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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선택! (창 13:9-18)

by 【고동엽】 2022. 2. 5.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선택! (창 13:9-18)

 

벌써 10월 둘째 주간입니다. 왜 이렇게 세월이 빠릅니까? 가는 세월 우리 힘으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아름다워진 여배우 '오드리 헵번'은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나이 들수록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나이 들수록 좋은 점만 보아라! 내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타인을 돕는 손이다" 얼마나 정감 어린 대화입니까?
여러분, 나이 먹고 세월 가는 건 슬픈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아름답게 완성하라고 주신 행복한 시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트 모양의 변천사를 아세요?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살아오던 두 남녀가 상대방을 향해 몸을 숙인 다음, <널 항상 지켜주고 싶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면서 포응하는 모양이 바로 하트모형이 되었답니다. 사랑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용서가 있고 양보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아브라함이 바로 이런 사랑의 실천자였습니다. ◀제목소개!▶

 

오래 전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TV의 가전제품의 선전 문구가 있었습니다.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선택은 30년을 좌우하고, 어떤 선택은 50년을, 어떤 선택은 영원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부단히 선택하며 삽니다. 사람을 선택하고, 믿음의 대상을 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누구를 만나는 것도 선택입니다. 선택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현재 모습은 지나간 과거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복하다면 과거에 행복한 것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선택은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결과를 낳는 것처럼, 선택도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조지 무어'는 인생의 가장 어려움이 '선택'이라고 말했고, '토마스 카알라일'은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영원하다"고 말했습니다.
▶선택이 미래입니다. 선택을 잘하면 행복하고, 선택을 잘못하면 불행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전 인류를 죄와 사망의 고통아래 살게 했습니다. 반면에 성경에 선택을 잘 해서 복 받은 사람은 '룻'입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했을 때 룻은 어머니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나중에 보아스와 결혼하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한 순간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선택은 우리가 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우리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래서 선택은 중요한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이냐? 팥죽이냐?' 결국 보이는 팥죽 한 그릇을 선택했다가 평생 후회하고 자손들은 저주받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가롯 유다는 '스승이냐? 은 30냥이냐?' 결국 은 30을 선택했다가 그는 목매어 죽게 되었고, 시체가 땅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의 창자가 다 밖으로 튀어나오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본문은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본문의 배경을 알아보자!

 

아브라함이 조차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갔는데 그 땅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하마터면 아내를 애굽 왕에게 빼앗길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보호로 아내를 찾고 애굽 왕에게 금은보화를 풍성히 얻어 다시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면서 그의 조카 롯도 더불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소 떼, 양떼가 많아지면서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간에 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땅을 더 차지하려고 싸웁니다. 쉽게 표현하면 재산싸움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돈 때문에 형제가 다투고 부모자식간에도 불화가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지금 두산그룹을 보세요! 박씨 4형제들이 다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삼촌과 조카의 싸움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좋은 풀밭을 차지하기 위한 생존을 위한 싸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람과 롯 사이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돌아온 즉시 '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만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4절). 하지만 롯은 '하나님과 동시에 세상' 이것이 그의 믿음의 모습이었습니다. 롯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믿었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에게 복이 된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 적인 모습으로 살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과 손을 잡고 타협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혹 불의한 일일지라도 내게 유익이 된다면 눈을 감아 줄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을 조금씩은 즐기며 사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아브람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롯의 선택 기준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이었던 반면에 아브람의 선택 기준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의가 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제는 길을 가다가 길바닥에 떨어진 값비싼 황금덩이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 때 형의 마음속에 "동생이 없었다면 나 혼자 갖는 것인데"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형은 "이 황금이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구나"하면서 길거리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두 조각이 되면서 두 마리의 뱀이 되어 물으려고 하기에 형제가 힘을 합하여 잡아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처음 주었던 황금덩이와 똑같은 두개의 황금이 되어 두 형제가 서로 나누어 가졌다는 예화가 있습니다. 형제의 사랑 때문에 물질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귀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그런 사랑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자와 조카 목자와 서로 다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조카 롯을 불러 놓고는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한 마디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기득권을 준 것입니다.
삼촌의 권위로 조카를 얼마든지 쫓아 낼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이 좋은 곳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들판이나 사막이나 다 좋다는 것입니다. /할/

 

2. 아브라함의 신앙의 모습을 보자!

 

▶8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아브람이 롯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서로 다투지 말자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말을 걸었다는 것은 문제를 피하여 가지 않겠다는 것이요 그냥 덮어두지 않겠다는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합니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입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만나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⑴절망형이 있습니다. 조금만 어렵고 곤란한 문제를 만나도 주저앉습니다. 아예 해결해 볼 생각을 하지 않고 한숨만 땅이 꺼지라고 쉽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그 삶이 우울하고 불만과 불평이 많으며 창조적인 도전이 없습니다.
⑵외면형입니다. 분명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모르는 척 해버립니다. '될 대로 되겠지' 마음 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⑶비겁형입니다. 누구 때문이라며 남을 탓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는가?
⑴적극적으로 나셨습니다. 갈등이 생기고 마음이 갈라지면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힘듭니다.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롯을 먼저 불러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실마리를 풀어갑니다.
⑵원칙에 충실했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하나라는 말입니다. 나눌 수 없는 관계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고, 이 일 때문에 사이가 나빠져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합니다. "너와 나는 골육이며 하나다. 네게 손해가 되면 내게도 손해이고 너의 실패이면 나도 실패이고 너의 영광이 곧 내 영광인 우리는 골육이다" 그 원리를 충성스럽게 붙잡습니다.
화가 나면 감정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끓어오르는 감정이 먼저 앞섭니다. 인간관계로 갈등을 가지고 고통을 겪으시는 분들, 이 원리 앞으로 나오십시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조용히 서서 싸우면 안될 골육이라는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⑶상황인식, 현실인식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함께 하기에는 너무 좁은 땅이라는 현실을 인식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현실인식이 빨라야 해결의 실마리가 쉽습니다.
⑷양보입니다. 우선권을 먼저 줍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는 시각으로 내가 정당한가를 봐야합니다. 주관 속에 빠지면 나는 언제나 옳고, 남은 언제나 틀립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기가 상처 주는지 모릅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에 대해서 "네가 먼저 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2천년 후에 이 땅에 오셔서 산상수훈을 말씀했던 삶과 일치합니다. 5리를 가자고 하면 함께 10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을 주라는 희생의 삶이요 양보의 삶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할/

 

3. 롯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고, 성급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삼촌인 아브라함이 '너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선뜻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9절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믿음이 없을 때는 자기가 중요합니다. 항상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며 일을 전개해 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예민합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믿음을 갖게 되면 손해도 볼 줄 알고 포기할 줄도 아는 여유와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없었던 롯은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는 이해관계에 예민했고 물질과 눈에 보이는 세상 적인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①눈에 보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10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눈의 기능은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한적입니다. 전부를 다 보지 못합니다. 가령 배우자를 선택할 때, 눈으로만 결정한다면 그 선택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으로는 색깔, 생김, 크기를 볼 수 있지만 인격이나 사상이나 신앙을 볼 수는 없습니다. 창6: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신앙도 인격도 제쳐놓고 눈에 드는 여자, 눈으로 보아서 예쁜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인데, 결국 그것이 타락과 범죄의 원인이 되었고, 홍수 심판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창3:6절을 보면 하와가 뱀에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기서 눈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결단했습니다. 눈이라고 해서 다 눈이 아닙니다. 진리를 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영의 눈이 밝아야 좋은 눈입니다.
성경 고후4:18절에 보면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의 육신은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안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는 보입니다. 그러나 내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세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은 오래 살아야 100년입니다. 롯은 보이는 대로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보이는 것에 의한 결정, 그것은 계산에 의한 결정이었습니다. 세상 적인 수치로 보면 그것이 현명한 것 같고, 수지맞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수학 법은 여기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보입니까?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믿음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히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보이는 것에 수치가 밝은 사람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때가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빌립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빌립은 보이는 대로 정확하게 계산을 했습니다. 이 곳은 빈들이요, 밥집도, 떡집도 없습니다. 돈을 아무리 가져도 먹일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빌립은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을 계산하다가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고, 안드레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점심,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의 손에 올려놓고 축사하니 기만 명이 먹고 12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이 최고입니다. 지금 보이는 현실, 조건보다는 더 멀리 내다보십시오. 믿음의 눈을 여시고 결정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롯은 지금 당장 보이는 소돔 땅이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죄악의 땅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땅인지를 몰랐습니다.

②롯은 조건을 선택했습니다. 10절(하) "온 땅에 물이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이었던 에덴동산과 같았고, 애굽 땅처럼 비옥했다"고 했습니다. ▶중동지방은 물이 귀한 곳입니다. 물이 많다는 것은 한마디로 생활조건이 최고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고 했습니다. 아름답기는 에덴동산 같고 기름지기는 애 굽 땅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애 굽은 나일 강을 끼고 일찍부터 수도시설이 잘 되어 세계적인 옥토로 이름 난 곳이었습니다.
롯은 육신의 눈을 가진 자였습니다. 육신의 눈은 언제나 겉만 봅니다. 겉만 그럴 듯 하면 마음이 동합니다. 본문에 "요단들을 바라본즉" 여기 '바라본 즉'이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쓰여 진 곳이 딱 한 군데 나옵니다. 창3: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바라보는 순간, 그 눈길은 벌써 욕망의 눈길이 되어 따먹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여기 롯은 '저 요단강 쪽 들판을 내가 가져야지' 욕심의 눈길로 바라보는 눈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적인 조건으로 볼 때, 아주 최상급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곳이 죄악의 도성인지를 롯은 못 보았습니다. ▶하나님보다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보다 조건을 더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롯이 선택한 그곳을 가리켜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무슨 말입니까?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그 곳이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에 불 심판이 떨어질 곳이라는 말입니다. 겉으로 볼 때, 얼마나 아름답고 조건이 좋습니까? 그러나 그 조건 뒤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조건은 죄악으로 벌써 썩어 있어 유황불이 떨어질 곳이었습니다.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물이 넉넉한 것 이상으로 죄악도 관영 했습니다. 먹거리 볼거리가 많은 것만큼, 타락과 범죄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황불로 멸망을 당하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은 보이는 것에 연연했습니다. 환경에 연연했습니다. 그 뒤에 숨은 타락의 세계를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돈 잘 벌리는 그것보다는 믿음 생활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곳이 축복의 땅입니다.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입니다. 환경이야 사막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소망이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그곳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지금 보이는 조건과 환경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보지 못하다가 결국 심판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롯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패가망신 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내도 죽었고, 재물도 불타 버렸습니다.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아브람을 떠나 롯은 소돔으로 갔습니다. 11절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결국 롯은 하나님을 택하지 못하고 세상을 택하였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행복의 조건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롯의 비극은 아브람을 떠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을 택했기 때문에 롯은 아브람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왜 아브람을 떠나는 것이 비극입니까? 아브람은 축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했지만, 가진 것은 없지만 그 사람은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축복의 사람을 뒤따라 다니며 축복의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면 평생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후회하며 삽니다.
▶12절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아브람이 끝까지 거주한 땅은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롯은 세상과 물질을 따라가며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표현은 '소돔까지'라는 말입니다. 물질을 택하면 '소돔까지' 갑니다. 그런데 이 길은 멸망의 길이요, 심판의 길입니다. 예수께서도 넓은 길로 가지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넓은 길은 인기 있는 길로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사람들이 피하는 길이요, 가지 않으려고 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좁은 길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13절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화려한 것과 쾌락 뒤에는 항상 죄가 있습니다. 넓은 길 뒤에는 멸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불편하다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편하다고 평안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련해서 항상 넓고 편하고 좋은 것만 선택합니다.

 

4. 아브라함의 선택의 경우를 보자!

 

①아브라함은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넓은 길보다는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좋은 땅을 롯에게 주고 광야를 택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어려운 길을 택한 사람이 나오는데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한번의 선택이 다니엘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단1;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이 뜻을 정한 길은 곧 우리의 길입니다. 믿음은 이미 뜻을 정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을 믿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뜻을 따라 살기로 날마다 선택하여야 합니다. 시대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것이 어렵지만 축복의 길입니다.

마7;12-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②아브라함은 미움보다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자 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잘못한 쪽을 본다면 롯이 더 많을 것입니다. '누가 잘했느냐 잘못했느냐, 누가 좋은 땅을 차지하느냐, 나쁜 땅을 차지하느냐' 따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미움보다도 존중해주는 사랑을 택했습니다.

③아브라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선택했습니다.
비록 광야이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 약속의 땅을 원했습니다.

④말씀을 따랐습니다.
한마디로 순종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나 판단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떠나라면 떠나고 머물라면 머물고 바치라면 바쳤습니다.
창12:1-4절에 보면, 하나님이 갈데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에 즉시 고향을 떠났고, 창14:20절에 보면, 즉석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22장을 보면 외아들 이삭이라도 하나님이 바치라하니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멋대로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했고, 그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무엇이며, 순종이 무엇인가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롯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순종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자신을 맞춰가며 살았습니다. 롯은 세상 조건에 자신을 맞추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진정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⑤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조건, 환경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환경이 나빠지고 조건이 악화되고 난관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선택한 사람은 원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과 같은 사람은 조건이 나빠지고 환경이 불리해지면 금방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신앙은 조건이나 환경 다 빼앗겨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앙의 소유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⑥아브라함은 욕심을 비우고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9절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완전히 기득권을 포기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마음을 비운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그 마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은 그 빈 마음에 은혜를 채워 주십니다. /할/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께서 천국을 그 마음에 채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5.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비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오셔서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①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다.
14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혈육인 롯이 환경과 조건을 보고 아브라함을 떠난 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조건들은 그를 떠났지만 그 조건들을 다스리고 만드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이미 아브람 곁에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계를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고 계시고, 한숨을 알고 계시며,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믿음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롯은 아브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롯이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롯과 아브람이 끊임없이 싸웁니다. 하루는 롯처럼 생각하고 또 하루는 아브람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아나는 길은 한가지뿐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롯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할/ 세상 적이고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그 행복의 약속을 눈감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우리의 등을 두드리시며 잘했다고 격려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축복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것이 축복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는 인간 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형편을 먼저 열어주십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먼저 아십니다. /할/

②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무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14-15).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 말씀을 12:7절과 비교해 보면, 12:7절에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했고, 본문에서는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즉 본문에는 "너에게 주리라"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재확인이며 다짐인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그대로 바라본 아브라함은 자기가 바라본 땅의 지주가 되었습니다.
▶14절에서 두 가지의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⑴'너는 눈을 들라' 인간은 본능적으로 땅을 보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가장 먼저 고개를 들고 눈을 들어 땅을 보지말고 하늘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현실과 환경을 보면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면 자신이 없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눈을 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그곳에는 놀라운 환상과 비전과 하나님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⑵'너 있는 곳에서'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당신이 있는 그곳에서 기적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병이어가 기적의 시작이 된 것처럼 내 모습 이대로 내 환경 이대로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나의 현실적인 상황 바로 그 자리가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5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무엇을 보느냐가 비전입니다. 어떤 총각이 한 처녀를 계속 보고 있으면 결국 어느 날부터 그 여인과 함께 살게 됩니다.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전이 됩니다. "네가 보는 땅을 내가 주리라" /할/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이 축복은 아브람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③자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이 말은 하나님의 축복이 무한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셀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없으며 크기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자식처럼 키우고 보살폈던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직후 하나님께서는 땅의 티끌처럼 무수한 자손의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가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셀 수 없는 자손의 축복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창22:16-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려 할 때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어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④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며 누리는 축복의 조건은 '고개를 들고 비전을 보고 그것을 향하여 일어나 걸으며 땅을 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축복을 거저 주지 않으십니다. 그는 보았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종과 횡으로 걷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아무 누구도 가본 일이 없습니다. 미래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미래는 갖는 사람의 것입니다. 축복도 갖는 사람의 것입니다.

⑤예배드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단'을 쌓는 일은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예배하는 순간 믿음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는 가운데 상황이 변하고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단을 쌓습니다.

 

6. 여기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

 

①눈을 들어 새로운 땅을 바라보라!
바라본다는 것은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see와 look가 있습니다. 둘 다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see는 눈에 들어오는 것을 그냥 보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look는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의미를 생각하며 보는 것입니다. 찾으면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냥 보면 안됩니다. 목적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무슨 뜻인가를 보고 탐구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②잃어버린 것을 바라보지 말고, 새롭게 주어질 것을 기대하라!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버리면 얻고 취하게 됩니다. 빈 그릇에 보배를 담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바라보면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롭게 열린 것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렸습니까? 그 잃어버린 건강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건강은 잃었지만 더 좋은 다른 문이 열립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물질을 잃어버렸습니까? 그 잃어버린 물질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질을 잃었지만 더 좋은 다른 문이 열립니다. ▶친구를 잃어버렸습니까? 그 잃어버린 친구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친구는 잃었지만 더 좋은 다른 문이 열립니다. 주님은 '이제부터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 잃어버린 것을 보지 마십시오. 새롭게 얻게 될 더 좋은 것을 바라보십시오.

③지나간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라!
과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날이요, 날아가 버린 화살입니다. 그것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미래는 우리가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 더 급한 일입니다. ▶사43:18-19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의 강을 내리니" 과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잃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얻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과거를 생각하지 마시고 창조하는 미래를 생각하십시오. 없어진 과거를 붙들지 말고 형통할 미래를 설계하십시오. 지나간 과거를 탓하지 말고 내일을 위해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십시오.

④땅을 바라보지 말고, 위를 바라보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난자들입니다(요1;12-13). 위로부터 난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를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땅을 소유하고, 땅을 정복하여야 하지만 그래도 땅을 바라보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위를 보고, 위에 것을 생각하며 위엣 것으로 땅을 정복하여야합니다. 골3:2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원래 인간은 '안드로포스' 위를 보는 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드리며, 찬양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⑸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선교 명령입니다. 아브람이 지시 받은 영역은 동서남북입니다. 오대양 육대주가 복음 전파의 영역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마28;19절에서도 '모든 족속'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입니다! 성도 여러분!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선택하지 맙시다. 눈에 보이는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맙시다. 환경이 변했다고 원망하지 맙시다. 조건만 바라보고 따르다가 예수를 버리지 맙시다. 조건이나 환경은 사라져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며 동서남북에 편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롯처럼 눈에 보이는 좋은 조건과 환경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회복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만을 선택하고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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