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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하박국의 감사(기도)! (합 3:16-19)

by 【고동엽】 2022. 2. 3.

의인 하박국의 감사(기도)! (합 3:16-19)

 

일찍이 일제 때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총독부를 실랄하게 공격하다가 감옥에 간 한학자인 '정인보'선생은 충무공 이순신을 가리켜서 한마디로 '바보 같은 사람'으로 평해 버렸습니다.
매번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공을 세울 때마다 간신들에 모함에 걸려 관직을 박탈당하고는 형무소 아니면 먼 수배지로 귀향 살이나 떠나고 말못할 심신의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나라가 위급하다고 불러내면 한마디의 불평불만도 없이 그 명령에 순종하고 복종하다가 마침내 싸움터에서 목숨마저 일어버린 '바보 이순신'은 '무엇인가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이 그럴수가 있느냐'는 글을 썼습니다.
'무엇에 미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여자에 미친 사람, 술에 미치고, 돈에 미치고, 권력에 미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옳은 일에 제대로 미친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손기정씨가 1936년 일제하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당당히 마라톤에 우승한 것은 결코 우연이나 요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마라톤에 미치지 않았다면 결코 우승의 영광을 차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권투 해설가로, 영화에도 출현해서 유명인이 된 홍수환선수가 외국에 나가 타이틀을 놓고 격돌하는데 7번이나 다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벌떡 일어나 8번째는 호케하게 KO로 그가 승리를 했습니다. 그때 온 국민이 얼마나 감격하고 환호했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 해설가는 홍수환선수를 가리켜 '권투에 미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에 미쳐야 되겠습니까? 한마디로 예수께 미쳐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 위해 미치므로 구국공신이 되었고, 손기정은 마라톤에 미치므로 올림픽에 꽃인 금메달을 목에 걸을 수 있었고, 홍수환씨는 권투에 미치므로 세계타이틀을 목에 걸었듯이, 예수께 미친 사람은 모든 범사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흔히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리켜서 '불신시대, 위기시대'라고 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감사가 없는 시대'라는 표현입니다.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아도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더 많고, 가정을 들여다보아도 똑같습니다.
성경의 교훈이 무엇인가? '범사에 감사하라!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이 그 말씀을 건너뛰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감사가 힘들까요? 그것은 감사의 조건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감사와 불평의 차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풍부한 물질을 소유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과 명예를 누리며 사회적으로 많은 부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사할 수 있을 때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보면,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이다. '참으로 강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면 '정말 부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 부자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감사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야 됩니다. 감사만이 선한 것입니다.
감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크게 두 종류로, '그러므로'의 감사와 '그러나'의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의 감사는 조건을 찾아 하는 것인데, 이 감사를 기복적인 감사, 또는 조건부 감사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의 감사는 '그러나'의 감사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가 바로 '그러나'의 감사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감사요, 신앙인의 감사입니다.
◀제목소개▶

 

'하박국'하니까 좀 이상합니다. '호박국'은 아닙니다. 좀 특이한 이름 같습니다 만은 그 이름의 뜻은 '포옹하다, 끌어안는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열렬한 포옹"을 의미합니다.
무슨 사람이름이 이런가? 이렇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뜻은 아주 깊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나님이 뜨겁게 포옹해 주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받는 자'란 뜻입니다.
인간과의 관계로 말하자면, '그 시대의 고민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사람'입니다.
선지자들이란 언제나 나라가 어려울 때 나타나서 위기를 타개하고 이 위기가 왜 왔는가를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소 선지서인 하박국서는 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를 보면 하박국도 그 시대가 가지는 모순과 절망, 그리고 슬픔과 탄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왜 이러한 일이 있어야만 합니까?' 묻고 하나님께 대답을 받는 그런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품었던 의심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왜 선택받은 이 민족이 이렇게도 고통이 많고, 어려움이 많습니까?"를 물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고통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었고, 하나님은 "그 이유는 바로 너희들의 죄 때문이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고통의 원인이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 탄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사랑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이렇게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그의 질문은 "악인이 왜 형통하는가?"를 물었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지금 이 나라가 적군 앞에서 도륙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신다면 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바벨론 사람들인데, 우리보다 더 죄인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죄인이긴 하지만, 하나님이라도 알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이방의 할례 없는 저 백성들,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신보다 하나님이 못하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이방백성들을 축복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잘 나서 높여 준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힘이 있게 된 이유는 내가 그들을 진노의 막대기로 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심판과 분노의 도구이니라"
물론 이 이방 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인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힘과 능력으로 강해지고 정복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교만하고 분노하고 제 멋대로 다 하지만, 하나님의 답변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네게 진노의 막대기가 필요해서 그들을 강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대답이었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였습니다. "또한 저 진노의 막대기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원수들은 영원히 번영할 것입니까? 우리들은 이렇게 망하고 끝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아니다. 저 진노의 막대기들은 사용기간이 지나면 그들의 죄에 따라 내가 심판 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받은 너희들은 깨닫고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런 대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낙심치 말고 절망하지 말아라.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어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정녕 구원이 날이 올 것이다" 그라면서 강조하시는 말씀은, 2:4절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은 이 말씀을 받고 백성들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당부했고, 자기도 그 신앙 안에 살았습니다.
후에 사도 바울이 이 신앙을 본받아 로마서의 주제로, 갈라디아서에서도, 히브리서 에서도 이 신앙을 주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이 말씀에 기초한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의인은 믿음을 먹고사는 자입니다. /할/
▶이제 하박국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면서 고백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3: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하박국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백성들의 죄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는데 알고 나서 깜짝 놀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니까, 영적인 눈이 떠져 바르게 현실을 바라보니까, 이건 뭐 죄가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뭘 몰라서 그렇지 정말로 영안이 열리면 내 죄가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그걸 알고 놀랍니다.
더구나 이 심판이 끝이 아니고 심판 뒤에는 아름다운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깜짝 놀랍니다. 이 처절한 절망 안에서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이 징계 뒤에 구원을 허락하여 주시는 그 은혜 앞에서 지금 그는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놀라야 합니다. 무엇에 놀라야 합니까?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이것에 대해 놀라야 합니다. 정말로 놀라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쓸모 없는 나를 하나님은 왜 이렇게 사랑하시는지? 왜 붙들고 놓지 않으시는지? 끝까지 붙들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애쓰시는지? 이 은혜를 알 때, 이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서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충격과 감격!"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무언가 짜릿한 감격을 맛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감격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면, 거기서 가장 큰 감격이 철철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감격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감격이 없습니까? 왜 찬송만 불러도 하품이 나오고,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눈만 멀뚱멀뚱하고, 옆 사람은 감사해서 우는데 "뭐가 저렇게 감사한가? 나는 장사도 안 되는데…"
왜 이렇게 감격이 없느냐? 자기를 모르고 하나님을 몰라서입니다! 진실로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면 감격하게 되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때 하나님이 그렇게 지키시고, 훈련시키시고 나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셨구나' 감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돌이켜보고 깨닫는 은혜입니다. 감사도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니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사랑을 깊이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감사가 나옵니다. 친구의 우정도, 이웃의 사랑도 깊이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감사가 나옵니다.

■이제 하박국은 성전에서 놀라고 감격하다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기도를 했습니까?
▶2절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부흥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부흥은 '우리 심령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부흥'을 영어로는 '다시 생명을 준다, 즉 다시 살리는 것'이 부흥입니다.
우리 심령이 먼저 살아나면 교회 부흥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할
▶2절 하반절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런 겸손한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능력이 죄인들에게는 없습니다. 죄는 지었지만 심판을 감당할 능력이 죄인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 벌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다만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이런 겸손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의인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를 찾아봅시다.

 

1. 환난 날에 감사하고 있습니다(16절 읽자!).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그 당시 배경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우리 나라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참 많습니다. 이스라엘도 우리 나라처럼 단일민족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우리 나라처럼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주전 931년 분단이 되었습니다. 931년부터 두 나라로 분단되어 지내다가 주전 721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했으니까 분단되어서 110년간이나 두 나라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할 때 남쪽 유다는 그것이 자기들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아주 태연해 했습니다. 그들은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되었지만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쪽에는 성전이 없는데 자기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 자기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있으니까 자기들은 북 이스라엘하고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서 날마다 화려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껍데기만 남은 형식적인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 드리는 자위(自慰)적인 예배였을 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북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예배를 무시하고, 거룩한 성일을 무시하다가 멸망당했습니다. 그런데 남쪽 유다가 똑 같은 전철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국제 정세는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제국이 멸망하고, 애굽 역시 국운이 기우려지면서 신흥국가인 바벨론이 강경한 세력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들은 어떤 존재였는가? 1:6절이하에 보면, '사납고 성급하며, 두렵고 무서우며,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가 떠는 것은 이 무서운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이 유대나라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말을 타고 창검을 번쩍이며 유대나라를 침략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국내사정은 말이 아닙니다. 종교는 타락되었고, 정치는 썩었고, 군사적으로도 바벨론과 맞서 싸울만한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탈진상태입니다.
그러한 사정 속에서 하박국선지자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나라 안을 보았고, 나라 밖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술이 떨렸고, 뼈가 썩는 것 같은 아픔이 엄습했으며, 그리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나라꼴이야 어찌되건 나만 편하고 잘 살면 된다는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나라가 어렵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이 매우 어렵습니다. 정치도 그렇고, 사회도 온통 어수선합니다. 왜 그렇게 파업들이 많은지 걱정입니다. 경제가 지금 굉장히 어렵다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어려운 것을 아는 사람은 하박국처럼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나라가 안정되고 평안해야 예수 믿는 것도 평안합니다. /믿/
그러므로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하박국은 그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찬양을 드리는데 혼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악기를 동원해서 성가대와 함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1절에 '시기오놋에 맞추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19절에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대장의 지휘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그래도 감사합니다' 찬양하고 있습니다. 보통 믿음이 아니고는 흉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의 감사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환난 날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오히려 그 시련으로 말미암아 신앙과 인격이 더 깊어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나무는 가물 때에 뿌리가 깊어지고, 겨울 찬바람에 단단해 집니다.
어머니는 해산의 고통가운데 자녀에 대한 깊은 정이 생기게 되고, 부부는 고생하면서 정이 듭니다. 환난이 우리를 성숙시킵니다. /믿/
여러분! 믿음만 있으면 어떠한 어두움의 환경이라도 하나님께 감사가 나오고, 종국에는 그 환경이 감사의 조건이 열린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어느 나이 어린 소녀가 자기의 일기장에 이런 기도문을 썼습니다. '주님! 오늘도 바른 손으로 글씨를 쓰게 해 주시고, 두 눈으로 엄마 아빠를 보게 하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도 짜증부리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 어린 소녀의 기도야말로 성숙한 기도이며, 더없이 맑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온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환경이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성경의 인물가운데 환난 날에 망한 사람이 있고, 환난 날에 큰 영광을 돌린 사람이 있습니다. 욥23:10절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연단 후에 죽어 나오는 사람이 있고, 연단 후에 정금 같이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금 같은 믿음을 얻어 나오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연단 속에서 영혼이 죽고 인격도 죽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시50:14-15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환난 중에도,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쳐들어오고, 함성소리를 들으면서 부르는 찬양이야말로 믿음이 강한 자만이 부를 수 있고, 승리를 믿는 사람들만이 부를 수 있는 승리의 찬양인줄 믿습니다.

 

2. 무에서, 즉 없어도 드리는 감사, 즉 실패 속에서 드리는 감사입니다(17).

 

17절 속에 무려 6가지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농경사회입니다.
사실 하박국에게 없는 여섯 가지는 그들 생활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생활필수품들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먹는 일종의 양식입니다. ■포도는 그들 음료로서 사용했습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짜서 불을 밝히기도 하고 성전의 불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밭의 식물은 양식이었습니다. ■양은 옷을 만들어 입고 ■소는 밭을 가는 수단이었고 동시에 소나 양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다 없습니다. 지금 하박국선지자는 전쟁이 터지면 이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다 없을지라도 하나님 한 분으로 감사하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없을지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이것은 성도만이 가지는 특권이요, 힘입니다.
■단3장에 보면,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했던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 앞에 절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칠배나 더 뜨거워질 풀무불 속에 던져 버린다는 말을 듣고도, "만일 그래도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리이다"(단3:17).
극렬하게 타오르는 풀무 불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건져내시겠다고 하는 저들의 확신에 찬 신앙은 우리의 신앙을 너무나도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결정적인 신앙의 고백은 단3:18절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이 환난에서 건져 주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이 질병에서 자유함을 주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죽음에서 살려주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신앙에 위대한 고백입니다.
'없을지라도' 이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없을지라도'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진 것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밭에 양식, 소와 양 따위 등 재산도 건강도 명예도 출세도 소위 눈에 보이는 재산이나 소유라는 것은 없어질 가능성이 많은 것들입니다.
전쟁 때에 없어질 수도 있고, 재난이나 질병, 또는 실패 때문에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넉넉하다고 해서 감사하는 신앙은 마치 어리석은 부자의 소행과 같습니다.
눅12:16절 이하에 보면, 어떤 부자가 농사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큰 창고를 짓고 그 곡간에 곡식을 가득가득 쌓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은 많이 쌓아 두었으니 이제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노래를 부를 때, 하나님께서 그 부자의 꼴을 보시고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려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이 얘기는 오늘 현대인들의 얘기입니다. APT를 사고 고급 승용차를 사고, 승진이 되고, 그래서 배가 부르다고 믿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이라도 네 생명을 불러 가면 남은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습니까? 있고 없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네가 실패했다고, 병들었다고, 무너졌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시간이 지나다보면 하나님이 다시 세울 때가 있고, 높일 때가 있고, 채울 때가 있습니다. /믿/
그러므로 여러분! 하박국처럼 모든 것이 다 없을지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에 조건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자이십니다. /믿/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유명한 주석가 '메투헨리'가 늦게 집에 돌아오다가 강도를 만나 돈도 시계도 옷도 다 빼앗기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온 가족들이 너무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를 드립니다.
"물질은 도적 맞았지만 내 생명 도적 맞지 아니하고 특별히 내 영혼을 도적 맞지 않은 것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이 붙은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이 여순 반란 사건때 공산당에 의해 죽었는데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죄인의 혈통해서 순교자를 나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한 아들이 순교해도 영광인데 두 아들이 순교하게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고 했더니 그보다 좋은 천국가게 하셨으니 더더욱 감사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병들어 죽어도 복인데 예수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3.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의 근원이 무엇인가?(18)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주경학자 매투헨리는 '하박국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 것은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마28:20절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4. 이런 감사의 신앙! 성숙한 신앙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감사의 신앙! 성숙한 신앙을 가지려면, ■하나님만이 나의 힘으로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권력을, 지식을, 자기의 기술을 힘으로 믿고 삽니다. 이런 세상적인 힘은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힘은 절대적인 힘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감사를 드리며 사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사슴처럼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사슴 발에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사슴 발은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또 높은 곳으로 올라갈지라도 피곤하거나 떨리지 않은 동물이랍니다. 사슴은 포수가 잡으려고 하면 높은 곳에 뛰어 올라가 우뚝 서서 쳐다봅니다. 그러나 포수는 높은 곳으로 따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높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추격을 당하지 않도록 높은 데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되 높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말은 '은혜 위에 은혜'속에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날라보면 저공비행을 할 때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내리고 구름이 덮여서 앞이 캄캄합니다. 그러나 창공 높이 올라가면 구름도 안개도 비도 없습니다. 항상 빛 가운데 밝은 창공을 날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의 높은 경지에 오르면 세상의 환난이 와도,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 와도 거기에 매이지 아니하고 은혜로 자유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유로움 속에 산다고 하는 것이 복입니다. 항상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됩니다. /할/
그렇다면 높은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높은 곳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곳입니다.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믿음의)날개를 달아주며, 사슴처럼 높은 곳으로 오르도록 힘을 주는 곳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저 높은 은혜의 고지를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찬송가도 있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아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새 힘을 얻습니다. 사40: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감사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통로입니다. 시50: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는 마음으로, 입으로, 헌신으로, 물질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다음 주일을 맥추감사절로 드립니다. 마음껏 감사하는 절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3년 6월 29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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