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간의 실존! (롬 1:24-32)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늙은 말 한 마리가 연자방아간으로 팔려왔습니다. 그는 무거운 연자방아 멍에를 짊어지고 한숨지으면서 말하기를 "그처럼 화려한 경마장에서 뛰어온 나의 결승점이 결국 이런 곳이라니" 가슴을 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육체의 결승점은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으면 영원한 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믿/ ◀제목소개!▶
지난 시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세 가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⑴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만 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⑵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그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만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⑶사람이 복음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저절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서 우상 숭배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간의 실존을 제시해 줍니다. 여러분! 버림받은 자의 운명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앞 절과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 되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마음에 허망한 생각으로 가득 찼으며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지혜 있다고 뽐내는 인생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져 버리는 형상의 우상에 빠져있는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란 이 죄에 빠진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선 버렸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버렸다는 말은 '포기해 버렸다, 단념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본문 24절의 버려 둠은 ①종교적인 버림을 말하고, 26절에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는 ②도덕적인 포기를 의미하며, 28절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는 ③인간에 대한 포기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에는 수많은 이방 신들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린도에 있는 큰 신전에는 창기와 미동들(남자 창기)이 천 명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종교라는 미명 하에, 종교의식을 행한다는 구실 하에 저들은 육신의 쾌락을 즐기고 있었고, 음란한 일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기의 육신을 서로 간에 욕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러한 종교적인 타락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버림받는 일로 나타납니다. 심판에는 몇 가지 다른 면이 있습니다.
①심판의 모양이 다릅니다.
죄를 지었을 경우, 당장 벼락이 내린다든지, 병에 걸린다든지, 사업이 무너진다든지 등등 여러 가지 형태의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심판의 형태는 여러 가지 입니다. 잘 안 되는 장사가 잘되는 것이 심판일 수도 있으며, 병들었던 사람이 건강해 지는 것도 심판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히려 잘 되는 그것으로 인하여 망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죄인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형통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자기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이제는 내 맘 대로다'라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심판입니다.
가령 아이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극구 말립니다. 때리기도 하고 달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에라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라" 포기해 버립니다. 이때 아이는 "이제 내 맘 대로다. 자유다" 하며 뛰쳐나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자유입니까? 아닙니다. 그 순간부터 심판 받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그 때부터 방종과 탈선과 죄 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났습니다. 가정을 떠났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극구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단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은 모든 것을 싸들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멀리멀리 떠나가 버렸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에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섭이 사라지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허랑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수중에 있는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서 돼지를 쳐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배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돼지가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로 배를 채워야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돼지가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로 배를 채웠으니까 돼지보다 못한 신세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인생은 돼지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아들은 뉘우쳤습니다. 회개했습니다.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일 이 아들이 십 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고 50년이 넘도록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끝내 돼지 옆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되고 말았겠습니까?
버림받은 아들, 내버려진 아들, 포기된 아들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늦기 전에 즉시 뒤돌아 서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형태는 여러 가지 입니다. 실패만이 심판이 아니라 때로는 성공도 심판이 될 수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②심판의 시간입니다.
바로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심판의 시간이 내가 생각한 시간이 아니라 해서 심판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가는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한 그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복 받지 못했다고 해도 안 되고, 또 심판이 없다고 해도 안 됩니다.
반드시 축복과 심판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것뿐입니다.
③심판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웃으로부터 주어지기도 하고, 혹은 원수를 통해서도 올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주어지기도 합니다. 축복도,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환경을 통하여, 조건을 통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⑴종교적인 심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일생을 다 내어놓는 심판이 있습니다. 죽음 뒤에 선악간에 심판을 말합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⑵현재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했듯이 하나님께서 내버려둔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애굽의 바로 왕은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강퍅하고 악합니다. 그러다가 홍해에 빠져 물귀신이 됩니다. 사울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마음이 강퍅해 짐으로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를 맞거나 고통을 당하면 착해지는데, 어떤 사람은 매 맞고 환난을 당할수록 점점 더 악해집니다. ▶악해지는 사람,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 이미 끝난 사람입니다.
가롯 유다도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에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하라"고 하자, 가롯 유다는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나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자기 스승을 팔았습니다. 그 결과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재판소에 찔림을 받아 목을 매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었더니 인간들이 어떻게 삽니까?
⑴정욕대로 삽니다. 정욕이란 히브리어 뜻을 보면. '이성의 욕구는 더럽히면서 육체의 즐거움을 찾는 마음'이랍니다.
성경 적으로 볼 때는 금지된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우상을 찾아갑니다. 쾌락을 쫓아갑니다. 음란에 빠져 들어갑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속에서 파묻힙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⑵'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합니다.
고전3:16-17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인데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뜻은? 살전4:3-4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세우신 가정의 원리를 잘 준수할 것을 가르칩니다. 가정원리는 일부일처제입니다.
25절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버리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영적인 안목이 어두워져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가 완전히 가리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보다는 보이는 대상인 피조물에 신앙하게끔 타락하였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말은 자신의 신앙이 뒤집혀졌다는 말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대상이 바뀌어 진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 대상이 인간의 영광이든지, 자연이든지, 심지어는 자기 자신 일지라도 모두 우상숭배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 23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기 바뀌었다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른 것과 바뀌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피조물로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25절 본문도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아멘입니까?/
다니엘서를 보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삼총사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우상 앞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그들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단3:16-18절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결사각오로 대항했습니다.
1930년대에 주기철 목사님은 일본이 강제적으로 천황을 신으로 섬기라고 강조하자 강단에서 피맺힌 절규를 했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일본 신사에게 절하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이 목숨까지도 주님께 드립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정절을 깨뜨릴 수 없다며 끝까지 저항합니다. 감옥에 끌려가 6년 동안 고생하며 갖가지 잔인한 고문을 당하던 중에 장렬한 순교를 했습니다.
▶하루는 신앙이 좋은 집사 님과 그의 친구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집사 님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은 언제 보아도 가슴이 떨려요!" 이 말에 친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볼 때는 그저 무미건조한 하늘일 뿐, 그렇게 가슴 떨릴 만큼 감동스러운 하늘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저 친구가 그럴 수가 있을까? 예수 믿으면 무언가 다르다는데 맞구나!"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부터 친구 따라 교회에 가게 되었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하늘을 보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땅을 보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돈에 있습니까? 아니면 명예, 지위, 권력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 해보십시오!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시37: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이 행복을 안 사도바울은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그렇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26-27절은 하나님이 내버려두었더니 저들이 도덕적 죄와 윤리적인 죄에 빠져있습니다. 동성연애에 대한 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6-27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로마서 가운데 가장 읽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읽기조차 부끄러운 내용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하여 빠진 가장 심각한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적타락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것이 동성연애입니다.
이 죄는 이미 24절에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으니" 성범죄는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타락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만일 동성연애가 유행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용납하는 사회가 되면, 그 사회는 치료 불가능하며 이것이 곧 종말의 현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을 우리는 잘 압니다. 왜 그 성이 멸망 받았습니까? 한마디로 성적 타락 때문입니다. 동성연애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남색과 여색을 영어로 소돔이라고 말합니다.
소돔이라는 말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이 바로 동성연애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하신 성은 고귀한 목적과 엄격한 질서를 가진 축복입니다. 처음부터 남녀가 성 관계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한 길을 결혼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만족하기를 거부합니다. 결혼이라는 자연 진리를 벗어버리고, 금지된 쾌락을 즐기려고 발버둥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희랍이나 로마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동성연애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답니다. 역사서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로마 초기의 황제 15명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중 14명이나 동성연애자였다는 충격적인 연구 자료가 나왔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자의 동성연애가 먼저 나옵니다. "순리를 바꾸어 역리로 썼다"고 합니다. 그 당시 여인들의 타락의 농도를 나타냅니다. 또 남자들에 대해서는는 노골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동성연애 문제는 그 당시 로마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선진국을 보십시오. 예술의 도시 파리는 온통 동성연애자들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같은 남자인데 한 남자는 입술을 새빨갛게 바르고, 외모도 여자처럼 해 가지고 핸드백까지 들고 다닌다고 합니다. 서양문명의 몰락을 보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동성연애에 빠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고 합니다. 1989년부터 샌프란시스코의 한 가정법원에서는 동성연애자들이 부부로 호적신고를 하면 결혼증명서와 유사한 증명서를 발급해 주어 정상적인 부부들과 똑같은 혜택을 누리게 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동성연애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동성연애자들을 '게이'라고 부릅니다. 여자끼리 손잡고 가도 '게이'라 하고, 남자끼리 손잡고 가도 '게이'라고 합니다.
▶왜 동성연애가 무서운 죄가 됩니까? 한마디로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살게 했습니다. 이것이 곧 가정의 제도요, 창조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법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썼다'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법을 뒤집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추악한 죄악에 빠지게 되자 응분의 결과가 찾아옵니다. 27절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한 마디로 죄 값을 받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인류는 '에이즈'의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감염자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에이즈'는 하나님이 내린 징계입니다. 아직까지도 치료약이 발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에이즈(AIDS)를 "아! 이제 다 살았다!"는 말의 약자라고 말을 합니다.
▶아까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로마 황제 15명 가운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 14명이 모두 동성연애를 즐겼다는 조사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의 로마 사회는 성적으로 아주 타락했습니다. 황제뿐 아니라 귀족들, 심지어 밑바닥에 있는 노예들까지도 동성연애를 즐겼다고 합니다.
뒤에 콘스탄틴 황제가 즉위했습니다. 그는 다른 황제들과는 달랐습니다. '어떻게 하면 로마를 성적인 타락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옳다, 이거다. 기독교를 공인하자. 기독교를 전파하자" 그렇게 해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감동을 받고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처음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배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순결한 삶에 감동을 받고 마음이 움직여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히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온갖 더러운 일을 자행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우리 어머니가 권사요, 우리도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데 왜 이렇게 못살게 하느냐?"고 원망하며 불평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본문에서는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는 자"라고 합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이외에는 굉장히 냉정하신 일면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섬기고, 의지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자들에게는 그들 마음대로 내버려둡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인간은 마귀가 조종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온갖 더러운 타락의 열매를 맺게 하여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시켜버립니다.
29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버린 인간들, 그래서 인격이 타락한 자의 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⑴인간의 근본적인 죄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이고,
⑵사람에 대한 심적(마음)의 죄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고,
⑶표현하는 죄는 '수군거림, 비방, 하나님을 미워함, 능욕, 교만, 자랑'이고,
⑷비인간적인 죄는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무정, 무자비한 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가 인간들에게 들어오므로 그 마음에 하나님을 상실한 결과로 오는 현상들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이러한 것들이 죄 인줄 알고, 그 죄를 끊으려고 날마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우리 죄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봅시다.
▶29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①인간의 근본적인 죄를 알아보자! 여기 ⑴불의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악행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요1서 3:4절에 '모든 불의는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 적은 모든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약4:17절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선을 행 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될 줄 알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눅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제사장이나 레위 인들은 선을 행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선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를 범한 것입니다.
롬14:23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또 있습니다. 요16:9절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죄 중에서도 가장 불의한 죄요. 큰 죄가 됩니다. 다른 죄는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으나 예수 안 믿는 죄는 지옥행입니다. /믿/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3: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또 요3:19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불의는 의와 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반대로 가는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은 복된 길이 아니라 저주의 길입니다.
⑵추악은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 악한 생각, 악의가 행동으로 나타난 악마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사탄의 마음인데, 칼빈은 '인간의 부패성과 더러운 생각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없애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잠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할/
⑶탐욕은 오직 물건에만 욕심을 내는 것, 물질을 하나님의 위치와 바꾸어 놓고 물질만 탐하는 것으로 이는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골3:5절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탐욕은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터무니없는 욕망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자기 위주의 소유욕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그런데 약1:15절을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십니다. 무섭습니다. 우리 모두 탐욕을 버리십시다. /할/
⑷악의는 사악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즉 남을 해하고자하는 마음, 악한 생각은 곧 악한 행동을 낳습니다. 또 악의는 구부러진 마음인데, 추악히 외적인 악이라면 악의는 내적인 악을 가리킵니다.
②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의 죄는 무엇인가?
⑴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⑵살인은 제 6계명을 어기는 큰 죄로, 육적인 살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미움도 살인입니다. 요일3:15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살인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죽인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죄입니다.
⑶분쟁은 남을 쳐서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당을 만들어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⑷사기는 거짓으로 사람을 속여 자기 생각대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대부분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으로 배신감이 큽니다.
⑸악독은 악한 성질, 간악함을 말합니다. 예)흉악범들을 보세요!
③남에게 대해 표현하는 죄도 있습니다.
⑴수군수군함은 은밀한 곳에서 남을 비방하거나 모함하거나 험담하는 것을 말합니다. 밤 말은 새가 듣고 낮말은 쥐가 듣습니다.
▶31절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사람에 대해 표현하는 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⑵비방하는 자는 '대적하여 말한다'는 의미이며, 숨어서 비방하고 수군거리는 자와는 대조되는 말로 공공연하게 남을 악평하는 자들입니다. 예)대남 방송
⑶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란,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를 말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로, 무조건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하나님이 미워하거나 손해 보는 쪽은 인간들입니다.
⑷능욕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타인을 경멸하는 자, 또는 악의를 갖고 타인을 해하며 타인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는 자를 말합니다.
⑸교만한 자는 '높이 나타내는 자'란 뜻으로, 타인을 멸시하고 자신의 우월감에 빠져 사는 자입니다.
잠18: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⑹자랑하는 자는 자신의 육신의 것이나,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도 교만한 자와 똑같습니다.
④비인간적인 죄도 있습니다.
⑴악을 도모하는 자란, 악한 일을 지어내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과 공모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⑵부모를 거역하는 자란, 부모를 공경치 않는 불효자로서 제5계명을 어긴 자입니다. 하나님께 효도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출20: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31절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비인간적인 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⑶우매한 자란, 이해력이 없고, 사리 분별이 없는 자, 은혜에 대한 지각이 없는 자,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⑷배약하는 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15:4절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성도는 한번 약속한 것은 그 상대가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자기가 해로울지라도 지켜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⑸무정한 자란, 애정이 없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애정이 없는 부모나 형제, 인간관계에서 사랑이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⑹마지막으로 무자비한 자란, 타인의 어려운 처지를 돌아보지 않는 사랑이 없는 자이며, 한 마디로 자비로운 마음을 상실한 자들입니다. 또 무자비한 자는 무례함과 무식함도 포함되는 말입니다.
▶32절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29-31절에 기록된 21가지의 모든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그 형벌이 사형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죄가 인간에게 왔는가? 그것은 앞에 24, 26, 28절에서 세 번이나 '하나님이 내어 버려 두사' 하나님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부도덕함과 더러운 것들 전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말하는 '인간 완전 타락'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가르친 사도 바울은 롬5장에 가서는 "그런고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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