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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본질을 바로 알자! (히 11:1-3)

by 【고동엽】 2022. 2. 4.

믿음의 본질을 바로 알자! (히 11:1-3)

 

막4장에 보면, 예수님 제자들이 한 밤중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풍랑 앞에 제자들은 위기를 느꼈고, 죽음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만 보고 어떻게 할 바를 모르다가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님이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명령하시니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 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무서워(두려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고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신 것보다도 더 강하게 꾸짖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을 먼저 보십니다.
마8장에서 백부장의 믿음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4장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책망하신 것과는 정 반대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8:1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백부장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찬송을 해도, 기도를 해도, 대화를 해도, 무엇을 해도, 믿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설명하려고 하면 마땅히 설명하기가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기는 알 것 같은데 이것을 요령 있게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의지한다/주님이 나의 구세주다'는 등 많이 알고 있지만 더 깊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할 때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쉽게 몇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목소개!▶

 

사실 믿음은 어떤 것인가를 연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이미 성경 속에 이런 것이라고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연구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친 믿음을 내가 받아들이므로 나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성숙의 단계(과정)가 있습니다.

 

①주님을 따르는 단계가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출발이 잘 되면 신앙의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고향을 떠남으로써 시작됩니다. 모세의 신앙도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해서 지팡이 하나를 들고 애굽으로 출발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도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따라 나섬으로써 시작됩니다. 사도들의 신앙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그물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라 나선 것이 사도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주님과 함께 살아 갈 것이다"라는 비장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②주님과 동행하는 단계입니다.
주님을 따라 나섰으면 언제까지나 그냥 수동적으로 쫓아가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주님과 동행을 해야 합니다. 이 단계가 한 단계 성장한 단계입니다.
그런데 동행하는 데도 법이 있습니다. 반드시 주님과 방향이 같아야 하고, 동행에는 보조가 같아야 합니다. 동행의 의미는 함께 한다는 데 있습니다. 마음이 맞고 뜻이 맞고 생각이 같아야 합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하여 똑바로 갔습니다.

③주님을 꼭 붙잡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인간이다 보니 신앙 생활을 하는 데도 마음이 한결같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고, 쉬고 싶기도 하고, 싫증도 나고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때는 신앙 생활하는 것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놀지도 못하고, 여행도 못 가고, 즐기지도 못하고 그래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 하는 동안 이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부부간에도 권태기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의견이 자꾸만 충돌되고, 집에 늦게도 들어오고, 다투기도 잘하고 그럽니다. 이때 방심을 하면 안 됩니다. 이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신앙 생활도 하다가 보면 이런 때가 옵니다. 그래서 '꼭 붙잡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꼭 붙잡아야 합니다. 이때 한번 이탈하면 다시 돌아오기가 힘듭니다. 이때 한번 신앙의 줄을 놓치고 나서 아직까지도 다시 붙잡지를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④주님께 꼭 붙잡히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까지 오르게 되면 신앙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 오르게 되면 신앙 생활은 아주 쉬워집니다. 자동차가 탄력이 붙으면 저절로 굴러가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이가 힘이 빠지면 잡고 있던 어머니의 손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미아가 됩니다.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가 안전하려면 어머니 큰손에 잡히는 일입니다. 그러면 내 힘이 아무리 떨어져도 놓칠 염려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꼭 붙잡히는 생활입니다. 이쯤 되면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 됩니다. 그때는 주님이 나를 당신의 마음대로 주관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던 길에서 이탈을 하고 싶어도 그분이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자유롭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붙잡히는 신앙 생활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 생활은 힘이 있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이 단계까지 올라와야 합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 경지에 오르게 되면 신앙 생활은 재미있어집니다. 응답의 역사! 체험의 역사! 신앙의 맛이 납니다.

⑤주안에 상주하는 단계입니다.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어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단계가 주안에 상주하는 단계입니다. 주석가들은 이 상태를 '유무 상통의 생활'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이 때가 가장 온전한 믿음의 상태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4:13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명령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우리는 믿음의 승리자가 됩니다.
⇒요일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마21: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2.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①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신앙은 고백이 중요합니다.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이것은 세상 적인 권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권세 속에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②믿음은 '빛'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1장에 예수님을 빛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1: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쉽게 말하면 예수가 곧 빛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이 빛 되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모든 생물체는 이 빛을 받아야 삽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의 빛을 받아들여서 빛을 품고 살아가면 그가 신앙 인이고, 그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의 양식을 주고, 은혜를 주고, 믿음을 더해 줍니다. /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반사체입니다. 예수의 빛을 받아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들이 이 빛을 품고 살아갈 때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상태를 "믿음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를 '어두움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③믿음은 '질'입니다.
요1: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이라고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생명이 있고, 믿지 않아 지옥 가는 영혼도 있습니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빛을 받은 사람들이요, 지옥 가는 사람들은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은 살아 있으나 실은 죽은 영혼이고 무의미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도 보면 변화 받은 사람이 있고 변화를 받지 못한 옛사람 그대로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 생명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옛날의 내 생명과, 빛 되시는 예수를 만나 과거를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고 변화 받은 오늘의 나와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질이 다릅니다. 모양이 다릅니다. 내용이 다릅니다. 색깔이 다릅니다. 품위가 다릅니다.
여러분! 사람도 질이 좋아야 합니다. 물건도 질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값이 있습니다. ▶우리가 질을 따질 때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품질'입니다. 이것을 '아가도스'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신앙이든, 사랑이든, 불문하고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한 때 국산품이 자꾸 외면을 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품질이 좋지 안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품질이 좋다면 도중에 떨어져 나가거나, 갈등을 느끼거나, 신앙을 이용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모양'입니다. 이것을 '칼로스'라고 합니다. 질을 말할 때는 품질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모양도 좋아야 합니다.
물건이 품질이 좋다고 다 잘 팔리는 것은 아닙니다. 품질도 좋아야 하지만 모양 또한 좋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미제 물건보다 일제 물건을 선호하는 것은 질도 좋지만 우선 모양이 좋기 때문입니다. 미제 물건은 튼튼하고 품질은 아주 뛰어나는데 모양새가 미국사람을 닮아서 크고 멋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신앙도 '질'입니다. 여기서 질이 좋다는 말은 품질과 모양이 다같이 좋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고 변화를 받게 되면 먼저 질적인 면에서 변화를 받게 됩니다. 이것을 '내적 변화'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생활에 질서가 생기고, 내용이 주어지고, 기쁨이 있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게 되고, 자비와 궁휼을 베풀게 됩니다. '외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질이라고 말합니다.

④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봄으로써 확실해집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얼어나시며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 그러십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 뒀다 보지 않고 무엇 하느냐?"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방금 전 우리가 배를 타기 전에 온갖 병자들을 기적같이 고쳤는데 그 고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지금 의심하느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느냐는 주님의 책망입니다.
마6장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제자들에게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새가 농사를 짓더냐, 백합이 길쌈을 하더냐, 그런데도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서 믿어라" 그것을 보지 않고 눈 뒀다 무엇 하느냐? 그 말입니다.
신앙 생활은 보는 생활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꽃과 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이웃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보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9장에 보면, 예수님이 한번도 눈을 떠 본 일이 없는 소경을 눈을 뜨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님이 눈을 뜨게 해 주는 사람을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만은 선지자가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눈뜬 소경을 불러 놓고 심문합니다. "저가 네 눈을 뜨게 해주었느냐?" 이 눈뜬 소경이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도 잡혀가고, 자기도 벌받을 것 같아서 말하기를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옛날에는 내가 소경이었는데 지금 보이는 것만은 사실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신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에는 우리 눈에 하나님이 안 보였습니다. 예수님도 안 보였고, 십자가도, 죄도, 구원도, 천국도, 지옥도, 믿어지지 않았고, 보이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못 믿었었습니다. 믿기는커녕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눈은 떴으나 모두 소경이었습니다.
●옛날 '완행열차'가 있을 때 서울역에 가보면 1등 대합실과 3등 대합실은 완전히 다릅니다. 개찰이 시작되면 1등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여유 있게 천천히 걸어 나갑니다. 그런데 3등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뛰고 밀치고 야단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1등 대합실의 손님은 고급 인생이고 3등 대합실의 손님들은 하급 인생이라서 그럽니까? 아닙니다. 단지 1등실은 자리가 보장되었고, 3등실 손님은 뛰지 않으면 자리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늦게 타면 서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뛰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미래가 보장되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라면 그렇게 뛰고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자리가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큰 소망입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구원도 보이고, 천국도 보이고, 지옥도 보이고, 심판도 확실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죽습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두렵고 떨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면 여러분은 모두 믿음이 있는 분들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마음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할/

⑤믿음은 '신령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머리로만 믿고, 지식으로만 믿던 신앙은 눈을 떠서 보아야 합니다.
수5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오로지 그 일에만 골몰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계속합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까 완전 무장한 장군 하나가 칼을 빼들고 서 있습니다.
깜짝 놀란 여호수아가 "너는 누구냐?"하고 물으니, 그가 "나는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다"라고 합니다. 그가 바로 천사장 '미카엘'입니다. 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어라" 그때 여호수아가 비로소 신령한 눈을 뜨게 됩니다. 이때 여호수아가 눈을 뜨고 보면서 발견한 것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기가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가나안, 그곳이 천국이었고, 그곳이 바로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구 밟고 지나갈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여호수아가 발견한 것입니다.

두 번째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들이 앞에 있는 적들과 싸워 이기게 하기 위해서 군대 장관인 미카엘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호수아는 그때부터 마음놓고, 안심하고 싸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나 혼자가 아닌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 혼자인 줄 알고 두려워도 했고, 무서워도 했는데, 눈을 뜨고 보니까 내 곁에 하나님이 계셨고, 내 앞에 주님이 계시고,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 해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뭘 주저할 것입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용기를 주고, 힘을 주고, 담대함을 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눈을 뜨고 보니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군대 장관을 이미 파견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렇지 않아도 모세가 죽은 후에 겁도 나고, 두렵기도 하고, 책임도 막중하고 해서 내심 걱정이 많았던 중인데, 그때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눈을 떠서 지금 여러분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우리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눈을 뜨는 일입니다.

⑥믿음은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싸우는 것이고, 전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행복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쟁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모르고 살아갈 때는 아무 것도 아니고, 거리낄 것 하나도 없던 것들이 예수를 믿고 보니까 모두가 양심에 걸리고, 죄책감이 생기고,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옛날에는 적당히 살았고, 적당히 먹었고, 적당히 눈도 감았었는데, 그래서 마음에 거리끼는 것도 별로 없었고, 사탄과 싸울 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죄를 지으면 사탄이 와서 위로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갈등도 없었고 고민도 없었고 그런 대로 살 만했습니다.
그런데 믿고 보니 모두와 싸워야 합니다. 모두가 부딪칩니다. 그래서 믿음은 싸우는 것입니다. 내 자신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세상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원수 마귀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전투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싸워서 이기려고 한다면 우리는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엡6:13-17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딤전4:7절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죄는 습관입니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양심이 무뎌지고 끝내는 죄를 지을 용기까지도 생깁니다. 그런데 경건을 연습하면 경건 생활이 내적으로 습관화됩니다. 그래서 주일 날 교회에 가는 것도 생각해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습관화되어서 주일날이면 저절로 발걸음이 교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때 "나는 습관 신앙이다. 나는 너무 의무적으로 신앙 생활하고 십일조도 의무적으로 하고, 기도도 밥상이 오면 저절로 눈이 감아진다. 이것은 형식 신앙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기까지는 하루 이틀이 걸렸겠습니까? 그만큼 수고가 있었고, 내적인 경건이 바탕이 되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할/

⑦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히11장을 보면 믿음이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믿음으로"라는 말이 232번이나 나오고 있고, 히11장에서 만도 25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11장을 '믿음 장'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믿음은 감히 인간으로서는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실상'은 '기초, 근거, 받침대, 기반'이라는 뜻으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기반이 되어 주시고 받침대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합니다. 우리의 언덕이 예수님이십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에서 살았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곱게 자랐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안정되고,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너는 고향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이때 아브라함은 망설임이 없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납니다. 사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치로 따진다면 무모한 것입니다.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계약서도 없습니다. 구체적인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들 같았으면 말할 것도 없이 한마디로 거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를 믿고 고향을 떠납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리만큼 당돌한 아브라함의 행동의 근거가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이때 이 말씀이 곧 '실상'입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곧 실상으로 나타날 것을 믿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실상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넙니다. 얼른 생각하면 사람이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닙니다. 배가 있어도 그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비행기도 없지만 있어도 불가능합니다. 헤엄을 쳐서 건넌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들은 건넜습니다. 어떻게 건넜느냐 하면 믿음으로 건넜습니다.
이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출14:1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고 했습니다. 지팡이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지팡이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능력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갈라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돕니다. 하나님이 일곱 바퀴를 돌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그 무더운 날에 열심히 성을 돌았습니다. 개중에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불평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돕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그 성이 믿은 그대로 산산이 무너져 내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⑧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증거'라는 말은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믿음은 지금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내적인 확신입니다. 또한 '증거'라는 말은 영어로 굿 리포트(good report)라는 말인데, 이 말은 '할 수 없는 것을 했더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앞으로 이 세상을 홍수로써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역사상 최장기 홍수 예보를 들었습니다. 120년 뒤의 큰비가 온다는 예보입니다. 그러니 큰배를 만들되 산 위에서 만들라고 하십니다. 이때 노아가 하늘을 쳐다봅니다. 홍수는커녕 이슬비도 오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 땅은 원래 비가 오지 않는 땅입니다. 홍수가 쏟아질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지 홍수가 온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올 것이니 산 위에서 배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웃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 명령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분명히 웃었을 것입니다. 비가 온 일이 없는 땅에서, 그것도 산 위에서 배를 만들라 하십니다.
그런데 노아는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이 땅에 홍수의 물결이 넘쳐서 온 세상을 쓸어 가는 것을 영적인 안목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산 위에서 그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방주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20년 후의 심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고 나서 믿으려고 합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자꾸 보여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 천국을 보여달라! 신통력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히11:27절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고" 했으며, 예수님은 요11:40절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고, 요20:29절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먼저 믿고, 후에 일어날 실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아도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청명한 날씨만 보았더라면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허허 벌판만을 보았더라면 어찌 가나안까지 갔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그 금성 철벽으로 둘러쌓은 것만을 눈으로 보았더라면 어찌 그 성을 돌았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때로 우리들을 실망시킵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이 같은 안목을 가지고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⑨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주보 상단에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기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믿음 안에서! 말씀 안에서! 해 보자!' /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 믿는 것이 불신입니다. 믿으면 역사가 일어나고, 믿지 않으면 철저하게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막11:23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믿는 자에게 은혜를 더 하여' 주십니다.

⑩믿음은 '그대로 되니라'입니다.
창1:1-7절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에 기록에 두 가지 특별한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7번 나오고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은 6번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할/ 이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엄청난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그대로 되니라'하신 것은 하나님은 절대자라는 강력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라는 강력한 의미입니다.

㉡'그대로 되니라'는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성경은 모두 66권입니다. 그런데 첫 장에 '그대로 되니라'가 6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은 나머지 성경도 하나님의 뜻 그대로 된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시가 좋으면 하루가 좋다고 장사하는 이들은 말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싹수를 보면 잘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압니다. 성경의 첫 장이 '그대로 되니라'의 반복으로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된다는 예언입니다.

▶성경의 대 주제 예언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죽은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는 대로 거둡니다. 갈6:7-10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지니라"
▶믿음대로 됩니다.
마9:29절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막11:23절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음대로 된다는 말씀도 예언입니다. 꼭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이루려면 우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브리지스'는 "믿음은 주를 보는 눈이요, 주께 매달리는 손이며, 주를 소유하는 능력이다"라고 말했고, '에드워드'는 "믿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캄캄한 터널을 밝게 비추어주며, 죽음의 깊은 계곡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세워준다"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되니라' 이 말씀은 '모든 역사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될 터이니 그대로 순종하라'는 순종의 명령입니다.

 

3. 결론적으로, 바른 예배가 바로 이 믿음의 출처입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의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예배에 성공하는 것이 가장 큰 성공입니다. 예배 성공이 인생 성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요4:23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무려 400년 간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10가지 재앙을 퍼부으면서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때 바로가 모세에게 물었습니다. "왜 가려고 하느냐?" 이 때 모세는 한 번도 '자유가 그리워서입니다. 해방되고 싶어서입니다. 고향 땅이 그리워서입니다.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서입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없습니다.
모세는 10번이면 10번 다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내 백성을 내보내라!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언제나 모세의 대답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 주시고 광야 40년 내내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예배를 잘 드린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사하는 곳마다 우선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야곱도 돌 단을 쌓아 놓고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시애틀에서 세계적인 지도자 네 명이 나왔습니다. 지금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이크 우드'라는 목사님이 네 아이를 신앙으로, 예배 중심의 삶으로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네 어린이를 예수 잘 믿는 아이들로 길렀습니다. 네 명은 다 대학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날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빌 게이츠'입니다. 2005년도에 11년 연속 세계최고부자에 오른 이 사람은 고등학교를 나와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나서 사업을 하였습니다. 하버드에 들어갔지만 중퇴하였습니다. 지금 이분은 얼마나 재산이 많은지 오늘 인류역사에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 재산이 1천억 불, 그러니까 120조원입니다. 앞으로 4년만 지나가면 그의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져서 전 영국국민의 재산을 다 모아야 빌게이츠 한사람의 재산이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보잉'입니다. 보잉기라고 하면 비행기 이름으로 아는데 이는 사람 이름입니다. 비행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엔진이 뒤에 달린 것이 있고 하나는 날개에 엔진이 달려 있는데, 지금 세계에서 많이 쓰고 있는 보잉 747이라든지 하는 것은 다 엔진이 날개에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주신 지혜로 보통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분야로 이런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 비행기 여객기로는 보잉이 거의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시애틀에 가면 보잉회사가 있고, 한 건물에 수 만 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맥 콜드'라는 사람입니다. 핸드폰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지금 세계 모두가 사용하는 휴대폰은 맥 콜드가 발명한 것입니다.
또 한사람은 '코스트'라는 회사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보잉과 함께 합자회사로 세계적인 기업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할/ ( 3월 6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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