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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의 기적! 나아만의 축복! (왕하 5:1-14)

by 【고동엽】 2022. 2. 5.

요단강의 기적! 나아만의 축복! (왕하 5:1-14)

 

왕하4장부터 보면, 여호사밧이 남 왕국 유다를 다스리고, 아합의 아들인 여호람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이스라엘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여섯 가지의 기적 사건이 계속 연달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 사건들은 모두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왜 성경은 이 기적 사건을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처럼 다양하고도 엄청나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진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요, 그 기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의 기적은 왕하4:1-7절에 사건으로 준비된 빈 그릇에 기름이 차고 넘치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준비하는 신앙이 귀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8절부터 나오는 수넴 여인의 가정이야깁니다. 수냄 여인은 주의 종을 잘 대접하다가 자기 외동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를 통하여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의 사건은 38절부터 나옵니다. '길갈'에 흉년이 들었을 때, 선지자의 생도들을 먹이기 위하여 큰솥을 걸어 놓고 국을 끓이게 되었습니다.
그 공궤를 위하여 어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어떤 열매를 따 가지고 국에 썰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다 끓여서 먹고자 하니까 국에 독이 생겨서 먹지를 못하게 되었을 때 엘리사가 그 솥에다가 가루를 던져 독을 제하고 배고픈 신학생들이 그 국을 먹게 된 사건입니다.
▶네 번째 사건은 42절부터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익은 식물로 만든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부대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그것을 받아서 무리들에게 주워 먹게 하는데 놀랍게도 100명이 먹고도 남은 풍성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섯 번째로 오늘 본문인 5:1절 이하의 그 유명한 아람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사건으로 이 사건은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섯 번째의 사건은 6:1절부터 나옵니다. 엘리사와 그 생도들을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 나선 사람이 그만 나무를 벨 때에 빌려 온 도끼를 물에 빠뜨렸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졌더니 쇠로 만든 도끼가 물위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도 도끼를 건진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 기적은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가정'에서 베푼 기적이고, 두 번째 기적은 주의 종을 잘 대접하다가 받은 축복이고, 세 번째 사건은 선지자 생도들을 위하여 봉사하다가 기적을 체험했고, 네 번째는 엘리사가 보리떡 조금으로 백 명을 먹인 사건은 우리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예표이고, 마지막 여섯 번째 기적은 선지 생들의 기숙사를 짓다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제목소개▶

 

오늘 본문은 다섯 번째 기적사건으로써 본문에 나오는 나아만이란 사람은 그 당시 최강국인 아람나라 군대장관으로써 권력 서열이 왕 다음으로 가는 제2인자입니다. 그는 전쟁 때마다 큰공을 세워 아람나라를 든든히 일으킨 공로자로써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를 잡았고, 물질도, 명예도, 부귀영화도 한 손에 움켜진 전형적인 고위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든 것 다 가진 것 같은 이 사람에게 치명적인 아픔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문둥병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문둥병은 불치의 병으로써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 당시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생긴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레13:45-46절에 보면, 문둥병 자들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했으며, 사회에서 추방되어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불치의 문둥병 자에게 권력이 뭐가 필요하고, 물질이, 명예가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그는 지위와 권력은 높지만 병으로 인해 몸만 썩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름답고 행복한 환경과 권력과 조건들이 함께 살처럼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손발이 썩어 들어가고 악취가 진동하고 몸에 균형이 하나하나 잃어가고 꿈도 희망도 물거품이 되어버린 비참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작은 계집종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전쟁 중에 이스라엘에서 붙잡아 온 포로로써 그 집에서 하인으로 부려먹고 있었습니다. 이 소녀가 그 주인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말을 합니다.
"우리 주인께서 이스라엘에 가실 수만 있다면 저 병은 틀림없이 고침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능력의 선지자가 있는데 그분에게만 가면 틀림없이 나을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인가? 그래서 복음은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일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기적이 아니고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기적이 필요한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멜테리'선교사는 "하나님은 욕망에 응답하시지 않고 필요에 응답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면 기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문둥병에 걸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계집아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선지자에게 데리고 가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기적을 기대하고 도전하는 이에게 기적이 따릅니다. /할/ 그래서 담대하게 주인에게 생명의 복음을 자신 있게 전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 남편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 이 소식을 들은 나아만은 이 이야기를 자기 왕에게 말을 자세히 말하면서 "이스라엘에 가면 고칠 수 있다는데 마지막으로 저를 그 곳에 보내어 주십시오."
허락을 한 왕은 나아만을 이스라엘에 보내면서 그냥 보내지 않고 금과 은과 옷 열 벌을 말에다 싣고 수백 명의 수행원들을 부쳐서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은 "당신 나라에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있어서 문둥병을 고친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의 충성스런 신하인 이 나아만의 병을 좀 고쳐 주시오"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도 함께 보냈습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의 9대 왕인 여호람 왕은 이 친서를 받아들고 기가 막혔습니다. 각료들을 모아 의논을 해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내린 마지막 결론은 "이는 엉뚱하게 문둥병 자를 보내서 치료해 달라고 하고서 이를 못 고치면 이를 핑계로 우리를 공격하고 정복하려는 야심이 있는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여러분,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떻게 문둥병을 쉽게 고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걱정이 되고 긴장이 되었습니다. 음식도 먹지 않고 옷도 매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풍속에는 슬픈 일이 있을 때, 머리를 풀고 옷고름을 매지 않고 흐트러트리면서 슬퍼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들었습니다. 그 계집아이가 말한 것은 '엘리사에게 보내라'는 것이지 왕에게 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엘리사도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그래서 나아만을 엘리사에게 보내었습니다.

한편 엘리사는 나아만의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그들이 문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몸종 게하시를 보내어 "당신은 여기 올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곧장 요단강가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하면 깨끗하게 나을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전해 놓고 들어가 버립니다.
나아만이 들어보니 기가 막힙니다. 대국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 왔는데도 정중하게 영접하지 않고 자기 나라의 깨끗한 강물도 놔두고 흙탕물인 요단강에 가서 목욕을 하라니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아만이 생각할 때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이 요단강은 그리 큰 강도 아닙니다. 우기 때만 물이 범람하지 보통 때는 우리나라 큰 냇물과 같습니다. 이런 요단강에 가서 목욕을 하라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나아만은 '이것은 나와 우리나라의 모독이다'고 분개하면서 신하들을 데리고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괘씸해하고 있는데 신하 한 명이 이야기합니다. "장군님 그러지 마시고 한번 순종해 보십니다. 만약에 저 높은 산을 올라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 어려운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이 낫는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번 해 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참 지혜 있는 신하입니다.
나아만의 종들은 '내 아버지여!'라고 부를 정도로 충성을 다하는 종들이었습니다.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축복을 받은 사람인줄 믿습니다.
이제 지혜 있는 신하의 말을 들은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일곱 번을 목욕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거짓말같이 그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곱 번 목욕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능히 고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눈먼 장님을 치료하실 때 그의 눈에다 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 못에 내려가 눈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흙이 고치는 것이 아니고, 실로암 물이 고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순종했을 때 고쳐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모습을 보시려고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나아만도 그 요단강 물이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얼마큼 하나님의 말씀(엘리사의 말)을 순종하고 있는가를 하나님이 보시려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주의 종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흙탕물 속에 일곱 번 몸을 씻었더니 그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나아만은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그의 말에다가 이스라엘의 흙을 싣고 갑니다. 그러면서 "나는 이제부터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를 고쳐주신 나의 하나님만 믿고 섬기며 살겠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배경입니다.

우리는 본문 안에서 귀한 진리를 캐내야 합니다. 오늘 이 문둥병을 고치도록 인도한 사람이 누구인가? 조그마한 계집아이입니다. 이 계집아이는 주인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보고 함께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보고만 있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의 주인을 이스라엘로 안내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반듯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가 할 일은 이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어려움을 안고 사는 자들에게 우리의 할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가십시오, 교회에 나가십시오.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병이 당신의 가정의 불행이, 자녀의 문제가, 당신의 사업의 문제도 그리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할/
계집아이의 말 한마디로 나아만 장군이 살아났습니다. 나아만이 살아난 것은 아람 나라가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개인을 살리고 민족을 살립니다. 우리가 보통으로 전해도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아멘!/
사실 계집종의 말 한마디는 하잘 것 없고 극히 논리적인 것도 못되고 과학적인 것도 못되는 하나의 미신적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그 소녀의 말대로 행했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나아만은 그 당시의 권력의 2인자였습니다. 그런 자가 병들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병 문안을 했을 것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을 것입니다. 요즘 표현에 빌리면 고급 승용차가 대문에 줄을 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빈손으로 왔겠습니까? 좋다는 약을 많이 가져왔을 것입니다. 연구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돈도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일부 양심 없는 정치인들 중에는 돈이 궁하면 병원에 입원을 한답니다. 그러면 어느 기업에서 병 문안을 와서 "얼마나 힘드십니까? 치료비라도 쓰시지요?" 그냥 주면 뇌물이 되지만 치료비로 명분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업인이 나가면 그 정치인이 얼른 일어나 돈을 세어본답니다. '천만 원, 이천만원'은 보통이랍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나아만 장군은 이 보잘 것 없는 계집아이가 생명을 고쳐준 은인이었습니다. 좋은 약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 의인이 아닙니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문병을 온 사람들이 그 사람을 고쳐준 것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계집종이 나아만 장군의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그 계집종이 축복의 해결사가 된 것입니다. /할/아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길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악의 물결에 밀려 지옥의 늪으로 깊이 빠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이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생명을 살리고 병을 고치는 능력이 많으신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오늘 선포되는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레마'로 받으시면 여러분들이 살고 가정이 살고 민족이 삽니다. /믿/
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삽니다. 주일을 지키면 고침을 받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해결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덴마크가 전쟁에 지고 외채로 인하여 국가가 남의 나라에 넘어가려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룬드비' 목사님이 국회에서 <하나님께로, 이스라엘로, 요단강으로 가자>고 국민에게 연설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자는 외침입니다.
그랬더니 온 국민이 따라주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덴마크는 이 위기에서 어려움을 이겨 오늘날 세계에서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영국이 부패하고 썩어질 때, 존 웨슬리 목사가 나와서 영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더니 오늘날 세계에서 축복 받은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계집아이에게 배워야 합니다. 나아만과 같이 절망 속에 빠진 자들에게 하나님께로, 이스라엘로, 요단강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요단강은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할/
▶이제 나아만 장군을 보면서 신앙의 과정 과정을 통하여 축복 받는 비결을 알아보겠습니다.

 

1. 말씀을 들음으로! 복음을 믿음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나아만은 계집종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지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자들입니다. 듣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완전히 믿었습니다. 전해준 계집아이도 귀하지만 그 말에 순종한 나아만 장군은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사실 이 계집아이는 생명을 걸고 전한 복음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 노예의 생사여탈권은 그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만약 나아만의 문둥병이 안 고쳐진다면 이 소녀의 생명은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정말 큰 믿음을 가진 계집아이입니다. 이 소녀는 나아만장군의 병은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하는 자가 확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잘 믿으면 이 땅에서도 하늘의 신령한 복이 임하고, 이 땅의 기름진 분 복이 넘쳐 납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나아만 장군을 보자! 그 자리에서 늘 명령만 내렸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보잘 것 없는 그것도 포로로 잡혀온 계집종의 말에 순종했다는 것은 그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기본이라는 것이 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본(마음)을 보십니다. ▶삼상16:7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시34: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2. 결단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은 부어주십니다.

 

5절 "나아만이 곧 떠날 세" 신앙은 결단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무에게나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하는 자에게 즉 '그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야!' 결심하고 결단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믿/
나아만이 떠난다는 것은 행함이요, 결단입니다. 그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도 않았습니다. '곧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떠올립니까?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엄청난 명령을 내렸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모리아산에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번제란 죽여서 각을 떠서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왜 이런 엄청난 시련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는가?
⑴믿음을 확증해 보시기 위한 것입니다. '떠나는가? 안 떠나는가?' 여기에서 순종과 불순종이 가려집니다. 고후13: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⑵하나님만을 사랑하는가를 보시려고 시험하십니다. 신13:3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⑶하나님은 우리의 기본(심중)을 체크해 보십니다. 대하32:31절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⑷온전한 축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신8:16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할/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똑같은 영적 원리로 우리들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감동 주실 때, 명령하실 때 즉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3.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갔듯이, 하나님 앞에 나오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막5장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는 여인은 많은 의원을 찾아다녔고 가진 재산도 다 허비하였으나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했고 오히려 병이 더 중해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여인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기적을 행하신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하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길은 오직 주님 앞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경상도에 전통적으로 무당말만 듣고 살아온 어떤 마을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는데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무렵에 그 마을에는 온천이 개발되어서 온천 탕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온천 탕에도 사람이 한 사람도 안 옵니다. 왜냐하면 무당이, "누구든지 제일 먼저 이 온천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은 죽는다"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목욕탕 주인은 첫 번째로 오는 남·여 손님에게는 각각 100만 원씩 상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상금을 걸어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목욕탕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때는 이때다 하고 사모님과 함께 온천에 목욕을 갔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목사님 부부가 이제 시체가 되어 나올 줄 알고 목욕탕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30분, 40분, 50분, 60분, 가마니를 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1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 두 사람이 다 얼굴이 뽀얗게 되어 나왔습니다. 죽기는커녕 깨끗이 씻어서 더 훤해져서 나왔습니다. 게다가 상금까지 받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제야 자기들이 이제까지 무당에게 속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당보다 목사가 더 세구나!"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도 나오고 목욕탕에도 다녔다고 합니다. /할/

 

4.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0절에서 엘리사의 몸종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요단강물에 몸을 일곱 번 씻어라'고 하자 이 소리에 나아만이 골이 낫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환영해 주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어떤 종교적인 행사와 더불어 직접 머리에 안수 기도를 하면서 최선을 다해 줄줄 알았는데 그 흙탕물 속에 들어가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씩이나 씻으라고 하니 성질이 난 것입니다.
나아만은 병을 고치러 엘리사를 찾아가면서도 군대와 병거를 거느리고 갔습니다. 그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대단히 큰 힘을 발휘하며 대체로 그 위엄에 굴복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철저하게 나아만이 과시하려 했던 모든 것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의 지위, 그의 위엄, 그의 권력, 그의 금력, 그가 거느리고 온 군마와 병거 등을 다 무시해 버렸고, 그를 단순한 한 병자로 취급을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종다운 처신입니다. 오늘날 이런 종의 권위가 떨어진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55:8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은 대우받기를 원했습니다. 처음 계집종의 말을 듣고 신앙의 출발은 참 좋았는데 그 마음에 생각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나아만 뿐이겠습니까? 목사인 나도 내 생각과 이론 때문에 하나님 중심에 서지 못한 때가 어디 한두 번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이론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주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낮아진 곳으로 흐릅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 생각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생각은 니느웨인데, 자기 생각대로 다시스로 갔다가 큰 풍랑을 만났고, 다윗은 자기 생각대로 인구조사를 했다가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았고, 가룟유다는 자기 생각대로 예수를 판단하고 은 30냥에 자기 스승을 팔아 배신자가 되더니 그의 종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목을 매 자살을 하고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또 11절 마지막 절에 보면 나아만은 '고칠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고칠까 하였도다'라는 신앙은 굉장히 위험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까? 치료해 주실까?" 이 까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라고 하면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서라고 하면 멈추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요단강물이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믿/
신28:2절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라"

 

5.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 겸손해야 합니다.

 

14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어디로 내려갔습니까? 요단강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갔다'는 말은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대접을 받겠다는 생각도 버렸습니다. 참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자세입니다. 나아만은 되돌아가려는 분노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그가 요단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타고 온 말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찬란한 훈장과 계급장이 달린 장엄한 군복도 벗어 놓고 강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의 말과 훈장과 계급장은 그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합니다. 권위와 권력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런 그가 요당 강에 내려갔다는 말은 지위도 권위도 권세도 다 내려놓았다는 의미입니다.
약4:6절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우리 모두 겸손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6.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14절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에게 직접 말씀하옵소서. 그러면 내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기를 원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모세를 통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오늘날은 당신이 세우신 주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믿/
나아만이 요단강 물 속에 일곱 번 몸을 담급니다. 이것은 나아만이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자존심을 포기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액면 그대로, 말씀 그대로 믿으십니까?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정말 큰 문제는 우리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라면 그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데, 문제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의 불 신앙이 문제입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어라'고 한 것은 주의 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분부입니다. 사실 '요단강에 몸을 씻으라'고 한 것은 이치에도 과학적으로도 맞지 않은 말씀입니다. 나아만이 말한 대로 요단강은 다메섹강보다 깨끗하지 못하며 오히려 문둥병을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과학도 상식도 초월합니다.
'칼 바르트'는 <믿음은 인간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했고, '앤드류 마레이'는 <예수 믿는 성도는 '순종학교'에 입학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완전한 순종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나아만이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 그 부하들은 큰 소리로 '한 번입니다'하고 크게 외쳤을 것입니다. 그때 자기의 몸을 보아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두 번, 세 번, - 여섯 번째'까지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몸을 완전히 잠그고 일어났을 때, 온 피부가 곱고 윤기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4'하'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할/
여러분, 성경의 일곱 번은 완전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숫자 3과 세상 수 4를 합한 수가 일곱입니다. 순종하려면 완전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완전한 순종이 하늘의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요 통로입니다. /믿/
그러므로 우리가 두 번이나 세 번만 순종할 것이 아니라 일곱 번까지 완전히 순종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오늘날 고침 받지 못하는 사람, 기도 응답 받지 못하는 사람,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나는 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응답 받지 못하고 축복을 받지 못할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하다 그만두고, 다섯 번 하다 포기하고, 여섯 번 하다 포기하고, 온전한 신앙으로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도 끝까지, 응답 받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려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순종을 하더라도 완전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끝까지 순종해야지 순종하다가 도중에 포기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1:19-20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 우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에머슨'은 "기적은 수학적인 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기적적인 사람에게만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기적은 기적을 믿는 사람에게만 나타나지 기적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아만은 온전한 순종을 했습니다. 나아만이 요단강물에 몸을 완전히 잠기므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완전히 잠그지 못하고 겨우 발목이나 잠그고 무릎이나 허리를 부분적으로 잠그므로 부분적인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은혜는 퐁당 빠져야 합니다. 성도는 뭐니 뭐니 해도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①은혜를 받아야 겸손하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은혜 받은 사람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감격만이 넘쳐나게 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한다는 말은 은혜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②은혜를 받아 깨달은 사람이 감사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③은혜를 받은 자가 헌신하면서도 행복합니다. /할/

 

7. 은혜 받은 사람은 오직 주님께만 경배하며, 헌신하며 살기를 다짐합니다.

 

나아만이 고침 받고 너무나 기뻐서 엘리사의 집으로 다시 찾아가서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라고 말하면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만 여호와께" 이 신앙이 귀한 것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 은혜 받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두 마리의 말에 이스라엘의 흙을 싣고 자신의 조국에 가져갈 것을 허락해 줄 것과 자신이 가지고 온 예물을 받아달라는 것이 15-17절의 이야기입니다.
왜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흙을 노새 두 마리에 실을 만큼 달라고 했습니까? 그것으로 제단을 만들고 오직 하나님께만 제사를 드리겠다는 약속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삶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만을 섬기는 삶, 그것은 완전히 인생관이 바뀐 것을 뜻하며 세계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아만의 나병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고치신 것입니다.
나아만은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가 자기 나라인 아람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을 것이며, 그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봉사·헌신을 했겠습니까?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다 할지라도, 집사, 권사, 장로, 목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없으면 어떠한 기적도 능력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 교회에 나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역사 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8. 우리도 기적의 주인공!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⑴체면을 버려라!
체면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합니다. 나아만처럼 체면과 특권의식의 껍질을 깨뜨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문화는 체면문화입니다. 이 체면이 골치 아픕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체면을 몰수해야 합니다.
⑵선입견을 버려라!
선입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내 방법은 이랬는데' 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을 수용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려면 자신의 생각과 방법을 포기해야 합니다.
⑶교만을 벗고 겸손의 과정을 통과하라!
우리가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만의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반드시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⑷믿음을 더 세워라! 믿음을 더 키워라!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방편은 믿음입니다. 기적도, 축복도 믿음의 통로를 통하여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두고 중요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4:27절에서 예수님이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6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3년 6개월 동안 닫혀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가 그 중에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 사렙다에 있는 한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이적을 행하시던 차에 자신이 자라나신 나사렛의 회당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 장군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이지만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단지 시돈지방의 시골 사렙다 과부만이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수많은 문둥병자에게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만이 엘리사로부터 문둥병을 고침 받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고, 상관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사렙다의 과부나,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이 모두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누리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적의 체험의 통로가 무엇인가? 믿음입니다. 헌신도 충성도 순종도 사랑도 이 믿음이 없이는 할 수가 없습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⑸전하라!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도 본문의 어린 계집종이 한 일을 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나아만은 이런 자리로 인도한 자가 누구입니까? 어린 계집종입니다.
우리 성림교회도 이런 계집아이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어야 부흥될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가십시다. 요단강에 몸을 담급시다. 성림교회로 가십시다. 그곳만이 기적이 있습니다. 그곳만이 생명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 앞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들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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