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창 1:26-31)
우리는 지금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그 셋째주간으로 성서주일이기도 합니다. 대강절은 300년 후기부터 지켰습니다. 기독교에는 절기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절기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절 40일전부터 지키는 '사순절'이고 또 하나는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전 4주간을 말합니다. 이 4주간이 끝나면 곧 바로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이 4주간 대강절은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대강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를 맞을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는 기간'이고 또 하나는 '장차 오실 재림 예수를 맞을 준비를 하는 기간'이 대강절입니다. 그래서 중세시대에는 이 기간동안 흥청대는 축제를 삼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찬송 가운데서도 '영광송' 같은 찬송은 가급적 피하고 정숙하게 보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목적이 인류에게는 큰 영광이요 축복이지만 예수께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고난 받으러 오시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에서는 이 대강절을 경건하게 보내게 된 것입니다. 또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께서는 죄를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에 오늘 대강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그만큼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에 기념으로 한 일들이 있습니다.
①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촛불을 가정마다 밝혔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풍습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성탄절 츄리 빛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이 땅에 가난의 어두움, 병의 어두움, 미움의 어두움, 불안의 어두움이 물러 갈 것을 기대하는 희망의 불빛입니다.
②초대 교회부터 대강절에는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성 프란시스가 1224년 그레치오 마을 입구에 구유를 만들어 놓은 것이 기원이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맞이한다는 기다림입니다.
③성탄절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화환입니다.
푸른 사철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촛불을 세웁니다. 원은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모나지 않아서 누구든지 다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상록수는 변함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촛불은 예수님을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네 개 초를 켰습니다. 한 주에 한 개씩 불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촛불과 구유와 화환을 만들어 놓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대강절입니다. 그런데 12세기 들어오면서부터는 대강절이 초림 예수님, 마굿간 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만 기다리는 절기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 확대 해석하면서 그 의미가 더 종말론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초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을 기다리지만 더 큰 의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다려야 합니다. /할/ ◀제목소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왜 이러한 말을 했을까요?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왜 이 세상에 왔으며, 무엇을 해야 하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기 때문에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심각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조차도 자기 자신이 왜 사는지를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 존재입니까? 이 사실을 바로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 실존의 의미를 바로 아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본문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아는 사람은 삶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사실은 축복의 존재입니다.
28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할/
▶미국의 20대 대통령을 지냈던 '제임스 아브라함 갓필드'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한 이야기는 참으로 소중한 교훈과 깊은 감동을 우리에게 줍니다. 갓필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사회시간에 선생님은 "너희들은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저들의 장래의 소망과 꿈을 물었습니다. 그 때 여러 아이들이 다투어 손을 들면서 자기 나름의 바램을 말했습니다. 커서 장군이 되겠다는 남자아이도 있었고, 명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여자아이도 있었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남자 아이, 간호원이 되겠다는 여자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만히 보니깐 갓필드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갓필드야, 너는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되겠니?" 그랬더니 그의 대답이 "예, 선생님. 저는 이 다음에 커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금방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런 바보 녀석, 우리가 다 사람인데 또 사람이 돼? 저 녀석 좀 모자라는 거 아니야?" 친구들의 조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얼굴은 달랐습니다. 선생님의 입가엔 그런 조롱 섞인 웃음이 아닌 대견하다는 듯한 흐뭇한 웃음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다가 선생님의 얼굴을 보더니 한 아이, 두 아이 웃음을 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2분 사이에 교실 안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갓필드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겠다'는 그를 다시 한번 본 줄로 믿습니다.
요즘 흔한 말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수 없이 들어왔던 말 중에 하나가 '인간성 상실'이라는 말아닙니까?
▶서울에 안동교회가 있는데 100년이 훨씬 넘은 오랜 교회입니다. 오래 전에 그 교회에서 발행되는 교회소식지에 참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집사님 한 분이 교통 경찰인데 교통 경찰로서의 일을 신앙적으로 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특별히 뇌물을 결코 받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동료로부터 따돌림(왕따)을 받았습니다. '너만 깨끗하냐'는 식이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데 그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는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일입니다. 상관들에게 무능한 공무원으로 낙인 찍혀 승진이 안 되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상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는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왔습니다. 그것만 해도 마음이 아픈데 그는 6개월 동안 신경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단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살기가 어렵습니다.
▶오래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읽어본 책 가운데 '오체 불만족'이라는 '베스트 셀러'가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그 당시 일본의 23세 된 청년 '오도다케 히로타다'라는 젊은이가 쓴 책인데, 이 청년은 발도 없고 팔도 없고 몸통만 있는 중증 불구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사람을 '선천성 사지 절단성 불구자'라고 전문 학자들은 말합니다.
얼마나 불행한 청년입니까? 다리 하나 없는 것도 아니고, 팔 하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팔 다리는 하나도 없고 몸통만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청년을 참 불행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불구자인데도 불구하고 참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창 외모를 생각하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인데, 외모는 고사하고 팔도 없고 다리도 없이 몸통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 되면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누구하나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을 비관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쓴 자서전이 벌써 300만 부가 넘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그런 환경인데도 신체가 건강한 사람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집필 당시 와세다대학에 재학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사람은 어떻게 태어났느냐 보나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신체적으로 불만족이지만 그러나 내 인생은 대 만족이다"라고 했답니다.
이 청년은 건강한 사람들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말 세상을 비관하고 원망하며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행복해 하며 살고, 정작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건강한 사람들은 세상을 비관하며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 육신이 건강한 사람들이고, 얼마든지 뛰어다니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보면 행복의 기준은 건강도 아니고 부함도 아니고 좋은 환경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건강한 삶이 참 중요합니다. 몸이 건강하다고 반드시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몸은 건강한데 정신적인 장애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또 돈은 많은데 경제적인 장애자들도 참 많습니다. ▶문제는 정신입니다. 사람은 정신이 건강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정신이 사람으로 하여금 건강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런데 건강한 정신은 어디서 옵니까? 내가 누구인가? 인간의 실존을 바로 알 때 마음이 건강해 집니다. /믿/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인간창조로 막을 내립니다. 인간은 작은 우주로써 천지창조의 축소판입니다. 인간은 천지창조의 극치요, 절정이요, 면류관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이러한 위대함이 어디에서 주어졌는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존엄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과연 어떠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까?
1.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흔히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몸으로 구성된 지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와 같은 육체적인 형질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바울은 엡4: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즉 지, 정, 의에 성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데, 인간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솔로몬은 전3: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는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신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종교의 씨를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주님은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14: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 앞에 나아가서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2:3) 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복은 엿새에 수고하는데 있지 않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배드리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가?
예배는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드리는 지상최고의 가치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종합예술입니다.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없으며, 하나님은 이보다 더 기뻐 받으시는 것이 없습니다. ▶예배에는 찬양, 기도, 헌금, 봉사, 말씀, 축도 등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를 우리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롬12: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사회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와 더불어 사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창2: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부부는 돕는 배필입니다. 이혼하는 이들의 말을 들어 보면 한결같습니다. "내 이상에 맞지 않습니다. 내게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말은 성경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상대방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나는 저 사람을 돕는 배필입니다. 서로 도우라고 존재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내 이상에 맞추어 달라고 존재하는 것이 배필이 아닙니다. 흙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흙처럼 주기만 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흙 철학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돕고 주는 존재로 상대방을 만들었다는 하나님의 근본 창조 철학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대상으로, 문화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짐승은 육적인 것으로 지었고, 천사는 영물로 지었으나, 사람은 육과 영으로 결합된 생령으로 지었던 것입니다(창2:7). 그러므로 인간이 땅에 것만 바라보고 살면 짐승과 같은 버러지 인생이 되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면 천사와 같은 삶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면 하늘과 땅의 권세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단의 권세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인간에게는 문화적인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비록 소보다 힘이 새지 못하나 이성으로 트랙트나 콤바인을 만들어 이용하면 소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다의 고기보다 헤엄을 잘 치지 못하나 군함이나 잠수함을 만들어서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독수리처럼 나르는 날개가 없으나 비행기나 인공위성을 만들어서 그보다 더 높은 창공을 나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믿/ ▶이 모든 것을 인간에게 복으로 주셨습니다. /할/
4.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주셨습니다(27).
그런데 실상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알만한 영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1:20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1979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한국의 남북대화가 중단되어 이를 재개토록 노력하던 당시의 UN총회 사무총장 '발트하임' 박사가 평양으로 김일성 주석을 찾아갔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를 환송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은 평양에 대한 인상을 물었답니다. "김 주석 덕분에 평양의 날씨가 좋아서 구경 잘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일성은 '평양 날씨가 좋았던 것은 내 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덕'이라고 수정하더라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일기도 주석의 영향 아래 있다고 믿었는데 김일성의 입에서 일기는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는 증언을 들은 것입니다. 왜 그런 대답이 나왔을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고질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것"(롬1:21)이 문제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섬기지도, 감사치도 않는데 인간의 죄악성이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인간은 다스리는 왕권을 가진 존재로 지었습니다(27).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셨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되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게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모든 만물을 다스리듯이 인간도 하나님 안에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의 정치적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 말씀은 왕권을 말합니다. 처음 인간이 지음 받던 날에는 창조된 이 세상의 만물을 다스릴 권세가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사단을 다스리고, 재물을 다스리고, 환경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권세를 다스리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어떤 권사님은 이사하는데 좋은 날을 잡아서 가야 한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소리입니다. 아무날짜나 잡아서 가면 됩니다. 왕자에게는 왕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왕이기에 그에게도 자녀 된 권세가 있고 아버지의 왕권의 혜택을 자신이 누리고 나아가 자기도 그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
①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왕권을 거부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곁을 스스로 떠났습니다. 왕자는 임금 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만 왕자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왕자로 인정해주고 그의 왕권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나 버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 비로소 누릴 수 있었던 왕권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니 자연히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왕권은 박탈되었습니다.
②왕권을 거부한 인간은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인간 근본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서 진노의 자녀로 하락했습니다.
엡2:2-3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③왕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왕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됩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더 이상 피조물을 섬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왕권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벧전2: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20: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우리는 이 땅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천국에 가서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바르게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6.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세상을 관리하는 존재로 지었습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가꾸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관리하라" ▶이 말씀 속에는 이 세상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몇 가지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①열심히 일하며 살아라!
열심히 일하고 가꾸고 관리하고 살아가는 삶, 여기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요즘 실직해서 할 일 없는 분들이나 은퇴한 분들은 사람이 할 일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인가를 실감할 것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지옥이란 할 일이 없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일한다는 것은 이렇게 소중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새벽에 일찍 일어납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처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일터로 나가는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외국인이 새벽에 남대문 시장을 둘러보고 소감을 피력하기를 "한국은 소망이 있는 나라다. 더 이상 부지런할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새벽 일찍부터 일터로 나가는 그 인생이 얼마나 활기가 있습니까? 삶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런 삶이 의미가 있고 건강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음식을 만들어 파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러 온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이런 사명감이 없습니다. 아무렇게 만들어서 돈만 벌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제가 붕어빵을 만들어 판다면 최고로 좋은 재료를 넣어서 정성껏 만들어 팔겠다"고 했더니 어떤 분이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붕어빵을 만들어 팔면 남는 것이 없어서 한 달이면 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 망합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주방장이 주인에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화가 난 주방장은 이 집 망하라고 음식에 재료도 더 많이 넣고 고기도 더 많이 씩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랬으면 망해야 하는데 손님이 더 많이 몰려와서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삶에는 하나의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이 복을 주고 사람들이 돕고 삶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삶에 진지한 면에 없어져 버립니다.
②이루어가며 살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해서 세상을 가꾸고 관리하며 살라" 이 말씀은 '이루어가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삶은 누가 다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 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다 만들어준 집에 들어가 살면 당장은 편안해서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기쁨과 행복은 스스로 만들고 가꾸고 성취해가며 살아가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때로 '기쁘다. 행복하다. 보람 있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만들고 가꾸고 성취하는데서 얻어지는 성취감입니다. 산도 힘들게 오를 때가 재미있습니다. 내려올 때는 오히려 쉬울 것 같지만 재미는 반감됩니다. 사람들은 정상정복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땀흘리며 수고할 때 거기서 보람을 느끼고 만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행도 준비할 때가 마음이 설레고 즐거운 것이지 같다 온 다음에는 피곤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넓은 들, 산, 땅, 바다를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시키고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스스로 행복을 일구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베이브 루드라는 야구선수는 생애 통산 714번의 홈런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홈런을 위해서 스트라이크 아웃을 1,330번이나 당했다고 합니다. 꿀벌이 한 숟가락의 꿀을 모으는데 4,200개의 꽃을 찾아 돌아다녀야 얻어진다고 합니다.
요셉 하이든이라는 음악가는 평생 800개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800개의 작품 중에서 작품다운 작품은 66세에 가서 작곡한 '천지창조'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800개의 습작을 만든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라는 작가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8년 동안 2,000번의 스케치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쉽게 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가 있고, 내가 고생하고 아픈 것이 하나님의 뜻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실패하고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6,25때 공산당에게 한 목사님 가족이 붙잡혔습니다. 구덩이에 넣어 생매장 시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유하기를 "지금까지 전한 것이 다 거짓이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옆에서 무섭다고 떨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은 갈등과 번민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죽는 것은 할 수 있는데 곁에 있는 아이들을 차마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찌릅니다.
그러면서 대담하게 나섰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더니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조금만 참아라. 오늘밤에는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식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가족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송을 부르면서 생매장 당해 죽어갔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그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서 살려주셨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적이고 형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매양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형통만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기적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목사님의 가정이, 아이들을 포함한 일가족 모두가 구덩이에서 생매장 당해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찬송을 부르며 장렬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 목사님 가족이 기적같이 살아 나온 것보다 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③하나님과 함께 살라(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고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와 함께 살아갈 인간을 만들자" 라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결론입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고 별 장난을 다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줄 알고 너무 돈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의 극치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철학 하나가 살아도 돈, 죽어도 돈이라는 철학입니다. 모든 현대인들이 여기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청년이 도박을 해서 80억을 날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박 범으로 구속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대학생 시절에 신화를 일으킨 사람으로 대학생 신화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는데 기발한 아이디어로 폭발적인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전국에 많은 체인점도 두고, 100억대의 돈을 벌었다고 해서 대학생 신화라 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이 도박 범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는 호화주택에서 살고, 미모의 여성과 결혼도 했고, 최고급 승용차를 타면서 부를 만끽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탕진하고 감옥에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감옥에 있을까요? '아, 돈이 최고가 아니구나! 내가 살아도 돈, 죽어도 돈을 위해 살았는데 이 돈이 나를 이렇게 망치는구나!' 하고 후회하며 감옥에 있을지 모릅니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 안에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요8:32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유교에서는 도를 듣는 것이 자유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절)고 했습니다.
▶자유를 얻게 되는 과정을 세 단계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입니다. 이것은 말씀과 삶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주자'는 글을 읽는 자세에 대하여 말로 읽는 것, 입으로 읽는 것, 그리고 마음으로 읽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마음으로 읽는다는 것은 생활로 읽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생활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말과 사상과 사는 방법까지 전수 받는 것이 제자입니다. 어떤 스승에게 배웠는가에 따라 그의 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빛이시오, 길이시오,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인생은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롬8: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랍은 결코 정죄할 자 없습니다. /할/
7.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들에게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자!
①'네 자신을 돌아 보라'고 권면합니다. 갈6:1절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을 깨우라, 잠자는 나를 깨워라, 근신하라, 깨어라, 기도하라'는 뜻이요, 또 하나는 네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강자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가 강한 자인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②'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갈6:4절에서 권면합니다. 여기 '각각'이라는 말과 '자기의 일'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일은 사명과 책임입니다. 사명과 책임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③'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갈6: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④낙심하지 말라! 갈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하다가 낙심합니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시2:7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이 창1:28절의 복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축복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위대한 신앙의 행진을 멈추지 마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004년 12월 12일 대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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