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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을 기념하라! (막14:1-9)

by 【고동엽】 2022. 2. 6.

이 여인을 기념하라! (막14:1-9)

 

인도의 창조 신화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먼저 지으신 다음, 연못 속에 피어 있는 연꽃을 가지고 아름다운 여자를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살집을 지어 주시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저 연못가에 용궁과 같은 아름다운 집을 지으면 어떻겠는가?" 여자가 연못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유인즉 연못 속에는 이상한 도깨비 같은 것과 물뱀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넓은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저렇게 밝고 넓은 들에서 살고 싶지 않니?" 여자는 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하기를 "저는 연약한 여성이에요.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들에서는 살 수 없어요."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 여자를 동굴로 데리고 갔습니다. "비바람이 없는 따뜻한 동굴은 어떠냐?" 여자는 "저는 저렇게 좁고 음침한 동굴 속은 싫어요." 또 거절했습니다.
그때 마침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창조한 남자가 씩씩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너는 저 남성의 가슴에 안겨 그와 함께 살면 어떻겠니?" 그러자 여자가 기쁜 발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속을 들여다보고는 질겁하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저렇게 무서운 곳에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남자의 가슴속에는 연못과 같은 음침함이 들어 있고, 광야와 같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으며 동굴과 같은 편협하고 어두움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 문제없는 곳을 찾으려면 너는 어떤 곳에서라도 살 수 없단다. 너는 남자의 가슴속에 들어가 힘을 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며 살도록 하라! 만일 네가 사는 곳에 연못의 음침함이 있거든 너는 진주가 되어 빛을 내거라! 만일 네가 사는 곳에 광야의 황무함이 있다면 너는 백합화가 되어 향기를 발하거라! 만일 네가 사는 곳에 동굴의 어두움이 있다면 너는 작은 태양이 되어 밝은 빛을 주어라." /할/
여러분, 여성의 역할이 큽니다. 세상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여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큽니다. 여자 성도님 여러분, 진주가 되어 빛을 내십시오! 백합화가 되어 향기를 발하십시오! 작은 태양이 되어 밝은 빛을 주십시오! /할/
▶오늘은 종려주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종려주일과 함께 이 한 주간을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에 고난 주간이라고 말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하며 환영한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주님 앞에 헌신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헌신을 한번 생각해 보고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마21:2-3절 "예수께서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주께서 보잘 것 없는 나귀새끼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며 겸손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나오셨습니까? 주님이 은혜로 세우시면 한 세대 크게 들어 쓰실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가난한 사람이 나오셨습니까? 천국이 당신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인생을 비관하는 분이 있습니까? 성령의 불만 밭기만 하면 세상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무능하다고 자책하지 마시고 가진 것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인생살이에 조금 뒤졌다고 열등의식이나 실패의식을 가지지 마시고 예루살렘의 나귀새끼처럼 당신의 등위에 예수님을 태우시고 호산나를 외치며 앞을 향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나귀 주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⑴이름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 사복음서에서 다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도 말했고, 마가도 말했고, 누가, 요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보아도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명의 충성자입니다.
⑵빛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쨌거나 영광스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하는 이름과 명예와 빛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경력입니까?
그런데 여기 이 나귀 주인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시골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⑶보상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농촌 마을에서 소 한 마리는 큰 재산입니다. 그래서 농촌 사람들은 소를 기르느라고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렇게 키운 소 한 마리를 선뜻 내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나귀 주인도 분명히 나귀 한 마리가 큰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 나귀가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그저 만족스럽게 바침으로써 기뻐했을 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정성껏 기른 나귀를 주께서 요긴하게 쓰신 다니 그것으로 보람과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⑷이 사람은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아무 말 없이 나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하나님이 '네 인생이 필요하다.'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인생', 주님이 필요하시다 하면 내놓아야 합니다.
⑸이 사람은 참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참 기쁨과 보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쓰임 받을 때입니다. 순교자는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곳에서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헌신 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 질 때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때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기쁨입니다.
나귀의 주인은 자신이 귀하게 기른 나귀 한 마리를 주께 드림으로써 보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마침내 슥9:9절의 '보라 네 왕이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한 예언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도 바로 이런 헌신의 삶을 살았던 여인입니다. ◀제목소개!▶

 

사람들에게는 자기 이름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공명심'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명예욕'이라고도 말합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에 자기 이름을 파 놓고 가는 사람들의 흔적을 곧잘 보게 됩니다. 또는 그 탄탄하고 억센 바위 위에 '0년 0월 0일 아무개 다녀가다'라고 새겨 놓는 바위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공명심은 인간이 모여 사는 세계면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욕이 뜻대로 안될 경우에는 힘으로 돈으로라도 이름을 얻고 권력을 쟁취해서 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매관매직'이란 말도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좀 색다른 주인공을 보게 됩니다. 본문 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 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요즘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선전을 해 주셨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파되어 이 여인의 일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나폴레옹 같은 영웅입니까? 시저와 같은 정치가입니까? 잔다르크, 유관순 같은 애국 여인입니까? 아니면 당시 빌라도 총독이나 헤롯왕의 영부인입니까?
아닙니다. 평범한 한 여성입니다. 본문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요12:2절에 의하면 베다니 마을에서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살고 있는 의로운 삼남매 중에 하나인 마리아라고 합니다. 이 기사는 4복음서가 공통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평범한 한 여인의 이름이 왜 이토록 하늘의 별처럼 높이 빛날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주를 높이면 주께서도 나를 높여주신다고 하는 평범한 진리' 그대로입니다. 잠8: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할/ 이 여인은 가난했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자신의 귀한 것을 바쳤습니다.
▶사랑의 낭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 헨리'의 '박사의 선물'이라는 단편집의 이야기를 보면 지극히 사랑하는 가난한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했기 때문에 돌아올 성탄절에 무슨 선물을 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금시계를 팔아 여인의 머리핀을 샀고, 여인은 20년간 길러온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시계 줄을 샀습니다. 성탄절 이브 때,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핀을 꽂아 주려고 하니 머리카락이 없고, 여인은 자기가 사온 시계 줄을 남자에게 채워주려고 하니 이미 시계가 없었습니다.

자초지경을 한 연인들은 더욱 더 사랑의 맹세를 굳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의 모든 기쁨으로 희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은 주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려서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쏟아 바쳤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기의 희생과 헌신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 되고 유월절이 지나면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1-2절을 보면 예수님의 예언처럼 죽음은 긴박하게 예수님 주위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국민의 대표기관인 장로들이 모여서 예수를 어떻게 잡아 처형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이런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 예수님은 그 날에 일정에 들어가셨습니다. 즉 베다니 시몬의 집에 심방을 가신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 그 집에 모여 있는 구경꾼, 향유 부음을 받은 예수님'입니다. ▶셋으로 나누어 조명해 보겠습니다.

 

1. 향유를 부은 여인을 생각해 보자!

 

요12:3절에 의하면 향유를 부은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리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눅7장에서는 큰 죄인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어째든 그녀가 누구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행동입니다.
①마리아는 공개적으로 향유를 부었습니다.
3절에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라고 나옵니다. 여기 시몬은 전에 문둥병자였으나 주님 앞에서 깨끗이 치료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집주인 외에도 제자인 가룟유다와 다른 제자들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서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일이 떳떳한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럽고 착한 일이라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라면, 또 사회와 이웃을 위해 떳떳한 일이라면 여러분들 주저 마시고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서둘러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②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3절에 '값진 향유'라고 했습니다. 요12:5절을 보면 가룟유다는 이 향유의 값을 300데나리온으로 쳤습니다. 당시의 화폐가치를 보면 장정이 1년 동안 일해서 받은 노임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당시 장정의 하루 노임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 돈은 오병이어 때 빌립이 모인 무리를 먹일 양식을 계산한 금액이 200데나리온인데 비해 100데나리온이 더 많은 돈의 액수입니다.
이 향유는 상당히 귀한 물건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 풍속가운데 혼수 준비물로서 가장 귀한 것이 옷과 향유라고 말합니다. 아마 마리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딸에게 혼숫감으로 이 귀한 향유를 물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부은 이 향유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으로 그것을 주님께 바친 것으로 사랑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던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그렇게 했다면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께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예배의 위기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없다고 뜻 있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극장에 오듯이 성가대가 찬양을 얼마나 잘하나? 목사가 설교를 얼마나 잘하나? 내가 아는 사람이 왔나 안 왔나를 살핍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보다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무슨 사건이 이루어지고 어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백날 천 날 예배드려도 하나님은 끄덕도 안 하십니다. ▶이 여인이 드리고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최상의 존재에게 나의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쏟아 바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이 여인만이 아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값으로 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싸구려 향유를 부어서 갚노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치의 성인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서울대 박 모 교수는 최근 미국에서 그 분야의 최고 권위를 가지고 치료하던 전문의를 만나서 치료받고 6개월만에 완치했다고 합니다. 박 교수는 병원 입원비, 수술비, 약값 등 엄청난 비용을 이맛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병원 수납계에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퇴원하는 날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에게 정성어린 물질의 사례를 드렸고, 또 6개월 동안 자신의 병상을 드나들며 치료하고 간호해준 간호사들과 끼니때마다 식사를 날라주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정성껏 사례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이 아깝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이 다 새롭고 가진 것을 주고 싶은 흥분과 감격으로 귀가했다고 그의 병상일기에서 적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 갈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니다.
오늘 본문의 값비싼 향유는 단순한 물량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드린 것은 그것보다 몇 천만 배 더 값비싼 사랑과 축복과 은혜를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헌신은 '저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깨달은 자'의 헌신입니다. /믿/
③순전한 나드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나드향은 인도에서만 나오는 최고급 향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드에 다른 것을 배합하면 본래의 향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향수로 유명한 것은 블란서의 샤넬 향수가 단연 최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샤넬 향수지만 No.5와 No.9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을 한데 섞어 놓으면 전혀 다른 매력 없는 향이 된다고 향수전문가가 말합니다.
마리아가 드렸던 향유는 순전한 '나드 향'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순전한 사랑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헬'어의 '순전한'이란 말은 '믿을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전이란 말은 믿음이란 말과 동의어로 해석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제 아무리 큰일을 하고 큰 봉사를 해도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하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할/
이번 신학 세미나에서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자기 교회 모 집사님은 새벽기도, 주일 낮 예배, 저녁 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구역예배뿐만 아니라 십일조, 절기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특별 헌금도 앞장서 냈습니다. 그런데 장로 투표에서 그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도와주지 않아서 떨어졌다면서 본전도 못 찾았다고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투덜대다가 어느 날 바람처럼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순전한 '나드 향'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에 감격도, 천국에 가치도 깨닫지 못한 불쌍한 영혼입니다. 우리가 정말 깨달아야 할 것은 천국의 가치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본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 가는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믿/
여러분,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이름 석 자가 저 천국 하나님의 나라 생명 록에 새겨져 있고,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소속이 하늘나라 시민권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천국의 소중한 가치를 바로 알 때 우리가 가진 가장 값비싼 나드 향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려고 그 고난과 수모를 당하시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믿/ 그러므로 정성을 다해 믿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드려야 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④향유를 깨뜨렸습니다.
3절'하'반절에 보면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깨뜨린 옥합은 이집트의 '알라바스트론' 지방에 있는 산에서만 나오는 돌로 만든 것으로 주로 향유 병을 만드는데 그 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병도 비싼 병이고 향유도 비싼 순전한 것인데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왜 그냥 선물로 쇼핑백 같은 것에 담아드리지 않고 깨뜨렸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⑴그것은 자신을 깨뜨려 드리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⑵너무나 고가의 향유이기 때문에 깨뜨리지 않으면 항상 그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지닌 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⑶주님의 죽음의 장사를 위해 미리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머리에 기름을 붓는 몇 가지의 관습이 있습니다.
⑴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의 머리 위에 향유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관습이 있고, ⑵왕이 즉위할 때, ⑶제사장의 성별의식을 위해, ⑷선지자를 세울 때, ⑸장례식 때 시신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물쭈물하면 마음이 변할지 모르므로 순식간에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오래오래 두고두고 생각하면 마음이 변합니다.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십시오! 신앙에는 결심과 결단이 절대 필요합니다. 봉사하는 일도, 기도하는 일도, 전도하는 일도, 헌금하는 일도, 주일 성수하는 일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합니까? 깨뜨려서 드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오만가지 것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옥합을 깨뜨리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훗날 깨뜨린다고 상담하고 약속만 합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죄 사함의 은혜를 아는 자요, 구원의 감격을 가진 자요, 천국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그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받쳤더니 주님이 이 여인을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여기 '여자가 행한 일'이란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부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으로 이 여인은 온 천하에 향수를 뿌린 여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기념될 만한 말'이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이 말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이 한 이 말도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이 한 말도 우리나라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 치고 이 말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
이같이 온 천하를 휩쓸고 있는 '기념비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 천하에 알려진 '기념비적인 행동'도 있습니다. ▶손 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행동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재구 소령 이야기도 다 알고 있습니다. 훈련병들이 수류탄 훈련을 하다가 수류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엎어져 그 수류탄을 끼어 안았습니다. 그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혼자 죽었습니다. 육사 교정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습니다.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리아의 헌신은 '온 세상이 기념'할만한 그런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여인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이 함께 전파되어 이 여인의 믿음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성찬식도 주님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눅22장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 몸이라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피니라 받아 마시라 그리고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찬식의 목적은 '예수님을 기념'하는데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성찬은 몇 가지 정신이 있습니다.
①성찬식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념하라. 이를 행하라'는 말씀은 '떡을 들고 잔을 마실 때마다 나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를 따라 성찬 상을 베풀고 떡과 잔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그 고통을 기념하는 것은 나 때문에 죽으셨고 나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②성찬을 땔 때 중요한 것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고전11:27-29).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이 말씀을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먹는 것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고, '벵겔'은 '자기 성찰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고, '앨 포드'는 '주의 죽으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믿음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 성찬식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만찬이나 회식이 아닙니다. 자기를 살피고 주를 생각하며 먹고 마시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자기를 살피고'라는 말씀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다듬고'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9절의 '주의 몸을 분변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희생과 그 고통을 깊이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④마라아의 헌신은 어떤 헌신인가? 우리가 바로 배워야 합니다.
⑴능동적인 헌신입니다. 그 누구도 마리아에게 헌신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마리아의 헌신을 비방했습니다. 마리아는 능동적으로 자원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⑵최선을 다하는 헌신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를 '임산부가 애를 낳을 때 쓰는 힘'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⑶비방을 이긴 헌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헐뜯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시험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가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⑷이미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는 헌신입니다. 오라비가 죽은 지 4일이나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마리아는 미래에 어떤 축복이나 은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 지난날에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은 어떤 조건을 내건 헌신이 아니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하는 순수한 헌신입니다.

 

2. 구경꾼들의 반응을 보자!

 

①집 주인 시몬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는 문둥이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문둥병자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격리되어 있어야 하고, 예배에도 참석을 못합니다. 집주인 시몬은 그런 문둥병에서 예수님께 치유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자기 집에 손님이 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환영합니다. ▶평안을 기원하며 입을 맞춥니다. ▶발을 씻겨 주거나 발 씻을 물을 줍니다. ▶향을 피우거나, 향을 머리에 부어 발라 줍니다. 그런데 이 시몬은 예수님이 오실 때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중에 그 어떤 한 가지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똑같은 배경의 눅7:44-46절에 보면 그 당시 예수님이 집주인 시몬을 책망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런 사람은 천국의 가치를 모르는 불쌍한 영혼입니다. 믿음을 형식과 의식으로만 채워져 있는 사람입니다.
②제자들과 가롯유다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을 내었습니다. 화를 내었습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라고 말하며 분을 내었습니다. ▶책망했습니다. 비난했습니다. 나무랐습니다. 4절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요12:4를 보면 가롯유다가 나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롯유다의 논리는 그럴 듯하고 교양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일이지 왜 낭비하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롯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죄에 빠져서는 아니 됩니다. ▶그럼 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
⑴다른 사람의 의로운 일을 시비하고 나셨습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고 시비하는 사람은 자기 할 일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이 하는 좋은 일을 질투하는 사람은 그 질투심 때문에 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⑵영적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롯유다의 발상은 지옥 갈 사람을 건져내는 교회의 선교를 '왜 돈을 쓰느냐? 우리 교회도 어렵지 않느냐?'와 같습니다. 여러분 지옥 갈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데 필요한 돈이라면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물질입니다. 우리 모두 선교 비를 드립시다.
지금 세계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사들이는 마약 때문에 썩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서 빨리 구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롯유다같은 발상이나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⑶동기가 불순했습니다. 요12: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리아는 순전한 마음으로 나드향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가롯유다는 불순한 마음으로 향유를 헌금화하여 구제하자고 불평했습니다. 문제는 그토록 구제 열이 불타고 이론이 정연했던 가롯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은30에 눈이 어두워 스승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결국 그는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의 논리대로라면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낭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마리아의 낭비 때문에 그의 신앙을 본받은 무리가 많고 또 세상에는 그런 낭비 때문에 어둠이 걷히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낭비 자들은 동양에서도 있었고, 서양에서도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인도의 '무저항주의'를 부르짖은 '간디'였다고 봅니다. 그는 영국에서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자기만 원한다면 많은 재산을 모으고 법률가로서 일등 국민의 특권과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안일과 행복한 생활을 집어 던지고 냄새나고 문화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조국 인도로 돌아가 인생을 무명옷을 입고 굶으며 옥중에서 온갖 고초와 학대를 받으면서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동족의 흉탄에 맞아 자신의 인생을 무참히 허비하고 낭비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바보가 독일에서도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다름 아닌 히틀러의 나찌 정권과 항거하여 싸우다 순교한 '본회퍼' 목사님입니다.
그는 40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노총각으로 약혼만 해 놓고 옥중에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 1945년 나치에 의해 사형 대에 올랐습니다. 만일 '본회퍼'가 당시 다른 지성인들이나 성직자들처럼 진실이나 정의를 말하지 않고 나치에 아부하고 협력만 했다면 그렇게 고생하고 처참하게 사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는 이런 사람들 손에서 움직여지고 있고, 세워지고 빛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사람들의 삶을 낭비했다고 하겠습니까?
▶미국 뉴욕 항 앞 '리버티' 섬에는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이 오른손에는 횃불을 들고, 왼손에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들고 서있습니다. 이는 '자유는 세계를 비춘다.'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 여인상은 프랑스 국민이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선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F. A. 바르톨디'라는 조각가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여신상을 무려 20년 에 걸려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조각상의 제작을 요청 받은 '바르톨디'는 '자유'라는 이미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 헤매는데 엄청난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델 감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많은 영웅들을 사진들도 모조리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다.'라고 부딪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몹시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그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모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여신상 모델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가장 훌륭한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옥합을 깬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곁에 게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멀리 있는 가난한 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⑴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26:10절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여자가 한 일을 '아주 좋은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십자가를 향하여! 예배의 중심은 십자가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쓰고 남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힘을 다해 준비한 향유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위해 미리 부어 드렸습니다. 유대인은 장사 때 시체에 기름을 바르곤 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위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비한 것으로 칭찬하였습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폐품을 모아 팔아서 성전 건축 헌금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폐품을 모아 팔았는데 상당한 액수의 헌금이 모아져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날밤 집사님의 꿈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안내로 예수님 계신 천국을 찾았는데 온갖 폐품으로 지어진 거지같은 집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천국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으로 알았는데 이런 거지 집이 천국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천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정성으로 지은 천국의 집은 폐품으로 지은 집이니라'고 할 때, 창피하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꿈을 깼답니다. 집사님은 잠자리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값비싼 보화는 장롱 속에 두고 폐품을 모아 바친 인색한 마음을 회개하고 새롭게 믿음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긴 물질과 금은보화를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황금보석의 집을 쳐다 볼 수가 없겠구나!' 생각하고 드렸답니다. 물론 예화입니다만 주님은 정성을 다해 최선의 것을 드릴 때, 아벨의 산 제사처럼 받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⑵가롯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한마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으로 일축해 버렸습니다. 길을 가는데 사람이 '여보세요' 부르면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말상대를 해주어야 합니다만 개가 짖는다면 그냥 가던 길을 가야합니다. 개가 짖는데 돌아서서 '개님 왜 짖습니까? 소원이 무엇입니까?' 개소리를 듣고 너스레를 떨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가난한 자들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세상에는 일할 사람도 많고 구제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사람입니다.
▶2천년 교회사는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 여자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눈에 띄게 헌신한 남자들도 많지만, 남몰래 헌신한 여자들은 더욱 많습니다. 이들의 눈물어린 헌신과 아낌없는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존재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런 행동을 비난한 사람들이 주위에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합을 깨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이 시간 옥합을 깨뜨립시다. 옥합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옥합을 깨어 드리면 우리 주님이 지금도 '저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칭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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