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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기한 능력 속에 살자! (벧후 1:3-11)

by 【고동엽】 2022. 2. 3.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 속에 살자! (벧후 1:3-11)

 

초대교회 '김익두' 목사님의 이야깁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황해도 일대를 주름잡는 불량배건달, 깡패였다고 합니다. 장터에서 상인들을 괴롭히고 행패를 부리는 생활을 하다가 선교사가 전해주는 전도지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김익두가 죽어 몇 월 며칠에 장례식을 한다는 부고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시원하게 여기며 그 시간에 장례식장에 모였다고 합니다. 가보니 관도 놓여 있고 장례식장이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시간이 되자 죽었다던 김익두가 사람들 앞에 불쑥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엄청 놀랐고 '저 놈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런 음모를 꾸몄나?'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김익두는 아주 정중하게 '여러분,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김익두는 정말 죽었습니다. 예전의 김익두는 죽어 이 관에 누워 있고, 여기 서 있는 김익두는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여러분을 이 자리에 오시게 했습니다. 저는 이제 새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정말 그는 예전의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어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인으로 살았습니다.
■한 번은 어느 여름 날, 김익두 목사님이 전도를 하면서 높은 산마루 길을 가다가 그늘진 곳에서 조금 쉬고 있는데, 조무래기 불량배 하나가 올라오더니 공연히 시비를 걸더니 '왜 자기보다 먼저 와서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느냐?'면서 '복날 개 패듯' 패더랍니다. 그러니 김익두 목사님의 주먹이 얼마나 근질거렸겠습니까?
그러나 김익두 목사님은 꾹 참고서 그 불량배가 지쳐 제풀에 주저앉을 때까지 맞고서 '형님, 다 때렸소?' '그래 다 때렸다. 왜 더 맞고 싶으냐?' '아니오. 그런데 형님, 내가 누구인지 아시오?' '네가 누군지 내가 알게 뭐냐?' '형님, 김익두라고 들어보셨소? 내가 바로 그 김익두요!'
이 조무래기 불량배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백배사죄'를 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그를 잡아 일으키면서 유명한 말을 한마디했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구원은 당신이 받았소!'
어떻게 그런 깡패가 변화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에 붙잡히면 됩니다. /믿/아멘!/ ◀제목소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비로운 삼라만상의 자연 세계들을 경험하고 삽니다. 어떻게 태양은 저렇게 이글이글 타면서 빛을 주고 열을 주어 이 산천초목을, 사람을, 식물을, 동물을 다 살게 하는지, 참 신비롭습니다.
어떻게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달이 저렇게 은은한 빛을 뿌립니까? 벌과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것, 바람 소리, 천둥소리, 번개, 이 모든 것 중에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과학이 하나님의 흉내를 내기는 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보리를, 벼를, 밀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화학 성분을 통해 만들 수는 있는데, 과학자들이 만든 보리나 밀은 아무리 심어도 싹이 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씨앗만이 땅에 심어질 때, 움이 트고,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의 피 1g을 만들 수 없고, 바닷물 1g을 만들 수 없습니다. 흉내는 내는데, 사람이 만든 물에서는 고기들이 죽고, 사람이 만든 피를 수혈하면 사람이 죽습니다. 과학자가 아무리 흉내를 잘 내어도 도저히 하나님의 창조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 신기한 능력을 우리는 아는데, 세상 사람은 모릅니다. 태양과 별이 왜 저렇게 하늘에 있고, 삼라만상이 왜 이렇게 되어지는지를 모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모릅니다. 그냥 영원한 수수께끼로 알다가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앎으로, 하나님을 앎으로, 창조주로 앎으로 시원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도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고 다스리고 계심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신기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신기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몸 하나 하나에도 신비로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부부가 결혼하면 어떻게 태에서 그 조그마한 것이 점점 자라 사람이 되어 가지고 열 달이 되면 나와서는 젖을 빨아먹고 자라 사람 노릇을 합니까? 참 신비롭습니다. '얘가 누구를 닮았나?' 참 신비로운 것은 대개 국화빵입니다. 자녀는 아버지 어머니를 꼭 닮습니다. 신비롭습니다. 이런 신비로운 창조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신기한 능력, 신비로운 능력은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더 신비로운 것입니다.

 

①십자가 보배 피로 구원받은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 사함의 비밀을 모릅니다. 목욕탕에서 때를 씻는 것은 알아도 마음의 때, 영혼의 때를 씻는 비결은 몰라 죄 속에서 살다가 죄로 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로운 보배 피의 능력을 알아서 어떠한 두꺼운 죄도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②성령의 능력이 신기한 능력입니다.
'신기한 능력'이란 거룩한 힘으로서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불을 받아야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엄청난 핍박을 받았고, 고난과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주의 일을 잘 감당한 것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갈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5: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③인간이 변화 받는 것도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돈만 알던 삭개오를 변화시킨 것도, 포악스러운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킨 것도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깡패 김익두를 변화시켜 주의 종으로 쓰신 것도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④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주님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마5: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됩니다.
막9: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⑤5절에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도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은혜 받은 이후 이 구절을 읽고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1738년 5월 24일의 일기에서 그는 기록하기를 '5월 24일 아침 5시경 나는 성경을 펴고 이런 말씀을 발견하였다. 우리에게 놀랍고 크고 귀한 약속을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 하는 자가 될 수 있다'니 놀라지 않은가?
그렇다면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처럼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인의 고품격을 말합니다. '신의 성품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 주님 닮는 것,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에게 참된 평화가 있고,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사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또한 성의 권능이 나타나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을 하게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 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러분과 저를 주님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내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할/

■신기한 능력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 성도들에게 '힘써' 행해야할 신앙의 덕목 8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더욱 힘써'라는 말이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5절과 10절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 힘써' 란 말은 부지런하고 열심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는 우리가 힘쓰고 애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힘을 쓰면 됩니다. 힘을 쓰면 효과가 나타납니다.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 부부가 더욱 힘을 쓰면 부부 생활에 행복이 증진됩니다. 학생이 더욱 힘써 공부하면 성적이 올라갑니다. 사업가가 더욱 힘써 사업하면 사업이 더 잘 됩니다. 직장 생활에 더욱 힘쓰면 직장에서 밀려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더 힘써야할 것은 믿음부분이요, 경건 부분입니다. 10절에 보면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굳게 하라'는 말씀은 '확실히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11절에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힘써 해야할 8가지 덕목이 무엇인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1.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첫 통로는 '믿음'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살후2:13, 요1:12, 히11:6).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근본적인 생명이요 원동력입니다. 믿음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에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교회에 충성할 수도 없고, 형제의 사랑이나 천국을 사모하는 삶도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로 여김 받았고(창15:6) 노아도(창6:8,9) 그러했으며, 스데반 집사나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들의 순교도 믿음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 구원받는 믿음이요, 두 번째는 신앙 생활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행하는 믿음입니다. 구원의 믿음은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있든 가, 없든 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 구원에 대한 믿음은 있는 것이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힘써야 한다는 말은 곧 생활 속의 믿음을 말합니다. '약'서에서 말하는 행동하는 믿음이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축복이 있다.
약2;14절 "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축복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행함은 내가 힘쓰고 애써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행할 때 큰그릇이 됩니다. 기도도, 헌신도, 충성도, 전도도 내가 행할 때 복이 되고 하면 할수록 더 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과 조건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철저하게 '플러스' 종교요, 자본주의의 원리입니다. 다섯달란트를 남긴 자에게 더 주었습니다. /할/
목회자는 세 가지의 방에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기도의 골방, 책방, 심방에서 능력이 나옵니다.

 

2.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두 번째 통로는 '덕'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은 좋은데 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 위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덕을 세울 수 있는가? 딤전3:9절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판소입니다.
고전8;1절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분가를 하여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네가 어느 곳을 택하겠느냐? 먼저 좋은 곳을 정하라고 양보하였습니다.
그는 큰아버지로서 윗사람으로서 먼저 좋은 장소를 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기득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곳을 택하라고 양보를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 위에 이러한 덕이 있어야 더욱 아름다운 믿음이 됩니다. 여기서 '덕' 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이 덕에 관하여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⑴롬15:2절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⑵고전14: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⑶살전5: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가끔 교회에서 보면 믿음은 열심히 있으나 덕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남에게 유익은 주지 못하고 상처를 입힙니다. 남을 칭찬은 못하고 항상 흉만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덕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같은 말을 하는데도 그 사람 말에는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도리어 고마워합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바로 덕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습니다.
■어느 왕이 신하 두 사람을 불러놓고 상자 하나씩을 주면서, 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을 담아오라고 했습니다. 신하들은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한 사람은 선한 것을, 다른 한 사람은 악한 것을 상자에 담아 왔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은 신하의 상자를 열어보니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는데, 가장 악한 것을 담아 오라는 명령을 받은 신하의 상자에도 사람의 혀가 들어 있습니다.
한 신하는 '선한 말을 하는 혀'가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했고, 다른 신하는 '악한 말을 하는 혀'가 얼마나 '나쁜 것이냐?'며 논쟁을 했습니다.
왕을 이들의 말을 듣고 잇다가 결론 내기를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도, 가장 선한 것도 혀'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하게도, 악하게도 됩니다. 남을 비방하며 헐뜯는 사람의 혀는 악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형제를 격려하며 칭찬하는 혀야말로 가장 선한 것이 됩니다.
■믿음의 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고전10:32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세 번째 통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 옛말에 '알아야 면장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의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삼박자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읽고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으로만은 안됩니다. 하나님을 체험해서 알아야 합니다.
2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절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렇습니다. 진정한 은혜와 평강은 예수를 바로 알 때 옵니다. 여기 예수를 앎으로의 '앎'은 단순히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체험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의 주석을 '부부관계'의 체험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이 한 마디에는 베드로 일생의 믿음의 노하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베드로야, 그물을 깊은 데로 던져라." 깊은 데로 그물을 던졌을 때 고기가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동안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은혜를 받지만, 처음에는 은혜도 부족하고 평강도 부족해서 불안한 때가 많았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면서도 풍랑이 일어나면 침몰할까 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니 그는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할/
풍랑도 잠잠케 하시고,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이기시고 사탄을 결박하시고, 승천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성령 님을 보내주신 예수님, 다시 재림하실 예수님을 생각하니, 또 죽는 순간에 천국으로 갈 것을 생각하니, 걱정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헤롯 왕의 칼에 순교 당해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자기가 끌려나가 순교를 당하게 되어 있는데도 감옥 안에서 걱정 없이 편안하게 쿨쿨 잠을 잔 것은 한량없는 은혜와 평강이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바로 어두움을 밝히는 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시119: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어두운 우리의 인생 길에 분별력을 줍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힘이 되고, 우리에게 안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덕에 지식을 더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지식, 말씀의 지식으로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네 번째 통로는 '절제'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도 브레이크가 없는 차는 탈수가 없습니다. 운전을 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운전을 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브레이크를 밟습니까? 빨리 달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서야할 때 즉시 서야합니다. 안 그러면 대형사고가 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신앙이 좋고, 칭찬을 받는 성도라 할지라도 절제할 능력이 없으면 교통사고처럼 자신은 물론이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이 절제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절제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입니다. 자기보다 더 큰 문제는 세상에 없습니다.
좋지 않은 말을 안 하려고 입을 깨물다가 한 번만 더 깨물면 되는데, 그만 말을 해버려서 상대방의 가슴에 못을 박아 상처를 입힙니다. 먹어도 한 숟가락만 덜 먹었으면 되는데, 절제하지 못해서 배탈이 납니다.
말도 그렇고 먹는 것도 그렇고 조금만 절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제자의 첫째조건을 자기부인에 두셨습니다.
잠16: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 자기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성을 빼앗는 자 보다 크다는 말씀입니다.
고전9;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사도바울 자신은 자기가 어떻게 무엇을 절제를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놀라운 주님의 종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믿/

 

5.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다섯 번째 통로는 '인내'입니다.

 

여기서 인내는 '굳게 버티는 지구력'을 의미합니다. 인내는 버티는 힘, 버티는 용기입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교구 크리소스톰이 '인내는 미덕의 여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웨어스비 목사님은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아니하십니다!' 라는 설교 집을 썼습니다.
인내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매사에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불평하고 원망을 터뜨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참기 힘든 어려운 일 앞에서도 십자가를 지고 침묵과 순종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환난이 인내를 가져다 준다고 했습니다(롬5:3-4).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은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 인내입니다. 그래서 대개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 오래 참고 인내할 줄 압니다.
계14: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인내는 결국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갖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약1: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6.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여섯 번째 통로는 '경건'입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또 '경건'이라는 말은 '잘' +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신기한 그의 능력에 힘입음'이라고 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누워도 하나님이요, 일어서도 하나님이요, 앉아도, 서도 무엇을 먹어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걸어도 하나님이요, 뛰어도 하나님이요, 넘어져도 하나님입니다. 올라가도 하나님이요, 내려가도 하나님, 성공해도 하나님, 실패해도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이 붓을 들면 그 첫마디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요,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라!'고 그랬습니다(시18:2). 그저 붓만 들면 '여호와'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이요, 이는 '하나님으로 가득 찼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거룩한 행실'(벧후3:11)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 구별된 행실입니다.
행10:2절에 보면 고넬료라는 로마의 백부장을 가르켜 '경건한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고넬료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행10:2).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딤후3;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람들을 잘 골라서 교제하고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경건은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⑴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요셉처럼 '신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⑵이웃들 앞에서의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정말 목사야! 권사야! 집사야! 성도야! /할/ 초대교회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처움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⑶네 자신과의 경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누가 뭐래도 자기가 자신을 더 잘 압니다. /믿/
▶그런데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핍박도 따릅니다.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핍박이 있으리라,"
오늘날 이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죄악에 물들지 아니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저들에게는 많은 핍박과 많은 시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을 하나님은 놀랍게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도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딤전4:8).

 

7.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일곱 번째 통로는 '형제우애'입니다.

 

이것은 곧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범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성도라면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을 볼 때, 내 마음속에 미움의 감정이 지배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경건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형제간에 친절한 것처럼, 하나님의 식구들을 내 형제와 내 누이와 내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한 집의 형제처럼 친숙하게 지내야 합니다.
친절하다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인데, 상대방이 미처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서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일3:10).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기도 합니다.
요13: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바꾸어 말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철학이, 인격이, 목적'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목숨까지 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신학다 '칼발트'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값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형제를 사랑할 것인지 마음속에 계획하고, 다짐하고,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잠17;17절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시133:1-3편에 보면, 형제 사랑에 대한 찬양과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
형제 연합의 아름다움을 대제사장의 수염에 흐르는 향유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이는 지극한 아름다움과 향내를 나타내는 최상의 비유입니다.
또 형제 연합의 아름다움을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헐몬산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입니다. 그 산에는 사시사철 눈이 덮여 있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 때에는 헐몬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려서 이스라엘 평원을 적십니다.
그리고 그 헐몬산에는 항상 풍족한 이슬이 내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할 때 헐몬산의 이슬 같다고 합니다.
이 이슬 때문에 온 대자연이 건기 때에도 생명의 신선함과 왕성함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고,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8. 그 다음 마지막 통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믿음은 기초요, 지붕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에로스' 사랑, '필레오' 사랑(친구), '스톨케' 사랑(부모)이 아니라, '아가페' 사랑, 즉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말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보상도 바라지 않은 그런 사랑이 '아가페'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에 우리는 빚진 자의 마음으로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22:36-40절 "선생님 계명 중에 어떤 것이 제일 큰 계명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율법의 강령이요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품성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충만하고, 그 사랑이 흐르고 흘러,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이런 여덟 가지 신앙의 덕목을 가진 자에게는 풍성한 영적인 열매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롬6;21절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사단의 종이 되어 살 때 우리는 무슨 열매를 맺었습니까? 부끄러운 일들뿐입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주님 안에 와서, 이제는 생명의 열매, 빛의 열매, 사랑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여덟 가지 덕목이 없는 사람은 9절에 보니까, 소경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앞에서 말한 것들, 즉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신앙의 모습들이 없는 성도는 신앙의 소경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멀리 볼 수 없는 소경이 되어서,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땅에 것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10절에 '언제든지 실족치 않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는 신앙이 되려면 앞의 8가지 신앙의 말씀을 굳게 가져야 합니다.

▶더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다시 11절을 우리 모두 정독합시다!
'이같이 하면(즉 신의 성품에 잠예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의 신앙의 '포커스'가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바울이 다녀온 삼천 층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도 그곳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히11:15-16절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모세도 보세요! 히11: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울은 무엇을 바라보면서 믿음을 지키며 일을 했는가? 빌3:13-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 곳은 '썩지 않은 면류관(고전9:25), 생명의 면류관(계2:10), 의의 면류관(딤후4:7-8), 영광의 면류관(벧전5:2-4)'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곳은 어떤 곳인가? 계21:3-4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6절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또 보자! 계22:1-5절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누가 이 곳에 들어가게 되는가? 계21:27절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계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우리가 이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인줄 믿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해야 합니다. /아멘/ (2003년 6월 15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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