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 바디매오의 믿음! (막 10:46-52)
▶다마레이 장군 이야기입니다. 그는 적군들에게 완전히 패배 당하고, 부하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는 동굴로 들어가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려고 칼을 배에 댔습니다. 그 순간 그 앞에 나타난 것은 개미였습니다. 개미는 자기보다 큰 먹이를 물고 가는데 가만히 보니 쓰러지면 또 일어나서 가고 또 쓰러지면 일어나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여 따라가 보았습니다. 79번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 80번째 성공하는 것을 보고, 다마레이 장군은 외쳤습니다.
"나는 이제 겨우 한번 실패한 것이 아닌가?" 다시 일어나 승리하는 장군이 되었습니다. 개미 한 마리에서도 교훈을 얻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가 있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는 주저앉으라는 신호가 아니라 이런 곳이 있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는 이정표입니다. 2005년 다시 뛰는 한해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아멘! ◀제목소개!▶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데다 길거리에서 구걸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거지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 지방을 지나가시게 되었을 때 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지르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소경의 딱 한마디의 말은 "주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때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향하여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소경이 보게 되어 예수님을 좇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얼마나 불행합니까? 누구하나 그를 따뜻하게 동정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소경이 되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앞을 보지 못하는 일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소경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로 삼중고를 가지고 있던 '헬렌 켈러' 여사가 쓴 '사흘동안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헬렌 켈러'여사는 아주 어려서 눈을 볼 수 없게 되고, 귀가 들리지 않아서 결국 말을 못하게 되는 불행을 안고 산 사람입니다.
그를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물'이라는 단어 하나를 가르치는데 무려 석 달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노력해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신체장애자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으며,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큰 교훈을 준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사흘동안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일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첫째 날에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천진스러운 아기를 보고, 숲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녁 노을을 보겠습니다.
둘째 날은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감격스러움을 보고, 미술관에 가서 예술품을 감상하고, 저녁에는 영화를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해뜬 광경을 보고, 길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고, 빈민가, 공장, 아이들이 노는 공원도 가보겠습니다" 소경의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보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소경은 어쩌면 저와 여러분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보기는 보아도 내일 일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데 보는 사람보다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두 눈을 뜨고 있지만 정말 내일을 볼 줄 모르는 인생, 미래를 볼 줄 모르고, 죽음 후에 그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하고, 죽음 후에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인생이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는 왔다 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합니까?
오늘 본문에 이 소경은 자기의 어두움을 끌어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절규합니다. ▶볼 수 없는 인생이 보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눈을 떠서 세상을 봅니다. 새로운 눈을 떠서 새로운 인생을 경험합니다. 이 소경은 새로운 삶을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이런 치유의 경험, 이런 기적의 경험, 교회에 나올 때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육적인 눈도 열리며, 새로운 세상을 보는 놀라운 경험, 이런 경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것이 물이 포도주되는 기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1. 자신의 실존(모습)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소경은 바디매오입니다. 이 사람은 여리고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 맨 먼저 통과해야할 성입니다.
예루살렘 동남쪽 3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인데 '달의 성읍'이라고도 하고, '종려의 성읍'이라고도 불리 우는 아주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특히 이 도시에는 향나무, 뽕나무, 장미 나무 등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래서 여리고를 '장미의 도시'라고도 합니다.
여리고가 이처럼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그러나 소경은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디메오의 형편을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가진 것도, 소유한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장래도 불투명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꿈도 없었고 소망도 없었고 절대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떠한 희망의 빛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이 사람은 자기의 처지(실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경은 자기가 소경인 것도, 거지인 것도 다 알았습니다. 자기는 얻어먹어야 사는 존재, 자기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치유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존재를 고치려고 예수께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소경에게 축복을 받는 길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 길을 걷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그릇, 자신의 현실적인 사정과 환경과 형편,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데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는 자기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불쌍하면서도 불쌍한 줄을 모르고 삽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합니까? 자기가 불쌍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께 나오지 못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죄인인 줄을 알지만, 자신이 죄인인 줄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이 연약하고, 무능하고, 죄가 많은 존재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자신을 깨닫는다는 것은 먼저 자신이 죄악 된 존재임을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죄인이요 보좔 것 없는 존재임을 고백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6:5)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마15:18-19절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둡고 그늘진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광기가 있고, 미움이 있고, 죄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육적인 정욕이 있고, 탐욕이 있고, 광란이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인생, 정말 주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인생의 어두움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가 이 불쌍한 처지를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 속에 인생의 장애물이 있고 어두움이 있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적어도 자기 인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비참한 인생이요 도움을 받아야하는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앞에 나와서 외친 것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중요입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의 죄, 내 속에 있는 어두움, 내 속에 있는 광기, 내 속에 있는 정욕, 내 속에 있는 연약함을 도와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과 필요를 존재를 인식할 때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메시야로, 구세주로 확실히 믿었습니다.
47절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①중요한 것은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예수 소식, 복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믿음이 자랍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깨닫습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생각이 넓어집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교회의 일도 합니다.
주께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시키는지 자주 들어야 하고 자주 살펴봐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바디메오는 '예수의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듣고 그는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외쳤습니다.
②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소낙비와 같아서 빨리 서둘지 않으면 지나가 버리고 만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회가 오면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후6:2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 지금 이 시간이 귀합니다. 신앙은 현재 지금입니다.
③예수를 메시야로, 구세주로 확실히 믿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막상 예수께 도움을 요청할 때는 '나사렛 예수여' 그렇게 외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이 소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받기는 '나사렛 예수'라 소개를 받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이 표현은 그 당시 예수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쓰고있는 말로 이 표현은 예수님을 경멸할 때 부르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사렛은 빈민촌입니다. 술 먹고 주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고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 부르는 것도 예수님을 비하하는 그런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불렀을 때는 나사렛 예수라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메시야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오십니다. 인류를 구원하고, 나를 돕고, 나를 구원하고, 나를 치유하시는 분은 다윗을 통해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 메시야가 오면 하나님 나라가 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이사야는 사35:5이하에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메시야가 오시면 소경의 눈이 열립니다. 귀머거리의 귀가 열립니다.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11장에도 보면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예수께로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믿었지만 감옥에 있다가 보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보내어 묻습니다. "당신이 정말 오실 메시야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마11:5).
이것이 바로 메시야의 증거입니다. 메시야가 오면 '소경이 눈을 뜬다. 메시야가 오면 벙어리가 말한다. 메시야가 오시면 귀머거리가 듣는다'. 소경 바디매오가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를 천대받는 나사렛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내 눈을 고쳐주시는 메시야로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 분이 메시야라면 내 눈도 열어주실 수가 있다. 내 인생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그분은 당연히 나를 고치시고 내 인생을 바꾸어 주실 수가 있다. 내가 그분께 나아가자. 그분께 엎드리자. 그분께 구하자'.
이 소경은 예수님이 내 인생을 바꾸고, 나를 치료하시고,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이 바꿔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앙은 '네가 예수를 무엇으로 믿느냐?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들의 인생이 바뀌기를 원합니까? 새로운 세계를 보기를 원합니까? 미래를, 내일을 보시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예수를 메시야로, 나의 생명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물이 포도주'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도 바뀌지 안아요. 여전히 옛 습관, 옛 사고, 옛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경이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세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분만이 나를 구원할 수가 있고, 그 분만이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수가 있습니다. /할/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이 소경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의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 때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장애물들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럴 때 이런 장애물들을 잘 극복하고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영적인 눈을 떠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디메오를 보세오! 바디매오는 단 한번의 요청으로 응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47절 "소경이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한번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48절에 보면 장해 요인이 생깁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장애요인이 발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경을 방해했습니다. 잠잠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경은 이 무리들의 압력 앞에서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했습니까? 48절에 보면 더욱 소리를 지릅니다.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더욱 심히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클레이는 "무엇으로도 예수님은 만나고자하는 바디매오의 고함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소리 지른 것은 소리였고, 두 번째 소리 지른 것은 그 원어로 보면 비명에 가까운 소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소경은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 더욱 소리를 질러,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가는 장애물을 극복한 것입니다.
저는 소경의 이 두 번의 외침을 통해 이런 반성을 해봅니다. 우리는 신앙은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닌가? 너무 쉽게 너무 간단하게 교회 몇 번 나오는 것으로 끝내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기도 몇 번하고 응답이 없으면 아 하나님은 별것이 아니구나! 교회 몇 번 나오고 별것이 없는 것 같으면 아 교회도 별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기도할 때 단 한번 기도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역시 나 같은 사람이 기도해보았자 무슨 응답이 있어, 난 역시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단한 번 혹은 두어 번 교회에 나오고는 별것이 없구나 하고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찾고 구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구하라는 의미는 현재시제입니다. 이는 지속성의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구하라. 계속해서 찾으라.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라는 말입니다. 한번만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드리라는 말입니다.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 마침내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딱 한번만 두드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동판매기처럼 돈만 넣으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우리 믿음의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 소경은 요청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런데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구했습니다. 이건 어떤 태도를 말합니까? '나는 알아요. 주님이 마침내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주님이 마침내 나를 만나주시고, 주님이 마침내 나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고 마침내 내 눈을 열어주시고, 내 인생을 새롭게 하여 주실 줄을 나는 믿습니다'. 반드시 새로운 인생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소경은 끝까지 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불으짖는다'는 말이 수없이 나옵니다.
시50: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설교요 교훈입니다. 그의 부르짖음이 있는 한 그 고통과 불행은 해결 될 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 됩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에는 기도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대상자가 분명합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불렀습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얼마나 오래 부르짖었고, 얼마나 그 부르짖음이 인간의 표현으로 강도가 세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향한 부르짖음이냐는 이것이 부르짖음을 결정하는 기도의 중요요소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기도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수많은 말을 하지만 그 수많은 기도를 종합해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표현 안에 다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번 불쌍히 여기면 밤새워 기도했던 그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의 발견은 큰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여호와가 들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발견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단 한번의 구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살아 계심은 우리가 경험하고 또 경험하여야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루아침에 성숙하지 않듯이 우리의 교회 생활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믿음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 엎드리고, 계속 배우고, 계속 찬송하고, 계속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비로써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큰 믿음이 큰 축복의 그릇이 되는 것이고, 믿음을 가지고 인내를 하는 것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믿음을 가지고 장애물을 넘어서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내를 갖고 나가는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을 하셨을까요?
49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불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예수님께서 머물러서셨습니다. 소경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의 길은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그 모멸, 수치스러움, 그 아픔, 그 고통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막상 고통을 당할 때면 자신의 고통 때문에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고통을 겪을 줄 알면서도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이웃의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십니다. 당신이 고통을 당하면서도 언제나 우리 인생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셨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의 절정에 도달하셔서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을 때, 십자가 곁에 다른 강도가 외쳤습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옵소서" 그러자 그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안심하라 그 나라가 임할 때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듣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세심하게 듣고 계십니다. 주님은 길을 가시다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들었듯이 우리의 부르짖음도 들으십니다. /믿/
4. 그의 분명한 고백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소경 거지가 소리지르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시던 예수께서 그를 불러 세우고 물으셨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그 소경의 소원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의 고백을 직접 듣기 위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원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생활고도 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백을 직접 듣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경의 대답은 분명하고 간단하고 확실했습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분명하고 확신에 차 있습니까. 이 분명함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여기에 군소리가 필요 없습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소경에게는 이 말 한마디면 됩니다.
요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예"하면 끝납니다. 38년 된 병자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낫는 것입니다. 여러 다른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 병자가 대답합니다. "이 물이 움직일 때,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나이다". 이것은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약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언제나 말이 많고 말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건설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이 많다보면 불평도 나오고 불만도 나오고 핑계도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 소경 바디매오에게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때 소경이 대답합니다. "예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기도에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할/
우리 신앙의 칼라도 선명해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시냐?'고 물으면 '예수는 나의 구주십니다"라고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예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물으면 대부분 대답하기를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참 애매한 말입니다. '우리'가 아니고 '나'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신앙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나 없는 예수, 나 없는 부활, 나 없는 천국,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젊은 며느리가 늦게 세례 받는 시어머니에게 미리 공부를 시켰습니다. 목사님이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느냐?'고 묻거든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고 대답하라고 단단히 일러 드렸습니다.
문답시간에 목사님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나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대답하기를 "우리 며느리를 위해서 죽으셨대요" 라고 대답했답니다.
오늘 많은 현대인들의 신앙이 이렇게 희미하고 불확실하고 복음의 불빛이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이 힘이 없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희미하면 온갖 유혹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탄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됩니다. 신앙이 뜨겁고 분명하고 힘이 있으면 사탄도 공격을 하지 못합니다. 유혹은 신앙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신앙이 분명하고 밝으면 유혹도 시험도 물러갑니다. 그런데 신앙이 불분명하고 흐리멍덩하면 사탄의 밥이 됩니다.
그래서 '루터'는 '신앙인들은 주일을 잘 지키는 일부터 훈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일 지키는 일은 천국 가는 훈련이라고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바쁘게 살다가도 주일이면 손놓고 교회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시험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목적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5. 겉옷까지 던져 버리고 뛰어 일어나는 믿음의 결단이 귀합니다.
50절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바디매오는 흥분했습니다. 구걸한 동전을 모아두었던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무조건 내달렸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주님을 향한 열망과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바클레이'는 '총알같이 달려왔다. 그 까닭은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이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마11:12절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 침노하는 자는 얻느니라"
렘29:13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으면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겉옷을 내어 버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겉옷은 그의 재산목록 제1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치마와 같은 큰 통치마를 겉옷으로 입습니다. 이 겉옷은 밤에는 이불로 낮에는 옷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낮은 덥고 밤은 춥습니다. 그러므로 겉옷은 그의 재산목록 제1호입니다.
여기 벗었다는 것은 믿음의 위대한 결단입니다. 이런 위대한 결단이 물이 포도주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에 실패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도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여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주저합니다. 포기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포기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지 못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고 했습니다.
무슨 겉옷을 벗어 버려야 합니까? 죄와 죄를 낳는 습관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었을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장애가 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자기 자랑도 벗어 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때로는 취미나 체면이나 오락이나 친구관계가 신앙의 장애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서 두 번째 자리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 주님을 제일 먼저 모시고 그 밖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주님 만나기를 원한다면 신앙의 장애가 되는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나온 바디매오에게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바디매오가 구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고통 속에서 바디매오는 자기 앞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둡게 살아왔던 세상에서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기 원했습니다.
지금까지 비참하게 살아왔던 삶에서 새로운 인생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 절박한 요청이 예수님의 귀에 들리는 순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는 그가 예수를 좇았다고 했습니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예수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고 예수를 얻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입니다. 코메디의 황제 이주일이 죽기 전에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많은 웃음을 주었지만 내 속에는 웃음이 없었다" ▶하나님이 없으면 많은 것을 가져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수도 없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자마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명도 '예수를 쫓는 일'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도 예수를 쫓는 일입니다. 전도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도 예수를 쫓는 일입니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거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십자가까지 따라갔을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는 그 자리에도 따라갔을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 나라까지 따라갔을 것입니다. /믿/
▶결론입니다. 그는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물이 포도주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만나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만나면 새로운 세계를 보시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앞이 보이지 않습니까?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까? 세상이 어둡기만 하세요? 인생 산다는 것이 답답합니까? 오늘 이 시간 예수를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하신 그 미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 나오지만 아직도 예수를 보지 못하는 분계십니까? 신앙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으신 분도 계십니까? 예수를 좀더 깊이 경험해 보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시간 주 앞에 엎드리세요.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세요! 그리고 엎드려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께서 오늘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를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영원히 죽은 자들이 새 생명 얻는 나라를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으십시오. 예수를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십시오. 예수가 생명입니다. 예수가 부활입니다. 예수가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분을 믿으면 살 것입니다. 그분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그 분을 의지하면 놀라운 인생을 살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할/ (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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