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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가장 좋은 교훈! (잠 22:1-6)

by 【고동엽】 2022. 1. 27.

가장 좋은 교훈! (잠 22:1-6)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은 온갖 소망과 희망과 정감이 넘치는 그런 달입니다. 우리 인류를 위해서 5월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 5월을 가리켜서 "계절의 여와"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1년 12달 가우넫서도 이 5월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달입니다. 5월에는 어린이날이 들어 있고, 어버이날도 들어 있으며, 스승의 날과 성년의 날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5월은 말 그대로 가정을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달입니다. 그리고 이 날들은 모두 우리의 삶에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그런 날들입니다.
오늘 어린이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존재가 바쳐지는 헌아식을 갖게 됩니다. 헌아식은 부모의 믿음으로 어린 생명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성례식입니다. 이 예식에는 세 가지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이 아이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신뢰와 의뢰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둘째는 "장차 이 아이를 말씀으로 양육하고 기도로써 키우겠다는 다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린 생명을 주의 양식으로 경건한 신앙 속에서 양육하고 키울 것이라는 부모의 다짐과 각오가 들어 있습니다.
셋째는 "장차 이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달라는 기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그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신 어린 생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양육해야 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이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헌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어린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아식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바쳐지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흠함"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흠이 없습니다. 꾀가 없고 수단이 없고 죄가 없습니다. 마치 백지와도 같은 때입니다. 무공해 인간 상태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눈여겨보십시오. 천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거기에는 가식이 없습니다. 꾸밈이 없습니다. 흠도 없습니다. 이것이 어린 아이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는 "인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그 상태가 마치 어린 아이들과 같았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들이 모두 선하고 순전하고 꾸밈이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은 완전한 인간상을 지닌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어린 아이들은 인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18:3)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행동하는 모습을 한번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한손 가득 쥐었다가도 다른 것이 주어지면 손에 쥐었던 것을 놓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잡습니다. 거기에 욕심이 없습니다. 탐욕이 없습니다. 아주 지극히 인간다운 인간 원형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모습입니다. 인간 원래의 모습은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어린 아이는 어쩌면 인간 원형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천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천사입니다. 거기엔 거짓이 없고 욕심이 없고 포악스러움이 없습니다. 좋으면 마냥 웃고 싫으면 곧바로 웁니다. 싫어도 좋은척하고 좋아도 싫은 척하는 그런 가식이나 위장이나 꾸밈이 없습니다. 누굴 미워하고 증오하고 속이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린 아이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더럽혀지지 않고 순전하 상태인 아이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헌아식"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교육은 이렇게 순전한 마음과 생각과 모습을 오래 간직하도록 교육하고, 이렇게 순전하게 주어진 마음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간직하여 살아가도록 해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이렇게 순전하던 순수함과 천진스러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이렇게 순전하던 사람의 심성을 온갖 거짓과 속임수와 움켜 쥐고 뺐고 뺐기는 포악스러움에 오염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의 그 순전하고 깨뜻하던 심성이 타락하여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다투고 뺐는 혐오스러운 인간으로 전락되어 이 세상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육은 이와 같은 마음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게 하고 창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는 데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도 그런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몇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땅히 가르칠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재물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교육입니다.

 

재물은 지극히 일시적인 것입니다. 재물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생명이 길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사람이 물질에 생명을 걸고 목적을 두고 살아가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순간 얻어지고 또 순간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그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명예는 그 생명이 무척이나 오래 갑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땅에서 사라져 버려도 그 명예의 생명은 여전히 지속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오래 오래 간직되고 기억되어 남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위인들은 모두 명예를 소중히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한 세기 내지는 수세기의 시간적인 과거 속의 사람들이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서 기억되고 역사가 그들을 기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명예를 소중히 하라고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명예는 일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지고 쌓아지고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예는 무척이나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깊이가 있고 무게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명예는 정신적인 무형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고 일시적으로 형성시킬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지극히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물질에 너무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말고 오히려 영원하고 값있고 무게와 깊이가 있는 명예의 소중함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너무나 이 물질에 집착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그 물질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영혼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와도 갈등하고 형제간에도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모두를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모두 명예를 소홀히 하고 물질을 너무 숭상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지나치게 물질 중심 시대요 현재적인 것에 집착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명예를 소중히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가르쳐야 합니다.

 

2. 은금보다 은총을 소중히 하라고 했습니다.

 

은과 금은 사람들에게 황홀함을 안겨 줍니다. 황금은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황금은 빛이 나고 값어치가 있고 위력이 있습니다. 황금은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이성을 잃게 만들고 흑사심(黑思心)을 품게 만듭니다. 황금은 무척이나 좋은 것인데 때로 이것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질은 참 좋은 것인데 사람들이 그 물질을 목적화하기 때문에 때로 이 물질이 사람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고 불행의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보다 은총을 더 중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황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사랑받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도 사랑을 입는 생활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같은 축복을 입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은총을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은총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은 무엇보다도 부모로부터 사랑을 입고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잘 균형 잡힌 아이로 성격이 형성되어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정치인은 윗사람들로부터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정치인은 힘이 있고 생명이 길어집니다. 학생은 스승으로부터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지고 있는 능력을 마음껏 표현하고 자신 만만하게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자본이고 축복입니다. 인간은 폐일언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야곱이 이 은총 때문에 성공했습니다. 요셉이 이 은총 때문에 축복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은총을 입어서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은총 때문에 사울에서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은총은 값있고 무게가 있고 영원하고 충만한 뜻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세상에서 복으로 말하자면 이 은총보다 더 좋은 복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은혜도 없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배경도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은 사람은 이 세상세서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이 재미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삶이 행복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은금보다 은총을 귀중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3.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만덕의 근원입니다. 여타의 것이 형통할지라도 이 부분이 잘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고 근본입니다. 명예도 은총도 순서적으로 따지자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의 다음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 땅에서 잘 되고 형통하는 길의 첩경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처음이고 시작이고 원리이고 길입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교육을 어떻게 하여야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입니가? 교육의 효과는 강조만 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더 좋은 방법과 길이 있을 것입니다. 잠언 3:3에서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목에 매어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목걸이를 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동전 열 개를 꿰어서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그러헤 하면 악귀로부터 자신을 구해 준다고 믿는 민간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전 열 개를 실에 엮어서 그것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이 같은 풍습은 신약시대에까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8을 보면 잃은 동전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동전 열 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잃은 동전을 찾기 위해 밤새도록 고생하면서 찾습니다. 그 한 개의 동전이 없으면 나머지 동전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밤을 새워 찾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전을 찾은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수학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먼저 동전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밤을 새우며 찾았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찾다가 없으면 그만둘 일이지 무엇 때문에 밤을 새워가며 찾습니까? 그리고 그 동전의 값이 얼마나 크길래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동전 하나를 찾았다고 해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전 하나가 지닌 값에 비해서 잔치에 드는 비용이 훨씬 더 많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는 의도는 그 동전 한 개가 지니는 중요성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동전 열 개를 엮어서 목에 걸로 다닌 것은 하나의 습과이었고 관례적인 삶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열 개의 동전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동전 한 개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한 개가 지니는 값어치보다도 열 개에서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개가 없어짐으로 인해서 나머지 아홉 개가 지니는 효험 조차도 없어졌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를 찾지 않으면 아홉 개로서는 아무런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악귀를 좇아내는 데 그 동전 한 개가 없으면 나머지 아홉 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밤을 새워서 잃은 동전 한 개를 찾은 것이고 찾은 후에는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장신구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니기를 아주 좋아했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부적을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녔고, 인장을 줄에 매어 목에 걸고도 다녔습니다. 이 같은 습관을 성경은 인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되 마치 사람들이 목에 걸고 다니듯이 그렇게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치되 일시적으로 가르치라는 말이 아니고 그 말씀을 밤낮 없이 보고 듣고 생각하며 생활화하도록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목에 매어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목에 매 주면 아이들이 어느 때라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마음판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돌판에 새긴 십계명에서 유추된 말씀입니다. 당시 중요한 교훈은 모두 돌판에 새겨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금속이나 돌, 나무로 만든 서판에 새겨서 전해졌습니다. 그러니가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치되 자녀들로 하여금 마음의 비(心碑)에 새겨 주라는 말입니다. 고래야 그 말씀으로 생활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삶이어야 그 인생에서 중요한 고비 때마다 말씀이 힘이 됩니다. 그리고 지혜가 되어 주고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참으로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귀한 자녀라 할지라도 낳아 놓는 것만으로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가르치되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면 하나님의 교훈을 목에 매어 가르치고 마음판에 새겨 주어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적당히 가르치고 형식적으로 가르치지 말고 철저하게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오늘 같은 세속화된 시대에도 방황하지 않고 정도를 걸으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주의 말씀대로 교육하고 가르치고 양육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자라는 주의 자녀들로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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