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생의 참 기쁨인가? (빌 4:4-13)
▶신앙이 좋은 권사님이 아주 똑똑한 앵무새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권사님은 워낙 믿음이 강해 이 똑똑한 앵무새에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소문을 듣고 목사님이 찾아 왔습니다. 권사님은 목사님께 앵무새의 재능을 자랑합니다. "목사님 저 앵무새는 오른발을 잡아당기면 주기도문을, 왼발을 잡아당기면 사도신경을 외운답니다."
이 말을 듣고 상상력이 풍부한 목사님이 "저 그러면, 양발을 다 잡아 당기면 어떻게 되지요?" 하고 물자 옆에선 앵무새가 뭐라고 했게요! "넘어지지, 이 바보야!"
▶두 젊은 남녀가 맞선 자리에서 통성명을 합니다. 먼저 총각이 "제 이름은 '철'입니다. 성은 '전'이고요" 그러면서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제 이름은 전철'입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처녀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합니다. "우리는 천생 연분입니다. 제 이름은 '이호선'이거든요"
▶웃음 십계명을 소개합니다!
①크게 웃어라! 크게 웃는 웃음은 최고의 운동 법이며 매일 1분 동안 크게 웃으면 8일을 더 오래 살 수 있답니다. 또 크게 웃을수록 더 큰 자신감을 만들어 준답니다. ②억지로라도 웃어라! 병도 무서워서 도망간답니다.
③일어나자마자 웃어라! 아침에 첫 번째 웃는 웃음이 보약중의 보약이랍니다.
④시간을 정해 놓고 웃어라! 그러면 병원과는 영원히 바이 바이랍니다.
⑤마음까지 웃어라! 얼굴 표정보다 마음 표정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⑥즐거운 생각을 하며 웃어라! 즐거운 웃음은 즐거운 일을 창조한다고 합니다. 웃으면 복이 오고, 웃으면 웃을 일이 마구 생긴답니다.
⑦함께 웃어라! 혼자 웃는 것보다 33배 이상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⑧힘들 때 더 웃어라! 진정한 웃음은 힘들 때 웃는 웃음이랍니다.
⑨한번 웃고, 또 웃어라! 웃지 않고 하루를 보낸 사람은 그 날을 낭비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⑩꿈을 이뤘을 때를 상상하며 웃어라! ◀제목소개!▶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인간 삶 속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 마음에 기쁨이 충만한 순간입니다. 올해 우리 성림교회의 비전이 바로 <기쁨 충만, 성령 충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참 기쁨과 평안은 물질적 재산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개는 뼈다귀 하나로도 만족합니다. 돼지는 콩 비지 한 사발이면 뿅 갑니다. 짐승들은 배만 부르면 그저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명예와 권세로도 마음의 진정한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기쁨의 종류도 많습니다. 돈이, 재물이 우리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주는 기쁨도 있고, 사업 성공의 기쁨도 있고, 자식들이 주는 기쁨도 있고, 남편이 주는 기쁨, 아내가 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또 세상 적인 쾌락이 주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책 한 권속에서, 시 한 편 속에서, 한 곡의 음악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들은 순간적이요 일시적이요 찰나적인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박 초롱초롱 빛나리’ 부모는 그를 낳고 너무나 기뻐서 이름도 너무나 멋있는 이름을 그에게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괴범에 의해 죽게 되자 그의 부모는 물론 온 국민이 슬퍼하고 분노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식이 주는 기쁨도 영원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권력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대 전직 대통령 두 분이 절간에 갔다가 감옥에도 갔다가 온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아버지가 현직에 있을 때에도 대통령의 자식들이 감옥소에 줄줄이 들어갔다 온 사실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권력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참 기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본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인가? 주님 안에 있을 때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15:11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저자는 바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어디에서 쓴지 아십니까? 로마 감옥에서 썼습니다. 그래서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성숙'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정은 특별합니다. 그가 옥고를 치르면서 태동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행16:22-29). 그래서 그는 잊을 수 없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지금 옥중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쁨의 서신입니다. 그래서 매장마다 기쁨이 연속해서 나옵니다. 자기 속에 기쁨이 없는 자가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마15:19). 성숙한 신앙인은 항상 기뻐하며 삽니다. /믿/
본문의 특징은 <주안에서 기뻐하라!>입니다. 4장밖에 안 되는 짧은 빌립보서에서 '주안에서'란 말이 무려 13회나 나오고, '기쁨'이란 단어도 무려 17회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찬의 기쁨이란 주위 환경에 따라, 혹은 명예나 지위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마음으로부터 나도 모르게 솟아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감옥소에 갇혀 매 맞고 있던 바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이 있었기에 그는 기쁨을 누리면서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이 기쁨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요14:27절에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기쁨)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왜 기뻐했는가? 왜 우리들에게 기뻐하라고 하십니까? 그가 '주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가 우리들의 삶의 일 번지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 번지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주 안'입니다. 주의 승리가 있는 곳이요, 주님께서 이미 확보해 놓으신 영광의 고지입니다. /믿/
주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지금 안 되는 것 같은데도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또 주안에 있는 자들은 '능치 못함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뻐해도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일이 잘 되어도 기뻐하고, 안 되어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주님의 명령이요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면 우리가 수지맞습니다.
사람이 화가 나고 혈기가 나는 순간, 인간의 육체 속에 여러 가지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화가 나면 정상적인 때보다 당분이 조직 속으로 스며들게 되고, 혈압이 갑자기 올라가고 근육이 긴장하고, 팽팽해져 음식이 소화가 잘 안 된답니다.
잠22:24-25절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결국 사람은 웃고 기뻐하며 살아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연적으로 건강하게 됩니다. /믿/
1. 주안에서 기뻐합시다!
바울 서신에서 아주 독특하게 많이 사용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주안에서'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최대의 문제가 '주안에 있느냐? 주밖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구원의 문제요, 능력의 문제요, 축복의 문제요, 하나님의 뜻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 굳게 섭시다. 여기 '서다'라는 말은 '견고하게 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견고하게 서기 위해서는 기초를 잘 놓아야 합니다. 무너지지 않은 견고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인생의 불실 공사입니다.
마7:25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라고 했습니다. 이제 반석 위에 자신을 세웠으면 좌우로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맙시다(수1:7).
본문에 보면 '항상'이라는 부사에 악센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기쁨을 '카이로'라고 하는데, 그 뜻은 '유쾌하다, 은은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폭죽 터지듯 잠깐 기쁘다가 불꽃 사라지듯 꺼져버리는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은은하게 항상,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그런데 기뻐하되 '항상, 언제나'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즉 기쁠 때만 기뻐하지 말고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기뻐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그리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떤 면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신앙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이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일 때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날 밤에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눕니다. 내일 새벽이면 예수님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자기를 팔 제자 가롯 유다가 그곳에 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감정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지금 심정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만찬을 마치고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올라가십니다. 그 길은 결코 유쾌한 길이 아닙니다. 기분이 좋은 그런 등산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마26:30절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 가니라"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찬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찬미와 그 기뻐함이 바로 종교적인 힘이고, 신비한 능력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찬미했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도했고, 스데반 같은 이는 순교를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종교적인 삶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원천은 어디인가? '주안에서'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 밖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출세한 기쁨, 성공한 기쁨, 인기 누리는 기쁨, 돈 벌고 잘 사는 기쁨 등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배드리는 기쁨, 찬양하는 기쁨, 기도하는 기쁨, 주의 일을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365일이 기쁩니다. 일생이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성공해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실패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하고 잘 살아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병들고 못살아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예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성공자'들입니다. /믿/
2. 성도가 누리는 기쁨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눅10:20절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합3:18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②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롬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③말씀 속에서 위로와 기쁨이 큽니다. 렘15:16절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했고, 고전13:6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④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기쁘고 즐겁습니다. 시63:7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46: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우리는 근심 중에서라도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적인 것들 때문에 영적인 기쁨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기쁨으로 살아도 우리의 인생은 짧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기 혼자 세상 짐을 다 지고 가는 것처럼 근심과 염려의 얼굴을 가지며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⑤하늘나라 생명 책에 내 이름 석자가 기록된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눅10: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할/
⑥하늘 본향에 소망이 있기에 기뻐해야 합니다. 롬8:18과 24-25절을 보세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하시면서 24-25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주기철 목사님은 이 소망 때문에 '일사각오'로 사셨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평양 감옥에서 일본 순사에게 엄청난 고문을 받았습니다.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와 뜨거운 물을 붓고 양손, 양발을 묶어 하루 종일 천장에 매달아 놓기도 했으며, 일주일간 굶기거나 10여일 씩 잠을 재우지도 아니하는 고문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다 못 판때기에 벌거벗은 몸을 굴리기도 하고, 땅굴 감방의 어둡고 습기 찬 냄새나는 곳에 가두는 비인간적인 고문을 숫하게 받았습니다. 한 때 목사님이 실의에 빠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목사님의 사모인 오정모 여사님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시고, 당신과 내가 세상에서 만날 생각은 마시고 하늘나라에서 만나 영원히 삽시다.>라는 격려에 다시 한번 하늘에 기록된 생명 책에 있는 자기 이름을 생각하고 기뻐하며 참고 견디었다고 합니다. /할/
⑦왜 우리가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까? 롬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할/ 여기 '은사'는 최상급으로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은 어디서부터 솟아나는가?
① 관용을 베풀며 살 때 참 기쁨이 넘칩니다(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란 말은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너그럽게 믿어주는 것 ㉡너그럽게 감싸주는 것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관용은 넓은 마음입니다.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관용을 세 종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⑴언어의 관용입니다. 잠15:4절에서 '양선의 혀'는 생명나무이지만, '악독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잠16:24절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선한 말만 합시다. 남을 상처 주는 말은 절대하지 맙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고, 말 한마디로 살인까지 합니다.
⑵행위의 관용입니다. 환난에도 인내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성실하고, 인내하며 살아야 합니다.
⑶마음의 관용입니다. 제일 중요합니다. 먼저 마음에서부터 관용이 나와야 합니다. 용서받는 것은 기쁘지만 여러분, 용서해주면 더 기쁨이 큽니다. 용서란 강한 자 만이 할 수 있고, 이긴 자 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원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본인에게 손해입니다. 미움은 독약과 같아서 속에 품고 있으면 결국 자기가 죽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관용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6:15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또 마18:21절에 보면, 하루에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무한대의 용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면 마음속에 참 기쁨이 넘칩니다.
그런데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어려운 말입니다. 끼리끼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엡4: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이 오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염려 대신에 기도하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우리는 늘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염려대신에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염려는 기쁨의 원수요, 적입니다. 염려가 자라면 불안과 초조를 낳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염려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염려를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하느냐?'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특히 6절에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자칫 기도를 한풀이나 넋두리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감사가 빠지면 안 됩니다. 감사 없는 기도는 원망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기도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기도하면서 염려하는 것은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다 맡겨버립시다. 염려가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믿습니까?/
▶매우 맑고 명랑한 곡을 작곡해서 유명해진 '조셉 하이든'에게 "어떻게 그런 즐거운 곡들을 쓰십니까?"고 묻자, 하이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생각하면 너무 기쁘고 즐겁습니다. 내가 펜을 들기만 하면 오선지 위에서 펜은 춤을 춥니다. 펜이 춤을 추는 대로 써 나갔더니 오늘 이렇게 명랑하고 기쁜 음악이 탄생한 것입니다." /할/ 주안에 있는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언제 기쁨이 옵니까? 7절 "하나님의 평강이 나를 지키실 때"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주경학자 '빈센트'는 '평강은 염려의 해독제'라고 했습니다. 여기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란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과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염려대신 기쁨이 옵니다. 염려는 쪼갠다는 말과 마음이라는 말의 복합어로서 '마음을 쪼개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6:22)고 했습니다.
염려는 우리 마음과 인격을 분열시킵니다. 염려는 사람을 작게 만듭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비난하고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염려는 이렇게 우리의 감정을 파괴해 버리고 우리의 지성을 와해시켜버리고 우리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제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고,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라는 말씀은 '단 한 가지조차도'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자들이 단 한 가지라도 근심하거나 초조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입니다.
'감사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은 '응답이 이루어진 것을 믿음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마7:7)이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눅18:1)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의 결과입니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돌보심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도 생각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강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용기를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이제부터 영원까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돈으로도 해결 못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염려가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을 누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
4. 이것들을 생각하며 지키며 살 때 인생의 참 기쁨이 옵니다(8-9).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생각입니다. 올바른 생각을 할 때 발전적인 삶, 행복한 삶,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각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창조력입니다.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적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소극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생각을 바로 하면, 그 생각을 통해 얼마든지 성공하고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생각을 통해서 더 행복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 '이것들'이란 '좋은 것들'들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다음의 7가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할 만한 것, 칭찬 받을 만한 것, 덕과 기림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생각하라'는 말은 '계산에 넣다, 고려하다, 판단하다'라는 뜻으로, 생각 없이 살지 말고 생각이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①참되게 살 때 참 기쁨이 옵니다.
'무엇에든지'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삶의 상황을 다 포함하는 뜻입니다. '참되다'는 것은 거짓된 것이 아닌 진실된 것을 의미합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남을 속이고 사기치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엡4: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할/
참은 진실을 의미합니다. 거짓되지 않고 숨기지 않고 선한 양심을 써서 진실하게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이든지 참되고 진실해야 합니다.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데리고 마을을 다녀오는 길에 이웃에서 돼지 잡는 것을 본 맹자는 어머니께 왜 돼지를 잡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무의식중에 "너 주려고 잡는단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생각하니 아들을 속인 것이 되어 그 고기를 사다가 주었다고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자식에게도 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②경건하게 살 때 참 기쁨이 옵니다.
경건하다는 말은 점잖다는 말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욕심과 욕망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신앙 인답게 살고, 신앙 인답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경건은 세 가지입니다.
약1: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⑴대신관계: 하나님 앞에서 정렬하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이요, ⑵대인관계: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 보라, 즉 베푸는 삶, 주는 삶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⑶ 대아관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경건의 능력 속에서 나옵니다. 딤후3: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할/
③성도가 옳게 살 때 참 기쁨이 옵니다.
'옳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옳으며" 옳다는 말은 불의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첫 번째 참되게 사는 것과 동의어가 됩니다. 성경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④정결하게 살 때 참 기쁨이 옵니다.
'정결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제사에 쓸 수 있는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흠이 있는 짐승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깨끗하고 흠 없는 짐승만을 드렸습니다.
정결하다는 말은 '순결하다,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깨끗하다는 말은 의미가 심히 넓습니다.
⑴신체상의 정결: 우리의 육신을 잘 가꾸고 관리해야 합니다. 가야할 곳, 가지 말아야 할 곳, 사귀어야 할 사람, 사귀지 말아야 할 사람, 분별 못하면 안 됩니다.
⑵심령상의 정결: 우리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잠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⑶물질 거래상의 정결: 주고받는 거래가 깨끗해야 합니다.
⑷성적 정조의 정결 등 다 깨끗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정결은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거룩한 제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완전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바울은 롬12: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⑤사랑하고 살 때 참 기쁨이 옵니다.
'사랑할 만하다'는 말씀은 사랑을 주고받는 자세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최고의 덕목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기쁩니다.
⑥남을 칭찬하며 살 때 기쁨이 옵니다.
"무엇이든지 칭찬할만하며"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칭찬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눈가림으로 하지말고 진실하게 하라는 것과 또 남에게 칭찬을 인색하지 말라는 말이 됩니다.
⑦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무슨 기림이 있든지"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 보면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⑧배우고, 받고, 본 바를 바로 행할 때 참 기쁨이 옵니다.
크리스천은 배우고 듣고 본 바를 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선의 것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약2:17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실천에 옮기고 노력할 때에 비로소 삶의 비결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잘 지키며 살아갈 때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믿/ 7절에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신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친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행복합니다. 하물며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5. 참된 기쁨은 신앙의 참된 능력을 소유함으로 오는 것입니다(11-13).
우리 사회는 힘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재력이 있든지, 지식이 있든지, 힘이 있든지, 체력이 있든지, 권력이 있는지, 어떤 힘이든지 있어야 합니다.
선거 때가 되면 사람들은 계보를 따라 움직입니다. 줄을 잘 서야 합니다. 누구를 따르느냐에 따라 지위가 바꿔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는 자리는 쉽게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정치판을 보면 믿고 따라 다녔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배신을 당해 좌절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느냐에 따라 그의 인격과 지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여기 자족이란 말은 만족이란 말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산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만족하는 삶과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만족은 긍정적인 삶과 승리의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자족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족도 관계에서 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자족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의 학교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대단한 선언입니다. 바울은 그야말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에 넘치는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될 때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와 연결될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존재로 바꾸어집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참 기쁨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기쁨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줄 믿습니다. /아멘!/
▶시카코에 한 술주정뱅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위스키 병을 갖고 다니며 돈만 생기면 술을 사 마셨습니다. 그에게는 술이 최고지 처자식은 다 필요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에게 귀여운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딸의 약을 살 돈까지도 술 마시는데 써버렸습니다. 나중에 그가 병원에 가보니 사랑하는 딸은 이미 죽고 말았습니다. 딸의 귀중품을 가지고 나가서 그것을 팔아 또 술을 마셨습니다. 그가 술에서 깨어나 제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과연 인간인가? 나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니 살만한 가치가 없음을 깨닫고 죽기 위해 호숫가에 달려갑니다. 그때 어디선가 스피커를 통하여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간절한 전도자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새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소리가 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영접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롭게 만들어 달라'고 통회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는 술도 끊었습니다. 열심히 공장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보고 정말 새 사람이 되었다고 칭찬하면서 나도 저 사람이 믿는 예수를 믿어보리라 자동 전도가 되었답니다.
이것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새로워지고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기독교의 복음인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기쁨은 언제 옵니까? 어떤 환경에서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나폴레옹처럼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세 글자는 없다는 선언일까요? 아닙니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의 능력을 통하여 나는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능력과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이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온 예수님께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당신의 제자들이 못한 일을 당신이 할 수 있거든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능력을 묻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다 없다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 밖에 있느냐? 이것이 주의 능력을 붙잡는 통로입니다.
링컨은 남북 전쟁 때, 정부 각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넉넉히 승리할 것을 믿는다고 하자, 링컨은 "나는 내가 하나님 편이 서 있는가가 더 큰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자가 오늘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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