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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히 11:13-16)

by 【고동엽】 2022. 2. 6.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히 11:13-16)

 

세계 모든 민족은 공동 축제의 명절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3대 명절이 있는데 '유월절과 칠칠절과 수장절'이 있습니다. 이 절기 때에는 이스라엘은 온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 민족도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있습니다. 음력으로 8월 15일인데 올해는 이번 주 금요일입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날씨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초가을에 맞는 추석은 우리 조상 때부터 참으로 아름다운 명절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했습니다.
▶추석의 기원을 보면, 신라 유리왕 때부터 아낙네들이 7월 보름부터 길쌈(벼 짜는 것)을 시작하여 두 패로 편을 나누어 8월 15일 날 이긴 자들을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면서 진 편의 한 여자가 나와 춤을 추며 하루를 즐겁게 보내게 된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추석날에는 아침 일찍 새 옷을 갈아입고 추석 다례를 지내는데 햅쌀로 술과 떡을 만들고 밤 대추 감 등 햇과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추석날을 당하여 가족들끼리 모여 조상의 은혜를 추모하면서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인의 행위입니다. /믿/
올해는 연휴가 길어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귀향 객이 전국적으로 사상 최대의 인파가 이동할 것이라고 정부 당국자가 말했습니다. 이 행렬을 귀성객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어느 부인이 고향을 떠난 지 3년 만에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외신은 그가 자살한 이유가 향수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향수병에도 약이 없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고향을 모성의 이미지와 연결시켰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이 아늑한 것처럼 고향에 대한 애착을 어머니의 모정에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고향은 안식처요,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그래서 고향이 그립고 고향을 찾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장성하면 고향은 흘러간 추억에서 살아있을 뿐입니다. 저도 부모님이 안 계시고, 큰형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고향이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귀성객들이 차표를 구하기 위하여 며칠씩 노력하여 한 좌석을 얻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을 찾아간 다음에는 허무함을 맛봅니다. 산은 산이로되 그때 그 산천이 아닙니다. 옛날 그 친구들은 모두 다 바람처럼 흘러갔으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고향을 찾는 행렬을 귀성객이라고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저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신령한 귀성객들입니다. /믿/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바라보며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도 이 믿음의 길을 따라 저 영원한 천국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길을 떠나는 순례 객들입니다. /할/ ◀제목소개!▶

 

▶히11장은 '믿음 장'으로,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선진들의 삶의 비결이 믿음임을 가르쳐줍니다. ▶믿음은 세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는 믿음이 있고,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바라보는 신앙이 있고,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헌신하며 사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시카고에 일어난 대 화재로 무디목사님이 섬기던 교회가 불에 타 버렸습니다. 기자들이 비아냥거리며 "왜 하나님의 교회가 불타야 합니까?"라고 물자 무디는 "이곳에 더욱 더 큰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지으실 텐데 지금 교회당 철거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하나님이 불로 태웠습니다."라고 하자, 질세라 기자들이 "그럼 건축할 돈이 있습니까?" 묻자 무디는 "나는 잠옷 바람으로 나오면서 수표와 헌금은 한 푼도 가지고 오지 못했지만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 금고인 성경이 있지요 여러분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 여기에 큰 교회당 건물이 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후에 영국에서 목사님이 말씀을 전할 때 부흥의 큰 물결이 일어났고 이를 통해서 교회당이 섰습니다. 기자들은 불탄 잿더미를 보았으나 무디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할/ 히11장에서 '믿음으로'를 18번 사용하였습니다. 신앙은 '눈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입니다.
15절에 '나온바 본향'이란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말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고향을 그리워하여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려움을 참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머물렀습니다.
16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본문에는 두 종류의 본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온바 본향'입니다.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입니다. 땅에 있는 본향입니다. 즉 우리가 태어나서 부모님의 슬하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육신의 고향입니다. 저희 고향은 전라도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 175번지입니다. 이 고향은 내 몸이 태어난 곳이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계신 곳입니다. 어릴 적 같이 자라난 친구들이 있는 곳이며, 나의 육신과 마음과 꿈이 함께 자란 곳입니다.
또 하나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이 하늘나라에 대한 모형이며,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하늘나라는 이 땅 우리 인생들의 고향 그 실체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매일매일 세상을 살아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믿/
본문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의 삶을 마치 고향 가는 길로 묘사하여 믿음생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으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그 곳을 향하여 인생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들은 믿음을 따라 살았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13).

 

"이 사람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 길을 따라 가면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고, 둘째는 그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곳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열차나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직접 자가용을 운전하여 교통 법규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분명히 천국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길을 믿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날, 저 영원한 천국의 본향을 환영하며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2.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외국인처럼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13).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앙의 족장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외국인이란 국적 없이 임시로 머무는 사람들이요, 나그네란 일시적으로 머물고 있는 사람으로 정착의 집이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나그네는 고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타향에 얼마 동안 머물러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고로 그 생활은 항상 임시적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모두가 나그네와 같습니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브라질로 이민을 가야만 나그네인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살고, 고향에 살아도 나그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모두는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낯 설은 인생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요 무덤을 향해 가는 행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행렬이 있습니다. 이는 하늘나라로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 객들입니다. 이 행렬이 오늘 이 귀한 성림의 제단에 모였습니다. /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나그네로 살았고 외국인같이 살았습니다. 그 땅 어느 곳이든지 그가 영원히 영주할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창23:4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었을 때에 헷 족속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 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해"(창23:4)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진실로 인생은 무상하고 허무합니다. 세월이 가노라면 인생 모두가 무덤을 남긴 채 떠나갑니다. 풍운아 다윗은 대상29:15절에서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또 본문 13절에서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다"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대를 이은 믿음의 족장 야곱이 요셉의 안내로 애굽 바로 왕과 대면을 합니다. 그때 야곱은 자신이 지나온 날을 회고하면서 이야기하기를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라고 고백했습니다.
실로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길을 가게 됩니다. 인생 길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만은 크게 보면 하룻밤을 여관에서 유숙하고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잘 살아도 한 세상이요, 못 살아도 한세상입니다. 인생은 한번 왔다 가는 인생입니다(히9:27).
누가 이 길을 거역할 수 있습니까? 권력을 쥔 자도, 재물을 쥔 자도 이 길을 막지 못합니다. 시90:3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여기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누가 거역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이 많으신 노인들은 70객, 80객이라고 하는데 이는 나그네로 7,80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하룻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 대궐 같은 큰집에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이 이 집은 여관방이 아니니 저 건너 여인숙으로 가라고 거절을 합니다. 이때 김삿갓이 묻기를 '이 큰집에 몇 대나 살아오시는 겁니까? 예 16대째 살아옵니다. 그 16대가 지금 다 생존하십니까? 그야 다 세상 떠났지요! 그렇다면 당신도 살다가 떠날 것이니 당신도 나그네, 나도 나그네 같은 처지에 하룻밤 쉬어 갑시다.' 이 소리를 들은 주인이 크게 깨닫고 잘 대접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본향 집을 떠난 나그네이기 때문에 항상 괴롭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고독합니다. 나그네가 여관에 들면 숙박 계를 씁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출신지를 씁니다. 지금 무엇 하러 여기에 왔습니까? 용무를 묻습니다. 내일은 어디로 갈 것입니까? 행선지를 기록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에 왔고, 지금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귀성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저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가고 있습니다.
▶암으로 죽어 가는 사업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 발악을 하면서 죽음을 증오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므로 그 고통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이 몸부림이 너무나 안타까워 부인은 목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잠시 후 이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를 맡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오, 부활이심을 영접합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기도를 따라 합니다. 그는 다 맡겼습니다. 그리고 평안을 얻었습니다. 얼굴이 밝아지고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 목사님과 자기의 부인의 손을 꼭 움켜쥡니다. 그리고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서는 나그네길의 삶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 결국 인생이 머물 곳은 이 땅 위가 아니라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입니다. 그곳은 믿음으로 한 발짝씩, 한 발짝씩 올라가는 곳입니다. /할/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나그네 의식이 강하였습니다. 70년 로마에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은 이 나라 저 나라, 이 곳 저 곳 떠돌아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인생은 모두 나그네입니다.
▶나그네 인생이란 '잠시 머무르고 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천년만년 살 곳이 아닙니다. 잠시 머무르다가 가야 할 곳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이기에 나그네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⑴나그네는 어느 곳에 있든지 궁극의 목적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능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여우는 죽을 때 꼬리를 자기 굴로 향하게 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는 알에서 깨어 강에 놓으면 바다로 가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늘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며 본향을 그리워하는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⑵나그네는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곳은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떠날 곳, 떠날 날이 있는 것이 나그네입니다. 떠날 때는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합니다. 여기 저기 여행을 하면서 땅을 사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곳에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야곱은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70명 식구들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 곳에서 살면서도 고향 가나안 땅을 늘 그리워했습니다. 평생 나그네로 애굽에서 살면서 자기 시체를 고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고 죽었습니다.
⑶나그네는 언제 떠날지 모릅니다. 나그네는 외롭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나그네 인 것을 알고 나그네끼리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과부심정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그네 심정 나그네가 서로 알아주어야 합니다. 신10:19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우리 모두는 나그네이기에 나그네 된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⑷나그네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벧전1:17절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기에 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쓰러지기 쉽고 넘어지기 쉬운 것이 나그네입니다. 겸손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벧전2: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나그네는 항상 유혹이 많습니다. 시험도 많습니다. 싸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이 쪽 저 쪽으로 치우치지도 말고 육체의 정욕에 빠지지 않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서 넘어지지 않게 두려움으로 살아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14-1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온바 본향을 사모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육신의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갈대아 우르를 고향으로 삼지 않고, 오직 저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고향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아브라함처럼 주님께서 준비한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최후의 목표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듯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의 '실낙원'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이후로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에덴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3: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우리의 육체는 흙에서 왔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고향, 영원한 고향은 하늘입니다.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 품을 떠난 탕자 같은 인생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찾아갈 고향이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키엘 케에골'은 인간을 가리켜 말하기를 '고향 잃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빌3:20절에 말합니다. 물은 바다로부터 왔기에 바다로 흘러갑니다. 불은 태양으로부터 왔기에 하늘로 올라갑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명이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부모님들이 주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큰 무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믿/
여러분, 현대과학이 아무리 첨단 산업을 개척했다 하더라도 그 과학의 힘으로는 생명의 근원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살아 있는 풀 한 포기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아야 할 고향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하늘이 준 영적인 생명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본향 삼아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입니다.
16절 '사모한다.'는 말은 '적극적으로 취하려는 자세'를 말합니다. 한 여인을 사모하면 죽자살자 매달려 자기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저 천국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 천국 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렘21:8절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또 신30:19절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할/
이 세상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과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다 두 가지 갈림길에 서야 합니다. '키엘 케에골'이 말한 것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이냐, 넓은 문이냐, 생명의 길이냐, 사망의 길이냐' 이것이 문제라고 고개를 끼웃등 합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길로 걸어가라!"
마7: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러분, 천국으로 가는 길은 넓은 문이 아닙니다.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버려야 할 것이 많은 문입니다. 회개하고 죄의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넓은 문으로 통과하려면 버려야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나의 옛사람, 옛 습관, 교만, 자랑, 그리고 죄의 짐까지 모두 걸머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은 문이 좁기 때문에 이런 죄 짐을 들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갈5:19절 이하에 육체의 일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함, 투기, 술 취함, 방탕 함'등입니다. 우리는 이런 온갖 죄를 회개하고 죄의 짐을 벗어버려야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히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좁은 문은 예수를 바라봐야 들어가는 문입니다. /믿/
이제 좁은 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난의 길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우리 믿음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얼마나 신앙생활이 힘듭니까?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십일조, 새벽시간에 곤한 잠을 깨워서 기도회에 나가 기도생활에 힘쓰는 일,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운동선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훌륭한 선수는 고된 훈련과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을 가꿉니다. 음식을 조절하고 규칙 있는 생활을 하고, 또 자신을 관리합니다. 피나는 노력 없이는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은 운동선수들이 바라보는 면류관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의 길을 잘 훈련받으면 이 땅에서도 부귀영화의 길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순례자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는 순례자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믿음으로 집을 떠나 거룩한 생활을 하는 순례자의 길입니다.
▶'성 안토니오'라는 성자는 부요한 집에서 자랐고 그 유산이 많아 그도 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성경을 읽다가 한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물었을 때, 주께서 "너는 가서 너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읽다가 크게 찔림을 받았습니다. '안토니오' 청년은 "나는 성경대로 살겠다, 주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재산 일부를 누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자신은 전도자가 되어 아프리카 광야에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는 성자의 생활로, 순례의 생활로 삶을 보냈습니다. '안토니오'는 저 천국을 밝히 보는 영안이 있었기에 즉 더 나은 본향의 상급을 바라보고 그런 고난의 길을 자처했습니다. /믿/
▶우리는 이조시대의 대 유학자이며, 어린 단종을 위해 목숨을 버린 충신이요, 학자였던 사육신의 대인 성삼문을 잘 압니다. 지금은 존경받는 위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마지막 남긴 한 수의 시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얼마나 실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는 세조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서 굴러가는 마차에 매달려 겨우 몸을 가누면서 사형 터에 도착한 그는 깨어진 기왓장에 한 수의 시를 썼는데 그 시가 그의 평생을 평가하는 마지막 그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북 소리는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 서산을 넘어 저물어가는구나! 아 황천길에는 여관이 없다는데 오늘밤에는 뉘 집에서 쉬어야 하나!>
저는 지금 그의 죽음이 값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삶의 마지막 종착에서 이토록 절망해야만 하는 유교의 가르침에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밤 뉘 집에서 묵어야 하나> 성삼문 그는 세상과는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을 살았으면서도 그의 마지막 소망은 겨우 '뉘 집에서 머물 것인가?'에 대한 걱정뿐이었습니다. 이 독백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할/
하루는 공자에게 제자들이 죽음 이후를 물었습니다. 공자의 대답은 "살아 있는 일도 다 알지 못하는데 죽은 이후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공자도 죽음 뒤에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땅위에 사는 어떠한 피조물도 한 치의 앞길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오직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
▶불교계에 유명한 효봉 스님이 있었습니다. 이 효봉 스님이 일제 강점기 때 평양의 감사로 근무할 당시 오판으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착각, 사형을 시켰는데 그 후에 진범이 잡혔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삿도의 직분도, 중복도 벗어버리고 전국을 엿장수로 떠돌아다니면서 고뇌 속에 살다가 결국 금강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수도승이 된 후에도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참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진 대승이었습니다. 그 당시 모든 젊은이들의 정신적인 지주요,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바세계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남기고 갈까?"에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남긴 말은 "모든 것이 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스님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한평생 순례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여러분, 진리는 영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유교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완고하고 불교는 허무하고 기독교는 기쁨이 있다고 했습니다. /할/ 우리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본향이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천당입니다. 고전15: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천국을 믿으시면 아멘!/

 

▶'더 나은 본향'은 세상 고향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고향을 말합니다.
⑴위치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그 위치부터가 세상 고향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⑵하나님께서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마25:34절을 보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14:2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고, 계21:2절에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했습니다. 또 고후5: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했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나은 본향'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곳입니다. ▶우리를 위해 만드신 곳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곳이요,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곳입니다. /할/
▶보험회사 직원이 믿음이 좋은 집사님에게 생명보험에 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명보험에 들어야 될 이유를 이것저것 설명하니까, 집사님이 대답합니다.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 말대로 생명보험에 들지요. 그 대신에 당신은 내가 말하는 참 보험에 들어주어야 합니다" 참 보험이라는 말에 보험회사 직원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생명보험은 그 보험에 든 사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 들면 안 죽는다는 것입니까?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돈인데 그것이 어떻게 생명보험입니까? 참 보험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참된 보험이 어디에 있고, 참 고향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믿어야 참 생명 보험에 든 것이고, 그러한 성도에게 하늘나라가 참 고향이고 그 본향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요14:6). /믿/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동네에 모여서 구슬치기를 하고 딱지치기 땅 따먹기를 합니다. 옛날에는 모두 그런 놀이를 하고 자랐습니다. 많이 딴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잃은 아이는 시큰둥해 있습니다. 딱지도 구슬도 다 잃어버린 아이는 아예 울고 앉아 있습니다. 많이 딴 아이에게 딴것 중에 조금만 달라고 통사정해도, 다 딴 아이는 욕심 많게 하나도 주지를 않습니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갑니다. 땅거미가 깔리면서 점점 어두워집니다. 놀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머니들이 나와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데려 갑니다. 울던 아이들도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면서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서 안깁니다. 모두들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표정으로 집을 향해 돌아갑니다. 그런데 딱지와 구슬을 다 따고 땅도 다 따먹은 아이는, 날이 어두워 졌는데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연연합니다. 손에는 구슬과 딱지가 한 아름입니다만 그에게는 조금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아버지도 집도 없었습니다. 누가 불러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낮에는 딱지를 많이 따 모으고 구슬을 다 따서 모아도 땅따먹기에서 모든 땅을 다 땄어도, 해가 지자 그는 갈 곳이 없는 비참한 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리 땅을 많이 가지려고 아우성을 치고, 돈을 많이 벌려고 발버둥을 치며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밤이 찾아옵니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때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의 황혼이 되어 주님 부르실 때에, 다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행복한 표정으로 주님의 품으로 가는데, 아무도 불러 주는 이 없고 갈 곳 없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고해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돌아갈 본향을 사모하는 자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믿/
▶어떤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일찍이 홀로 되셨습니다. 그는 콩나물 장사를 하시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잘 키웠습니다. 자녀들도 잘 자라서 이제 나름대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권사님은 예전의 오두막집에서 홀로 구차한 삶을 계속해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자녀들이 권사님을 찾아와서 애원을 했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 혼자서 이렇게 구차하게 살지 말고 우리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사십시다." 그러자 권사님의 자식들에게 "너희들이 그토록 애원하니 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구나. 너희들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날 위해서 이런 집을 한 채 지어다오. 바닥은 온통 유리로 깔아라. 집의 기둥은 열두 개를 세워라. 그리고 기둥에는 각기 다른 보석을 박도록 하여라. 문도 열 두개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 문은 진주로 장식을 하도록 해라."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자녀들이 픽 웃었습니다.
"어머니, 농담이시지요? 세상에 그런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그 권사님의 말씀은 걸작이었습니다. "왜 그런 집이 없니?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 그런 집을 분양 받아 놓았다. 나는 곧 그곳에 가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더러 그보다 못한 집으로 이사 가서 살라고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러분! 새 예루살렘성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찬란한 성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게되는 순간, 우리는 그곳에 올라가서 세세 무궁토록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믿/

 

4. 우리가 갈 본향(천국)은 어떤 곳이고, 지옥은 어떤 곳인가?

 

▶먼저 지옥부터 알아보자!
⑴전체가 불입니다. 불 못이라고 합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하는 곳입니다. 불은 심판을 상징하고 저주를 뜻합니다. 구약 시대 때 큰 범죄인에게는 불로 태우는 심판을 하셨습니다.
⑵어두운 곳입니다. 마8:12절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⑶세세토록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영원한 고통입니다.
⑷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입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이를 갈게 됩니다. 엄청난 괴로움을 참을 수 없어서 이를 갑니다. 마13:50절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⑸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막9:48).
⑹하나님이 없는 곳입니다.
⑺누가 그 지옥을 갑니까?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마10: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천국은 어떤 곳인가?
⑴밤이 없는 곳입니다. 밤은 죄악과 공포의 상징입니다. 밤은 위험합니다.
⑵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문명한 나라에도 질병과 고통이 수없이 많습니다.
⑶죽음과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계21:3-4절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일러라"
⑷염려와 근심이 없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온갖 염려와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스위스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천국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⑸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즉 사단의 음모가 없는 곳입니다.
⑹바다가 없습니다. 계21장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바다가 없다는 것은 폭풍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풍랑이 없는 곳입니다.
⑺천국엔 예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으리라" /할/

 

5. 본향을 찾는 성도들의 삶의 가치가 달라야 합니다.

 

믿음의 시인 이해인 수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셔졌지만 우리의 나날은 어찌 이리 소유를 위해 숨이 차게 바쁜지 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케 하소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가져갈 것 없는 이승의 순례 객인 우리가 이기와 탐욕의 노예가 되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빌려 받은 것임을 항상 기억케 하소서!>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 객은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짐이 무거우면 그 짐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하늘 본향으로 가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 집착한 욕심 때문에 신앙생활을 게으르게 합니다. 베드로는 벧전2:11절"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당부합니다.
오늘 14절의 말씀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며 그 안에서 삶의 목적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사는 목적이 달라야 하고 가치와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세속의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치가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우리 이제부터 자신 있게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간증하며 삽시다. "나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사람이다. 내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 록에 기록이 되는 사람이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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