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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전2:1-26)

by 【고동엽】 2022. 2. 6.

인생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전2:1-26)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뛰어난 명작이라고 하는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스탠버그의 십자가'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그림도 유명하지만 그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에 있었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스탠버그'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성 베드로성당 '위고' 신부의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당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조심스럽게 그려가다가 그만 중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림 값이 너무 싸게 흥정되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림 값을 다시 흥정할 생각으로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집시의 여인 '페피타'를 모델로 세속적인 나체화를 그렸습니다.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느 날 그림을 그리다가 잠깐 쉬게 되었는데 이 여자 모델이 초안만 만들어놓고 완성하지 않은 십자가의 그림을 보면서 "저 그림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이군요." "그렇습니다." "무슨 사연입니까?" 교회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한 집시여인의 질문입니다. 좀 귀찮지만 설명을 안 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성경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죄도 허물도 없으신 분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못박여 물 한 방울, 피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설명하는데, 이 '페피타'는 그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냥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슬퍼합니다. 너무너무 슬퍼하니까 화가인 스탠버그는 그 우는 집시여인을 위로할 마음으로 "울지 마세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셨으니까 울지 마세요." 그랬더니 눈을 번뜩 뜨면서 "정말로 부활 하셨습니까?" 이 여인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지고 기쁜 낯으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스탠버그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이 여인에게 예수는 만백성을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셨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은 저렇게 밝은 생명력을 얻는데 내가 정말 예수의 부활을 믿고 있느냐? 정말 내가 부활했다고 말했는데 내가 정말 믿는 것인가?' 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다시 부활신앙을 부활시켰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을 그리면서 돈 적게 준다고 흥정을 하고 있어? 이 나쁜 놈아' 자기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나서 회개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그 그림이 '스탠버그의 십자가'입니다. 이 그림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기독교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의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 모독죄'(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와 '성전 모독죄'(46년에 걸려 건축한 성전을 헐면 3일 만에 짓겠다고 한 것) '로마정부에 대한 반역죄'(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것) 때문에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 못 박혀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장사되었다가 제3일 이른 새벽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할/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아멘!/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부활절이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부활절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오히려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인도의 능수해안에 그 무덤이 있습니다. 유교의 공자도 죽어서 중국 창평향(지금의 산둥성)에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도 죽어서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무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종교는 샤머니즘이 5천년, 불교가 천년, 유교가 500년 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했습니다. 기독교는 1885년에 이 땅에 들어와서 120년밖에 안 되었는데 1천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기독교를 연구해 보니 기독교에는 여름성경학교가 있어서 성경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교회가 확장되는 것을 보고, 약 20년 전부터 여름불교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또 찬송가가 있는 것을 보고 모방하여 찬불가를 만들었습니다. 교회에 찬양대가 있는 것을 보고 합창대를 만들었고, 전도하는 것을 보고 도시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본래 사찰은 깊은 산 속에 있고 사람들이 찾아가는 종교인데, 이제는 도시에 내려와서 포교를 합니다. 여름 수련회, 겨울 수련회도 모두 그대로 모방하고 있지만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부활절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무덤이 없습니다. 모든 종교, 종파들이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는 있어도 부활절 절기는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부활절 예배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신앙이 있기에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고전15:55-57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할/
예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능력'입니다. 여러분,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벌벌 떱니다. 아무리 돈이 귀중해도 강도가 '너 죽여!' 하면 '다 가져가'라고 합니다. '명예, 권세, 인기'가 아무리 귀해도 '너 죽여!' 하면 '나, 포기할게' 벌벌 떨고 다 포기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첫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 승리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으면서도 고백이 다릅니다. 미국의 'D. L. 무디' 목사는 죽을 때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간다.'고 하면서 평안하게 눈을 감았고, 영국의 종교 개혁자 '존 녹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라. 그러면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할/
여러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천국을 얻은 자요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삶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 안에 있으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 그러므로 세상에서 부귀영화 때문에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믿음생활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저는 부귀영화를 한 몸에 받고 살았던 솔로몬의 고백을 보면서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진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솔로몬의 전도서를 통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제목소개!▶

 

'벨기에'의 작가 '메테를링크'라는 사람이 쓴 동화 '파랑새'에 보면, 두 어린아이가 꿈속에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파랑새를 찾아서 먼길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일러주는 대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파랑새를 찾았습니다. 부지런히 파랑새를 찾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원하던 파랑새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두 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자기들이 새장에 기르고 있던 산비둘기의 깃털이 그날 따라 유난히도 파랗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동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멀리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본문에서 일깨워주는 바가 바로 이 점입니다. 솔로몬은 행복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행복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모든 곳을 두루 다니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1. 솔로몬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쾌락이라는 나라입니다(1-11).

 

그 나라에는 값비싼 술도 있었고, 웅장한 저택도 있었고, 멋진 정원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노래하는 남녀들도 있었고, 아름다운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솔로몬은 자기가 찾던 파랑새를 거기에서 찾은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날아다니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고 보니까 파랑새가 아니었습니다. 엉뚱한 색깔의 새였습니다. 솔로몬은 쾌락 속에서 인생의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솔로몬이 시험적으로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쾌락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인생의 참된 의미, 인생의 참된 만족을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쾌락의 나라에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무엇입니까?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육신의 쾌락 속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쾌락의 나라에서 쾌락을 누리면서 웃고 떠들고 희희낙락하던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2절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지내고 보니까 그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미친 짓거리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는 유익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추구했던 쾌락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해주었습니다.

3절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솔로몬이 쾌락에 몸을 담았지만 쾌락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쾌락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보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쾌락에 몸을 던졌지만 정신만큼은 잃지 않았습니다. 지혜로 마음을 다스려가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목적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쾌락의 나라를 탐구한 것입니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술을 마셔보았습니다. 취해보았습니다. 제정신 가지고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일들을 술 취한 김에, 술의 힘을 빌려서 해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이 쾌락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천하 인생의 중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짧은 인생 길을 가면서 과연 어떠한 것이 진정한 낙을 누릴 수 있는 길인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로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참된 만족을 술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음에 취하여서' 세상 쾌락주의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그 어리석은 행동을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쾌락으로 치우치는 것이 왜 어리석은 짓인가? 그로 인해 하나님이 멀어지고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고, 심적 고통이 오며, 믿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①솔로몬이 세상 쾌락을 누려 보려고 육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 보았습니다.
4절부터 8절까지 보면 10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⑴"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솔로몬은 왕입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업을 크게 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사업을 크게 했습니까?
⑵"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서, 육신을 위해서 좋은 위치에다가 백향목으로 거대한 궁궐을 짓고 아름답게 구며 놓고 즐거움을 누려보려고 했습니다.
왕상7:1절에 보면 솔로몬이 자기 왕궁을 완성하는 데 무려 13년이 걸렸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데는 7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13년에 걸쳐 자기가 사는 집을 지었으니 그 집이 얼마나 웅장하고 호화스러웠겠습니까? 육신을 즐기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⑶"포도원을 심으며" 포도원을 만들고 좋은 포도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아가8:11) 그는 포도원을 경영하여 좋은 포도주도 먹어 보았습니다.
⑷"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멋진 정원을 여기저기에 만들어놓았습니다. 거기에다가 각종 과목을 심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게 꾸몄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각종 아름다운 과실을 보기도 하고 먹기도 해 보았습니다. 이것도 쾌락의 일종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⑸"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이스라엘 땅에는 이른 비와 늦은 비 두 번 내립니다. 그래서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서 여러 못들을 팠습니다. 그러니 그 사업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업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인력도 많이 동원되어야겠지요. 그 많은 인력을 어떻게 충당했습니까?(7)
⑹"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그 많은 인원을 먹이기 위해서 식량도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⑺"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엄청나게 많은 가축을 길렀습니다. 가축만 많았던 것이 아닙니다.
⑻"은 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습니다. 주변의 여러 왕들과 여러 도의 방백들이 보내온 보배들, 예컨대 상아, 모피, 값비싼 향료 등등이 금고에 가득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⑼"또 노래하는 남녀와" 가무단을 두어 노래와 춤을 보며 즐거워했습니다.
⑽"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소위 말하는 왕의 기쁨 조들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기쁨 조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처가 7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첩도 300명이라고 했습니다. 일천 명의 여자를 혼자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쾌락으로 따진다면 이 세상에 솔로몬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②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노력을 했습니다(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쾌락의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누려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10절 끝 부분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행복을 가꾸어서 기쁨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④그런데 솔로몬의 탄식이 무엇입니까?(11)
처음에는 쾌락의 나라 가운데서 자기가 바라던 파랑새를 찾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새를 찾고 보니 전혀 다른 색의 새였습니다. 파란색의 새가 아니었습니다. 엉뚱한 색이었습니다. 그것이 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⑤여러분, 솔로몬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겪은 이 실패를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만큼은 반복하지 마세요!'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행복을 육신의 쾌락 속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쾌락에 몸을 내맡기지 마세요. 행복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몸과 마음이 다 병들고 맙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 깊은 허무감만 남을 것입니다. /믿/
요4: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는 육신을 좇아 살지 말고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우리의 모든 행실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날마다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솔로몬이 두 번째 찾아갔던 나라는 지혜의 나라입니다(12-17)

 

과연 그곳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과연 내가 바라던 새를 잡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솔로몬은 그 새를 잡아 새장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서 그 새는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 헛수고를 하고 말았습니다.
12절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쾌락의 나라에서 솔로몬은 바라던 행복의 파랑새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방향을 바꿔 지혜의 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지혜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습니다.
지혜를 좀더 잘 깨닫기 위해서 지혜의 정반대가 되는 망령됨과 어리석음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지혜의 나라를 탐구했던지 그는 12절 하반부에서 이런 말로 자기가 지혜의 나라를 세밀하게 조사해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뿐이리라." 내 뒤에 누가 와서 이 지혜의 나라를 탐구한다 할지라도 내가 시도한 이상으로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지혜의 나라를 살펴보았습니다.
①솔로몬이 느낀 소감이 무엇입니까?(13)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빛이 어두움보다 확실히 나은 것처럼 지혜가 우매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14절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확실히 지혜가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14절 하반부를 보세요!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지혜자나 우매자나 결국에 가서는 그 당하는 일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②그것을 깨닫고 솔로몬은 마음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로운 나도 결국에 가서는 우매자가 당하는 일을 당하는데 무엇을 하려고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지혜를 더하려고 발버둥쳤던가?' 지내 놓고 보니까 다 헛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③그러면 지혜자와 우매자가 똑같이 당하는 일이 무엇입니까?(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우매자는 죽습니다. 그러면 지혜자는 영원히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자도 똑같이 결국에는 죽습니다. 죽고 나면 지혜자나 우매자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다 사라지고 맙니다. /안 그렇습니까?/
④솔로몬은 지혜의 나라에서도 원하던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지혜의 나라를 떠나면서 솔로몬은 결론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달리 지혜를 가진 솔로몬 임금이 내린 결론입니다.
⑤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것이 못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난 것과 같이 공부 잘하면 그만큼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학업성적이 우리 자녀들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못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전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란 영화도 나왔습니다.
공부가 소중합니다. 그러나 공부 자체가 행복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집 팔아 족집게 과외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행복을 살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솔로몬이 인생의 허무주의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바로 살라는 권면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 제일주의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믿/
공부가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을 자녀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가 후회하지 않는 삶, 실패하지 않는 삶,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로 솔로몬은 재물의 나라를 찾아갔습니다(18-23).

 

그곳은 모든 것이 풍요로웠습니다.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풍성한 물질의 나라 그 어디에서도 행복의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아주 소중한 진리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바로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마음에 즐거움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행복이더라는 것입니다.
18절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사람이 해 아래서 땀흘리고 수고해서 많은 재물을 쌓은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남은 사람들에게 남기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속담 가운데 이런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왜 그렇습니까?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더 기가 막힌 일이 있습니다. 19절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남긴 재물을 지혜로운 사람이 맡아서 관리하면 다행이지만, 그러나 후손이 어리석어서 내가 남겨놓은 재물을 다 탕진해버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상합니까?
솔로몬 사후에 이렇게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친 솔로몬만큼 똑똑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라가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를 빼앗겼습니다. 겨우 두 지파만 가지고 명맥을 유지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죽을 때 르호보암의 나이가 41세였습니다. 르호보암이 41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자기 아들 르호보암의 인물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다 예견이나 한 듯이 솔로몬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자기가 쌓아올린 업적이 아들 대에 가서 다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21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버는 사람이 따로 있고, 쓰는 사람이 따로 있더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22절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자기가 누리지도 못하고, 자기가 벌어놓고도 갈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하고,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어리석으면 그대로 다 탕진해버릴 것인데 수고해서 모아놓은들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남는 것이라고는 23절의 말씀대로 입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수고하며 재물을 모아놓았다 해도 남는 것은 슬픔과 근심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낮에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물 때문에 밤낮 쉬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고생해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돌아갈 때는 남김없이, 깨끗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반납해야 합니다. 하나라도 가지고 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맡기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셈해야 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얼마를 맡기셨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서 수고해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쌓아놓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맡았든 적게 맡았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그것을 누리면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값있게 하나님의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솔로몬이 깨달은 행복은 무엇인가?(24-26)

 

솔로몬은 행복을 찾기 위해 쾌락의 문을 두드리고 지혜의 문도 두드렸습니다. 재물의 문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어디에서도 원하던 행복을 찾지 못하고 원점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아주 소중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24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은 사람의 일상생활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솔로몬은 엉뚱한 곳을 돌아다니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최고의 삶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면 그것이 최고의 삶이요,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깨닫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 마음에 낙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심령의 낙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솔로몬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믿/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몸도 창조하셨지만 마음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께서 낙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면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은 평강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다고 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령의 낙을 주실 때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우리 마음속에 깊은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합3:17-18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마음에 심령의 낙을 주시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사업을 크게 한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니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해 아래서의 수고로 인생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솔로몬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25절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이 세상에서 솔로몬보다 누가 더 잘 먹고 잘 살아보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쾌락 속에서도, 지혜 속에서도, 재물 속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랑하시는 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에게는 무엇을 주십니까? 지혜도 주시고, 지식도 주시고, 희락도 주시고, 심령에 낙도 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인에게는 무엇을 주십니까? 노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죄인은 아무리 수고해서 재물을 쌓아놓아도 낙을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또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땀흘려 이 땅에서 수고해서 재물을 많이 쌓아놓았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수고해서 쌓아놓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다 주십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땀흘리고 물질을 모으고 아등바등하면서 재물을 쌓아놓은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쾌락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뛰어난 인간의 지혜와 지식도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물질도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나그네와 같은 짧은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령이 낙을 주실 때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할/

 

5.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부활 신앙'을 믿는데서 옵니다(요11: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마르다를 찾아오셔서 그를 위로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마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27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이 고백이 위대합니다. '나의 부활이요, 나의 생명이신 분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내가 확실히 믿나이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르다의 이 고백을 통해 그 집에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죽은 나사로를 다시금 살려주셨습니다. /할/
①부활에는 두 가지 부활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요5:28-29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를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고 마귀의 종노릇하던 사람들은 심판을 받은 후 지옥의 고통을 당하게 되는 심판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20:6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생명의 부활을 가리켜 '첫째 부활'이라고 말씀하면서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고전15:51-54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살전4:16-17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님께서 강림하시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믿고 구원받고 죽은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여 주님을 만나게 되고, 살아있는 사람들도 변화되어 공중에 올라가 주님을 만나게 되며, 그 시각 이후로부터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②예수의 부활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⑴제자들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낙심하고 두려움에 차 도망갔던 제자들이 사흘 후에 완전히 변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후 두려움이 는 곳마다 부활을 증거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했습니다. 제자들은 대부분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계속 전하다가 순교들을 했습니다.
⑵교회가 탄생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2천년 동안 교회라는 새로운 세계적 공동체를 만들었다.
⑶예배 날이 바뀌었습니다. 토요일에 드리던 예배가 부활하신 날, 안식 후 첫날로 바뀌어 오늘까지도 부활을 축하하며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⑷할례대신 성례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성례전이 제대로 치러져야 합니다. 즉 성찬과 세례식입니다. 그런데 성찬과 세례는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성찬은 죽음, 세례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부활을 상징합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으로 이기고 승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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