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주간은 우리 그리스로마 달력으로 주일부터 시작해서 금요일 오후 3시까지 계속되는, 일주일 동안의 예수님의 집중적 고난입니다. 고난주간에는 실제로 집중고난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그날 띠 띠어서 적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했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총출동해서 예수님과 대논쟁을 벌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안식일 직후, 토요일 그다음 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수님께서 입성을 하십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스가랴 9장 9절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보면 이스라엘 왕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데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본문은 솔로몬의 초기 구절이거든요. 솔로몬이 초기 왕으로 등극할 때 평화의 왕, 솔로몬이 나귀 새끼를 타고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시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앞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은 강력한 이방군주 같은 힘의 상징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 스가랴 9장 9-14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은 자기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나귀를 타고 왕위에 오르는 겸손한 친 민중적인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스라엘 왕이 전 세계 만민에게는 전 세계적인 평화를 가져옵니다. 화를 꺾어버립니다. 자기 주민에게 아주 친절한 왕이신 솔로몬 왕이 솔로몬왕적 무한적분 메시아 이상왕이 열방의 모든 활들을 꺾어버린다는 말이 나와요. 그게 바로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의식하면서 예수님이 벳바게에서 나귀를 탔거든요. 예수님은 두 가지를 노렸습니다. 예수님이 왕은 왕입니다. 초창기의 솔로몬왕, 전제군주로 돌변하기 전의 솔로몬 왕처럼 자국민을 아주 친절하고 자애롭게 다스릴 것이며 전 세계 만민을 평화의 세계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진 본문의 일부를 한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나아왔다,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민족주의적인 파토스가 극에 달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이 장면은 또 왕이라는 이미지가 두 가지로 겹칩니다. 강력한 이스라엘 신정국가를 형성하여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하실 왕, 그렇게 오해가 됩니다. 종려나무를 가지고 이스라엘 왕을 영접하는 것은 마카베오 독립전쟁 때 있었던 분위기거든요. 마카베오 독립전쟁은 BC 164년에 끝났는데 마카베오 독립전쟁의 끝에 시므온이란 사람, 마카베오 독립전쟁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BC 167년의 뼈대 있는 제사장의 아들이 시므온입니다. 그 시므온이 왕과 제사장과 행정관을 겸하겠다고 백성들로부터 서약을 받습니다. 그 시므온이 하 시므온 이라고 해서 하스몬 왕조가 됐습니다. 하는 히브리말로 정관사 the입니다. the simon, 시몬녀석들 시몬파들 이런 뜻입니다. 하스몬왕조 또는 하스모니안 왕조라고 돼 있습니다. 초대 왕이 사실상 시므온인데 시므온이 왕적인 지위를 국민들로부터 수락하겠다고 할 때, 마카베오상의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왕권 재판관 일부의 행정적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왕이 나타나면 그 모든 지방적 권력들은 없어지는 겁니다. 종려나무를 드는 민족해방의 절기, 그걸 순식간에 기억나게 하는 종려나무를 든 군중이 나타났단 말이에요. 이 말은 군사적 모험주의를 부추기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군사적 모험주의를 부추기는 말이니까 이 환호성을 맞이한 예수님은 뭔가 개인기를 보여주셔서 로마제국 권력의 압제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구로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지금 받고 있는 겁니다. 두 가지가 겹쳐집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등극하셔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메시아적 평화의 정치를 구현할 것을 암시하며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을 선호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군중은 토지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가장 피해를 보고 있는 땅을 가진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가장 직접 피해를 보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중농이상의 부르주아 계급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을 정조준해달라고 부탁을 한 겁니다. 로마제국이 모순이다, 로마제국이 지금 우리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것이 문제라는 식으로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이야 말로 모순이고, 우리가 정조준 해야 할 악의 처소는 로마제국 총독부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다, 불행하게도 로마제국의 총독부는 예루살렘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이사랴 해변도시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환호성을 듣고 가는데 예수님 자신을 이스라엘 왕이라고 부르짖는 이 소리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에 대한 강력한 암시를 받습니다.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 대답이거든요. 오늘 20절에 대한 대답입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헬라인을 만나는 대신 답변을 두 가지를 합니다. 24절 답변 하나와 32절 답변, 이 헬라인들은 개종직전에 있는 그리스 사람이라고 봐야 합니다. 순전히 이방인인데 개종직전에 있는 그리스사람으로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방법, 예수님이 펼쳤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답변을 두 가지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다시 말해서 헬라인들은 언제부터 혜택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헬라인들, 명절에 올라온 이방인들은 언제부터 혜택을 받아요? 예수님 죽고 나서, 예수님이 많은 열매를 맺은 단계에 가서 헬라인들은 예수님의 구원에 동참합니다.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땅에서 들려야만, 예수님이 지금은 땅에서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흡입력은 공간에 제한돼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만 영적 파장이 일어나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고 나서 부활하고, 들린다는 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감수하는 완전한 순종을 바침, 두 번째 내가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을 드려 인류의 죄를 대속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인정받아 하나님 보좌 우편에 들림, 두 가지가 있어요. 십자가에 못 박혀 들리면, 놋뱀이 되어 들리면이 하나이고, 두 번째로 놋뱀처럼 들렸던 그분이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존귀케 되는 승천으로서의 들림, 이 두 가지가 된다면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끈다, 지역적 한계를 언제부터 벗습니까?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는 죽음으로, 율법의 저주를 받아 대속적 죽음으로 죽는 것과 대속적 죽음의 끝에 하나님이 그를 존귀하게 하셔서 번쩍 들어 올리시는 그 들리심, 이 두 가지를 한 후에야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 이끈다, 이게 바로 헬라인이 이때 구원받는 거예요. 헬라인은 예수님이 땅에 떨어져 죽고 나서, 예수님이 들리고 나서 인정받은 거예요. 그래서 헬라인에게는 답변이 됐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있어 예수님과 멀리 떨어진 사람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시간과 공간 너머에 예수님과 직접 얼굴로 대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야만 구원받습니다. 들려야 구원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들렸기 때문에 인디언도 구원받고, 레슬리 뉴비긴이 35년 동안 했던 남인도 사람도 구원받고 한국 사람도 구원 받고 웨일즈 사람도 구원받고 중국 사람도 구원받습니다. 전 세계만민이 예수님께 빨려 들어요. 전 세계 만민이 예수님께 모여 들어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들렸기 때문에, 이게 일반 원칙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에너지와 물질적 한계 안에 있기 때문에 몇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멋지게 죽고 나면 그 죽음 이후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존귀케 되고, 하나님에 의하여 시성될 때, 시성된다는 말은, canonized 될 때, 가톨릭에서 성자라고 칭해주는 걸 시성식이라고 하거든요. 그걸 영어로 말하면 ceremony for canonization, 그 사람의 삶이 기준이 됐다는 말이거든요. 성자가 된 사람들은 가톨릭에서 어떤 의미인가? 그 분의 삶은 우리 성도에게 기준이 됐다, 그분의 삶은 성경 텍스트가 됐다는 말이거든요. 그분의 삶의 모든 행적들은 우리 모두에게 성경 본문이 됐다는 말이 시성식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고 나면, 이태석 신부님은 몇 년 있으면 성자가 돼요. 시성식을 해요. 왜? 이태석 신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이제 성경본문의 위력을 갖고 그분이 했던 모든 남수단 사역은 그냥 공인된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도 되는 기준이 돼버려요. 그걸 시성식, 우리는 본회퍼를 볼 때 본회퍼의 생애는 한 권력자가 나오면 그 권력을 수긍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악한 권력자에게 죽음으로 맞서는 삶이 우리에게는 시성식, 우리가 데모하는 건 본회퍼 때문에 그렇거든요. 제가 캠퍼스 내내 악마적 정권에게 외칠 수 있었던 이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본회퍼적인 영감이 있었기 때문이죠. 본회퍼가 간 삶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한테 본회퍼를 성자로 여길만한 개신교 기구는 지금 없어요.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본회퍼의 삶은 너무 거룩하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찬란하고 너무 비극적이었어요. 본회퍼가 보였던 삶이 우리에게 기준이 됐기 때문에 본회퍼적인 희생을 해야 한다고 해서 데모를 하고 감옥가고 매를 맞고, 그런 모든 걸 다 한 거예요. 그런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야 한다는 말은 진리에 복종하다가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완성하고 나서야 그 희생을 고난을 자처한 삶을 신적으로 성립해주신 후에야 그때야 사람들을 다 이끈다, 똑같은 거예요. 지금 우리의 삶은 지역적인 한계가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성자처럼 산다 하더라도 성자처럼 우리의 삶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매우 적어요. 그러나 우리가 들림을 받으면 우리의 거룩한 희생에 방점을 찍는 완성점에 가고 그때까지 얼룩 없이 흠 없이 살고, 그리고 그 삶을 이건 기준이 되는 삶이라고 누가 신적으로 성립해주는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면 우리가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약간의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이끌 수 있는 준인자적인, 인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요.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이끌지 못해요. 우리는 몇 사람만 이끌어요. 우리는 인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자적 삶에 수렴하는 사람에 불과해요. 이런 원리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첫째 날 나귀를 타셨어요. 둘째 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어요. 셋째날 무화과나무가 말랐고 대논쟁이 벌어졌어요. 이때는 악한 농부에 대한 비유, 부활에 대한 비유, 이런 모든 것들이 이때 일어납니다. 넷째 날 수요일인데 아무 일이 없어요. 넷째 날은 역사가 없어요. 이때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엄청 하신 날이에요. 다섯째 목요일이 최후의 만찬의 날인데 이때는 예수님께서 성찬식에 준하는 식사를 하시고 발을 씻어주신 날입니다. 그다음 여섯째 날 금요일에 새벽에 붙들려서 오후 3시에 돌아가신 날입니다. 그다음 일곱째 날은 무덤에서 완전히 있으시고, 이때 지옥에 내려가셔요. 음부에 내려가신 날이에요. 여덟째 날 부활하셨어요. 우리 주님께서 안식일 후 첫날, 즉 일요일 첫날 부활하신 거예요. 이게 대개 고난주간 사이클입니다. 그러니까 수요일은 기록이 돼 있지 않습니다. 수요일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수요일은 신적잠적의 날, 또는 신적은닉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격렬한 논쟁 끝에 하루 쉬셨어요. 엄청 고조된 날, 분위기가 좋았던 날, 업이 된 날, 주일날, 나귀타고 들어가던 그날, 너무 배고파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날이 그다음 날입니다. 화요일에 엄청난 개떼같이 모든 다섯 개의 정파 대적들이 다 붙었어요. 헤롯당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다 붙어서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논쟁을 합니다. 수요일 날 아무 일도 안 하십니다. 목요일 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식사를 하시고, 그날 목요일 밤 철야기도에 들어가십니다. 목요일 밤 철야기도 하시다가 새벽에 유다가 인도하는 무리에게 붙들려갑니다. 그게 금요일 새벽입니다. 금요일 새벽에 두 번 정식재판 전에 안나스와 가야바의 집에서 각각 재판을 받으시고, 빌라도가 안토니오 요새라는 출장소에서 재판을 합니다. 빌라도 총독의 출장소입니다. 임시사무소, 거기서 재판을 받고, 거기서 1.7-2km 정도 되는 골고다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그게 금요일 오후 3시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일날, 우리식으로 말하면 금요일 오후3시에 죽임 당하셨죠? 토요일 쭉 죽음을 경험하셨어요. 안식일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이런 일주일이 흐르는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죽음과의 정직한 대면입니다. 죽음과 정직한 대면은 죽음을 아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입니다. 죽음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본문, 27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이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공자의 죽음과 석가모니의 죽음과 너무 다른 죽음입니다. 일단 예수님은 이 세 사람보다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석가모니 등은 나이가 많을 때, 거의 자연사 할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은 불과 33세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45-50세 정도, 그 당시 평균연령으로 볼 때는 지금 현재 45-50세에요. 인생의 프라임타임 때 죽음을 맞이한 겁니다. 성공의 정점에서, 너무 성공했을 때, 온 세상이 예수님을 주라고 추종할 때 죽은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온 세상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을 때 죽는 죽음은 격렬하고도 강렬한 슬픔과 아쉬움이 있는 거거든요. 몰락해서 죽는 자연사와는 다릅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여, 이 시간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이런 말입니다. Rescue me from this hour, 이 시간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죽지 않겠다고 한 말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한 죽음을 완전히 거부한 것이라고 하는데, 꼭 그렇게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이스라엘 왕이라고 부르짖는 엄청난 인파와 군중을 보시고 나서, 예수님은 헬라인에게까지 찾는바 된 가장 큰 정점, 개인으로서 가장 보람 있는 인생의 정점에서 죽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헬라인도 찾고 이스라엘 민족, 전 세계 만민 이방인들까지도 찾아오는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이 시간은 죽기로 작정한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십니다. 나귀를 탄 행위는 예수님이 결코 죽겠다는 말입니다. 나귀를 탄 것은 유월절, 민족주의적 파토스가 절정에 달한 그때에 나귀를 타고 솔로몬 왕을 순식간에 방불케 하고, 스가랴 9장 9절을 순식간에 생각나게 하는 그 행동을 한 것은 엄청나게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인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중에 십자가에 못이 박힐 때 명패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라틴어 아람어 그리스 말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돼 있었죠.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실제로 그런 왕적인 책임감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명패가 붙은 거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예수님의 왕적 책임감과 왕적 동정심의 무진장한 분출이거든요. 예수님이 목자 없는 양 같은, 삯꾼 목자 같은, 이리 떼 같은 악한 지도층이 지배하던 때 너무나 대조적이고 착한 예수님이 무제한적 왕적 동정심을 분출했어요. 이건 결코 안전한 일이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왜 검찰의 조사를 받았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과 똑같이 케임브리지로 갔으면 돼요. 김대중도 똑같아요. 김대중도 대통령 떨어지자마자 지방에 내려가서 신안 앞바다에 가서 대중닭 만들어서 깐죽깐죽 글 올려서 바다에서 해 먹는 모습 보이면 바로 김영삼이 잡아넣습니다. 보통 대통령 퇴임하고 대통령 떨어진 사람들은 새 대통령이 하려고 하는 대로, 연극 무대로 fade out, 무대바깥으로 사라지는 게 정상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가서 벙거지 모자 쓰고 자전거 타고 계속 만 명 정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정치를 했어요. 그러니까 MB 같이 속이 좁은 사람들이 볼 때는 도저히 안 돼요. 그래서 검찰을 시켜서 죽이라고, 사법적 살인 비슷하게 한 거예요. 600만 원 정도 받은 걸 밝혀내기 위해서 대통령을 부른 거예요. 600만 원 정도 받은 것 가지고 대통령을 불렀는데 모욕적인 검찰조사를 한 거예요. 죽게 만든 거예요.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검찰조사를 받고 나오게 만들면 전부 다 죽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인생의 정점에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고난은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요. 예수님이 면류관을 쓰지 않았지만 정말로 왕 같은 분인 거예요. 왕이 마땅히 보여야 할 모든 동정심과 능력을 다 보여줬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왕이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상비군과 권력과 관료조직을 거느린 제도조직의 왕이 아니고 제도권 왕이 아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직접적인 위협세력은 안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위협세력이 되죠. 예수님과 빌라도와 로마황제가 너무 대조적으로 비추면 사람들 민심이 전부 다 빌라도나 헤롯대왕이나 성전지배체제를 따라가지 않게 되고, 그러면 이쪽이 다 붕괴가 되는 건 맞죠. 그래서 매우 위험한 것은 맞죠. 예수님이 민족주의적 파토스가 절정에 달한 유월절 명절에 나귀를 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죽으시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안 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의 왕적 자비심과 왕적 무한 책임감을 보여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도발이거든요. 누구에 대한 도발입니까? 이미 있는 왕에 대한 도발입니다. 이미 왕의 행세를 하고 있는 모든 자들에 대한 도발이 나귀를 탄 참 왕이신 예수님이거든요. 그런데 그 왕은 권력 상비군 관료조직 그런 거대한 돈의 힘으로 세계를 다스리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 너무 겸손합니다. 그리스사람들은 어차피 구약성경을 모르니까요. 당신의 부활에 대해서 다니엘서 12장 3절로, 이사야 26장 16-19절로, 구약본문에 있는 부활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자연계시를 이용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을 함으로써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불가피성을 인정합니다. 이때 많은 열매라는 말은 이방인들까지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까지 구원받는 죽음은 살아 있을 때는 안 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5절은 괄호 안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이때의 사랑은 아가페가 아닙니다. 필레오라는 말입니다. 자기 생명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생명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수식어가 중요합니다. 엔테 코스모 투토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을 잘못해 이 세상을 빼면 자기 생명을 무조건 미워한다, 즉 자기 생명을 저주하고 혐오하는 자만 영생하도록 보존한다는 그런뜻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은 이 세상, 영원한 삶이 보장되지 못한 죄와 죽음이 가득 찬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려고 하는 마음으로 자기 생명에 집착하면 오히려 죽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충분히 누리지 못할 것을 이 세상에서 영생을 추구하는 것, 극한 몽환적인 완전한 삶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은 이 세상 괄호하고, 완전한 영생을 누리기에는 이미 조건적으로 부족한 곳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 말은 죄로 가득 차고 모순에 가득 찬 우리 삶을 너무 극단적으로 절대화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세상의 삶 전체가 죄와 모순 위에 구축됐다고 봅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실의 값어치에서 인생이 잘 풀렸다는 식의 모든 간증들은 근본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간과합니다. 한 번 보십시오. 좋은 부모님한테서 태어난 사람, 좋은 가정에서 지원받은 사람들은 다 잘 삽니다. 대개 교수 의사 판검사 하위직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적습니다. 대부분 가난과 부는 대물림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난과 부가 대물림되는 구조적으로 완악한 이미 어그러진, 정의의 다림줄에서 많이 어긋난 체제 안에서 이 체제가 마치 정상작동하는 것처럼 믿게 만드는 성공의 법칙들을 많이 보일수록 불리합니다. 그런데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악마적 모순을 은폐하고 만드는 성공신화를 가진 사람입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하이라이트로 보여주는 사람은 이 세상의 체제에 근본적인 모순에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개인이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반전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을 막 띄웁니다. 그게 일면적으로는 맞습니다.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사업에 성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그것, 그러한 개인이 나왔다고 해서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불의에 기초하고 있고 거짓되고 잘못된 정의와 행복의 불공평한 배분 위에 이 세상이 있다, 이 세상 자체가 조화가 아니고 부조화라는 것, 영속적인 존재성을 갖지 못하고 언젠가 부서질 취약한 구조라는 것, 그런 것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기사는 잘못됐다는 거예요. 최일도 같은 사람을 동아일보가 엄청나게 키웠습니다. 왜? 최일도 목사와 동아일보가 왜 맞느냐? 이런 죄와 모순이 가득 찬 세상에서 사회체제를 문제삼지 않고 사랑의 가치를 최고로 해서 사회를 통합시킨 사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계급적 모순을 은폐하는 모든 사회통합적 인물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결국 김진홍 목사를 좋아합니다. 왜? 김진홍 목사님은 저와 사회적 불의가 가득 찬 세상에서 분노하다가 결국은 사랑의 힘을 믿고 모든 사람을 다 끌어 모아서 하나되게 만든 것, 이건 듣기에는 나쁘지 않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떤 약점이 있느냐? 이 세상 안에 근원적으로 작동하는 탐욕과 불의와 거짓의 구조를 은폐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죄와 구조적 모순이 작동하는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는 자는 매우 극적인 말입니다. 자기 생명에게 무한한 행복감을 고취하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 라는 뜻입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자기 생명을 값어치 없게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 생명의 영속성을 안 믿는 사람들이란 뜻이에요. 이 죄와 모순이 가득한 세상에서 자기 생명의 한계, 자기가 누릴 삶의 한계를 적당히 인식하고 무한히 영생을 누리려고 하는 그런 삶을 포기하는 자야 말로 영생하도록 그 생명을 보존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말은 이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상대화시키는 자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의 영생을 누릴 것처럼 행동의 사치와 환희를 자기 인생의 선물로 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삶을 상대화시키면서 미워한다, 자기 삶에 대해서 값어치 없게 여기는 것, 이 초개 같은 삶을 버릴 수 있는 것처럼 고상한 삶을 위하여 이 죄와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의 삶을 상대화시키는 자야말로 영생하도록 보존한다, 이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것 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근본구조가 내가 영생을 누려도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고 잘 사는 것은 나한테 의미가 없습니다. 왜? 너무 불리한 여건속에서 고난 받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너무 불쌍한 사람이 많은 거예요. 내가 여기서 영생을 누리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이 죄와 모순, 인류의 80%가 양식이 제대로 없는 세상에서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행위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는 삶과 정반대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이 영생합니까? 한 알의 밀알, 즉 생명가치를 희생시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잠정적인 생의 쾌락을 영원한 생의 희락을 위해서 희생시킨다, 이게 바로 죽는다, 죽는다는 말은 영속적 가치를 위해서 비영속적 가치를 희생시킨다는 뜻이에요.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말은 영속적이지 않은 자기 생의 욕구를 영원한 삶의 가치를 위해서 희생시키고 거부하고 배척한다는 뜻이에요. 그런 사람이 영생하도록 보존합니다. 이게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경우는 죽음과 너무 맞딱뜨리는 경험이기 때문에, 항상 그런 순간이 오면 그때를 면하게 해달라는 위기가 도래합니다. 예수님도 그 위기가 도래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위기가 도래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그러나 내가 이때를 위해 왔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내가 땅에 잘 떨어져죽어 많은 열매를 맺으러 왔습니다, 이게 우리 생의 목적입니다. 내가 한 번 땅에 떨어져죽어 많은 영생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왔습니다, 이때가 죽어야 하는 때라면 내가 이때를 영접하겠습니다, 28절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했더니, 네가 주기로 결단한 순간 내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31절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을 받기로 했으니까 이제 누가 심판을 받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를 삼켰습니다. 이제 죽기로 결단했더니 갑자기 이 세상의 임금, 죽음의 위력을 갖고 우리를 지배하던 그 세상의 임금이 죽음의 위력을 갖고 우리를 지배하던 힘이 약해졌습니다. 내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때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사람이 센 사람처럼 보였는데, 내가 죽기를 결단하고 죽음을 영접하고 났더니 이제 죄와 죽음의 권세로 나를 지배하고 세상을 지배하던 임금이 더 이상 나에게는 왕노릇하지 못한다, 폐기됐다, 내 마음에는 죽음의 권세로 나를 지배하고 겁주던 사탄은 폐기됐다, 내 마음에 사탄적인 죽음의 권세가 폐기됐다는 말은 이 세상은 이제 누구도 죽음의 권세에 휘둘릴 일은 없다, 그런 뜻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너무 어려운 본문인데 논리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임금이 어떻게 쫓겨나요? 죽음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삼키고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 더 이상 죽음 자체를 영접하는 성스러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죽음을 무기로, 너를 죽여버릴 거야, 죽음이 너의 삶의 궁극적인 끝이야, 라고 협박 공갈하는 이 세상 임금은 더 이상 나에게 위력을 더하지 못합니다. 세상 임금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면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를 실천하면 되고,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하면 전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 구실 못할 각오하고 한 번 바짝 가난하게 살면 실제로 아무 문제가 없어요. 저도 20대부터 40 대여섯살될 때까지 장례식 결혼식에 가서 내 이름으로 돈을 내 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사회인 인격으로서는 죽었습니다. 내가 어디 가서 내 이름으로 5만원이나 10만원 돈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돈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요. 그렇게 하기에는 제가 어떤 사회적 활동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약간의 가난 속에서 불편하게 살았을 때 오는 확신과 삶의 풍요는 어마어마하게 컸습니다. 사회생활에서 죽는 것? 십 몇 년간 죽었습니다만, 아무 것도 잃는 게 없었습니다. 제가 12년 동안 캠퍼스 ministry 할 때 완전히 사회적으로 아무한테도 나타날 수 없고, 명절에도 나타날 수가 없고, 성전에서만 살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게 저한테 치명상을 입혔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직도 정신적으로 어떻게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됐을수도 있는데, 제가 볼때 그렇게 이상해보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매장된 게 맞고, 김회권 완전히 존재가 죽었다고 그렇게 소문이 났다고 해도 나는 실제로 잃는 게 없었어요. 내가 마지막 결혼식에 갔을 때 85년에 박상모라는 불문과 나온 친구가 대전고등학교 나온 친구입니다. 우리 주식을 받았는데 5천 만원을 받았다고 월 14만원 받고 있는 나한테, 5천만원 사주받았다고 회권이 너는 어디 아파트 사냐고 해서 내가 싱긋이 웃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집은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집에 산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 가서 처음으로 수돗물이 따뜻한 물이 있다는 걸 알았지, 계속 물을 끓여 썼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따뜻한 물에서 씻긴 게 아니라 매번 물을 끓여서 아이를 씻겼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잘 컸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는 정도의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 삶에 대해서 무한히 호강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수식 때문에, 이 세상 괄호하고, 죄와 모순이 가득 찬 세상에서, 즉 삶의 영속성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부서지고 하나님을 등진 이 부조화의 세상에서 내가 내 목숨을 영생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 목숨을 미워했다, 그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 예수님은 한 번 툭 떨어져 죽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떨어지면 안 돼요. 천천히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꺼번에 떨어져죽었지만 우리는 일생에 떨어져 죽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결론 맺습니다. 수난주간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추구를 상대화시키는 날이다, 불편을 감수하는 날이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영원하지 못한 것들을 약간 희생시키는 날이다, 그렇게 했을 때 그분은 들리웠다, 그 분은 가난의 감수 때문에 들렸다, 그분은 오해받고 들렸다, 진리를 가르치다가 진리 아닌 자들의 파당의 음모에 의해서 희생당했다, 그게 들린 겁니다. 이렇게 당해야만 모든 사람을 영적으로 흡입할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갈 수 있다, 이런 원리를 깨닫는 날이 사순절 고난주간입니다. 여러분 오늘 결단,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 가치를 상대화시키고 가볍게 여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땅에 떨어져 죽는 일이다, 이것이 사순절날 있는 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한 번 땅에 떨어져 죽으셔서 전 세계 만민이 예수님의 보좌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흡인돼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살아가신 위대한 삶의 흔적, 위대한 삶의 자장이 전 세계 만민이 쇠붙이가 거대한 자석에 끌려가듯 끌려가고 있습니다. 주님 이 멀고 먼 대한민국까지 주님의 찬란한 십자가가 힘을 발휘하여 저 같은 완악한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 이 십자가의 끄는 그 힘이 세계 만민의 양심을 쇠붙이처럼 끌어당겨 주님이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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