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하늘의 부요로 사는 사람! (고후 6:1-10)

by 【고동엽】 2022. 2. 5.

하늘의 부요로 사는 사람! (고후 6:1-10)

 

아라비아의 속담에 '돌아오지 않는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화살'인데, 이는 한번 과녁을 향해 겨누고 쏜 화살은, 곧장 날아가 목표를 명중시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급하게 뱉어낸 말'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 영향을 주는 '급하게 뱉어낸 말'도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과거 생활'인데,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과거 생활은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을 되돌아보며 아무리 후회를 하고 탄식을 해도 그 걸어온 발자취를 지워버릴 수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넷째가 바로, '황금과 같은 기회'인데, 우리가 아무리 잃어버린 기회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를 써 봐도 한번 가 버린 기회는 다시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의 기회를 바로 잡고, 축복 받을 기회를 바로 잡고, 행복의 기회를 바로 잡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먼저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늘의 부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본문 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 속에 깊이 빠져 봅시다! /할/ ◀제목소개!▶

 

사람은 누구나 잘 살기를 원하고,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라고 다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자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인생을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한 환경가운데서도 인생을 부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토록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의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인색하게 사는가하면 늘 걱정과 근심 속에 절망하며 탄식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자이면서도 가난뱅이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볼 때에는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지만 마음이 평화롭고 부유하고 항상 여유가 있고 넉넉하며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할/
신앙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감사하고 모든 것이 궁정 적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은 심령이 메말라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인물들 가운데 보면 가장 인생을 부유하게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면 우리보다 좋은 환경에서 산 것도 아닙니다. 그는 집 한 칸 없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생을 보면 거의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굶고 주리고 헐벗고 매 맞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원망하거나 자기 처지를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소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주어진 환경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그 환경을 바꾸어 살았습니다. 감옥을 별장으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어 살았고, 그의 눈물은 찬란한 진주 빛이 되었고, 그의 가난은 하늘의 부요로 채웠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부요가 넘쳤습니다. 그의 고백이 본문 9-10절에 나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도 맞으면 아프고, 굶으면 배고프고, 병들면 서럽고, 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마음속에 근심도 되고 불안도 깃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어떤 인간적인 의지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속에 우리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할!/믿/
우리가 주안에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바울은 친히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질그릇같이 연약한 존재로, 쓰러지면 부서지고, 넘어지면 깨지고, 병들면 탄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보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 분이 역사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길 수 있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
막9:23절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올바른 길과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는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하늘의 부요로 사는 비결'의 세 가지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진리를 붙잡고 영원한 풍요 속으로 달려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1.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자!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당시에 세우신 교회로써 주후 50년 가을에 주님의 지시를 따라 1년 6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고린도는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대도시였으며 로마의 행정구역의 수도였습니다.
고대로부터 이 고린도는 헬라 최대의 도시인 '아테네'와 '스파르타 테에베' 같은 도시들과 함께 헬라의 중요한 도시국가의 하나였습니다. 이곳에는 유명한 고린도식 건축 양식이 발전하였고, 여행자들과 상인들이 모여 사는 교통 중심지였고, 아가야 지방을 복음 화하기 위해서는 가장 전략적인 지역이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 왔을 때는 자유인이 25만 명, 노예들이 4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이 도시에는 적어도 12개 이상의 신전이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신전은 고린도 앞산 꼭대기에 위치한 사랑의 여신 아데미 신전이었습니다. 이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만 1000명이 넘었다고 하니, 고린도는 상업의 중심 도시이며, 음란과 방탕히 만연된 도시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곳에 내려와서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분들은 사도 바울처럼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아굴라의 집에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에 내려오면서 아덴에서처럼 철학적인 수사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 증거하기로 힘을 썼습니다. 오직 성령의 힘을 의지하여 최선을 다했더니, 이곳에 고린도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습니다.
마침 실라와 디모데가 북쪽 마케도냐에서 내려오므로 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습니다. 회당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강론하였는데 이 집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때 회당장 그리스보가 회당에서 나와 세례를 받았고, 수다한 헬라인들이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지,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년 육 개월을 고린도에 유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교회였습니다. ▶이제 본문 중심의 '하늘의 부요로 사는 비결'을 알아보자!

 

2. 은혜의 귀중함을 깨닫고 살아라!(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 자들입니다.
▶이현주 씨의 동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밀가루를 싣고 빵 공장에 가는 트럭과 시멘트를 싣고 벽돌공장에 가는 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멈추어 섰습니다. 트럭운전사는 화장실에 갔다 와서 트럭을 탔는데 그만 서로 바꿔 타고 말았습니다. 두 운전사는 똑같이 '알게 뭐냐'하고 생각하며 차를 몰아 목적지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시멘트를 실은 트럭은 빵공장으로 가고 밀가루를 실은 트럭은 벽돌공장으로 간 것입니다.
공장기술자는 '알게 뭐야'라고 말하면서 빵 반죽에 시멘트를 붓고 벽돌반죽에다가 밀가루를 쏟아 부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빵이 가정에 배달되고 벽돌은 집 짓는 데로 배달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집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이빨이 부러진 채 배를 움켜쥐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내가 알게 뭐야?'하는 식으로 간다면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멈추어 서게 될 것이고, 하늘의 부요는 살아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고전3:9절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밭에서는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열매를 거두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씨를 뿌리고(전도), 초신 자들을 돌보고, 전도의 열매와 신앙의 열매들을 맺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집에서는 예배드리는 일과 기도하는 일과 찬양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바울은 당부하기를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부요를 아는 사람이 은혜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헛되이 받지 말라는 뜻은 '헛된 것으로 여기지 말라, 허사로 돌리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의 귀중함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은혜가 중요합니까? 은혜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이며, 축복이며,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공식적인 인사는 '살롬'입니다. 즉 '은혜와 평강'을 비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만 안녕도 평안도 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하나님이 돌아봐 주셔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로 내가 구원을 받았으며 그 은혜로 내가 숨쉬고 있으며 산천초목을 바라보고 있으며 두 다리로 뛰고 걷고 있습니다. /믿/
미국 최고의 박사들이 모인 곳이 미항공우주국(나사)입니다. 그곳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립니다. 그런데 그 직원의 95%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9:30분에 모여 반드시 예배를 드리는데 그들이 똑같이 드리는 기도가 있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할 일은 다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할/
내가 다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되는 것 같은데 안 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오래 전에 한 집사님이 차를 몰고 영동대교를 지나다가 1.5톤 트럭을 추월하다가 그만 그 트럭에 밀려서 한강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귀한 줄 몰랐다고 간증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예배를 소중하게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배를 통하여 오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첫 번째 이유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신앙을 물려받은 이삭은 가는 곳마다 제단 예배를 드렸는데 그의 모든 삶에 100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통하여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우리 가정이 복을 받고 우리 사업장이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의사가 '건강하다'고 해서 오래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면 약해도 오래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은 하나님이 그를 귀하게 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도 그를 우습게 여기십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박사학위만도 5개나 가졌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오지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사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을 지냈지만 언제나 고백하기를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풍성합니다. 그런데도 기갈상태에서 허덕이는 성도들을 보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깊고 넓은지 마치 태평양의 물과 같고 하나님의 은혜의 곡간은 요셉이 애굽에 지은 창고보다도 더 풍성합니다.
그런데 태평양 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 목이 말라죽고, 요셉의 창고 속에 있는 생쥐가 굶어서 죽었다면 그 얼마나 어이없는 노릇이겠습니까? 그저 입만 벌리면 물이 들어오고 입을 놀리기만 하면 기름진 곡식으로 창자를 채울 터인데 입을 꼭 다물고 굶어죽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메마른 저수지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에 가로막혔던 구리빗장을 부서뜨리고 은혜의 큰문을 넓게 열어 놓으셨는데 바로 내일 아침부터 시작되는 <신년 새해 축복 새벽 부흥회>입니다. /할/
여러분,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실 때입니다. 깨어서 일어나 은혜를 주실 때에 믿음의 입을 크게 열어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언제? 새벽 축복 성회 때입니다. /믿/
▶한글사전에 보면 부흥이란 말을 풀이하기를 <쇠잔했던 것을 다시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의 뜻은 <다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부흥회는 성도들의 믿음을 보다 깊고 굳게 하며 회개하게 하고 전도하여 새로운 구도자를 인도하여 성경을 가르치기 위한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세상일에는 다 기회가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대하여 기회를 열어주는 때가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이 기회를 잘 잡은 자요 실패자는 이 기회를 무심히 보다가 놓쳐버린 자입니다.
옛말에 기회는 앞에만 털이 있고 뒤에는 털이 없는 대머리라 합니다. 오는 기회는 잡기 쉬우나 기회가 지나고 보면 잡으려고 해도 미끄러져 잡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기회를 잘 살려야 할 것입니다. 새벽성회가 바로 그 기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받는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지금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넓게는 기회라는 뜻이 됩니다만 좁게는 '순간, 찰라'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보라'는 말은 은혜의 공개성을 말합니다. 은혜는 눈에 나타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그 모습이 다릅니다. 또 '지금'은 숨쉬는 그 순간, 살아 있는 이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 맥박이 뛰고 심장이 고동 치고 손발이 움직이고 두 눈이 끔벅거리고 있는 이 순간을 말합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란 말은 몹시 긴박한 시간을 말합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됩니다. 은혜를 '카이로'라고도 합니다. 그 뜻은 <유쾌하다,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유쾌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행복합니다. 하늘에 부요가 넘치게 됩니다. /할/
고후9:8절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까?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 받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 착한 일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렇다면 은혜가 무엇인가? 은혜라는 말은 헬라의 원어에 '카리스'인데 그 뜻은 '선물로써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특별한 호의'를 의미합니다.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이니까 손을 내밀어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귀한 은혜를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는가?
⑴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원하는 자, 사모하는 심령 위에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이번 새벽성회에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⑵열심히 모여 기도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120문 도가 함께 모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불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믿/
⑶참고 기다리는 자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최후 마지막 시간까지 바라고 기다리며 참을 때에 은혜를 충만히 받습니다. 여러분 은혜 주실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주신 직책, 직분을 귀중하게 여기며 살아라!(3-4)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4-5절 이하에서는 그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겪었던 고통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직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종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전도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전도하는 자는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도 전도에 맞추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그 직책을 지상 최대의 것으로 생각하고 잘 수행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사명을 감당할 때 두 가지의 기본자세를 정해 놓았습니다.

①그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전15:10절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래서 그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되지, 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신 직책이 훼방 받지 않으려고 자기의 말이나 행동으로 거리낌이 없도록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성직의 품위를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성도의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각자 주어진 직분의 품위를 잘 지켜야 합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리어지면 교회가 욕을 먹고, 하나님의 선교의 문이 닫힙니다. 나 하나 행동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뚝하면 예수쟁이들, 말쟁이들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직책에 훼방이 됩니다. 우리의 직책이 훼방되는 것은 그 직책을 주신 하나님을 훼방하고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 '거리낀다'는 말은 '거추장스럽고 방해가 된다'는 뜻인데 내 행동 때문에 내 언행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직분 감당하는데 거추장스럽고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언행 심사 하나 하나가 복음 전도에 바로미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본과 덕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귀한 것입니다. /믿/

②바울은 그 직책을 감당할 때 그 어떤 고난도 참고 인내했습니다.
4절에 보면 '견디는 것'은 인내를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욕을 하든지 비판을 하든지 참으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일할 때, 복음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면 말도 참아야 하고, 행동도 참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참아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까닭 없이 괴롭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견뎌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시고 계십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견디었습니다. 4절 이하에 보면 9가지 고난을 견디어 냈다고 고백합니다. (환난, 궁핍, 곤란, 매 맞음, 갇힘, 요란함,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 어느 것 하나 견디기 쉬운 것이 없습니다. 다 어렵고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참고 견디었습니다.
고후11:27절에서 바울은 그가 겪은 환난과 곤고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열거하기를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기록합니다.
왜 견디었는가?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자천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일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자천입니다. 모든 일을 통하여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자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그 직분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 부요롭게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모든 직책의 이름과 내용은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그 직책에 중요성은 똑같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나,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나, 안내나 헌금위원이나 식사당번 모두가 다 하나님의 중요한 일을 위하여 인내하고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③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감당하면서 기억할 것들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이 귀한 직책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아야 합니다.
㉡모든 직책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마음을 갖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감정이나 기분에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생명 다하는 날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롬12: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딤전1: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할/

④하늘의 부요로 사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6절 하반절의 '성령의 감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람의 의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시적으로는 할지 모르지만 지속적이요 한결같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주시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감동, 감화하시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엡5:18).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기쁨 충만, 성령 충만입니다. 여기에 예수 행복이 잇고 하늘의 부요가 있습니다.

⑤그 다음, 우리에게 '거짓이 없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겉모습만의 사랑이 아니란 뜻입니다. 남의 슬픔을 보면서 겉으로는 위로하지만 속으로는 고소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며, 남의 성공을 보면서 겉으로는 축하하지만 속으로는 시샘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7절에 '진리의 말씀'은 우리의 공격무기가 됩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거짓 투성이라고 하더라도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는 거짓된 것과 타협할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따라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강함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머물 때 비로소 나타납니다.
고전4: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라고 함은 '성령의 검인 진리의 말씀을 들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롬6:13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할/

 

4.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위치는 '신분'임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질그릇에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들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바울은 본문 8-10절에서 하늘의 부요를 누리는 삶의 비결을 아홉 가지로 역설하고 있습니다.
①"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욕된 것 같으나 영광스럽다'는 말로, 이 말씀은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거부당할 때는 욕된 것 같은데 받아들일 때는 영광스러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②"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악한 이름 같으나 아름다운이름'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이름은 비난하는 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악하게 비추어졌으나 받아드리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③"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당시 헬라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허황한 억측같이 보였습니다. 속이는 자 같이 보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진 복음을 전하면 믿지를 않습니다.
특히 주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전하면 거짓말이라고 속이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틀림없는 참 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십니까? /할/아멘!/ 믿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참된 자, 진실 된 자'들입니다. 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참된 사람이 아닙니까? 사장이, 구청장이, 장관이, 국회의원 당선자가 참된 자입니까? 아닙니다. 진실로 참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 증거 자들입니다. /믿/아멘!/
④"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저는 우리 성도들이 다 유명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활동 분야에서 유명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살아서 이 땅에 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영원히 유명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유명한 자들을 살펴보면 대통령, 부귀, 영화, 공명을 취한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크게 유명해 지거나 높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유명한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서 우리의 생애를 마치고 하늘나라에 올라갈 때, 천군 천사가 도열해 있고, 주님께서 친히 마중 나오셔서 우리를 영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무명한 자'란 '의심받고 무시당한다.'는 뜻이며, '유명한 자'란 '인정받는 자'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과 복음의 증인이 세상에서 의심받고 무시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시며 우리의 이름 석자는 하늘나라 생명 책에 기록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 때문에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자부심을 갖고 당당한 것입니다.
⑤"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입니다. 내가 죽어질 때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강하게 하십니다.
마10: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사실 바울은 감옥에 끌려 다니면서 매 맞고 고문을 당하며 핍박을 받고 죽게 되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기하게도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때마다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살아났습니다.
'리빙스턴'은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고 했고, 바울의 고백도 <나는 사명이 있기에 죽을 수 없고 할 일이 있기에 여기 살아있다>는 고백입니다.
⑥"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예수 안에서 징계가 크고 고난이 크면 클수록 열매가 크고, 영광도 크고, 축복도 큽니다.
고난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장시키는 촉진제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고난 앞에서도 절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시34:19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
⑦"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짐을 우리 주님께 맡길 수 있기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마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래서 바울은 빌4: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⑧"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는 부자였지만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후에 바울은 가난해 졌습니다. 이유는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날 이후 날마다 풍요했고, 언제나 만족했습니다. 이유는 주안에서 영원한 풍요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예수님을 날마다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⑨"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왜냐하면 주님을 가진 자는 사실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믿/
그러나 주님이 없는 자는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입니다. /믿/ 우리는 부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모든 풍요가 있습니다. /할/

▶우리들의 삶에는 <아는 것과 아는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잘 사는 것과 잘 사는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고 아는 것 같이 보일 뿐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나 참으로 잘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이 근본 (잠1:7)임을 잘 알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대인들만큼 하나님을 잘 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종교 전문가들이요 이들은 그 누구보다 주님을 잘 알고 있어야 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해 십자가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문외한들인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알고 구주로 영접하여 인생의 머리 돌로 삼아 구원의 은혜 속에 살았습니다.
의사들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은 환자들이 아는 체 하는 것이랍니다. 여러분들은 아는 것 같은 사람들이 되지 마시고 참으로 알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할/ 이 한 가지만 알아도 우리는 세상의 어떤 박사들보다도 축복 자들입니다. /믿/
▶세상에는 잘 사는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 적인 기준은 재산이 많고, 주택이 크고, 정원이 넓고, 가구가 호화스러우면 잘 산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 사는 것같이 보일 뿐이지 실상은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적인 기준의 재산은 없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그 사람이 진짜 잘 사는 사람입니다. /할/ 바울처럼 하늘의 풍요를 누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생활비 가운데서 음식비로 쓰이는 비율은 '엥겔계수'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교육, 레저, 자동차, 교양비 등으로 쓰이는 것을 '잡비계수'라고 하고, 땅도 사고, 증권도 사고, 골프회원권, 헬스회원권도 사고 보석도 사는데 쓰는 비용을 전문용어로 '투자계수'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자신의 품성이나 교양이나 덕망 등을 계발해 나가는데 쓰는 비용을 '명예계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 올라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안락하고 만족스럽고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단히 추구하고 올라서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계수' 단계입니다. '영원계수'란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영원한 나라를 위해 나의 시간과 삶의 비용을 투자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잘살든지 못살든지, 사업이 크든지 적든지 수입이 많든지 적든지 주님 때문에 만족하고 주님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가 하늘의 풍요 속에 사는 자, 즉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믿/아멘!/
하늘의 풍요의 원동력은 뭐니뭐니 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