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은 life for eternity 라는 뜻입니다. 영원까지 지속될 만한 삶, 오랫동안 존속가능한 삶이 영생입니다. 하인 아드 하올람, 영생이라는 이 말이 히브리적 세계, 즉 구약성경의 세계에서는 우리 육신을 벗어버리고 영으로 사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원히 존속가능한 삶이란 뜻으로 쓰였다고 했죠. 요즘말로 하면 sustainable life, 지속가능한 삶, 이런 말과 비슷한 말이에요. 하인 아드 하올람이란 이 말이 육신을 벗어버린 영들이 사는 삶이란 뜻으로 쓰지 않기 위하여 요한복음을 구약성경적 배경 또는 유대교적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영생은 life for eternity, life unto eternity, 또는 eternally durable of life,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이다, 이 ‘영원’이 영에 관한 게 아닙니다. 시간 영, 영원할 때 영입니다. 영혼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영생을 신령한 영적인 영으로 써버리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했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면 인간이 지속가능한 삶, 인간끼리 영원히 존속 가능한 모둠살이, 사회생활, 공동체로만 가능한 것이 성경 안에서 나온다, 맞죠? 그런데 이 영생을 히브리인들은 유대인들의 특권이 보장되고 이방인들이 열등한 지위에 가면서 유대인들의 특권이 오랫동안 영원히 보장되는 삶, 그 유대인들 중에서는 율법을 가르치는 종교적 엘리트들의 특권적 지위가 보장되는 삶을 영생이라고 하고 있어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런 사람들은요. 이 사람들은 만민 중에서 유대인들이 최고 하나님과 중심 보좌를 차지하고 그 중심보좌 일렬에 또 종교지도자들이 차지하는 거예요. 나머지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봉신국가가 되는 겁니다. 봉신국가는 조공을 바치는 나라란 말이에요.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은 존속 가능한 공동체 생활이란 뜻이었다, 모둠살이란 뜻이었다, 그 근거는 신명기 30장 14-19절, 또는 시편 133편에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영생과 가장 같은 말은 세브트 하이 라하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겁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영생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려면 형제들의 삶에 내가 깊숙이 관여해야 합니다. 이거 힘듭니다. 형제자매들의 정서적 재산적 물질적 모든 삶에 어쩔 수 없이 엮이고 관여해야 하니까, 뚜렷한 개체성을 가진 우리가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 남들과 엮이는 건 쉬운 게 아니죠? 이 말은 개체성도 뚜렷이 가지면서 형제자매도 많이 배려해야 하니까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아가 없어야 하죠. 그래야 공동체생활이 될 것 아닙니까? 뚜렷이 개체적인 나의 자아, 나의 개성도 발휘하면서도 나의 뚜렷한 개성발현이 공동체 전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절묘한 균형, 이게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뚜렷한 개성적인 특징이 드러나서 공동체 빈곳을 적절하게 내가 채워주게 됩니다. 내가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돼요. 성령충만한 내 모습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내 존재가 너무 독특해서 내가 빠지면 톱니바퀴가 빠지는 그런 삶이 되는 거예요. 그런 individualize, 개성적 자아가 많이 발현되고 성령충만하면, 그래서 성령은 공동체에 덕을 세울만한, 공동체를 일으켜 세울만한 재능과 은사를 나에게 꽃피우게 해주세요. 대학교 1,2학년 때 성령충만 해야죠. 그래야 3,4학년 때 자기가 취업할 때 유리하겠죠? 내가 20대 초반에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내가 어디에 적합한지 모르겠죠? 오십 몇 살에 발견하면 물론 second career 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인생 낭비하는 거죠. 많은 경우에는, 그런데 사람이 개성적이 되어간다는 개념은 공동체에 상당히 힘들어질 가능성도 증가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그 사람이 개성적일수록 우리 공동체의 빈틈을 잘 채우는 방향으로 개성적인 지향을 뚜렷하게 해주기 때문에 위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영생이 가능하다, 영생은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의 감화 감동받는 정도가 비슷해야만 가능하다, 옛날 우리 두레마을에 77-90명까지 공동체 생활을 했는데, 김진홍 목사님이 테이프에서 너무 공동체 생활에 대한 로망을 심었어요. 어떤 로망을 심었느냐면 미국교포가 마약쟁이였는데, 와서 케일 농사를 짓다가 케일 잎을 따먹다가, 케일을 먹고 마약독이 빠져서 희망이 없는 노처녀를 만나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돈 많은 교포들이 들을 때 바로 마약하는 내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못하고 있던 처녀들 다 두레마을로 오고, 그다음 또 김진홍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두레마을에는 전과4범이 가장 아래입니다, 대개 7범이 돼야만 소개할 수 있습니다, 전과자들이 몰려들어요. 그런데 제가 축도를 하고 제가 공동체생활을 지도했기 때문에, 이런 사람 앞길을 축복해요. 군포의 산 하나를 개간했어요. 그 사람들을 데리고,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됩니다. 제가 볼 때는 그런 공동체적 로망을 너무 많이 심고 오면 안 됩니다. 그래서 2년 반 만에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김진홍 목사가 또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하면 또 몰려와요. 결국은 공동체 생활이 안 되더라고요. 제가 87년부터 94년까지 7년간 경험한 공동체 생활은 안 됐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성령 충만한 영적중심이 형성이 안 됐고, 그 다음에 힘이 센 사람이 힘 약한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우연히 됐습니다. 물론 결국 마약중독 해결 안 됐습니다. 마약중독 됐다고 한 사람이 남의 바이크를 훔쳐서 타고 다니다 사고를 쳐서 화성군수가 우리한테 전화를 해서 우리가 고개 숙이고 싹싹 빌고 해서 선처를 받아 나오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데 사람이 모이는 건 너무 위험한 겁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 사람끼리 모여 살면 그건 굉장히 collateral damage입니다. 영화제목 있죠? 동등한 손상 입히기입니다. 공동체생활은 damage를 줍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면 collateral damage를 주지 않고 서로 몸을 세웁니다. 영생은 성령 충만한 형제자매들이 개성적 지향을 뚜렷이 가지면서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 이때 공동체라 함은 개인의 덕과 선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덕과 선을 줍니다. 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루지는 못하죠? 나무 한그루가 옆에 있는 나무 한 그루 옆에 있으면 거대한 숲이 되죠? 숲은 나무 한 그루가 줄 수 없는 엄청난 선을 주죠? 다시 말해서 70명의 형제자매들이, 70명의 걸어 다니는 상수리나무가, 70명의 걸어 다니는 인격적 나무들이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공동체생활을 잘 하면 70명의 인격적 상록수에서 나오는 오존과 맑은 산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이었다, 그런데 이 영생의 걸림돌은 무엇이냐? 예수님은 이런 영생을 주시려고 하는 예수님 자신의 비전이 유대인의 고착화된 종교기득권에 의해서 좌절감을 겪었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게 중요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빠 기도였어요. 우리가 보통 그런 말을 들으면 저 놈이 이단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지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서 우리들의 아버지라 불림을 받았어요. 우리들 아비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비누라 불렀어요. 아비누는 our father 아비는 아버지 누 하면 우리의, 우리들의 하나님, 우리들의 아버지라 불렀어요. 이것이 개인적으로 아빠라는 말이 아니에요. 아빠라는 말은 아람어로서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빠라는 그 말은 종교적 용어가 아니었어요. 그건 아주 친밀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용어인데, 예수님이 그걸 아버지께 불렀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는데, 예수님의 그 피파송 의식, 하나님께로부터 자기가 파송 받았다는 의식이 너무 강했어요. 30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 나를 보내신 이라는 말로 하나님을 너무 많이 의식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인자라고 불렀어요. 5장 27절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요한복음에서 쓰인 인자의 의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두 번째로 하나님께 파송받았다는 피파송의식이 특심으로 강한 자, 세 번째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임까지 당할 수 있는 고난감수자, 마지막 네 번째 하나님 뜻을 이루다가 죽임을 당했다 마침내 높이 들릴 자, 이것이 인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자,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된 의식이 강한 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다가 고난과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복종할 수 있는 절대 복종자, 마지막으로 고난과 심판과 죽임을 당했지만 마침내 높이 들려서 만민을 자기한테로 이끌어들일 자, 이것이 요한복음 12장 32-33절입니다. ‘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한복음 3장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이런 예수님의 독특한 자기 칭호가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나왔어요.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지상의 모든 성도와 함께 짐승나라와 싸워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는 사람, 이것이 인자에요. 이것이 다니엘서 7장 13절부터 7장 마지막에 나와요. 예수님은 다니엘서적 인자를 좀 더 고난을 많이 당하는 인자, 하나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수위까지 가는 고난감수자, 이런 개념을 당신이 덧붙였어요. 원래 다니엘서 7장보다 덧붙인 거예요. 5장 27절 보세요. 이런 네 가지 점의 인자,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요. 이렇게 말한다고 유대인들이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예수님은 진실을 말할수록 죽음을 초래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파송 받았다는 강한 피파송의식을 말할수록 더욱 유대인들을 격분시킵니다. 자기에 관한 진실을 에누리 없이 말할수록 더 죽음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은 자기의 인자됨을 말하면 할수록 자기를 위태롭게 한 거죠. 잘 보세요. 그러면 예수님 죽음의 궁극적 책임은 누구한테 있는 겁니까? 이 죄악된 세상에 와서, 특권적 종교의식으로 가득 찬 유대인 공동체에 와서,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가진 인류에게 와서 바르게 하나님을 전하려다가 죽었으니까 결국 예수님을 누가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예요? 결국 유대인보다 더 먼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게 누구에요? 거짓과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가 가득 찬 참 하나님 이미지를 주신 분이 누구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인 거 아닙니까? 예수님의 죽음, 하나님께 감동 받은 그 마음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거 아니에요? 예수님을 유대인과 바리새인과 빌라도가 죽였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 당한 소품들이에요. 사실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무한히 착하게 하면 이 땅에서 우리가 고난을 받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무한히 순결하게 하면 이 더러운 세상과 갈등을 빚게 돼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덜 순결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냥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본회퍼처럼 너무 깨끗한 난초처럼 백합처럼 때 묻지 않은 영성을 가지고 살면 히틀러 나치와 결승전에서 만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선과 악의 싸움의 예선전에 참여했어요. 선과 악의 싸움의 예선전이 아니라 quarters final 과 semi final과 final에 가면 우리의 흉악한 죄와, 나치의 히틀러 같은 독재자 같은 죄와 맞닥뜨리게 돼 있어요. 결승전에 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주면 우리 바깥에 있는 적도 그 참된 진리를 정조준 하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도 그 참된 진리를 정조준 하겠죠?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 있는 죄를 터트리고 내 안에 있는 불의를 내 안에 있는 불법을 해소시켜 주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바깥에 있는 악도 싸워야 해요. 미국에 웬델 벨 이란 사람이 있어요. 유명한 녹색 에세이 쓰면서 소설도 쓰신 분이에요. 녹색평론에 이분의 글이 많이 나와 있어요. 이분은 컴퓨터를 켜자마자 전원이 들어와서 컴퓨터가 열을 받자마자, 아 오늘 내가 애팔래치아 산의 석탄으로 만든 전기를 소모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건 굉장히 치열한 싸움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는 컴퓨터로 글을 쓰진 않아요. 자기가 원고를 쓰면 누군가가 컴퓨터로 써주겠죠? 그러나 본인자신은 컴퓨터로 글을 쓰지 않는답니다. 왜? 애팔래치아 산에서 캐는 석탄을 생각하면서 내가 전력을 낭비하는구나,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비난을 하다 보면 우리 안에 있는 이명박적 자아, 이명박적 요소에 대한 비난을 하고 있는 셈이 돼요. 이 말은 약간 사기와 협작을 좀 버무릴지라도 금방 나에게 이익이 되면 언제든지 그렇게 할 내 내면이 있어요. 악으로 기울어진 내 마음, 이것이 바로 MB 같은 사람이에요. MB는 기회를 얻어 크게 사고를 친 사람이고, 우리는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할 뿐이고 사고 칠만한 자리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린 상대적으로 선해 보이지만 결국 모든 신문에 난 악인들의 죄는 내 안에 이미 침투해 있고, 내 안에 바이러스의 형태로 미생물의 형태로 내 안에 와 있다는 말이에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MB라든지 요즘 감옥에 가는 사람들 죄는 대부분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죄들을 지어도 친구끼리 후배끼리 술을 사주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죄, 이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죄가 해결돼야만 영생이 되는 거거든요. 죄는 뭘까요? 죄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포기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포기, 순종거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괄호 안에 다른 사람의 이익,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 하나님의 계명을 포기했다는 말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포기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 내가 내 인생을 고귀하게 사는 생각도 포기하는 거예요. 김회권 너는 네 인생을 고귀하게 살아야 한다, 너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여야 한다, 이런 고귀한 사명을 주셨어요. 그런데 내가 죄를 짓는 순간 내가 고귀하게 살 수 있는 사명을 포기한 거예요. 결국 죄를 지으면 1차적 피해가 나한테 오는 거예요. 죄를 짓자마자 내 존엄성의 파괴가 일어나고 하나님 형상이 흐려져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내 존엄성이 파괴와 형상이 흐려지면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 결과를 가져와요. 영생은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 함께 부족함이 없는 지속가능한 삶, 모둠살이, 공동체생활, social life를 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순종상태, 진리에 대한 자유로운 순종, 이것이 바로 영생이에요. 진리가 내 마음에 자유롭게 순종될 때 영생이 가능한 거래도요. 성경을 많이 읽으면 무슨 상태가 돼요? 너희가 성경을 읽는구나,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다? 맞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어떻게 돼요?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맞습니다. 제가 성경을 연구해보니까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내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돼요. 성경 말씀대로 살면 그렇게 돼요. 성경을 읽기 전, 내가 삼국지와 세익스피어를 읽을 때는 나에게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에요. 성경만이 나의 죄성을 부단히 지적을 해요. 성경만이 나의 자기중심성을 제동을 걸어요. 내가 불경이나 다른 책을 읽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숨결이 고취된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됐기 때문에, 모든 성경은 의로 교육하고 바르게 하고 경계하고 경책하고 교훈하고 책망하면서, 교훈 책망 의롭게 함 바르게 함, 이런 기본적인 내 품성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어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내가 영생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영생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불렀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겁니다.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파송 받은 하나님의 인자임을 증명해줄 세 사람이 있다, 첫째 세례요한이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가 직접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건 세례요한도 들었고 제자들도 들었다, 셋째 내가 하는 사역자체다, 내가 병자를 고치고 문둥병자를 고치고 내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는 것, 이건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요, 생명의 통치 아니냐?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사역을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파송된 자라고 말하는 것, 내가 인자라고 말하는 것, 내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말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파송 받은 자임을 입증하는 것, 내가 다니는 직장 선배가 김회권은 하나님 자녀라고 증명하는 것, 또 신비한 경험까지 덧붙여진 것, 이런 삼중적인 증언을 보고도 믿지 못합니다. 37절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괄호하고, 나는 들었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1장 11절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5장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겁니다. 오늘 39절을 해명하면 오늘 메시지는 끝난 겁니다. 여러분 성경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해요?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주로 어디를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예언한 게 몇 개에요? 성탄절날 주로 듣는 말씀이 뭐에요? 미가서 5장 2절, 마태복음 1장 11절, 이사야 7장 14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미가서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이건 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쓰였어요. 이런 정도만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거라고 봤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수준이 아니에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한 1분간만 생각해보세요. 이게 무슨 말인지, 이 말씀을 이해하면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거예요. 너무 중요한 말이에요. 성경에서 예수란 말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예수아에요. 예수아는 여호수아 발음의 아람어식 발음이에요. 예수아 세르베이신이란 뜻이에요. 예수님 이름을 순우리말로 말하면 구원동이 또는 해방동이, 이런 식으로 부를 수 있어요. 그런데 성경이 나에 대해서 증언한다는 말 뜻, 예수님은 독생자죠? 독생자는 완전한 순종의 화신, 성경은 완전하게 순종하는 길, 즉 영생에 대해서 끊임없이 증거한다는 말이에요. 성경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영원히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증거하기 때문에 영생의 화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완전한 순종의 화신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래도요. 성경이 예수님에 관한 말이란 말, 성경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영생을 누릴 것인가를 증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신명기 6장 4-5절 쉐마 이스라엘 엘로힘 에하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이야기가 성경의 핵심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 레위기 19장 18절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성경의 두 계명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인데, 이 두 계명이 성경의 압축이에요. 이 두 계명을 온전히 구현하신 분, 이 두 계명을 완전히 성육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완전히 구약성경의 두 계명을 성취하신 분이에요. 예수님이 구약에서 말한 온전한 생명의 길을 다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공동체인 이스라엘이 하나님 뜻에 완전히 순종한 상태를 연구하면서 끊임없이 권면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구약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온전히 성취하도록 해주는 많은 구절과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요.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상적으로 온전히 성취하실 상태에 관한 이야기에요. 온전히 성취하신 분에 관한 이야기니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란 뜻이에요. 그런 뜻이에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성경을 읽던 그 마음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누구한테 가야하죠?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던 사람들은 이제 누구한테 가야해요? 그 성경을 온전히 구현하는 텍스트, 그래서 성경 본문보다 더 중요한 텍스트는 설교자입니다. 설교자가 본문을 구현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오늘 설교자가 성경본문보다 더 중요한 본문이에요. 어찌보면요.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가야 해요. 영생이라는 것이 특별한 나의 인격과 품성과 상관없이 받는 선물이 아닙니다. 내 인격과 품성이 예수님처럼 변하기 위하여, 이런 뜻입니다. 내 인격과 품성이 예수님처럼 변하여 영원히 지속가능한 공동체생활에 적합한 존재로 바뀌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가란 말이에요. 옛날에는 성경을 읽었는데, 지금 그런 말이에요.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너무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이 너무나 바리새인 못지않게 특권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타종교를 너무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 대한 이해가 약해서 타 종파를 미워하고, 타종교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교인들끼리 뭉치는 폐쇄적인 고립된 마음만 강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 마음이 없습니다. 이동원 목사님 손봉호 장로님 이런 분들이 한기총 해체운동을 벌였더니 그 한기총이란 집단이 이동원 목사님 이단 심사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우리 이재철 목사 같은 사람을, 깨끗하게 교회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접촉해서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속한 통합 측 교단이란 집단이, 저는 목사들이 뭉치면 거의 위험한 폭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한 명일 때가 제일 거룩합니다. 예비군이 한 명 있을 때 거룩하고 예비군이 뭉쳐 있으면 아주 폭력집단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비군하면 벌써 아주 인간 말종들이라고 봅니다. 왜? 예비군은 무슨 짓이든 하거든요. 물론 이때 우리 심사 속에 있는 예비군이 그렇고 실제로 예비군이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 군인은 폭력성으로 단련된 인간이거든요. 목회자들은 목회자 A가 10명이 모이면 10배 더 거룩해져야 하는데, 그런데 실제로는 10분의 1로 거룩해집니다. 그래서 목회자들 모이면 개고기 먹으러 가고, 맛있는 음식 먹으러 가고 한 마디로 듣기가 힘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생물학적인 DNA, 1미터 58센티미터 정도의 골상학적인 모습을 했던, 팔레스타인 평균 농부의 얼굴을 가진 그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농부들의 골상을 연구해보면 158cm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오늘날 158cm는 완전히 루저입니다. 158cm가 세종대왕 때 우리 한국 사람들 키하고 똑같습니다. 세종대왕 때 군인들 키가 158cm입니다. 그리고 지금 160cm보다 적기 때문에 너무 적은 겁니다. 팔레스타인 농부니까 얼굴 자체가 결코 흠모할만한 얼굴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도 사랑스럽지만, 지금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은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철두철미하게 구현한 그분을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그럼 이때 사랑한다는 말은 모방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 모방한다, 영향을 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모방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향을 받습니다. 제가 사랑하면 그분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분을 존경하게 되고 그분의 요구를 헤아리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의 요구를 헤아리게 되고 존중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존중함이 있고 거기에 승복함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나의 자발적 복종이 있어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요구를 내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즉 예수님을 모방하겠고, 예수님을 추종하겠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처럼 되면 어떻게 돼요? 영생이 가능한 거죠. 마무리 짓습니다. 영생은 원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읽으면 없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어떻게 돼요? 칼과 창이 서로 치는 전쟁연습을 하면 열국에 올라가서, 야훼의 산에 올라가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이사야 2장 3절입니다. 살상용 무기를 가져갔던 사람이 생산용 무기로 전환하고, 약탈과 정복에 의존한 경제활동이 내 육체로 땀을 흘려 노동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웃 사랑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이웃이 불편하지 않는 법을 만들어야합니다. 우리 이웃을 못 살게 하는 법을 만들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거예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 이 땅의 육체노동자들을 사정없이 못 살게 굴면서 그들을 사랑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땅의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들에게 주택을 공급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 모두는 주택보유권은 공기로 숨을 쉬는 공기흡입권과 똑같아야 한다고 봅니다. 주택에 살 권리, 이건 공기를 숨 쉴 권리와 똑같은 거예요. 대한민국의 공기를 숨 쉬잖아요. 대한민국 공기에 세금 안 내고 숨 쉬거든요. 대한민국의 공기를 숨 쉬는 공기 흡입권과 주거에 안정적으로 살 권리, 헌법을 저는 이렇게 고쳐야 한다고 봅니다. 합당한 주거에 살 권리가 있다, 이렇게 돼야 한다고 봅니다. 헌법을 이렇게 고치면 토지투기는 불가능합니다. 주택은 소유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일부가 됩니다. 이렇게 법을 바꾸는 것이 이웃 사랑에 가장 좋은 겁니다. 형제자매들은 주택문제 때문에 결혼을 못하지 않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납니다. 인구가 늘어나면 국력이 늘어납니다. 국력이 늘어나면, 우리나라 인구가 7- 8천만 되면 FTA 하지 않고도 내수경제만으로도 대기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대기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굳이 있어야 한다면 7-8천만이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주택보유도 못하게 만들고, 대범이 송수 창기 이런 사람들 결혼 앞으로 못합니다. 왜? 돈을 어떻게 1억 얼마를 구해요. 물론 특정한 인물을 예를 든 겁니다. 여기 와 있기 때문에, 덕영이도 똑같고요. 그런 이유가 이분들을 이렇게 주택을 보유하지 못하게 하고 결혼을 못하게 만들어놓고 사랑할 수 없으니까, 제가 참다운 사랑을 하려면 그분들의 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주택보유권을 헌법적 요강 안에 있도록 입법 활동을 하는 겁니다. 제가 10년째 하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세상이 안 바뀌네요. 전 올해도 또 할 겁니다. 저는 주택보유권을 헌법의 행복추구권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봅니다. 주택은 경제가 아니라 숨 쉬는 공기와 같은 겁니다. 이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천부인권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으로 사랑해야지, 이웃 사랑이 무슨 초콜릿을 사주고 이런 것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법적인 제도적 개선과 혁신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이웃 사랑은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우리와 같이 동등하게 숨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올바른 법이 들어올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이웃 사랑이 되는 거죠. 물론 개인적으로 이웃 사랑을 하는 것은 돈이 모자랄 때 돈도 빌려주고 시간도 줘야하고 그것도 이웃 사랑 맞죠?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법적인 문제 제도적 문제 바른 정치의 문제이고, 그래서 이웃 사랑의 가장 좋은 방법은 바른 정치가 들어오도록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이웃 사랑입니다. 20대가 투표율을 80%까지 끌어올려야 합니다. 100%까지 끌어 올리면 피 흘리지 않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납니다. 우리를 상쾌하게 만드는 이런 멋진 법들이 대한민국에 들어서서 대한민국이 아름다운 나라가 돼야 대한민국에 관광객이 옵니다. 아름다운 나라가 되면 대한민국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러 대한민국 사람들이 세계만민에게 우러름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 흠모함을 받는 것, 이것이 대한민국이 진짜 멋진 나라가 되는 거죠. 저는 이런 것이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이렇게 하면 죽었을 때, 우리가 죽고 나면 부활하여 또 다시 육신을 입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온전한 의미의 영생입니다. 온전한 의미의 영생은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이렇게 살다가 이 삶을 완성하기 위하여 온전케 됨, 공동체생활을 다시 한 번 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생명의 부활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다운 영생입니다. 여러분, 이런 영생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런 영생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 감화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오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파송 받은 인자임을 인정하고 영접하여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영생을 누리시는 형제자매들이 되기 바라고, 저는 이 영생의 확신으로 죽게 됩니다. 저 죽습니다. 그런데 저는 희망이 있습니다. 죽으면 생명의 부활로 다시 한 번 우리 하나님을 영원히 찬미하면서 살 수 있는 희망이 저는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이런 영생의 부활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숙달된 사람이 되게 해주시고 정통한 사람 되게 해주셔서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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