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 13:1-9/18-23)
‘홍성사’에서 출판된 <각설이 예수>란 책은 이천우 목사님의 간증집입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어머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두 살 때에 우여곡절 끝에 거지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거지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어떤 남자에게 이끌려 소매치기 소굴로 끌어갔습니다. 거기서 20여 일 동안 소매치기 교육을 받고 서울역으로 실습을 나갔습니다. 바람잡이가 시골 아주머니를 도와주는 척하면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면 곁에 있던 이천우가 돈주머니를 슬쩍 꺼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안 됩니다.”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 돈 주머니 조심하세요. 저는 소매치기에요.”
그날 이천우는 패거리들에 의해 소굴로 끌려가서‘사형집행’이란 것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죽도록 때린 후에 2층에서 아래쪽 쓰레기 야적장 유리조각 더미로 던져버리는 벌이었습니다.
정신을 잃어버린 그는 한참 지난 후 겨우 정신을 차리고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쳐보았지만 피투성이가 된 그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다시 잃고 쓰러졌습니다. 눈을 떠보니 각설이 한 명이 자기 움막에 눕혀 놓고 온 몸에 박힌 유리 파편을 뽑아주고, 유리가루는 자기의 혀로 핥아주고 있었습니다. 혀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이천우를 각설이가 살려준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금발의 머리를 가진 멋진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눈앞에 있는 각설이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각설이는 바로 자기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도 각설이가 될 수 있습니다. 죄로 죽어가는 생명들을 건져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줄 믿습니다. /할/ ◀제목소개!▶
씨를 뿌리는 자는 가장 큰 기쁨을 가을에 풍요로운 추수를 거두는데 있습니다. 농부는 이른 봄에 땅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태양빛 아래서 김을 매어주고 비료를 주며 비지땀을 흘리면서 수고하고 또 병충해를 방지하면서 오래 참음으로 가을에 풍요로운 곡식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않는 생명의 씨앗)이요, 우리 마음은 (말씀에 씨앗을 뿌리는 밭)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서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가 풍년들기를 원하고 수확을 많이 거두는 것을 원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이 말씀에 씨앗을 통해서 신앙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믿/
예수님은 요15: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고, 시126: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1. 본문의 배경을 상고해 보자!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 가장 유명한 비유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어떠한 배경에서 이 비유를 주셨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비유란 어원적으로 ‘옆으로 던진다.’ 혹은 ‘곁으로 던진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우리가 지금은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현세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을 들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마다 비유를 많이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때는 아마도 봄날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배에 타고 계십니다. 이 배가 예수님의 강단이었고 바닷가에 모여든 큰 무리가 그날의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있던 청중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바닷가 저 건너편에서 씨를 뿌리는 농부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그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를 시작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4복음서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일생을 다루고 있지만, 각 복음서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고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합니다. 반대로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섬기는 종으로 묘사합니다. 마가복음은 제일 짧습니다. 예수님은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부지런히 우리를 섬기시는 종으로서 일하시는 모습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자되심, 곧 사람의 아들이심을 묘사하면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인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복음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합니다. 마1: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세계라는 말은 족보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왕권을 그대로 이어받은 분이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2:2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동방박사들의 말 그대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서 왕 되신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치심과 베푸신 능력을 통해서 왕 되신 것을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가운데는 왕 되신 예수님을 바로 영접치 아니하고 오히려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왕 되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라고 주신 교훈입니다.
여러분! 바른 제자는 스승의 유언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이 무엇입니까? 막16:15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눅14:15절 이하에 보면, 왕이 잔치를 배설하고 손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이 초청받은 사람이 다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비상사태를 선포합니다. “길가나 골목이나 시장에 가서 가난한 자들, 병신들, 눈먼 자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잔치자리가 비었습니다. 그 때 주인은 또 한번 비상선언을 합니다. “길가나 산울가로 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이 잔치는 천국잔치의 모형인데, 왕이 배설한 잔치는 굉장한 잔치입니다.
16절 “큰 잔치”라고 했고, 17절에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주인이 말한 비상선포는 “길가나 골목이나 시장이나 산울가로 가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한 여기에 아주 중요한 전도원리가 있습니다.
⑴전도는 특정대상이 없습니다.
아무나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모든 계층의 모든 종족에게, 모든 대상에게 열려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양반이 모이는 교회, 상놈이 모이는 교회, 상류층만 모이는 교회, 하류층만 모이는 교회는 교회답지 못합니다.
왜 교회가 부흥합니까? 모든 계층에게 복음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쉬운 것입니다. 특정계층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면 그 계층에게만 찾아가야 합니다. 그 계층을 만나려면 온갖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⑵장소의 특정의미가 없습니다.
전도는 장소가 없다고 핑계하지 못합니다. 내가 일하는 일터, 사는 곳, 길가나 골목이나 시장가나 아무데서나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모든 계층에, 모든 종족에게 모든 나라에 개방되어 있는 아름다운 은혜입니다. 특정장소가 없습니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복음은 열려 있습니다.
⑶특정 방법이 없습니다.
전도는 절대로 정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무어라고 말합니까?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데려오고 강권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강권을 받아서라도 오기만 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강권할 이유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복음의 잔치에 대한 열정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우리 왕의 잔치에 데리고 가야 할 심부름을 받은 종이라는 이 복음 전도자의 열정이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얼마든지 가능한 줄 믿습니다. /할/
2. ‘씨 뿌리는 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밭에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고, 또 더러는 돌밭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다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나아가서 전도할 때에도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길가처럼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서 아예 복음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돌밭처럼 흙이 얇아서 그저 말씀을 듣는 척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보다는 세상일에 관심이 많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믿음이 깊이 박히지 못하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 같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옥토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씨 뿌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능력입니까? 재능입니까? 말 잘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그저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부지런히 나아가서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할/
3. ‘밭’은 땅입니다. 땅(흙)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창2: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은 흙의 특성을 통해서 사람됨의 모습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계십니다.
⑴흙의 특성은 생명입니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 출발합니다. 초식동물도 육식동물도 흙에서 나는 열매를 먹고 삽니다. 물속에 사는 어류도 바다 밑바닥에 흙이 있기에 생존할 수 있습니다. 흙은 생명의 양식을 제공합니다.
흙은 생명이기에, 흙이 오염되면 인간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인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생명을 서로 나누면서 살아야 할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미 내게 주신 새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는 것보다 더 소중한 섬김은 없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이 점점 상실되어 가는 이 시대에 우리 안에 있는 예수생명의 능력을 나누어 주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생명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⑵흙의 특성은 사랑입니다.
흙은 인간들이 버리는 온갖 더러운 오물들을 끌어 앉습니다. 만약 흙이 인간의 쓰레기를 품어 주지 않는다면 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난지도의 쓰레기더미를 보십시오. 거대한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곁을 지나다 보면 그곳에는 각종 꽃들이 피어나고 숲이 우거져 있는 것을 봅니다.
흙은 어느 것이든지 차별하지 않고 모두 포용하여 깨끗하게 정화를 시켜줍니다. 흙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인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⑶흙의 특성은 정직입니다.
흙은 정직합니다. 흙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바로 사람됨의 모습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직성의 회복은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입니다. 미국 국세청 발표에 의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한국인이 가장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황우석 파동에서 과학자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문가조차도 한국인들의 이중장부와 교묘한 탈세에 감탄할 정도라고 합니다.
호주에서도 가장 부정직한 민족으로 한국인을 꼽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한국인을 제일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서 정직성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를 보고,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⑷흙의 특성은 봉사와 섬김입니다.
흙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토기장이에게 모든 것을 맡겨둡니다. 남과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들어준 대로 묵묵히 자리를 지킵니다. 인간을 위한 도구로서 봉사합니다.
또한 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밑에 들어갑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간에 흙은 발밑에 존재합니다. 흙은 겸손을 보여줍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겸손함을 잃어버린 사람은 참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내 마음에 밭이 옥토가 되어질 때 이런 능력이 나오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오, 주여! 내 마음을 갈아서 부드럽게 해 주옵소서." /할/
4. 네 종류의 밭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의 배경이 되는 팔레스틴 지방의 농지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팔레스틴의 밭들은 대개 길다란 모양이었고 그 옆으로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틴 지역은 대부분 산지로써 가파른 언덕을 일구어 만든 비탈진 밭입니다. 이러한 밭에는 석회석이나 대리석 같은 암반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와 같은 옥토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이 많아 조금만 밭을 매지 아니하면 가시덤불의 기운이 온 밭을 덮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씨를 뿌릴 때,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⑴호미나 발로 땅을 헤치고 씨앗을 넣어 심는 방법이 있고, ⑵씨앗을 손에 쥐고 훨훨 뿌리는 방법과 ⑶당나귀 등에 씨앗 자루를 얻고 구멍을 내서 짐승이 움직이는 대로 씨앗이 떨어지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나 세 번째에 해당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밭은 우리의 마음(심령)인줄 믿습니다. ▶네 종류의 밭을 알아보겠습니다.
①길가와 같은 마음의 밭입니다.
길가와 같은 밭은 19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라고 했습니다. 또 막4:15절에서는 길가에 뿌린 씨앗은 새가 와서 주어먹어 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길가란 밭과 밭 사이에 나 있는 작은 통로인데 사람들이 늘 상 지나다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시골에서 보면 논이나 밭에 있을 때, 조금 돌아가면 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름길을 가기 위해 기어이 가운데를 밟고 지나갑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는 반들반들 굳어지고 마는데 여기에 뿌려진 씨앗은 새들이 와서 주어먹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실은 생각해 볼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땅, 굳은 땅, 단단한 땅은 우리 인간의 ‘닫힌 마음, 굳은 마음, 고집스러운 마음, 교만한 마음’일 수 있습니다. ‘닫힌 마음, 굳어진 마음, 교만한 마음’은 아무리 하나님의 귀한 약속의 말씀을 전해도 들어가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닫힌 마음에 무슨 말씀이 들어가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이 열려져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마음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노크하고 계실 때, 우리는 문을 열고 그분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열매는 맺게 되어 있습니다.
계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할/
곽선희 목사님은 ‘인간에게 가장 불쌍하고 괴로운 것은 마음의 귀가 어두운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바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면 그 사람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지혜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권면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보다 더 큰 소리는 하늘의 소리, 생명의 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닫힌 사람은 귀를 닫아 버리고 맙니다.
▶또 길가에 있다는 말은 자신의 편견으로 자기의 고집으로 꽉 차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의 편견과 고집으로 꽉 차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요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은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빌립이 그에게 예수에 대하여 전도할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일단은 거부를 합니다. 그러자 빌립이 ‘와 보라’고 할 때 그가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이 사람 나다나엘은 자신의 고집과 선입관을 버릴 줄 아는 그러한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만이 절대적이라는 편견입니다. 물론 자신의 지식, 경험이 귀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이 경험이 최고라는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방법을 무시하는 자요, 바로 본문의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또 길가는 무관심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관심입니다. 무관심은 불신앙입니다.
▶또 길가는 습관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것입니다. 구교인 가톨릭이 썩어진 것은 형식화 의식화 하면서부터입니다.
그렇다면 길가와 같은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깨뜨려야 합니다. 녹아져야 합니다. 부셔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길가와 같은 완악한 마음을 깨뜨려 옥토를 만드시기 위해 때로는 가정적인 시험, 사업의 어려움, 육신의 질병을 통해 옥토를 만드는 작업을 하십니다.
②돌밭과 같은 마음의 밭입니다.
씨를 뿌렸습니다. 돌밭이니까 그 밑엔 바위들이 있으므로 자연적으로 흙이 얇게 깔릴 수밖에 없습니다. 씨가 뿌려지기는 했지만 흙이 깊지 않음으로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은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는 기쁨으로 받되...)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맞아, 그래, 아멘!’ 말씀을 받을 때 기쁨으로 받습니다.
또 예수님의 설명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말씀을 받는 순간 ‘맞았어, 진리야, 이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진리인가?’ 받는 순간은 기쁨과 은혜로 받는데 이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을 포기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 바위는 원문에 보면 반석을 의미합니다.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했습니다.
▶습기가 없다는 말은 ‘은혜가 없다’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말씀은 은혜의 토양 위에 자랍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은혜가 없어서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 잘 받는 것 같은데 돌아서서는 잘 따집니다. 비판합니다. 자기 수준에 맞춥니다. 그러니 영적깊이가 없습니다.
‘레마’ 주석에 보면 ‘습기가 없다’는 말은 말씀은 듣지만 기도와 묵상이 없는 성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심지어 기도회에 참석해도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고 주위에서 맴도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신앙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말씀을 묵상하며 묵상한 말씀 붙들고 기도할 때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또 반석은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기 때문에 크게 자랄 수가 없는 밭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넘어집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신앙이 흔들리는 교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은혜를 받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고개를 끄떡입니다. 아멘 합니다.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하지를 못합니다. 왜? 은혜도 못 받았고, 신앙의 뿌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깊은 뿌리를 내리려면 말씀의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말씀의 뿌리가 약하면 곧장 무너지고 맙니다. 불은 땔 때에는 부글부글 끊다가도 불이 꺼지면 바로 식어져 버리는 냄비 같은 신앙, 시작은 잘하지만 끝맺지 못하는 믿음, 입학은 하지만 졸업은 못하는 믿음입니다.
마라톤 경주에서 시작을 하여 뛰지만 얼마 못가서 쓰려지는 사람과 같습니다. 설교 들을 때는 신앙의 삯이 나서 믿기를 결심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면 부모와 가족들이 반대하고 핍박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그 신앙을 포기합니다.
이런 신앙을 돌밭에 뿌린 씨앗이라고 비유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환경에서 지내다보면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생명 또한 역설적인 데가 많습니다. 비바람을 맞음으로 오히려 강해지고 역경 속에서도 더욱 성숙해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이치요 근원입니다. 동물도, 식물도, 인간도, 인격도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상이 평탄해지면 자라지 않습니다. 거센 핍박과 고난을 통할 때 우리의 신앙은 새롭게 성장합니다.
여러분 어떠한 핍박도 고난도 감수하시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 핍박이 그 고난이 우리의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멘!/
③가시밭과 같은 마음의 밭입니다.
7절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22절은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 떨기 밭은 흙이 있는 옥토인데 함께 자라는 잡초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영향을 다른 데로 다 빼앗기게 됩니다. 사실 잡초들이 많으면 알곡이 누렇게 떠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참뜻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세상적인 근심과 걱정 때문에 다 빼앗겨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데 그 말씀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먹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까? (세상의 염려와 물질의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3가지 이유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⑴‘이생의 염려’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생의 염려란 온갖 인생살이에 대한 염려입니다. 특히 어떤 분은 장래 문제를 염려합니다. 예수님은 장래 문제를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염려하므로 너희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마6:27).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걱정합니다. ‘재산 때문에, 건강 때문에, 자녀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주일날 설교시간에, 기도시간에, 찬양시간에도 집안 걱정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생활 속에 하는 염려 중 90%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걱정이랍니다. 그렇다고 10%가 다 들어맞는 염려가 아니고 불투명하다고 합니다.
▶큰 사업을 하고 있는 ‘아서뱅크’는 사업으로 인한 고민, 걱정, 불확실성, 미래에 대한 절망 때문에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초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을 염려에 붙잡혀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일주일 중 하루만 염려하는 날로 정하여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염려상자를 만들고 그날그날 염려되는 것을 적어서 염려상자에 넣고 수요일에 한번 그 염려 메모를 꺼내서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날그날 메모지에 기입하여 상자에 넣을 때에는 큰 염려거리로 생각되었던 것이 며칠이 지난 수요일에 꺼내보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염려 근심 걱정이 있습니까?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걱정도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라는 말은 ‘메림네오’라는 말로 ‘물어뜯는다.’는 뜻입니다. 또 그 속에는 ‘짐승이 이빨로 몸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인다.’는 가공할만한 의미도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염려는 우리의 인생을 물어뜯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물어뜯습니다. 신앙을 물어뜯습니다. 이런 걱정, 저런 걱정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힐 수가 없습니다.
⑵재리의 염려 때문입니다.
재리는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말씀을 듣긴 들었는데 세상 재물을 더 모으는 욕심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재리에 말려든 사람은 돈을 벌 생각 밖에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마음을 꽉 지배하고 있으므로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마치 마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 같이 영생은 얻고 싶으나 "그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나를 쫓으라 하니 이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 가니라"고 했습니다.
⑶유혹(일락) 때문입니다.
일락이란 세상 즐거움입니다. 육신의 쾌락을 쫓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떠났고" 했습니다.
④좋은 땅은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입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23절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 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또 똑같은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눅8:15절에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여기서 강조한 말씀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이요, 그 깨달은 말씀을 부여잡고 실천할 때 축복의 문이 열려집니다. /믿/아멘!/
또 눅8:15에서 강조한 말씀은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지킨다. 인내한다는 말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깨달아 지켜 인내함으로 마침내 결실을 맺는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옥토는 부드럽습니다. 돌이 없으니 흙이 부드럽고, 잡초와 가시덤불이 없으니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그리고 흙이 깊어서 뿌리를 깊게 뻗을 수 있습니다. 이 옥토와 같은 마음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또 옥토의 밭은 믿음과 순종으로 변화된 마음입니다. 마8장에 있는 백부장처럼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 얼마나 좋은 신앙입니까? 이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기를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옥토는 ⑴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마음입니다. 행17:11절에 “뵈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시기심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히 받아 드릴 때 좋은 마음 밭을 옥토라 했습니다.
⑵들은 말씀을 지켜야 옥토라 했습니다. 들은 말씀을 그대로 지킬 때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생명이 있어 열매를 맺습니다. 순종한 만큼 열매를 맺습니다.
⑶인내해야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내 한다’는 말은 ‘참다, 견디다, 버티다.’ 는 뜻입니다. 씨앗을 심어 두면 금방 싹이 납니까? 시간이 지나야 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었으면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좋은 땅에 씨앗을 내리는 옥토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이 평신도로 신앙생활을 할 때 그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 가운데서 믿음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이런 의구심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출석했는데 이렇게 익숙하게 종교적 환경을 접하고 있는데, 나는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어왔는데, 왜 내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으며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있는가?)
그러던 어느 날 존 번연은 오늘 본문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이 사단이라는 사실 앞에 그는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사단이 내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이라면 그래서 나의 영적인 안목이 없어지고 나의 삶에 변화가 없다면 분명 자신이 사탄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이 존 번연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부터 존 번연은 설교를 듣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지하게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마침내는 참된 믿음에 도달할 수가 있었고, 그 믿음을 가지고 수 없는 영혼을 깨웠고, 그리고 그는 수세기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을 남긴 위대한 천로역경의 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5. 말씀 받는 자세가 중요합니다(9).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 마음속에 옥토 밭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질 때 굳센 믿음, 강한 믿음, 불같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성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동물들 중에는 사람보다 소리를 훨씬 잘 듣는 것들도 있고, 어떤 동물은 사람보다 소리를 잘못 듣는 동물도 있습니다. 악어는 오분의 일, 개구리는 이분의 일이며, 개는 사람의 두 배, 고양이는 사람보다 두 배 반을 들을 수 있고, 박쥐는 사람의 다섯 배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소리의 귀가 밝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세한 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⑴귀가 할례 받지 못해서 못 듣습니다. 행7: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
⑵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행28:27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⑴말씀을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렘13:15절 "너희는 들을 찌어다 귀를 기울일 찌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사55:3절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 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원이 살리라"
주님은 계2-3장 끝부분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6. 이제 옥토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①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씨앗에 물 주듯이 물을 주어 가꾸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 왕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백성들도 우상과 정욕에 빠져 있을 때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여 3년 6개월 동안 하늘의 문이 닫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산천초목이 다 타고 백성들은 굶어 죽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다시 기도하여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습니다. 땅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시면 우리들의 범사에도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생활의 열매, 건강의 열매, 물질의 열매, 사업의 열매, 가정의 화목의 열매가 일어납니다.
신28:12-13절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면 박토가 변하여 아름다운 옥토가 되고 사막이 변하여 물 흐르는 에덴동산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의 성령입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쉬지 않고 기도할 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믿/아멘!/
②그 다음에 우리는 성령의 단비로 물을 주고 또 신앙의 비료를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비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십시다.
어린아이들은 밥을 잘 먹으면 건강합니다만 편식하면 갈비씨가 됩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은 금방 펄 적 뛰었다가도 무너지고 맙니다.
③또한 말씀으로 영양분을 섭취했으면 우리는 찬송과 감사로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먹었다고 할지라도 소화불량에 걸리면 다 소용이 없습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활력소입니다. /아멘!/
감사하는 신앙은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며 그곳에 항상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④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잡초가 있습니다. 뽑아주고 벌레를 잡아줘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잡초는 염려, 근심, 걱정, 불안, 절망, 좌절감, 불평, 원망입니다. 이 잡초가 생겨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버려두지 말고 뽑아야 합니다. 이 뽑는 운동이 바로 회개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바르지 않을 때 불평과 원망이 오고 좌절과 낙심이 오고 근심과 걱정이 생깁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의 마음속에 ‘못한다, 할 수 없다,’ 부정적인 마음을 품으면 결국 신앙도 축복도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안에서 담대해집시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들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든 심령이 옥토가 되어 범사에 100배, 60배, 30배 열매 맺는 성림의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의 부요로 사는 사람! (고후 6:1-10) (0) | 2022.02.05 |
---|---|
진정한 행복의 비결은? (잠 15:13-17) (0) | 2022.02.05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벧전 5:7) (0) | 2022.02.05 |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자! (수 24:14-18) (0) | 2022.02.05 |
여호와를 바르게 경외(경배)했는가? (시 29:1-2/시 128:1-6) (0) | 2022.02.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