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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14:1-9)

by 【고동엽】 2022. 2. 4.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14:1-9)

 

영국의 역사를 바꾼 '윈스턴 처칠'이 상원의원에 출마했습니다. 당당히 이기리라고 모두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처칠은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상해서 두문불출하며 사람을 만나기를 기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가에 서 있던 그는 우연히 벽돌공의 날렵한 손놀림을 주시하게 되었습니다. 벽돌공은 벽돌 한 장을 쌓고 그 위에 쎄멘을 바르고, 그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견고하고 거대한 담벼락이 완성되었습니다.
처칠은 멍하니 그 모습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바라보면서 깨달아진 것이 있는데, "그렇다. 인생은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리는 작업이다. 인생 여정을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결심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 날 벽돌공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은 처칠은 다시 정치계에 뛰어들어 평생 지치지 않고 활동하는 성공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림의 여러분! 2005년도에도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는 인생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제목소개!▶

잘 사는 나라, 건강한 나라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중심이 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보면 그 나라를 건전하게 받쳐주는 중심 정신이 하나씩 있는데 그 정신이 건전하면 그 나라는 건강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신을 소중히 여깁니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은 미국이 추구하는 가장 중심 되는 국가의 정신이고 이념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독재라든가 쿠데타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역사에도 없습니다.
또 영국은 '신사도'를 소중히 여깁니다. 또 일본은 '의리'를 중시합니다. 야구자의 의리는 전 세계가 알아줍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소중한 정신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절'입니다. 그래서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이 정신도 많이 훼손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이 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정신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소중한 중심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유일 신관입니다. 즉 하나님 중심 생활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 백성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고 민족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해석이 되질 않으며 뜻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정신입니다.
그런데도 호세아서를 보면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고 이방 나라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 백성들은 이미 자기를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존재 의미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이렇게 가지고 있어야 할 정신을 버리게 되면 곧바로 혼돈이 오고, 흔들리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상실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상실하면 그 시간부터 혼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기 중심을 상실하게 되니까 방탕하게 되고 무질서해지고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방 나라를 동경하고 의지하면서 자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니 그 백성들이 온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흔들리고 방종하고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이 백성들이 이러다가 망하리라" 이것이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탄식이고 후회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때 호세아가 나섭니다. 하나님의 탄식을 듣고 호세아가 백성들 앞에 나서서 호소했습니다.
호6: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고집 부리지 말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 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돌아가면 여호와께서 받아 주시이로다"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로 가되 "말씀을 가지고 가자(2절)"고 했습니다.
여기 말씀은 정신을 말하고 중심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여호와께로 가되 '잃어버린 중심을 되찾아 가지고 가자' 그 말입니다. 신앙 인은 마음에 말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내 마음에서 중심을 이루어 줍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지고 가자'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드리자(2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진정으로 회개하자'는 말입니다. 이 백성들이 그 동안 무분별하게 죄 없는 양을 잡고 송아지를 잡아서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형식적인 제물을 바치지 말고 '입술로 드리자', 즉 '이제는 정말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앗수르를 더 이상 의지하지 말자"(3절)고 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감히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배후에 앗수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는 당시 최강국이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면서 동맹을 맺었습니다. 앗수르는 그 대가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어도 앗수르가 있으니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놓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 앗수르가 문제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앗수르는 다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하나님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가끔 신앙생활을 과감히 중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거나 일이 아주 잘되거나 몸이 건강해졌거나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이 잘 안 될 때는 잘 믿다가도 일이 잘되면 신앙에서 멀어져 갑니다. 또 갑자기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만합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멀어져 갑니다.
이때 돈은 빽이고 배경이고 하나님이고 앗수르입니다. 또 병을 앓던 사람이 병이 나았을 때 신앙에서 떠나갑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건강해져서 혼자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때 건강이 앗수르입니다.
이 백성들은 도저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백성이었는데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앗수르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적들은 앗수르가 다 막아 줍니다. 앗수르와 맺은 동맹이 있는 한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과감하게 하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때 호세아가 외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쉽게 말하면 '돈 의지하지 말고, 사람, 배경, 조건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네 번째는 "말을 의지하지 말자(3절)" 고 했습니다.
말은 당시 군사 무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로부터 말을 많이 수입해서 그 말로 병거를 만들고 날마다 군사 훈련을 하느라 말을 타고 연습을 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병거를 보고 안심합니다. 이제는 이 병거들이 나라를 든든히 지켜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말을 타지말고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자"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우상을 버리자(3절)"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입니다. 당시의 가장 큰 우상은 앗수르입니다. 이 백성들이 앗수르를 너무 의지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정신을 잃고 앗수르를 쫓아갔습니다.
그때 호세아가 백성들 앞에 서서 외쳤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얼마나 실감나는 외침입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위기의 때를 만날 경우가 있습니다. 늘 평안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때로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누군가가 나서 주어야 합니다. 중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는 누군가 나서서 문제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그런 점에서 그 시대의 중재자였고 선지자였고 백성들에게 살길을 제시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돌아온다'는 것을 '회개와 회복'의 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돌아온 사건들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만에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사건을 들 수 있고, 70년 만에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도 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의 아내였던 고멜이 남편의 품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건이 호세아서에 기록되어 있고, 아버지의 품을 떠났던 둘째 아들(탕자)이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사건도 있습니다.
특히 고멜이라는 여자나, 둘째 아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품을 떠났거나 떠나고 있거나 떠나려고 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모든 인간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고멜은 호세아라는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남자의 유혹에 빠져 집을 나갔고, 그러한 그녀를 남편인 호세아가 찾아가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는 세상 향락을 찾아 집을 나갔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렸습니다.

 

▶고멜과 둘째 아들의 경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①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 발로 걸어 나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발적으로 선택한 유혹이었고 타락이었습니다.
②집을 나간 이후로부터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멜은 인신 매매단에 의해 유흥가에 팔렸고, 둘째 아들은 환락가를 맴돌다가 결국 돼지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③둘 다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멜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고, 둘째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④두 사람 다 용서받았습니다. 고멜에게 남편은, "여보 내 잘못이오. 내가 당신을 잘 돌보지 못한 탓이오. 우리 이제부터 딴 맘먹지 말고 사랑하며 잘살아 봅시다"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두고 아버지는, "내 아들은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다. 목욕을 시키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우고 그리고 살진 소를 잡아 환영 잔치를 열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지난날의 잘못이 일체 거론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일을 미주알고주알 낱낱이 따지면서 용서하겠다는 것은, 심판하겠다는 것이지 용서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정죄나 심판은 유보해 놓고 하는 것입니다.

⑤두 사람 모두 타락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녀를 사랑하는 좋은 남편을 배신했던 고멜처럼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제 남편의 품을 떠나 다른 남자의 품을 전전했던 고멜처럼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 신을 섬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좋은 집, 넉넉한 가산,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놔 둔 채 환락가로 뛰쳐나가 거지가 된 둘째 아들처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향락이 더 좋다면서 그 품을 떠나고 있습니다.
고멜과 둘째 아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자화상이며 그림자입니다.
⑥제아무리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품을 떠난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도망치지만 하나님께서는 찾아가십니다. 인간은 외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대면하시고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도망치는 인간, 쫓아가시는 하나님, 어떻게 승부가 결정 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손오공은 부처님 손안에 있지만, 그 부쳐도 우리 하나님 손안에 있습니다.
고멜과 탕자의 이야기는 결국 죄인이라도 용서하시고 기어이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극적인 사랑을 설명해 줍니다.

호세아서는 호세아 선지자가 기록한 책입니다. 호세아는 이사야, 아모스, 요나, 요엘, 나훔 선지자들과 동시대를 살면서 약 65년 동안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호세아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두 큰 줄기가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꾸짖고 심판을 예고하고 있는가 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회복시키겠다는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가 드러나 있습니다.
호14장은 책 전체의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타락과 방종, 불신과 배신을 용서하신다는 것과 그 전제 조건으로 여호와께 돌아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와 돌아오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1. 왜 돌아와야 합니까?

 

1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여호와께로'라는 말은 '하나님에게까지'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로 돌아가느냐, 어떻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돌아오려면 하나님의 품에까지 돌아와야 합니다. 마치 집 떠났던 탕자가 아버지가 계신 집에까지 돌아왔던 것처럼,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방향을 잘못 정한 나머지 다른 데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엎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엎드러졌다'는 말은 '실패, 절망, 고통, 좌절'을 의미합니다.
남편을 떠났던 고멜이 죽을 고생을 다 겪은 뒤 결국은 유흥가에 팔린 신세가 된 것이나,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방탕으로 삶을 탕진하다가 결국 비렁뱅이가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 역시 그 덫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넘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이곳 저곳 깨지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인간이란 넘어지고 넘어져 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이란 질그릇과 같아서 깨어지고 깨어져 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여기저기 넘어진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높아 가고 있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넘어졌기 때문에, 네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너 자신의 힘만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빨리 돌아오라고 본문은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불의 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다가 걸려 넘어졌다는 말입니다. '넘어졌다'는 '실패, 절망, 좌절을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합니다.
본문은 '불의 때문에 엎드러졌다'고 말합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를 믿고 세상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는 개인을 넘어뜨립니다. 불의는 가정도 넘어뜨립니다. 불의는 통치자도 넘어뜨립니다. 불의는 국가도 넘어뜨립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불의 때문에 유황불에 멸망했고, 헤롯왕과 아합 왕조도 불의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 하나님께로'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뜻은 '너는 비록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따라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러나 나는 네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를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네 하나님이다. 네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2. 어떻게 돌아와야 합니까?

 

2절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악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선입니다. 선을 선택하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악을 선택하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렘4:1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 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회복의 지름길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말씀을 가지고 돌아 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①고백과 기도를 의미합니다.
2절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입술은 고백과 기도를 의미하고 수송아지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 뜻은 형식적인 겉치레보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자기 죄를 낱낱이 그리고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요1서 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②신앙을 정립하라는 것입니다.
3절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즉, 지금까지 세상 것들을 믿고 우상을 믿고 섬겼던 것을 고백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를 믿고 의지했지만,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배신했고 공격을 일삼았습니다. ▶또 말을 키우고 사랑하여 그 말을 탔지만 그 말이 날뛰는 바람에 떨어져 깨지고 부러졌습니다. ▶손으로 새기고 만든 우상을 섬기고 그것에게 절했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은 섬기는 자들을 도와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구하라는 것이 본문의 충고입니다. 3절하반절을 보면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결론은 드러났습니다. 엎드러진 사람들은 그것이 건강이든 경제 문제든 지식이든 세상이든 명성이든 간에 그런 것들을 절대 가치로 의지하거나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3. 돌아오면, 하나님은 몇 가지 용납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①"너희를 고치사 사랑하겠다(4절)"는 메시지입니다.
아주 소망적인 메시지입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환영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맞아들일 때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고치는 과정이 몇 가지 있습니다.

⑴'저를 씻겨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상태인 아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씻으라고 했습니다.
⑵씻긴 후에 '가락지를 끼워 주라'고 했습니다.
가락지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양자를 받아들일 때 반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아들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⑶'채색 옷을 입혀 주라'고 했습니다.
그냥 옷이 아닙니다. 채색 옷입니다. 채색 옷은 당시 로마에서는 나라에 공덕을 세운 신하에게 왕이 선사하는 옷입니다. 그러니까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를 정식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채색 옷을 입혀 주라고 했습니다.
⑷'신발을 신겨 주었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신발이 없었습니다. 노예들은 맨발로 살았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 가면 아들이라 하지말고 품꾼 중 하나로 일하게 해 달라고 하자" 그리고 집으로 갑니다. 이 말은 신발을 신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맨발로 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에게 신발을 신겨주라고 했습니다. 탕자를 정식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용납입니다. 이 백성들이 타락하고 방탕했어도 돌아온다면 이렇게 탕자를 받아들이듯이 무조건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저를 고치고 사랑하리라"고 했습니다.

▶시골 동네에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고 마당 한쪽에는 닭장이 있었습니다. 가을의 어느 날 주인이 일하러 들에 나간 사이 아궁이에서 일어난 불이 온 집에 옮겨 붙어 집이 모두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만, 닭장에 있던 닭들이 연기에 질식되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미 닭이 품고 있던 병아리 가운데 몇 마리가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물론 어미 닭은 죽었지만 어미 닭이 품고 있던 병아리는 그 품속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누가 훈련시킨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미 닭이 지닌 새끼 보호 본능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더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정성이나 희생에 비하면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의 효성이란 티끌만도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짐승이건 사람이건 보호하고 지키고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무제한적이며 끝도 다함도 없습니다.
4절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고치고 사랑하고'라는 말의 의미는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랑을 쏟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여기서 말하는 고친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⑴영혼을 고쳐서 구원하신다는 것이고,
⑵육체를 고쳐서 건강하게 해주신다는 것이고,
⑶삶을 고쳐서 인격적이며 신앙적인 존재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패역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패역이란 배신과 불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병들고 육체적으로 병들고 인격적으로 병들게 된 원인이 배신과 불신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 패역마저도 고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 사랑의 극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과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영혼을 고치고 육체를 고치고 삶을 고치시는 것은 전인격적인 구원, 즉 전인적 구원과 치유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부분만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새롭게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패역'이란 나쁜 버릇입니다. 그것을 고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여기에는 '조건 없이 기쁘게 사랑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근심하시게 한 것뿐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사랑은 그 어떤 힘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죄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고 마귀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고 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서로 뺨을 때리는 것이 인사법이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자기 귀를 잡아당기고 혓바닥을 길게 내미는 것이 친절의 표시라고 합니다. ▶통가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두 눈을 부라리며 위 아래로 굴리는 것이 인사법이라고 합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콧등을 서로 비벼 대는 것이 인사법이라고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 가운데는 인사로 뺨이나 발바닥을 핥거나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즐거움과 반가움을 표현하는 방법이 종족에 따라 각양 각색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멋진 친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사랑 받았을 때,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용서받았을 때,
고침 받을 수 없는 사람이 고침 받았을 때,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고치시는 분이 웃으며 기쁨으로 조건 없이 그 일을 행하실 때 느끼는 기쁨이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강요된 웃음이나 친절은 진짜 웃음이나 친절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즐거이 저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즐겁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②"이슬 같고 백합같이 피어나게 하리라(5절)"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슬이나 백합은 그렇게 소중하지 않습니다. 이슬이나 백합은 얼마든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이슬이나 백합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곳은 사막 지대이기 때문에 물도 없습니다. 비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이슬이 생명수입니다.
광야를 여행할 때는 밤에 밖에다 비닐을 깔아 놓고 잠을 잡니다. 그리고 밤사이에 이슬이 내리면 아침에 그 이슬을 모아 물을 마시며 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슬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장차 이 백성을 이 생명수와 같은 이슬처럼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슬은 아름답습니다. 더욱이 아침 이슬에 햇빛이 비치게 되면 오색 찬란한 보석처럼 빛납니다. 이슬은 조용합니다. 소나기도 시끄럽고 천둥 번개도 요란합니다만 이슬은 밤새 내려도 소리가 없습니다.
또 이슬은 식물을 성장시킵니다. 골고루 침투하는 그 이슬 때문에 식물은 성장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상징합니다.
은혜의 이슬이 내 심령 속에 내리면 내 삶이 아름다워지고 부드러워집니다. 떠들썩하고 불안정했던 나의 생활이 조용해집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이 쑥쑥 자라나게 됩니다.
▶또 <백합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백합꽃이 피었으니 그 꽃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앞으로 이 백성들로 하여금 이슬과 같이 또 백합과 같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망적인 약속입니까?

③"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뿌리를 내리게 할 것(5절)"이라고 했습니다.
한대 지방의 나무에 비해 열대 지방의 나무는 키가 크고 줄기가 굵은 데 비해 뿌리가 약합니다. 습기가 많고 큰바람이 적기 때문에 뿌리가 깊이 박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바람에도 쉽게 넘어지는 나무들이 많습니다.
본래 백향목은 줄기가 곧고 하늘을 향해 쭉 뻗어 가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키가 큰 나무이기 때문에 뿌리가 약하면 쓰러지게 됩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이 박히면 쓰러질 염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향목을 심으실 뿐만 아니라 그 나무가 하늘로 치솟게 키우십니다. 그리고 그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뿌리를 깊이 박게 해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백향목은 곧 나요 여러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굉음을 내며 쓰러지는 고목처럼, 그 어떤 이유 때문에 인생의 현장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고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서서히 쓰러진다면 받침대라도 설치해서 떠받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갑자기 쓰러지면 속수 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쓰러지지 않도록 그 뿌리를 깊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든든한 나무! 그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향목이라는 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입니다. 단단하고 향이 있고 곧게 자라는 가장 좋은 나무입니다. 그래서 백향목은 벌레가 없고 뿌리가 깊이 박히기 때문에 바람에 뽑히거나 부러지는 일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이 나무로 성전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이 백성을 이 백향목처럼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백성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흥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버선발로 뛰어나가 지금까지의 진노와 서운함을 순간적으로 녹여 버리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한 것도 잊은 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 흥분한 탕자의 아버지 모습 그대로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속을 얼마나 썩였습니까? 재산을 얼마나 탕진했으며 또 얼마나 방탕했습니까? 그랬는데도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왔다고 송아지를 잡고 가락지를 끼워 주고 야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성이고 마음이며 생각입니다.

④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5-8절을 살펴보면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다,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푸른 잣나무 같으니' 등의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백합화, 백향목, 감람나무, 포도나무, 잣나무' 등은 당시 이스라엘과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고, 박히고, 퍼지고, 아름답고'라는 표현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을 설명해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무들 가운데 감람나무와 포도나무와 잣나무는 열매를 맺는 나무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 하반절은 그 나무들이 하나님 때문에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열매를 따게 된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열매는 수고와 땀의 결과입니다. 농부는 열매 때문에 땀 흘려 일합니다. 학생은 결과를 위해 밤 새워 공부합니다. 사업가는 성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합니다. 결국 열매 때문에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결론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고 사랑하시고 가꾸시고 꽃 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15:4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다"라고 하셨고, 15:5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⑤호세아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9).
이 말씀이 호세아서 전체의 결론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여러분, 사람들이 복을 말합니다만 복중의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지혜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외쳤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좋은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축복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2005년 1월 16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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