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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신분을 바로 알자! (벧전 2:1-10)

by 【고동엽】 2022. 2. 4.

성도의 신분을 바로 알자! (벧전 2:1-10)

 

인생은 부메랑입니다. 부메랑은 자기가 던지고 자기가 받는 놀이 기구입니다. 오늘 뿌리면 내일 거두고,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길을 가다가 할머니가 다리가 아파지자 할아버지에게 엎어 달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엎었습니다. 할머니가 <무겁지?> 미안하여 말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가 <그럼 무겁지. 돌대가리지. 철면피지. 강심장이지. 당신은 무거울 수밖에 없어> 할머니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조금 가다가 할아버지가 다리가 아파지자 할머니에게 <여보! 교대하자! 이제 당신이 나를 엎어줘>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엎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조금 미안해하면서 <생각보다 가볍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가벼울 수밖에요? 머리에 든 것이 없지. 허파에 바람이 들었지. 속 비었지. 싸가지가 없지. 양심도 없지. 가벼울 수밖에요> 꼭 심는 대로 거둡니다. 말은 메아리칩니다. 가는 말이 고오야 오는 말도 곱습니다. ◀제목소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이름 석자가 하나님의 나라 생명 록에 기록이 되었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분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신분이지만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새로운 신분이 주어지고 그 신분에 맞게 살게 됩니다. 처녀가 결혼을 하면 신분이 바꿔집니다. 그러면 아내로 살아야 하고, 며느리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신분이 바뀐 존재입니다.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본문10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자니라"
그렇습니다. 전에는 죄 가운데 살았고, 마귀의 자식이었고, 죄의 종이었습니다. 세상 썩어 없어질 가치 없는 것을 바라보고 살던 소망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할/
그래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에 대한 각성이 있을 때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성도의 신분이 무엇인가?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산 돌’되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도 ‘산 돌’입니다.

 

4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그런데 베드로는 우리가 산 돌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산 돌이라는 사실을 소개합니다.
산 돌이라는 비유는 얼른 생각하면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돌이라는 것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생수를 주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또 동시에 돌처럼 견고하신 분이라는 뜻으로 산 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산돌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나아와'라는 말은 헬라어의 현재분사 형으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계속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생명을 공급받을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6절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건물을 짓는데 모퉁잇돌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결정적으로 모퉁잇돌 때문에 건물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벽돌들은 이 모퉁잇돌에 의지해서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퉁잇돌은 건물의 기초를 형성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본문 4절에서 이 산 돌이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5절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우리도 산 돌이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집’은 곧 교회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교인들이 모이는 건물을 교회당, 예배당이라고 해야 합니다.

▶인생은 하나의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짓되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 하고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하나의 집을 지으려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우선 건강이 필요합니다. 건강은 모든 것의 가능성입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꿈도, 이상도, 미래도, 일터도 그 모두를 잃게 됩니다. 건강은 인생의 집을 짓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초석입니다.
▶여기에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경쟁 시대라서 실력이 없으면 뒤지게 됩니다. ▶또 성실성도 있어야 합니다. 건강도 있고 실력이 있어도 이 성실성이 없으면 좋은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성실성이 결려된 인생의 집은 모래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여기에는 노력도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씩 쌓여져 나가다 보면 결국 튼튼한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집이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하나의 집을 짓는 생활입니다. 신앙의 집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집이 다르게 만들어집니다.

▶‘신령한 집’은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신령한 집’을 짓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영적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버릴 것을 버리라!(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이것들을 왜 버려야 하느냐 하면 우리들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의 마음 밭을 오염시킵니다. 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들, 이것은 사람의 순전한 마음 밭을 오염시키고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근심을 가지고 있거나 불화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 마음이 모든 생활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삶이 삭막해지고 불화해서 다투게 되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식물들이 자라는데 그 위에 가시 넝쿨들이 짓누르고 있어서 성장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탈선하는 청소년들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반드시 탈선할 수밖에 없는 문제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 주위에는 좋지 않은 친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좋지 않은 환경들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영향을 받아서 생활에 질서를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맹모 삼천지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좋은 환경으로 여러 번 이사를 했다는 말입니다.
환경은 어린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사실은 어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어른도 주위에 좋지 않은 친구가 있어서 어울리다 보면 생활의 질서를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또 주위에 술친구가 있으면 술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작심을 했다가도 또 무너져 버립니다. 그것은 친구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노름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유혹으로부터도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노름을 하면 돈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잃으면 억울하니까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마음에서 빚을 내서 또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만 그 세계로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친구도 바꾸어야 합니다. 환경도 바꾸어야 합니다. 때로는 직업도 가감이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관심도 바꾸고 취미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 같은 단절이 없으면 그곳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때로 이 단절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삶을 살게 하고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왜냐하면 이것들이 신앙의 집을 짓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잡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자유할 수가 없고, 마음을 제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첫째, "모든 악독"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악하고 독한 마음입니다.
둘째, "모든 궤휼"을 버려야 합니다. 궤휼은 거짓을 말합니다. 남을 속이는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사기꾼들의 마음입니다.
셋째, "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실제의 자기 자신의 모습은 감추어 놓고 다른 사람으로 가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식은 위선이요, 속임수입니다.
넷째, "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분하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살고, 더 존경을 받고, 더 큰 명예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질 때에 시기심이 발동됩니다. 성도가 시기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평생 분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다섯째,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이 비방하는 말은 시기심이 발전하여 나타나는 언어의 형태입니다. 말은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②취할 것은 취하라!(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신령한 젖(말씀)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갓난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인정사정없이 울어댑니다. 그리하면 어머니는 열일 재처 놓고 아기에게 젖을 먹입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특히 모유는 갓난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음식입니다. 모유 속에는 영양이 고루 함유되어 있고 그 속에 지혜의 요소와 온건한 성품을 만들어 주는 요소들이 다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유만 먹고 자라면 잘 조화된 성품이 조성된 온건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에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모두 모유를 먹이지 않고 소의 젖을 먹여 키운다는 데 있습니다. 송아지가 먹는 소의 젖을 아이가 먹고 자랍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모두 망아지처럼 사나워지고 난폭해지고 소란스럽고 들이받기를 좋아합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이 먹을 음식이 따로 있습니다. 그 음식은 순수한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 “신령한 젖”은 신구약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다가 성장합니다.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가까이 하면 내가 복을 받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면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계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많이 읽고 묵상하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시19:103절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신앙의 집은 이렇게 지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튼튼한 신앙의 집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③주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즉 연합을 이루라!(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여기서 예수를 산 돌이라고 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는 모퉁잇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돌을 초석이라고도 하고 옛날에는 주춧돌이라고도 하고 기초석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집의 구조물은 이 초석과 연관하여 짓습니다. 그러니까 이 돌이 모퉁잇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의 집을 지을 때나 인생의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 산돌 되시는 예수와 연결하여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연합의 삶이요 주 안에 삶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삶의 필수입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양분을 공급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은 모두 산 돌이신 예수께 연결되어야 비로소 신앙인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떨어져 나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15:4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7-8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산 돌되시는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는 삶, 주 안에 있는 삶이 축복의 삶입니다.
롬8: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엡2: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2:22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빌4: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논어에 보면 공자가 70생애를 술회한 대목이 나옵니다. 공자는 73세를 살았습니다. 그 73세의 삶의 내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자는 15세 때에 학문을 하기로 입지를 세웁니다. 30세 때에 성격을 형성합니다. 40세 때에 불혹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50세 때에 천명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천명이라는 것은 ‘생명과 부귀가 모두 하늘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50세에 가서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60세에 가서 귀에 들리는 말을 모두 순순히 이해하고 관용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했다고 합니다.
70세에 가서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도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73세에 죽습니다. 거기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알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 죽은 후 중일전쟁 때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쫓겨서 중경까지 후퇴할 때 누군가 말하기를 중국의 조상인 공자의 무덤을 잘못 써서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공자의 무덤을 파 보니까 그 큰 무덤 속에 쪽박만한 두개골 하나밖에 없더랍니다.
그런데도 그 무덤은 엄청나게 크고 장엄했습니다. 그 속에는 온갖 허무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끝나고 말 것이라면 군자면 무엇하고 성현이면 무엇할 것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 산 돌이신 예수와 연결하여 인생의 집을 건설하고 신앙의 집을 지으라고 합니다. 예수와 연합하여 지어진 집이라야 그 집이 신령한 집이고 영원한 집이라는 것입니다.

 

④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라!(5).
⑴‘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라’요4:23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인생이 하나님을 향한 사명 첫째가 예배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순전히 하나님을 섬기게(예배) 하기 위해서입니다.
출9:1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10:3절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⑵기독교 예배가 다른 이방 종교의 예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 선포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례전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시고 흘리신 피를 예배 현장에서 재현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배자들의 심령에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그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능력을 덧 입혀주시고, 놀라운 은혜의 강물을 맛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 뒤에 그 사람의 예배 현장에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그 참된 예배자를 크게 축복하십니다. 더 큰 은혜와 감동을 맛보게 하십니다.
⑶하나님은 지금도 거룩한 산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롬12:1-2).
바울은 예배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말합니다. 이것은 공예배가 아니라 생활의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균형 잡혀야 합니다. 예배에 있어서도 공예배와 생활의 예배가 균형 잡힌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공 예배를 가볍게 생각하고 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활은 엉망이어도 예배만 잘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는 예배도 잘 드리고 생활도 거룩한 사람입니다.

 

⑤복음을 전하라!(9).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선하신 덕을 세상에 선전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선전원들입니다.
⑴복음 전도는 '억지로라도' 꼭 해야 합니다.
고전9: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바울도 부득불 복음을 전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득불'이란 하기 싫은 데도 억지로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화를 내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서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⑵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칭찬하십니다.
롬10:15절 "아름답도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전도는 남을 위해 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데 드는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아깝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 수고의 대가를 반드시 지불하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전도의 결실이 곧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⑶복음 전도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접촉점입니다. 만나야 합니다. 전도는 접촉점이 일어나지 않으면 출발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시다가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 들렸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구하러 가셨는데 마침 수가성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내게 물을 좀 달라며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물가에서 물 이야기로 예수님과 그 여인은 접촉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나게 되고 대화를 하게 되는 이 접촉점이 바로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 전도의 출발이 되어졌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대상자의 영혼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끈질기게 전화도 해야 합니다. 접촉점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찾아가야 합니다. 전화 속에서 대화가 무르익고 찾아갈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될 때는 찾아가야 됩니다.
다섯 번째는 데리고 와야 합니다. 일단 '와 보라'입니다.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송구영신예배 때, 우리 모두 타이밍을 맞춰 데리고 오세요.
여섯 번째는 계속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전도해 놓고 돌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관심이 중요합니다. 전도자는 전도한 사람이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며 기쁘고 즐겁고 자기 신앙이 더 성장합니다.

 

2. 성도의 신분이 무엇입니까?(9)

 

①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신7:6절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엡1:4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천국의 시민권을 주셨습니다. 여기 택했다는 것은 엡1: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택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전에 택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싶어서 자의로 내 의지와 생각대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창세전에 택해서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졌다는 말입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빌3:20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한 나라의 시민권을 얻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 중에서 우리나라의 시민권을 얻기 위하여 애를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민권을 얻지 못하고 불법으로 채류 하다가 발각되어 돈벌려고 왔다가 벌금내고 추방당하는 조선족이나 동남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주셨으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를 쓸 당시에 세계 최대강국인 로마의 시민권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야 시민권을 살 수가 있었고 어떤 특별한 공을 세웠을 때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의 시민권을 받은 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공로 없이 무조건 택하시고 시민권을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잡니다. 우리의 소속은 하늘이요 땅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살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미국사람이듯이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옛날에 공중을 나는 새들과 땅에 기는 짐승과 싸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쥐란 놈은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새들이 이기는 듯 하면 새처럼 날아다니며 새편에 붙고, 짐승이 이기는 듯 하면 짐승처럼 땅을 기면서 짐승 편에 붙었습니다. 처음에는 잘되 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을 안 새들과 짐승이 다같이 박쥐를 싫어하고 쫓아버리자 갈 곳이 없어서 동굴 속에 숨었고 낮에는 다니지 못하고 밤에만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박쥐처럼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붙었다 세상에 붙었다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택한 족속이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②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라는 말은 본래 라틴어로 "다리를 놓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즉, 중보자라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예수께서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죄 때문에 속죄양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된 것입니다.
신약적 의미에서 제사장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잡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만인 제사장>설이라고 합니다. 즉 모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하면 큰 재앙을 만나게 되었었습니다.
대하26장에 보면 웃시야 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웃시야는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준 아주 인기가 많았던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웃시야 왕은 그것 때문에 문둥병에 걸려 왕이면서도 죽는 날까지 별궁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제사장들만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는 권리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⑴제사장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⑵제사장에게는 책임이 수반됩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켜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적인 의미에서의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합니까? 양을 잡고 소를 잡아 바쳐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제사는 다 끝났습니다. 그러한 제사는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난 것입니다.
롬12: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내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몸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됩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몸을 드려야 됩니다.
히13:15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지금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내 몸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또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는 구제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성경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⑶제사란 ‘드린다’는 의미인데,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구제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⑷5절에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그 제사장의 특권을 빼앗기지 말고 포기하지 맙시다. 9절에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왕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물려받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의 권세가 능력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죄를 이기고,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를 이기고, 마귀와 귀신들을 물리치게 됩니다.
막16: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 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 권세로 표적을 일으킵니다. 귀신도 쫒아냅니다. 이 왕의 권세로 질병도 물리치게 됩니다. 심지어 사망도 이기게 됩니다.
고전15:55-57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사망에서 이긴 사람들입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습니다.
이 이름의 권세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요14:13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마18: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할/

③거룩한 나라의 백성입니다.
⑴거룩한 나라란 성별된 나라란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지만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비록 죄와 허물로 얼룩져 있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백성답게 말과 뜻과 행동이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⑵나라에는 다스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마귀가 우리를 다스리면 불행입니다. 불신자는 마귀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믿는 우리마저도 마귀가 다스리려고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공격을 이겨야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평안해 집니다. 우리가정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⑶나라에는 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인 성경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혹시라도 성경 말씀을 벗어나지 않기를 애써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 때에 행복해지고 은혜를 받습니다.
⑷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에게는 거룩한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주신 것처럼 우리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성도로 불러 주시고, 집사로 불러 주시고, 목사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대통령이 불러주어도 그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야지 합당하게 살지 아니하면 대통령에 누가 되고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줍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내려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거룩한 나라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거룩한 나라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도 거룩한 나라, 영적인 이스라엘,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한 시민이 되었습니다.
세째로, 우리에게 거룩한 혈통이 요구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는 것 중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우상에 빠지고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제일 싫어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거룩한 혈통을 보전케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별한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느 왕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신하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저 별은 참 아름답다” 그랬더니 신하들이 “찬란합니다”“대단합니다”“왕과 같이 빛납니다” 모두가 야단들이었습니다.그러나 한 신하만이 그대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에게 왜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저는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 후 왕은 그 신하와만 국사를 의논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 때 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신하였기 때문입니다.

④하나님께 소유된 백성입니다(9).
사43:1절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짐승도 주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살아 통통 찌기도 하고 빼빼 마르기도 합니다. 짐승도 누구의 소유가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누구 밑에서 일하는가 중요합니다. 누가 나라를 다스리느냐 중요합니다.
특히 영적으로 내가 어디 소속이냐가 중요합니다. 마귀의 소속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소속이냐가 따라 영생과 영벌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란 의미는?
⑴하나님이 아껴주십니다.
말3:17절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⑵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 질병, 사업, 직장 등등, 그 모두를 다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⑶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 물건의 소유주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같은 키타지만 엘비스 프레스리가 쓰던 키타나 영국의 비틀즈가 쓰던 키타는 일반 사람들이 쓰던 기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가격에 팔렸다고 합니다. 별 가치가 없는 종이 한 장이지만 롱펠로우가 휴지를 집어 들어 얼른 떠오른 시상을 적으면 6천불로 팔렸다는 것입니다. 옛날, 피카소가 종이 조각에 그림 스케치를 한 것이 집 한 채의 값이 되어 팔렸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시므로, 그 가치가 엄청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16: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⑷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육신의 부모가 자식 잘되기를 바라서 꾸지람을 하고 징계를 하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자녀입니다.
사41:10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⑸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롬14: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고전10:31절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개성 두문동의 72충신을 아십니까? 고려말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72명의 고려의 충신들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개성 근방의 두문동이라는 오지로 들어갔답니다. 이성계는 그들의 충절을 높이 사서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불을 지르면 나오겠거니 하여 동네에 불을 놓았으나 그들은 죽음으로서 충신의 길을 택했습니다.
한 임금을 위해서도 그렇게 충절을 지켰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의 절개를 지켜야 합니다. 계2: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할/ (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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