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
수난주간의 마지막 일정은 금요일 새벽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사건입니다. 운명하신 그 사건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 사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성자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리는 사건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자가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순종을 바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수난주간은 우리의 생명가치를 감소시키는 주간입니다. 우리의 생명가치는 25절의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행동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미워하는 것을 일생동안 누적시키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는 사건으로 나중에 평가를 받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는 사건은 몇 초 안에 일어나는 사건인데 우리 일생 전체를 나중에 요약할 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졌다 말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은 수년동안 계속된 삶이지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졌다고 요약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진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우리 일생전체를 요약할 때도 결국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졌다고 말하거든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오해받으면 안 되는 구절인데, 엔테 코스모 투토, 이 세상 안에서, 호이 미손텐 푸스켄 아우토, 겁주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늘 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 그다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 호 필론테스 시킨 아우토 아플르 에이 아우텐, 여기서 필로라는 말을 썼죠? 필레오라는 말도 집착하다는 말입니다. 아가파오라는 말과 다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마지막에 물었을 때 아가파오인데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두 번은 필레오로 물었습니다. 집착적으로 사랑하느냐고 이렇게 물었어요. 요한복음 21장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두 번 물을 때는 네가 집착적으로, 혈과 육으로 사랑하느냐고 할 때 필레오입니다. 내가 내 욕망을 사랑합니다. 나의 탐욕을 사랑해요. 그런데 탐욕을 사랑하면 내가 비인간화 되고 진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죠. 내가 뇌물을 사랑해요. 뇌물을 사랑하면 뇌물 받고 감옥 가죠? 내가 사실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열정이 솟구칠 때 필레오라고 해요. 집착적 사랑, 나에게 유익을 가져오지 않는 사랑이죠. 자기 목숨을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결국 자기에게 해를 끼칠 방식으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잃어버립니다. 너무 맞는 말이죠.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 필레오, 호 필러 텐 프쉬켄 아우토, 자기 목숨을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실상 자기 목숨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 원래 집착적으로 사랑한다는 그 말 안에는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욕망까지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고 할 때는 내게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욕망들을 거절한다는 말이 있는 거예요. 말을 비비꼬아서 말 되게 만들려고 하는 거 아니냐? 그런 거 아닙니다. 원래 뜻을 풀면 그런 거예요. 김회권 목사님 어쨌든 성경말씀을 그럴듯하게 들리게 하기 위해 비비꼬는 사람 아니냐?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알기 때문에 오해를 받는데 헬라어에 보면 그렇게 돼 있어요.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 미쓰오 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 엔테 코스모 투토라는 말이 없으면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오해를 받을 수 있어요. 자아 말살적인 행위, 자기의 개성을 말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 이 세상이라는 수식하는 말이 중요한데 어차피 이 세상은 영생을 추구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입니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근교에서 내가 영생을 하면 뭐해요? 후쿠시마 원자피폭 지역에서 내가 영생을 받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고역이죠. 후쿠시마 같은 핵진이 날아다니는 세상에서는 내가 영속적이지 않는 삶을 사는 게 좋은 거죠. 다시 말해서 후쿠시마 체르노빌과 같은 핵진이 날아다니는 세상에서는 자기 목숨을 상대화시키고 자기의 부당한 욕망, 부풀려진 자기의 과잉 생명력을 미워하는 자, 그 사람이 진짜 영생을 산단 말이에요. 그런 삶을 누적시킬 때 마지막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거예요. 사순절 고난주간은 밀알이 떨어져서 죽기로 결단하는 날이에요. 그런데 우리 목숨이 한 번 밖에 없는데, 우리 예수님은 그 죽는 행위를 지금 강렬하게 하루 안에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겪는 죽음의 공포는 하루 안에 감수하는 것이고 우리는 쭉 길게 늘어뜨려서 경험하는 거죠.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27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제가 볼 때 80세된 노인은 죽음의 공포를 이렇게 맞이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공자님 석가모니 이런 사람들은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이런 격렬한 삶의 집착을 보이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30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강한 집착을 보였어요. 본회퍼가 39세에 플로선 브루크 감옥에서 처형받기 전 부킹파트에서 살려고 할 때 애를 엄청 썼거든요. 너무 살고 싶어서,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자기 모습, 자기를 응시했거든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죽음의 공포와 맞대결하는 것이 사순절의 가장 원형질 경험입니다. 사순절 또는 고난주간의 가장 원형질 경험은 자신의 생명가치를 내려놓아야 하는 결단, 내가 이번에 분명히 동작구 국회의원 될 것이란 확신이 드는데, 여론조사하면 80%가 되는데, 내가 분명히 되어 빛날 수 있는데 펜을 잡고 출마하지 않는 엄청난 희생, 이런 것들이 생명가치를 말소하고 희생시키는 것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자기 생명가치를 포기하는 그 사람이 영생토록 자기 목숨을 보존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구조가 잘못돼서 그래요. 31절 ‘이 세상에 대한 심판’ 이 세상은 심판대상이에요. 왜?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왜 세상이 심판 대상인지는 요한복음 1장부터 나왔죠?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 임금 때문에 예수님을 묵살했다,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은 묵살했다,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 임금이 보여준 길 때문에 예수님은 왕으로 왔지만 알아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폐위돼야 할 임금이 다스리고 있는 겁니다. 내가 조선총독부 일제의 지배 아래서 자기 목숨을 집착적으로 사랑하면 윤치호 삶을 살게 되고 이완용 같은 삶을 살게 되고, 일본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조선총독부의 폭압적인 삶이 있는 체제 안, 세상 임금이 다스리는 체제 안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이 세상을 미워하면 독립운동가가 되고 만주 봉천에서 가난을 감수하고,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처럼 장지락처럼 27세의 꽃다운 청춘을 바친 사람들은 세상 임금이 쫓겨날 때 드디어 영생을 누린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자의 마음을 지배하는 악한 자 사단이 통치권을 가진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사랑하고 자기 목숨을 집착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그런 나쁜 가치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렇다는 말이에요. 원리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원리적으로 이해가 되죠? 윤치호는 1883년부터 영어일기를 60년 동안 썼다가 1945년 해방되는 그날 자살인지 타살인지 어쨌든 죽었습니다. 8월 15일에 죽었습니다. 온 국민 2천만 동포가 파득파득 춤을 추는 해방의 그때, 윤치호가 죽었어요. 그런 뜻이에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구조가 집착적인 생명을 유지하면 할수록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등을 지게 돼요. 조선총독부 일제 만주지배적인 악의 질서에서 안에서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게 영원히 보존될 만한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한 알의 썩는 밀알은 죽음 자체의 무조건적 미화가 아닙니다. 죽는 걸 무조건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죽으면 안 돼요. 그런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체르노빌 후쿠시마 같은 근원적 모순에 빠져 있는, 즉 영속될 수 없는 세계 한복판에서는, 영속되지 못하는 죄와 모순이 가득 찬 세상에서는 떨어져 죽어야만 영생을 누릴 수 있어요. 이 세계에 대해서 죽음을 선언해야 해요. 그것이 사순절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원리에요. 사순절에 깨달아야 할 원리, 로마제국의 압제체제 안나스와 가야바의 압제체제와 지금 우리나라의 제도 권력은 다를 게 없어요. 도덕적으로 더 깨어있지 않아요. 거의 같은 수준이에요. 안나스와 가야바의 구원을 빌미 삼는 인간의 양심지배, 똑같아요. 안나스와 가야바가 도처에 있고 바리새인이 도처에 있는 거예요. 서기관이 도처에 있어요. 서기관 바리새인 누구도 민중에게 예수님이 흡입해 빨아 들였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제도적 권력이 완전히 기층민중의 삶을 등지는 때, 바로 세상임금이 지배하는 때에요. 이런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집착적으로 유지하면 무엇이 될까요? 예수님 당시에 지식인들이 취할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었어요? 똑똑한 사람은 열심당원처럼 폭력집단에 들어가거나 헤롯체제의 왕궁관리가 되거나 세리가 되었어요. 이거 밖에 없는 거예요. 부자로 살았다는 말은 이렇게 산 거예요. 그렇게 안 살면 목수가 되거나 가파치가 되거나 고기를 잡는 어부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베드로 같은 분은 매우 똑똑했지만 고기를 잡은 분이에요. 베드로 요한은 굉장히 똑똑했지만 물고기를 잡은 거예요. 기분이 너무 잡쳐서, 왜냐하면 이 세 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헤롯국세청 조달청도 못 들어가요. 세리도 못해요. 헤롯 체제 밑에 들어가서 왕궁수비대장도 안 돼요. 로마황제의 초상이 찍힌 데나리온 가지고 훈제업을 하면서 로마에 고기를 갖다 파는 무역업도 못해요. 화폐 자체에 로마 황제의 초상화가 찍혀 있기 때문에 그 화폐가 유통되는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직업이 없는 거예요. minimalist life 최소주의자로 살아가면서 물고기 잡아서 생계를 유지해 사는 거예요. 그렇게 가난을 감수하는 거예요.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말은 이런 특수한 맥락에서 맞는 말이에요. 사순절 고난 절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원리는 어떤 매직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과 양심에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데요. 한 번 보십시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 원리가 바로 십자가의 원리이고, 기독교의 원리이고, 사순절의 원리라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리적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한 알의 썩는 밀알을 가지고요. 이 원리를 수긍하는 것이 기독교에요. 이 멋진 메타포 비유를 그저 목가적으로 이해하고 삶을 살지 않으면 기독교의 본질에 닿지 못하는 거예요. 얼마나 좋아요? 예수님은 구약을 모르는 그리스 사람들한테 얼마나 쉽게 설명해줬어요.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내가 말하는 기독교, 내가 말하는 구원이다, 너희가 알고자 하는 구원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기독교를 한알의 밀알로써 정통을 파헤쳐버린 것, 이것이 기독교라고요. 땅에 떨어져 죽는다,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어서 높은 준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 내가 공작과 백작으로 살 수 있는데 서민으로 떨어지는 것, 이태석 신부님이 인제대를 나와 의사인데 그 고귀한 집안에서 의사로 살 수 있는 분이 떨어져 하강하는 것, 한경직 목사님 김선택 목사님 대부분 위대한 분들이 떨어진 거예요. 자발적 낙하를 한 거예요. 자발적 낙하를 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게 기독교에요. 자발적으로 떨어진 밀알들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이에요. 기독교는 간단하고 쉬운 거예요. 구약 몰라도 모세오경 몰라도 이사야 몰라도 이것만 가지고 다 설명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리스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했다는 말은 우리 예수님이 아주 민첩하시고 아주 기민하시고 너무나 멋진 분이에요. 그리스 사람에게, 너 이사야 읽어봤어? 모세 읽어봤어? 이렇게 하지 않고 바로 12장 24절과 같은 기가 막힌 말씀을 해주신 거예요.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은 이 세상을 코스모스 조화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리스 사람들의 우주관은 세계의 영원항존설입니다. CC이론이라고 말합니다. continues cosmos theory라고 해요. 그리스는 이 세계가 매우 solid 한 structure를 갖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히브리인들 성경은 이 세계의 견고한 구조를 믿지 않고 이 세계는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고 이 세계는 전복돼 있고 이 세계는 뒤틀려져 있고 이 세계는 영속성을 갖진 못한 질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이 와서 이 세계를 뒤집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들 성경의 세계관입니다. 바이블은 밟은 사람들의 문서가 아니고 밟힌 사람들의 문서입니다. 거대한 힘을 보고 거대한 힘을 가진 세계가 안정돼 있구나, 세계가 매우 안정된 코스모스라고 느끼지 못하고, 그리스사람들이 코스모스라고 느끼는 이 세계가 완전히 악마가 지배하고 세계 꼭대기에 악마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전복해야 하고, 이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권력자체, 세상 임금이 폐위돼야 할 악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 사상을 이어 받은 분이 우리 예수님인 거예요. 여러분, 대한민국을 뒤집어야 할 사회라고 믿는 사람들은 민중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이대로 괜찮다고 믿는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독자, 동아일보의 독자, 교수들 대부분, 이 세상을 괜찮다는 사람들은 애절한 마음은 있지만 세상을 뒤집을 만한 열의는 안 생겨요. 우리가 혜택을 보고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이 세상 바깥에서 아무리 일해도 이 세계가 개선의 여지가 없고 인정의 샘이 말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계가 뒤집어지길 바라기 때문에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는 말을 할 때 굉장한 의미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을 헬라적 안정감, 코스모스적 조화의 실체로서 세상을 보지 않고 그 세상 임금이 압제적 지배를 일삼고 있다고 본 거예요. 세상 임금을 쫓아내는 방법은 무엇이냐? 인자가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이 사태야말로 세상 임금을 폐위시키는 방법이다, 이건 너무 역설이에요. 예수님이 세상 임금을 쫓아내려고 세상임금의 왕위 보좌로 갔습니다. 세상 임금이 어둠의 실체를 드러내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아르콘, 지배자가 폐위될 것을 맹렬하게 환히 밝은 빛 가운데 드러내신 분은 땅에서 들린 인자입니다. 이 본문은 어려워요.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이 세상임금이 쫓겨난다는 말뜻이 무엇이냐? 이 세상에 심판 당함으로써 세상임금을 쫓아낸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이제 세상 임금에게 붙잡혀서 심판을 당할 거예요. 심판을 당하는 그 십자가의 치욕적인 들리는 경험, 이 들리는 경험이 어떻게 세상 임금을 폐위시키는 사건이 되느냐? 왜 헬라인들에 대한 대답이 되는가 보세요. 헬라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세상 만민이 찾아왔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못 만납니다. 못 만나면서 하는 대답이 두 가지입니다. 24절과 32절입니다. 내가 그리스 사람들을 못 만나지만 내가 세계 만민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내가 죽어야만 그리스사람들이 혜택 받는다, 그리스사람들이 내게 와서 구원을 갈구하는데 그리스 사람들이 언제 구원 받느냐? 내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 사람들은 내가 열매를 맺는 그 단계에서 구원 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사도바울이 나를 대신해서 그리스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 사람들은 구원받는다, 대답을 그렇게 한 거예요. 두 번째 대답은 인자가 땅에서 들려야 한다, 들린다는 말은 첫째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못이 박힌다, 33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는 방법으로는 돌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겁니다. 왜? 유대인들은 돌로 쳐 죽었지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어요. 이 말은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죽음, 이렇게 말하면 다 아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야 한다는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다 아는 말입니다. 왜? 예루살렘 일대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말은 들려서 사형당하는 그 익숙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한테는, 로마제국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겠구나, 즉 이 세상의 아르콘 이 세상의 지배자가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형집행자가 되겠구나, 라고 암시를 줍니다. 33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 말은 죽음을 무기로 세계의 악을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악의 최첨단 왕국의 패권자는 죽음입니다. 우리를 죽여 버린다고 하며 지배합니다. 우리 양심도 죽음으로 다스리고 우리가 살려고 하는 이 모든 구차한 것을 죽음으로 지배합니다. 그런데 죽어버리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어떤 악도 지배를 못합니다. 히틀러가 아무리 100도가 넘는 인두로 나를 지져도 내가 죽어버리면 히틀러는 나의 입의 어떠한 말도 얻어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운동권 때 잡혀가서 매를 엄청 맞는데 죽어버리면 이 모든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그때 죽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동베를린 사건 때 강제로 자백을 받다가 그냥 5층 빌딩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서울 법대 교수가 너무 모욕적인 자백을 강요하는 그 말을 듣다가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왜? 죽음만이 죽여 버리겠다는 그 공포를 중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이 죽음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는 죽음의 공포를 극한으로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후퇴할까 생각했습니다. 이러면 악, 즉 이 세상 임금이 예수님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죽음의 잔을 받아들이겠다고 결단하고 십자가에 매달리겠다고 작정하고 나자마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세상 임금을 폐위시켰습니다. 죽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지배하거나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어집니다. 즉 이 세상에서 죽음의 세력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하는 이 세상의 주권자는 이제 폐위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패권자가 휘두르는 죽음의 무기, 죽음의 무서운 공포를 감수하는 쪽으로 결단하는 것, 죽음의 잔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난하면 가장 사회적 죽음을 경험합니다. 가난하면 친인척 대소사에 나가지 못합니다. 동문명부에서 다 잘라버립니다. 제가 옛날에 캠퍼스 ministry를 할 때 우리 동문들은 저한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드디어 엄청 높은 숭실대 교목실장이 되니까 계속 뭔가 노리면서 하루가 멀게 열 번씩 문자를 보냅니다. 돈 보내달라고, 어떤 놈들은, 회권아 30만원만 보내주라, 비봉축제한다, 이 미친놈아 내가 왜 비봉축제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동기들이기 때문에 보내줄까 생각하다가 이놈들이 술 먹을 것을 생각해서 안 보내줬습니다. 보내려고 하다가 끝까지 안 보냈습니다. 제가 친인척 대소사도 못 나가고 결혼식도 안 가고 일체 아무 것도 못했던 12년 동안 간사생활을 할 때는 동창회든 누구든 아무도 찾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제가 엄청 높은 대교목실장이 되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저를 찾는데, 결국 죽는다는 말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가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것만 감수하면 가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음을 감수한다는 말은 이 세상 임금, 조선총독부적 질서 안에서 가난의 감수는 독립된 조국에서의 영생을 보장한다는 역설적인 반전을 믿고 내가 죽음을 감수하고 나면 조선총독부가 주는 무시무시한 인두질을 받아들이기로 하면 일본천황이 더 이상 무서워지지 않는 거예요. 9개의 못으로 된 발자국으로 걸어간 주기철 목사님은 일본천황이 무섭지 않았어요. 일본천황이 안 무서웠어요. 안희숙 박관준 한상동 목사, 일본천황이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왜? 죽기로 각오했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 임금을 심판했습니다. 죽음을 무기로 우리를 죽이겠다고 지배하는 사람들을 폐위시키는 방법은 죽겠다고 목을 매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 임금의 왕적 위력을 비신앙화시키는 것이고 끝장내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유지해야 할 생명보다 더 고귀한 가치, 즉 영생이 있다, 조선총독부적 질서 안에서 구차하게 유지해야 할 이 삶을 프시케라고 말합니다. 이때 목숨은 프시케입니다. 조선총독부적 모순의 질서 안에서 유지하는 삶, 생물학적 생명을 프시케라고 말하고, 영생할 때 생명은 조에라고 말합니다. 프시케를 잃고 조에를 얻는 거예요. 조에 아이오네스, 여러분 내가 영속적이지 못한, 방사능 피폭지대에 사는 내 목숨을 희생하여 영원히 하나님과 완벽한 세상에서 다시 사는 것, 방사능 피폭지대와 같은 삶, 조선총독부적 질서에서 사는 삶을 잃고 예수님과 같이 영원히 삶,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영원히 삶, 영원히 우애롭고 친절하고 사랑을 경험하는 삶,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히기로 결단하며 세상 임금을 심판했고, 또 한 번 부활하면서 예수님의 심판이 완성됐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십자가에서 장렬하게 돌아가시기만 했으면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은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죽음은 <대화 - 파이돈> 편에 엄청 나왔는데, <파이돈> 편에 100페이지가 넘는 대화록 마지막에 자기 영생을 확신합니다. 독약을 마셨는데 안 죽어요. 독약을 마신 소크라테스 노인이 왔다 갔다 하면서 간수를 부릅니다. 내가 약을 마셨는데 왜 안 죽나? 좀 있으면 죽습니다, 안 죽잖아? 아니 좀 있으면 몸이 굳어질 거예요, 하면서 서서히 몸이 굳어집니다. 죽으면서 끝까지 영생을 확신했지만 소크라테스가 영생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가장 큰 차이, 예수님과 인류 성인의 죽음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만민에게 의인의 장렬한 최후를 미학적으로 회고하게 만드는 죽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죽음이에요.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만민을 영적으로 거대한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들이듯이 헬라인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거예요. 모든 사람 괄호하고, 나를 찾아온 헬라인들을 언제 끌어들입니까? 인자가 십자가에 들린 후에, 예수님이 대답한 겁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헬라인들을 내가 언제 이끌게 되는가? 대답합니다. 내가 떨어져 죽어 썩어 열매를 맺는 그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승천하여 들리는 그날에 성령이 임하여 세계만민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을 흡인시키고 끌어들일 것입니다, 라는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들의 멋있고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회고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지금도 우리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죽었기 때문에, 즉 의지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대신 받으면서 죽었기 때문에 만민을 당신께 이끌어 오시는 끌어들이는 죽음이 됐고, 마귀를 이기는 죽음,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죽음이 됐기 때문에 승리하신 죽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을 조선총독부적 질서 안에서의 프시케, 조선총독부적 질서 안에서 누리는 없어질 생명 프시케를 조에, 영원한 생명으로 맞바꾸는 영악한 이해타산의 삶이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삶은 조선총독부적 질서 안에서 없어지고 말 프시케와 같은 육의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전환하는 하나의 영악한 이해타산적 믿음의 결단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순절은 이 세상, 방사능 피폭지대에 살았을 때 누리는 정도, 영속적이지 못하고 모순에 가득 찬, 내가 누군가를 착취해야만 드디어 안심을 하는 삶을 포기하는 겁니다. 이 세계 안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 아세요? 이번에 독일학자 하이델베르크의 미하엘 베르크라는 교수가 숭실대에 와서 특강을 했는데요. 이 세계 자체가 인간은 풀을 뜯어먹어야만 하는 존재, 다른 피조물을 계속 희생시켜야만 자기 목숨을 유지하는 것, 이것은 영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계 안에 벌써 참담한 영생이 뭔가에 대한 목마름, 뭔가에 대한 물음을 안고 있다는 거예요. 뱀은 쥐를 잡아먹어야 해요. 그래야 생태계에 평화가 와요. 생태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잡은 거예요. 호랑이가 여우를 잡아먹어야 해요. 여우는 또 뭘 잡아먹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 만일 호랑이가 순록을 잡아먹지 않고 사슴을 잡아먹지 않으면, 노천명의 시에 나오는 그런 목이 길어 슬픈 사슴이 될 수 없어요. 우리 모두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사슴, 왜적 같은 사슴이 돼버려요. 사슴이 너무 많으면요. 사슴이 너무 없기 때문에 사슴을 보면 아이고 사슴 이렇게 하지, 사슴이 우리의 모든 보리 밀 커피 다 뜯어먹어요. 이 세계가 이 평화로운 자연이 살육과 희생 강요를 담보로 유지되는 평화기 때문에 이 세계 자체가 벌써 self in danger 스스로 위험을 초래한 세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란다는 이 히브리적 세계관이 너무나 옳다는 겁니다. 에너지 차원 이 모든 것을 볼 때, 이런 강의를 이분이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엔 토 코스모투토, 이 세상에서, 호이 미스 온 프시케 아우트,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인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예수님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지금 이 땅에 많아야 해요. 예수님이 했던 것을 단순히 희생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살았으니 단순히 회고해서는 이 땅에 아무 도움이 안 돼요. 그런 예수님의 삶을 재현하는 사람이 많아야 예수님이 진짜 구원을 베푸는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회고하고 그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이 땅에 내려와서 육신을 입고 우리처럼 해달라고 하면 안 돼요.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예수님이 하듯이 내가 예수님의 확대 재생산 복제 예수가 돼서 예수처럼 살아야만 하나님 구원이 나타난 겁니다. 이것이 제가 가장 최근에 발견한 건데요. 차정식 교수가 쓴 책 <예수 스물세 가지 쟁점에 답하다> 그 책을 읽으면서 <목회와 신학> 북리뷰에 글을 썼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너무 답답했어요. 예수님이 회고적으로만 언급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늘 날 우리 시대에 답이 된다는 것은 복제예수가 그 답을 줘야만 답이 된다는 명제가 성립한대도요. 결론짓자면, 예수님이 오늘 날 우리를 위해서 밀알이 되셨습니다. 그걸 복고적으로 회고해서는 성령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지금 이 땅에 한국판 복제예수가 나와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겁니다. 그래야 감동이 파도쳐요.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를 복고적으로 회고하고 풍문을 많이 헬라어로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예수님 삶을 방불케 하는 삶이 여기에 재현돼야만, 열매라는 말은 확대재생산, 우리가 예수님 열매가 돼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매, 예수님의 확대재생산 편이 돼야만 세상 임금을 쫓아내는 거죠. 사순절은 예수님의 복제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한꺼번에 못 떨어져 죽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하루분의 정량만큼 이 세상 안에서의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프시케를 약간 가볍게 여기고 상대화시키면 됩니다. 저는 추울 때는 제 아내에게 모피를 사 입히고 싶어요. 제 아내가 막 추워서 떠는 걸 보면요. 봉실 사모님이 추워서 떠는걸 보면 모피하나를 선물해주고 싶은데, 제 아내는 특히 추위를 많이 타요. 저는 살이 많아서 춥지 않은데, 그런데 그게 비싸요. 천만 원 해요. 이걸 사주면 양목사 실족할 거예요. 그러면 가향교회가 다 없어지는 거예요. 나는 내 아내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 프시케를 풍요롭게 해줬어요. 또 내가 교통사고 당해도 안 죽으려고 큰 볼보를 사는 거예요. 5천만 원짜리, 그런데 양목사는 지금 껌이 붙으면 나가지도 못하는 마티즈를 타고 있는데, 양목사 차를 타면 완전히 생명보험을 들어야 해요. 이 차가 너무 적기 때문에 바람 불면 날아가요. 이 차 몰고 행담도 가면 안 돼요. 그런데 저는 안전하려고 볼보를 타고 다니면서 절대 안전을 누린다면 체르노빌적, 조선총독부의 체제 안에서 저의 프시케를 풍요롭게 하는 거예요. 프시케를 보존하려고 하면 조에를 잃어버려요. 그런데 내가 프시케를 미워하면 그 남는 여분에 내 에너지 레벨을 떨어뜨려서 희생과 봉사를 일삼을 수 있는 여력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겨울에도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을 빌어서 천백만원짜리 모피를 사주지 못한 남편의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추위를 타는 모든 자매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데, 우리 가향에 오면 얼마나 우리 형제자매가 옷을 소박하게 입고 오는지 모릅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주일 날 패션의 경연장입니다. 저도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머리에서 일단 비듬이 떨어지기 때문에 멋이 안 납니다. 우리 모두 다 옷이 너무 평범해도 우리끼리 있기 때문에 샬롬을 느끼는데, 우리가 만일 온누리교회에 한 번 갔다 오면 실족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엔토 코스모스 투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 프시케를 미워해야만 영생을 약속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세상의 구원의 원리를 터득한 저희들이 사순절 고난절에 정말 예수님과 동행하게 해주시고, 억지로 기억에서 파도쳐 오는 감격 말고 복제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동역자의 살갗과 피부와 눈길을 보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도와주소서. 주님 우리가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회고하고 복고하는데 시간 쏟게 하지 말게 하시고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 예수님을 만끽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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