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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의 기적! (요 5:1-18)

by 【고동엽】 2022. 2. 6.

베데스다의 기적! (요 5:1-18)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7번의 기적사건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은 그 세 번째 사건으로 예루살렘의 베데스다의 연못의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는 이적사건입니다. ◀제목소개!▶

 

기적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성도는 기적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데스다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오래 전에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잔잔하던 연못물이 끊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우연히 연못 곁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이상히 여겨 물에 손을 넣어 보았더니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오던 지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 소문이 입술 따라, 바람 따라 온 동네에 파다하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각종 병을 앓는 사람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이 연못가로 모여들었습니다.
당국에서는 환자들을 위해 그곳에 행각 다섯을 지어 주었는데 그 행각 밑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물에 동함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뜻하지 않은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연못물을 동하게 할 때, 맨 먼저 연못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만이 어떠한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고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병자들은 물의 동함을 학수고대하며 밤낮으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무려 38년이나 병든 환자가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38년을 병을 앓았다면 전 인생의 3분의 2를 병상에서 보낸 것입니다.
이 사람도 들 것에 누워 연못가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수없이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물이 동할 때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재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이 사람이 들어간 때는 항상 물이 동함이 끝나버릴 때였습니다. 이 사람은 누가 간호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육신의 질고로 자신의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아주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을 허송하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큰 기대를 가지고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신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무능한 인간은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능한 인간, 죄인을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시고 복을 주시는 종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있는 사람, 친척이나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하고 도와주어도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 주님이 찾아 오셔야 하고, 우리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예수님 만나는 자리입니다. /할/
때문에 베데스다 기적의 첫 번째 비결은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복음서 여러 곳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이 찾아오시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 혼인집에 오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시작으로 가시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치의 나병환자를 만나면 그가 치유 받는 기적이 일어났고,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 소경된 사람,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오늘 이 자리가 기적의 베데스다가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본문에 예수님은 침상에 드러누워 있는 병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이 물음이 궁극적이요 본질적인 물음이었습니다. "네가 물 속에 들어가기를 원하느냐?"가 아닙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모든 절차와 단계를 무시하고 바로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병자는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제가 들어 갈 때는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물 속에 들어가 버림으로 물의 동함이 그쳐버리고 맙니다." 이때 주님은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권세가 있고, 위엄이 있고, 만물을 소생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주어지자마자 그의 머리 끝 에서부터 발끝까지 화로 불을 담은 듯이 화끈거리는 전기가 닿는 것처럼 짜릿하더니 38년 동안 괴롭히던 그의 병마가 일시에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할/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걸어갔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가 능력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시골길을 가다가 큰 고목 나무가 있어서 잠시 쉬는데 한 여인이 그 나무 밑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빌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무엇을 비느냐"고 물으니 "병든 아들을 고쳐 달라"고 빌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 나무가 왜 속이 이렇게 썩은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늙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아니라고 이 나무가 이렇게 속이 썩은 것은 자기가 복을 줄 수도 없는데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자꾸만 와서 복을 달라고 하니 답답해서 이렇게 속이 썩었다"고 말하고 여인에게 오늘 본문을 소개하면서 전도해서 기적이 주인공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할/

 

1. 베데스다에 대하여 알아보자!

 

베데스다의 못은 간헐천으로 샘물이 좍 솟아 나오다가는 뚝 끊어지고 또 갑자기 좍 솟아 나오다가는 또 끊어집니다. 그 때 물이 막 뒤집힙니다. 그것을 보고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뒤집어 놓는 것으로 알고 전설대로 맨 먼저 뛰어드는 사람은 누구든지 또 무슨 병에 걸렸는지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병자들이 다 모여든 것입니다. 사실은 천사가 내려와 그런 것도 아니고 또 병에 걸렸던 사람이 나았는지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 있는데 양쪽에 두 개의 문이 있는 양문이 아니고, 가축의 양의 문입니다. 지금은 그 문을 '스데반의 문'이라고 한답니다.
양의 문이라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에 제물을 드릴 속죄양들을 이 문을 통하여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연못이 남아 있으며 그곳에 기념 교회가 세워졌고, 스데반의 문 위쪽에는 지금도 양을 사고 파는 장터가 있다고 합니다.
베데스다의 연못에서 주님이 사랑의 기적을 베푸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연못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 속죄의 제물로 죽어갈 양들이 그 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당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을 치러야 할 양들이 그 문을 통과하는 모습은 누구를 상징한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1:29절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2. 당시 유대 땅은 명절을 맞이했습니다(1).

 

우리도 지난주간에 추석 명절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나라의 고유 명절이 크게 다섯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있고,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감을 기념하는 장막절이 있고, 보리추수를 한 다음 지키는 오순절이 있으며, 페르시아 왕후였던 이스라엘 사람 에스더의 지혜로 총리 하만의 모략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절기인 부림절이 있었고, 성전을 깨끗케 정비하고 지키는 수전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큰 명절은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입니다. 이때에는 예루살렘에서 80리 이내에 있는 모든 성인 남녀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명절을 지키는 것이 법적으로 되어있습니다. ▶본문의 명절은 많은 학자들이 4월에 열리는 유월절이 아니면 3월의 부림절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온 이스라엘이 들떠있는 축제 분위기로 고조되어 있습니다. 이 유월절에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곳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불쌍한 병자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가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참 목자이시며 사랑의 목회자이십니다. 잘 사는 사람, 돈 많고 대접 잘 해줄 사람을 찾아가신 게 아니라 돈 없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세상 축제로 분위기가 들떠 있는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육체의 질병으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고통의 현장 속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3. 베데스다의 환자들을 보면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정검해 보아야 합니다(3).

 

여기 대표적으로 세 종류의 병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소경입니다.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이 땅 위에 있는 우리들은 영적으로 다 소경입니다. 소아시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처럼 실제 보아야 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소경입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서 신령한 눈이 열려서 볼 것을 보라고 경고합니다(계3:18).
둘째, 절뚝발이입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실존이 그러합니다. 영적인 사역에 절뚝발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잡아주어야 하고 곁에서 부축을 해야 겨우 걷습니다. 꼭 전화를 해야 하고, 심방을 받아야 하고, 권하고 타일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뿌리를 깊이 내려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골2:7).
셋째, 혈기 마른 자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갖출 것을 제대로 다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차에 마치 기름이 떨어진 것처럼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 피를 우리가 수혈 받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 분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때 그곳에 가신 우리 주님은 지금도 헐벗고 굶주리며 온갖 문제와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는 인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늘도 인생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4. 거기 38년 된 병자를 조명해 보자!(5).

여러분, 38년 동안 병든 사람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랜 병에는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많은 투병 속에 그의 부모도 손을 들었고, 형제도 손을 들었습니다. 38년 동안 얼마나 많은 약을 써 보았고, 수없이 많은 의사를 찾아 돈을 탕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환자는 부모형제도 이제 지쳐 외면한 상태요, 가진 것을 다 잃은 빈털터리 인생입니다.

▶이 병자가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요 이 병자에게서 현대인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⑴현대인들은 여러 가지(영,육) 면에서 아파하고 있습니다.
⑵현대인의 두 번째 특징은 고독입니다.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이덱거'는 현대인을 표현할 때 '고장 난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이' 같다고 했습니다. 또 '망망대해에 홀로 둥둥 떠 있는 사람처럼 고독하다'고 했습니다. 누가 언제 구조하러 올지 망막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입니다. 38년 된 병자 옆에는 집안 식구도 한 명도 없었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습니다. 고독합니다. 아무도 그를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이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⑶살기가 힘이 듭니다. 38년 된 병자는 혼자서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가려고 애를 써봅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습니다. 지친 몸, 어쩌면 깡말라 해골처럼 된 몸을 움직여 보지만 마음뿐이지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양보해 주는 사람은 상상도 못 합니다.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만 들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부러워 보이는 대통령도 힘든 자리인 모양입니다. 노 대통령도 대통령 못 해먹겠다고 얼마나 하소연했습니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대통령직은 내 두 손에 코끼리 한 마리를 올려놓은 것과 같이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다."고 했고, '닉슨' 대통령은 "대통령 자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외로운 자리다"고 했고, 1980년 11월 4일 레이건 후보와 대결에서 낙선에게 쓴잔을 마신 카터는 '다시 대통령에 도전하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꿈도 꾸지 않는 질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으로부터 말단 국민까지 모두가 힘들어합니다. 쉬운 일이 없습니다. 남녀노소가 모두 자기 문제와 씨름하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⑷온통 절망뿐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어디를 보아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것을 다 잃었고 사랑하는 이들도 다 떠났습니다. 모두를 포기한 상태입니다. "나를 넣어 줄 사람이 없나이다."라는 말은 차라리 체념이요,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절망 중에 한숨입니다. 요즘 절망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업 때문에, 직장 때문에, 질병 때문에, 자녀 때문에 온통 한숨소리가 큽니다.
⑸온통 없는 것 투성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건강이 없었습니다. ▶돈이 없었습니다. 병 치료에 모두를 탕진했습니다. ▶사람도 없었습니다. 현대도 모든 것이 풍성한 것 같은데 나에게는 없는 것 투성이라고 고함치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함께 살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여자가 '이런 남자하고도 살아야 하나요?'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놓았습니다. 부부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주유하려고 휴게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아내는 화장실에 갔습니다. 남자는 기름을 넣고는 달렸습니다. 한 시간쯤 달리다 보니 아내가 없었습니다. 다시 오니 두 시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남자와도 살아야 하나요?'라고 물은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회사는 회사를 일으킬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부흥시킬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아픈 사람들은 아픔을 같이 나눌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꿈이 있고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38년 된 병자는 한마디로 버림받고 잊혀 진 존재였습니다. 부모형제, 이웃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잊혀 진 존재입니다. 그를 위해 한 사람도 관심을 갖지 않으므로 물이 동할 때 연못에 넣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 자리에서 서서히 죽어야할 비참한 신세였습니다.
▶이런 비참한 인간에게 예수님은 오셔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어떤 환경, 어떤 처지, 어떤 조건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를 만나면 살 길이 열리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
▶38이란 숫자는 유대인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숫자입니다. 우리나라 일제 36년이란 잊을 수 없는 숫자입니다. ▶신2:14절 "가데스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 걸렸는데 그들은 가데스바네아를 중심으로 광야를 38년이나 방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38이란 숫자는 광야의 고생스러웠던 기간을 상기시킵니다. 이렇게 고통 받는 38년 된 환자에게 예수님은 오신 것입니다.

 

5.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동사를 주목해 봐야합니다. 그것은 '보시고와 아시고'입니다. 예수께서 그 병자가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고생하고 고통스러워했는지 보시고 아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히4:12절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감찰한다는 말은 '살핀다.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생각은 모릅니다. 부부라도 속생각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십니다. ▶마9:4절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현대과학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보를 캐기 위해 하늘을 비행하는 정찰기가 하늘에서 지상의 물체를 촬영하는데 지상에 있는 신문지의 한자까지 촬영을 한다고 하니 얼마나 놀랍고 무서운 일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투시경으로 위 속에 있는 병을 관찰한다고 하니 이만하면 인간의 관찰 능력도 엄청난 것입니다. 미래학자나 우주과학자들의 얘기로는 2010년대가 되면 우주 중계국을 통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을 안방에서 TV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과학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그 사람의 생각과 뜻은 감찰하지 못하고 캐내기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판단하십니다. 이것이 옳다, 이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을 해 주십니다. 그래서 히4:13절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난다'는 뜻은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세 가지가 불가능합니다.
①도피가 불가능합니다. 구약의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여 다시스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도피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바다가 요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요나에게는 바다 물결이 하나님의 손이었고, 발이었습니다.
②은폐가 불가능합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요나가 자기를 숨기기 위해 배 밑창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공들을 시켜서 요나를 찾아냈습니다.
③저항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해야 하고, 하라고 하면 하는 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체질까지도 아십니다. ▶시103:14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부모는 자식의 체질을 대강 알고, 아내는 남편의 체질을 압니다. 좋아하는 음식, 취미, 건강 여부 등을 대강 압니다만 완벽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더 나를 자세하게 알 사람은 없습니다. 의사보다, 가족보다, 하나님이 나의 체질을 더 잘 아십니다. 오늘 38년 된 병자의 체질을 우리 주님이 보시고 치료해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오늘 여러분이 얼마나 간절한 기도로 준비된 사람인가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말씀을 읽고 듣고 사모하는 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고통 당하고 있는 고통, 질병, 물질 때문에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풀기 힘든 문제를 안고 얼마나 애쓰고 힘써 기도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계십니다. /믿/
그렇다면 우리의 결론은 나와 있습니다. 우리를 보시는 분, 우리를 잘 아시는 분, 그분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믿/ ▶잠16: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할/

 

6. '네가 낫고자 하느냐?(6)'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먼저 그 병자에게 소원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그 은혜를 사모하는 소원이 우리에게 있어야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 소원이 없으면 역사가 따르지 않습니다.
삼상20:4절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시20:4절 "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오늘 우리를 향하여서도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 육신의 병이 낫고자 하느냐? 너희 영혼의 병이 낫고자 하느냐? 너희 마음의 병이, 사업의 병이 낫고자 하느냐?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느냐?" 이 물음은 "네 마음의 소원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살펴보아도 여러 가지 달랐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은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고, ▶세베대의 어머니는 두 아들들의 출세를 원했고,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의 목을 소반에 담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지혜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원하겠는가? "주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나이다." /할/ 마7: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더 나아지고, 낫고자 하는 뜨거운 소원이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무관심하면 하나님도 무관심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관심을 갖느냐? 그 척도에 따라 하나님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믿/
쇠붙이가 자석에 끌리듯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뜨거운 소원에 끌리십니다. 오늘 베데스다 연못의 행각에 모인 사람들은 틀림없이 뜨겁게 불타는 소원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그 땅에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런 뜨거운 소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분명히 연못물이 끓어오르게 되어있습니다. /믿/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믿음이 끓어오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연못 속에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만나가 임하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기를 원하십니까?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임합니다.
고전12: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할/ 또 엡3:20절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소원하십시오, 하나님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을 탐내십시오. /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①네 상태를 알라! 병든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진단해 보고 내려 간 줄 아는 사람은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②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라 ③예수님께 소망을 두라 ④말씀 한마디면 낫을 줄 믿고 예수님만 바라보라! 이런 뜻으로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물으신 것입니다.

 

7. 오늘 이 자리가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도 실로암의 물가나 아니면, 갈릴리 호숫가에 있을 수도 있었는데 왜 그들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였을까요? 베데스다의 연못이란 뜻이 깊습니다. 은혜, 자비, 진정의 집으로 샘솟는 연못입니다.
▶이곳에서 재물을 드릴 양을 깨끗이 씻어서 양의 문을 통해서 성전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이 하나님께 재물로 드릴 양과 짐승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씻는 장소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은혜의 연못에 와서 깨끗이 씻어야 됨을 의미합니다.
씻지도 않고 더러운 그대로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자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치료를 받고자 원하는 자들은 먼저 제물을 씻는 베데스다 연못에 와서 자신의 영혼과 몸과 마음과 생활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 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은혜를 입은 베데스다 연못은 어디입니까?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예수님이 피 흘려 값없이 사신 하나님의 교회, 바로 이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할/
▶그 다음에 베데스다에 씻긴 양들은 하나님의 제물로 올라갑니다.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내가 살아있는 한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입니다. 죽어질 때, 살아나고, 나눠줌으로 넘쳐나고, 낮아질 때 높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죽어질 때, 하나님은 그때로부터 우리를 살리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가정을 살리시고, 사업장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할/
여러분, 예수 안에서 죽으십시오, 우리의 자아가 죽어지고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살리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일시에 자아가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서서히 조금씩 깨어지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깨어지고, 불순종하는 것이 깨어지고, 이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믿/

 

8. 오늘 이 자리가 '일어서는 자리'입니다(8-9).

 

주님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보십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떻게 보면 이 질문은 이상한 질문입니다. 환자가 병이 낫기를 바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어이없게도 주님은 "낫고자 하느냐?"묻고 계십니다.
또 환자의 대답도 동문서답입니다. "네 낫고 싶습니다. 한번만 걸어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상일진데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내려가나이다." 넣어줄 사람이 없음을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넣어주겠다"는 말씀대신에 일어나라고 명하십니다.
8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는 환자에게 지금 당장 일어나라는 말은 잘못 이해하면 조롱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섰습니다. /믿/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정말 놀라운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적어도 38년 동안이나 한 번도 일어나 걸어보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라고 할 때, 과연 믿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은 주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고 일어났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이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만나자 마자 완전히 믿었습니다. 믿는 자가 기적을 봅니다. 믿는 자만이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명령을 보십시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명령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세 단락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일어나라!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라는 명령이지만 동시에 '범죄의 자리에서! 불 신앙의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일어나라!'
②네 자리를 들라! 과거를 청산하라는 의미입니다. 과거를 깨끗이 잊어 버려라, 세상과 단절하라, 그 단절이 없으면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그 과거로 인해 다시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③걸어가라! 이제 주님만 향하여 앞으로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3:12절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오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맞이했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믿고 순종했더니 치료받는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아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는 새 출발을 의미합니다. 이 명령은 창조주의 명령이요, 회복의 명령이요, 축복의 명령이요, 새롭게 하는 명령이요, 순종하기만 하면 자손만대에 복을 받는 명령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축복의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능하고 비참한 인생일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베데스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만나기만 하면 다시 일어 설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신비한 장소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장소가 있답니다. 용문산에 1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둘레를 돌고 있는 노인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왜 돌고 계시냐고 물었더니 “이 나무 주변을 세 바퀴 돌면 죽을 때 고생 안 하고 산뜻하게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물이 흐르는 천이 있는데 그 곳에 동전을 하나 던지면 애인이 생기고 두 번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세 번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에는 동전들이 수북히 쌓여 있답니다.
이스라엘 통곡의 벽 속에 동굴이 있고 그 동굴 속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앞에서 기도하면 기도가 응답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장 기도하고 싶어하는 자리랍니다. 베데스다 연못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디로 베데스다 연못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무엇이 소망입니까?
⑴포기하지 않는 것이 소망입니다. 불치병에 걸렸을 때 고치기를 포기한 사람은 베데스다 연못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데스다 연못으로 나온 사람은 모두 소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⑵기적을 바라는 것이 소망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9. 유대인의 시비를 보자!(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38년 동안 병든 자가 일어서서 성전에 와서 자기들과 함께 예배에 참여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하고 이름을 더럽히고 주려 죽는 돼지 인생이 되어서 돌아 왔으나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시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안식일에 병자가 누워 있는 것은 괜찮으나 일어나 움직이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노동행위라고 생각하여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에 주인으로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24). 그 사람은 일어나서 그 자리를 들고 성전으로 갔습니다. 38년 만에 성전으로 들어가는 참된 예배의 감격을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할/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유대인의 안목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에 고쳐야 합니다./아멘!/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모세 오경 자체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10. 하나님도 일하시고, 주님도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세상을 운행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는 가정 하나 관리하는 데도 쩔쩔 맵니다. 대통령은 나라 관리에도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만일 지구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온 우주를 관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시고 예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한다'는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가?
⑴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
⑵전도야말로 예수님의 가장 큰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실 때에는 전도에 가장 큰 비중을 두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막1:38-39절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전도야말로 가장 큰 하나님의 일입니다.
⑶섬김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⑷변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⑸돈을 벌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초대교회 바나바가 그랬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어 초대 교회에 선교 헌금으로 모두 헌금하였습니다(행4;36). 루디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주 옷감장사를 하여서 돈을 많이 벌어 사도 바울을 도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가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같이 물질적으로 봉사하는 일을 할 일군이 교회에는 필요합니다. 그 일을 여러분들이 다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독교는 풍성한 생명을 얻는 종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모든 자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행3장에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셨고, 오늘 본문에 38년 된 자를 고치셨습니다. 자기 힘으로 높이뛰기를 하면 2m50cm를 뛰어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장대를 의지해 뛰면 4m50cm를 뛰어넘습니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어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을 의지할 때 불가능한일이 가능케 됩니다. /할/
오늘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십니다. 주의 능력을 믿고 온전히 맡기는 성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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