 주님을 따라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닥친 위기를 그가 주님을 부인했다는 사실보다도 주님을 향한 사랑의 농도가 식어가고 주님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커다란 문제임을 주님이 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농도가 식어지면 신앙생활에도 그만큼 식어집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믿음도 같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주의 사랑을 덧입는다.'고 했습니다. /할/
당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이 물음이 지금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물으신 질문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기서 세 번이나 물으신 것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의식해서 베드로의 깊은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듣기 위해서라는 주석을 단 학자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시킨 다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 명령을 내리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면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불완전한 사랑이지만 사랑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고 치라' /할/ 이곳이 어디인가? 처음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신 곳입니다. 그때는 전도자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갈릴리 바다에서의 사명은 양을 치는 목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을 따르고자 끝까지 십자가 정신으로 걸어갔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네로 박해 시에 베드로는 교우들의 강권으로 로마 성을 빠져 탈출했습니다. 새벽에 로마 성을 몰래 빠져나가는데 주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는 환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땅에 엎드려 '퀴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주님께는 '네가 버리고 간 십자가를 내가 지고 다시 십자가에 죽기 위해 로마 성으로 간다.'고 하십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가 목멘 소리로 '주여! 내가 가겠나이다.' 그리고 불타는 로마 성을 향하여 갔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네로 박해 시에 로마 성에서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처음에는 실패자로 나왔지만 주께서 다시 붙들어 주시니 그는 위대한 신앙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 베드로의 위치는 한마디로 큰 대들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성공자로 다시 세우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할/
요6장에 보면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 풍랑 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끼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힘을 의지하여 풍랑과 싸웠는데 오히려 풍랑은 더 거세어지고 힘은 지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이 한마디에 바다의 풍랑은 잔잔해 졌고 제자들의 절망이 희망으로,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할/
▶서로 교제하던 남녀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사주궁합을 보았습니다. 결과는 하늘이 맺어준 천상배필이고, 찰떡궁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날부터 틈만 나면 찰떡을 사먹었습니다. 약혼식 때도 축하 케이크 대신 찰떡으로 케이크를 만들고, 결혼식 때도 일부러 찰떡을 만들어 대접하고 자기들도 먹었습니다. 신혼여행가서도 신혼살림을 차리고 난 후에도 찰떡을 일부러 먹었습니다. 찰떡처럼 달라붙어 찰떡궁합으로 살자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부부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초저녁에 시작한 싸움이 새벽까지 계속됩니다.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도 않은 채 싸웁니다. 쉬는 날이 되면 마주 바라보고 앉아 하루 종일 싸웁니다. 이유는 찰떡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찰떡으로 찰떡궁합이 됩니까? 점쟁이나 관상쟁이가 찰떡궁합이라고 한다고 해서 부부가 행복해집니까? 성공, 행복, 평안히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43:1-3절의 말씀을 보세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성공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 길과, 방법과, 해결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래 전에 '부시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그는 나이도 모르고, 시간도 모르고, 돈도 모르는 무공해 인간이었습니다. 출연료로 받은 돈을 버리거나 땔감으로 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시맨의 주인공 '니카우'는 점점 생선회를 먹고, 담배를 피우고, 통장을 만들고, 그러다가 돈을 알고, 세상을 아는 사람이 돼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 성공이 그를 병들게 했습니다.
여러분, 성공할수록 자기관리를 바로 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수록 그 돈을 바로 써야 합니다. 권세를 잡고 출세할수록 그 권력을 바로 행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근황을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패했다가 성공하는 것보다, 성공했다가 실패하는 것이 더 비참하고 힘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철저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 승리로 개선가를 불렀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성공은 십자가로 이뤄집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바로 믿고, 신앙생활 똑바로 잘하면 성공하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그 어떤 실패에서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멘입니까?/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어떤 실패를 맛보셨습니까? 그 실패가 신앙의 실패든 사업상의 실패든, 인간관계의 실패든, 도피는 해결이 아닙니다. 부딪치십시오, 직면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사랑으로 설득하시는 주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기도에서 옵니다. /할/
오래 전에 한 목회자 세미나에서 '목회의 성공과 실패'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이 있었는데 그 중에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 한 분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실패는 더 많은 시간을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기도하지 못한 것이 더 큰 실패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기초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가졌습니까? 좋은 직장을, 좋은 사업을 가졌습니까? 사랑하는 교회를 가졌습니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기도가 능력이고 기도가 축복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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