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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7-23)

by 【고동엽】 2022. 2. 2.

《제6강》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7-23)

 

알렉산더 대왕의 어린 소년시절 때의 일입니다. 이웃나라에서 멋진 야생마 한 마리를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립 왕에게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필립 왕은 기뻐서 이 말을 타고 달리고 싶었으나 말이 너무나 거칠게 날뛰는 바람에 도저히 탈수가 없었습니다.
필립 왕 수하에 많은 장군들이 이 말을 타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필립 왕은 크게 실망하여 "아! 우리나라엔 이 말을 다룰 자가 없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 순간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어린 왕자 알렉산더가 "제가 저 말을 타보겠습니다." 아버지 필립 왕은 "전쟁터에서 거친 말들을 다루는 수없이 많은 장군들도 모두 실패했는데 어린 네가 어찌 탈 수 있겠느냐?' "아버지! 저는 여러 장군들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말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 말은 그림자를 싫어했고, 두 번째는 고함소리를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먼저 태양을 향하여 그 말을 세우고 일단 말을 탄 다음 부드럽게 속삭이는 음성으로 말에게 명령하면 능히 이 말을 탈수가 있습니다"
이후 이 말은 알렉산더의 전용 말이 되어 알렉산더가 세계를 제패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을 잘 이해하고 아껴준 주인 알렉산더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알렉산더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그의 등을 허락하지 않는 굳은 절개를 지킨 말이 되었습니다.
B.C 326년에 이 말이 죽자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한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여 이곳 이름을 '제롬'이라고 말의 이름을 따서 불렀습니다. 이 도시가 오늘날 파키스탄의 '제롬'시랍니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었지만 제롬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준 주인을 위해 대쪽같은 절개를 지켰고 그에게 충성하다가 끝내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신을 사랑해 준 주인을 위해 생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절개와 충성심이 필요합니다. 우리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뒤집어쓰고 말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는 신앙의 절개와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제목소개!▶

 

말씀 공부는 끊임없이 반복이고, 재교육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복음의 씨앗을 어떻게 뿌려야 하는지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①복음은 누구에게 전해야 하는가?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별 없이 다 전해야 합니다. 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늘 새롭게 전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은 항상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아니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②복음은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바울은 세 가지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전해라,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라, 복음은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③복음은 왜 전해야 하는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한 주간 동안 과연 복음의 빚을 얼마나 갚으셨습니까? "그까짓 빚이야 안 갚아도 상관없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큰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겔3:17-18절에 보면 그 죄 값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무슨 뜻입니까? 가령 우리 이웃 사람이 예수를 안 믿습니다. 내가 그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이 예수 믿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알고도 입 다물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기는 그 사람이 죽었는데 하나님은 그 피 값을 누구에게 찾으신다는 것입니까? 나에게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청구서를 내게 보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평소에는 말도 잘하고 혀도 쉴 새 없이 잘 놀리더니 내가 전하라고 하는 복음은 왜 한 마디도 전하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따지고 책임을 추궁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9: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지 않을 경우에 자기에게 화가 미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화가 미친다면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에게 화가 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옆집에 불이 났습니다. 여러분, 그냥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철로 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기차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냥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상황을 따지기 전에 먼저 구해야 할 줄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단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살길을 찾으세요" 일단 복음을 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이 피 값을 우리들에게서 찾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은 너무나 중요하기에 지난주에 이어 다시 한번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루터가 로마 교황청 앞에 빌라도의 28층계를 무릎 꿇고 올라가다가 본문 말씀이 전광석화처럼 심령에 박혔습니다. '그래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로워지는 것이지 무릎 꿇고 28층 계단을 오르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루터는 중간지점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때 마틴 루터는 "나는 새로 탄생하였고 열린 문을 통하여 홀연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과 합2:4절, 갈3:11절, 히10:38절 등 4번이 나옵니다. 바울이 합2:4절을 인용한 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역사적 변천이 가장 극심한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때는 앗수르가 망하고 바벨론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정치가 요시아 왕이 전사하고 앗수르와 바벨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지도자를 잃어버리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고 있을 때, 갈대아의 군대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갈대아의 군대는 표범과 같이 무자비하고 성난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삼켜버렸고 겁탈했습니다. 어린아이와 노인들을 수없이 살해했으며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유린을 당했고, 그 틈에 모리배 상인들이 돈을 벌었고, 중상모략 자들은 출세를 하고 정의와 공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호소합니다. "하나님 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당해야 합니까?" 이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합2:2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그러고 나서 말씀을 주시는데, 4절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들은 그 속에 하나님이 없음으로 정직하지 못하고 그 마음이 심히 교만하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믿으라. 믿기만 하면 의인으로 봐줄 것이며 대적을 물리쳐 살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크게 새겨 누구라도 달려가다가도 보고 믿을 수 있게 써 높이 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광야에서 뱀에게 불린 자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낫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적의 침략이 눈앞에 놓여있는데 지금 새삼스럽게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주님은 의롭게 보시고 구원의 손길을 허락해 주십니다.
특히 이 말씀을 인용한 바울이 '기록한바'라고 말한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란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의인, 믿음, 영생' 이 세 가지의 큰 사상으로 구성되어있고 또 그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인으로 인정한 사람은 믿음으로 살고 또 영원히 살게 합니다. 믿음을 떠난 의인은 없고, 믿음이 없는 영생도 없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봐 주십니다.
빌3:9절(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쉽게 표현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그래 너는 옳은 자다, 완전한 자다"고 인정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법적 선언입니다. 여러분! 세상 법정에서는 그 재판장이 무죄를 선언하면 죄가 없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하나님이 법적으로 우리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롬8: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할/ 하나님이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믿/
내가 아무리 생활자세를 고치고, 회개하고, 노력해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으로 인정하면 죄인인 것입니다. '평생 의를 행해도 의인이 될 수 없고, 죄는 한번만 지어도 죄인입니다'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생을 의롭게 살다가 한번만 죄를 지어도 의인은 못됩니다. 죄는 한번만 지어도 죄인입니다. 큰 죄, 적은 죄 똑같습니다. 호숫가에 돌을 던지면 큰돌도 가라 안고, 작은 돌도 가라앉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의로움으로도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길 밖에 없는데, 그 조건이 우리의 생명을 내 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타락한 로마 교황청처럼 돈주고 면죄부를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조건으로 의인으로 선포해 주신다는 간단한 조건입니다.
②하나님과의 개선된 관계입니다. 즉 새로운 관계입니다. 두려운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자격이 없는 자에서 자격 있는 자로, 관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처녀가 시집을 가면 흔히들 새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그 사람 자체가 새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어제와 오늘 똑같은 사람이지만 달라진 것은 관계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아버지, 어머니 부르게 되고 전에는 몰랐던 사람을 사랑하는 남편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법적으로 너를 의인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며 이제 우리는 새로운 관계가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이 관계의 조건은 오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그렇습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라나고, 성장합니다. 겨자씨는 생명이 있기에 심으면 크게 성장합니다. ▶믿음이 어떻게 자라납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은 자라납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신앙이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십니다. 아이는 때를 따라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바울은 엡4:15절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성장해야 합니다. 큰 믿음은 큰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적은 믿음은 역사가 따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하셨고, 히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도 했습니다.
막9:23절에서 주님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①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연합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영접이 귀하고, 연합이 귀합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②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생명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같이 죽었습니다. /믿/ 이제 우리는 주님의 생명으로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③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마4: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살리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죽으면 무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환생, 곧 윤회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생에 석가는 84번이나 죽었다고 '세이론도'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사람으로 죽고, 소로 태어났다가 소로 죽고, 말로 태어나서 죽고, 등등 이렇게 83번 죽었을 때 언제나 짐승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84번째 죽은 다음 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짐승은 말할 것도 없고, 심하게는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게 합니다. 왜? 윤회설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이 죽어서 소, 돼지, 닭 등등 짐승이 되기 때문에 짐승을 잡아먹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을 죽여서 먹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중들은 고기를 더 잘 먹습니다.
오늘 본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영, 육 전체를 말하는 것이지만 특히 영적인 무게를 더 두었습니다.
히4:9절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속 사람 영혼이 주님이 계신 영원한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 쉬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고후5: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말씀과 같이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장로님의 외아들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장례 때 모든 교인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장로님은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주례한 목사가 나중에 물어보았더니 "저는 불 타 죽은 아들을 보지 않고,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바울은 17절까지 찬란한 복음을 전개하다가 갑자기 더러운 죄악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18절에서부터 3:20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 할 것 없이 전 인류의 죄악을 농도 깊게 파헤치고 있습니다.
좀 이상한 감이 들기도 하지만 바울이 바로 지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꽃은 검은흙에서 피는 것같이 복음은 더러운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서 결실하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먼저 그 환자를 진찰해 봐야 하듯이 영적으로 진찰을 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란 말이 로마서에서 12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7:11-12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하나님의 진노 곧 노여우심은 섭리적인 역사심판과 최후심판 두 가지입니다.
역사심판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 하는 그때 그때마다 내리시는 심판이고, 최후심판은 세상 끝의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놓는 심판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이율배반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무슨 하나님의 진노가 있냐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의 사랑입니다. 죄는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변함이 없습니다. 성경은 죄를 무섭게 다룹니다. 이스라엘이 죄 중에 빠졌을 때 여지없이 심판했습니다.
롬3: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59:2절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롬14:23절(하)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 중에 가장 큰 진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십자가의 진노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은 외아들을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신학적으로 볼 때 17절과 연결해야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즉 십자가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에 나타나서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곧 '불의한 자와 경건치 않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는 양심을 어기는 것, 자신의 욕심에 따라 사는 것, 자신의 중심으로 사는 것, 즉 인간관계에서 의롭지 못하고 잘못한 일이 바로 불의입니다. 또 '불 경건'은 '모든 경건치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 즉 불 신앙, 불순종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하늘을 쫓아 나타나나니" 하늘은 신령한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을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새가 날아다니는 창공, 별과 달이 비취는 곳,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보았습니다.
성도가 범죄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벌이옵니다. 어떤 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며 하나님이 떠나가십니다. 또 각종 징벌이 옵니다. 이스라엘은 왕이 범죄 하면 '전쟁, 온역, 기근' 세 가지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종교적인 죄'경건치 않는 자'와 도덕적인 죄 '불의'로 나타납니다.
▶본문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주어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왜 나타나는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 때문에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하늘로 좇아 나타납니다.

 

▶19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비록 타락했어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종교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영성의 차이입니다. 양심의 차이입니다. 진화론자가 말하는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하는 원숭이가 교회에 나왔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저들 속에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짐승 중에는 영리하고 재간을 잘 부리는 것도 많습니다. 우리 집의 진주만 해도 아주 여우같은 짓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예배시간엔 조용하다가도 주기도문만 끝나면 멍~ 하고 짖지 않습니까?
그러나 개들은 기도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형식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저 아프리카 정글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무신론자인 '파렐'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널 때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즉시 "하나님!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도와주소서!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맹세하노니 무신론자의 '무'자도 입으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파렐'의 무신론은 '육지에서만 권위가 있고 바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혼과 양심을 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넣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증거 하면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회개하고 주 앞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본문은 19-20절을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너희가 몰라서 그랬다고 핑계할 수 있느냐? 너희 속에 있는 양심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말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바라보아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나타나 보이고 있지 않느냐? 그럼에도 너희가 몰라서 믿지 못하고, 몰라서 죄를 지었다고 핑계할 수 있느냐? 입이 열 개라도 핑계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9-20절 가지고 2,000년 동안 신학자들은 결사적으로 싸웠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사람에게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칼바르트'와 '부르너'의 논쟁은 유명합니다. ▶'칼 바르트'의 주장은 "사람은 다 타락해 버려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없다"고 했고, '부르너'는 "아니다. 그래도 마음 저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조금 남아있다"고 각각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주장을 제쳐놓고라도 본문에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19절에서는 내적으로 사람들에게 종교성과 양심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였고, 20절은 외적으로 보이는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작품에는 작가의 성품이 깃들어 있듯이 천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작품 속에도 그분의 성품 곧, 그의 보이지 않는 능력과 신성이 보여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자전하는데 하루가 걸립니다. 이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24시간입니다. 그리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데 365일이 걸립니다. 여기서 춘하추동 사계절이 생겨 오곡백화를 내고 아름다운 눈을 내리기도 합니다.
수많은 별들이 우주 공간에 잔재하고 있지만 한 번도 충돌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정확한 천체의 운행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정확히 돌아가는 시계를 보고 이것이 절로 생겨났다고 한다면 기가 막힐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면서도 지능 있고, 조직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들의 작품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롱펠로우'는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요, 예술은 인간의 계시다"라고 했습니다. 시19: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유명한 선다싱 같은 분은 예수님을 믿고 은혜 받은 후 길을 걸을 때 "나는 지금 성경을 가지고 가지 않지만 성경을 읽고 다닌다"고 말했습니다. 꽃을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새가 노래하는 것을 봐도 하나님의 계심을 알 수 있도록 자연계시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놓으셨고, 사람 속에 영혼과 양심을 주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섬기지 않는다고 하나님 앞에서 핑계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알되"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저 자기가 잘나서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속에 없으니까 그 생각이 자꾸 헛된 것만 추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두 가지를 요구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장로교 소 요리문답 1문에 사람이 사는데 제일 되는 목적을 묻고 그 답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을 떠남으로 그 생각들이 허망해졌습니다. 또 빛이요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이 미련해지고 어두워졌습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눈이 어두워져 만물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을 불쌍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불쌍한 것은 조물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으려 해도 바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2-2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말은 인간의 교만을 나타낸 말입니다. 인간들이 많이들 안다고 자랑들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범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사실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범죄 함으로 우준하여 졌습니다. '우준'이란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본절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타락하는지 우리들에게 적나라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으로 내려갑니까? 썩어질 사람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다음에 또 무엇으로 내려갑니까? 금수로 내려갔습니다. 맨 밑바닥에 어디까지 내려갑니까?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꿉니다. 얼마나 한심합니까?
타락한 인간은 사람의 신상을 만들어놓고 하나님처럼 숭배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했습니다. 일본의 천황을 신이라고 숭배했습니다. 김일성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한 걸음 더 내려가서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이라는 것은 날짐승, 새입니다. 옛날 로마 사람들은 독수리를 신처럼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은 황새라든지 매를 숭배했습니다.
'수'는 '길짐승, 네 발 달린 짐승'을 의미합니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소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출애굽 했을 때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신이라고 하면서 절을 했습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소를 신으로 숭배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제일 밑바닥의 버러지를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추하고 더러운 버러지를 신으로 섬기는 모습으로까지 전락해버렸습니다. 버러지는 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뱀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코브라를 자기들의 신처럼 숭배했습니다. 심지어 애굽 사람들은 더러운 오물 속에 살고 있는 딱정벌레가 자기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애굽에 가면 딱정벌레 모양을 만들어서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팔고 있습니다.

여러분! 최고의 지식이 무엇이며,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는 참일 수가 없습니다.
1932년 채플린이 일본 군국주의들이 세상에 과시하기 위해 그를 특대해서 천황 앞에 인도했답니다. 천황 앞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90도로 머리를 숙였답니다. 그런데 채플린은 구경만 했습니다.
안내자가 당신도 한 번만 엎드려 절해달라고 정중히 부탁을 했습니다. 그가 절하는 것을 사진 찍어 세상에 선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채플린은 이런 일은 우상숭배가 되므로 절대 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생이 썩어질 우상에 절하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신을 God(갓) 이라고 합니다. 순서를 바꾸면 dog(개)가 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간이 우상을 섬겨서 개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시49:20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맞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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