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지난 주에 대전에 있는 계룡대 본부교회라는 교회에서 700여명의 장병들 신우회와 100여명 되는 가족들이 참석했는데 하루 부흥회를 열었더라고요. 두 번의 설교를 했는데 장병아저씨들이 아주 힘차게 찬양하면서 군대생활의 적요함을 이기는 장면을 보면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동안 연예인들이 와서 공연을 했답니다. 숭실대 채플처럼 자는 분위기가 많기 때문에, 그런데 저처럼 진지한 설교를 하는 사람을 초청했다니까 반대가 있었답니다. 또 장병아저씨들을 간부들 보는 앞에서 다 재우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가 있었다는데, 저는 그런 걸 전혀 모르고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 모인 줄 알고 눈을 당연히 뜨고 있겠거니 기대하고 갔습니다. 대부분이 눈을 뜨고 있더라고요. 마치고 나서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대부분 눈을 뜨고 있었다고 하면서, 눈만 떠도 칭찬받는 예배분위기였습니다. 아무튼 감사드리고, 처음 온 사람들이 눈을 뜨고 한 두시간 설교를 듣는데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적 신임도가 많이 쇠락한 지점에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날 기독교를 일시에 구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브랜드네임을 쓰려면 기독교 전체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를 버리려면 다른 이름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름을 쓰는 건 초기에 이단시비에 엄청 걸려듭니다. 아무리 우리가 깨끗하다하더라도, 기독교라는 이름 전체를 살리려면 우리 가향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기독교 전체의 오염 타락 정도를 수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비관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아무리 제 일생을 바쳤지만 지금 현재로 아무 것도 좋아진 게 없습니다. 저는 인생이 60대로 접어드는 만큼 이렇게 줄기차게 한시도 쉬지 않고 했지만 거의 세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우리 주변에 있는 아이들까지도 충분히 복음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 믿는 자체가 지난한 과정입니다. 저는 요한복음을 그 동안 강의하면서 제가 해석했던 가장 큰 원칙은 예수님의 말씀을 당대의 맥락에서 먼저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구원론이라고 보지 말고, 예수님 그 말을 듣는 그 사람들에게 적합한 말을 하셨다고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살 길을 제시했다고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 당대 사람들을 다 제쳐놓고 먼 후대에 예수 믿을 사람들을 위해서 본문을 했다고 믿으면 안 되는 거죠.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대에 가장 유효했다, 당대적인 적합성, 당대 청중들의 삶의 자리에 가장 적합한 말씀이었다, 그걸 제가 요한복음 해석에서 주안을 두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당대적 맥락에서 해명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걸 구원론으로 풀어버립니다. 무차별적으로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로 풀어버리기 때문에 5장 19-29절에는 예수님이 살과 피를 가진 사람처럼 안 보입니다. 그냥 구원을 말해주러 온 하늘의 메신저처럼 보이고, 살과 피를 가지고 역사의 특정한 시공간 속에 살았던 숨 가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도 전부 다 당대적 맥락에서 해명될 수 있는 말이고, 예수님 당시의 가장 중요한, 예수님 당시에 점점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는 심판이라는 말, 심판당하여 유대민족 전체가 멸절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예수님 말을 해석해보자고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도 구원론으로 보지 말고 당대의 맥락에서 풀 수 있다는 말이죠. 이때 영생이라는 말은 땅에 오랫동안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영생은 땅에 끝까지 뿌리박고 사는 것을 생각했지, 땅과 관계없는 삶은 한 번도 성경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생은 땅에 뿌리박고 평화롭게 사는 삶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입니까? 신명기 30장 시편 133편 같은 본문입니다. 시편 133편을 보시면 영생의 구약적 정의가 나옵니다. 그 당대의 맥락에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정국가를 독립시켜서 예루살렘의 권력의 본거지, 상비군과 관료조직과 왕이 있는 강력한 권력집중체가 탄생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믿었던 열심당원 바리새인들과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생존방식을 권력의 집중체인 왕조 상비군 관료조직이 아니라 우애롭게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자체, 요즘 말하면 공산적 사회주의자들의 말과 가장 비슷합니다. 국가조직 없는 이웃끼리 오순도순 사는 튼튼한 삶, 이것이야말로 땅에 가장 오랫동안 sustainment 유지가 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권력 집중체로 모이는 사회는 적의 공격을 받아서 멸망당할 수 있지만 오순도순 모여 사는 공동체,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여 부자형제가 가난한 형제를 돕는 무차별적 사랑을 주는 불멸의 삶의 원리로 사는 사람, 그게 바로 영생입니다. 구약에서 영생은 땅에 오래 뿌리박고 사는 겁니다. peaceful life in the land,입니다. 구약에서는 땅에 오래 뿌리박고 사는 게 영생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데, 이걸 없애고 우리는 지금 영생을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없애고 저 먼 혹성 행성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삶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성경에서 그렇게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6절에 보면, 새 하늘과 새 예루살렘 길이는 장 광 고가 정육면체입니다. 장 광 고가 1만2천 스타디움입니다.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2200km짜리 도시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 도시죠. 2200km 시유지가 있는 도시가 천국입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생각한 거죠.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새 하늘과 새 땅이 됐는데요. 왜 새 하늘과 새 땅이냐면 태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없다는 말은 중력이 없단 말이에요. 중력이 없기 때문에 2200km의 도시가 중력법칙을 안 받으니 유지가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영생은 시편 133편, 신명기 30장 등에 의하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생명과 사망을 준다, 생명의 길은 야훼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순종을 통해서 이웃끼리 오순도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영생의 핵심은 땅을 경작하고 땅에 사는 것이다, 이게 영생이다,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걸 한 번 더 시적으로 말한 것은 시편 133편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런 형제사랑이 돈독하여 하나님의 복을 초월적인 복을 매개시키고 유발시키는 형제자매의 사랑 헌신이 있는 그곳에 야훼께서 영생을 명하셨다, 그 삶이 영생이다, 무슨 영생이죠? 형제자매끼리 돈독하게 사랑하여 땅을 경작할 때 하나님께서 땅을 비옥하게 하는 축복을 누리는 게 영생입니다. 영생의 핵심은 초월적인 축복이 끊임없이 내림, 비를 내려주심, 눈을 내려주심, 지면에 습기가 올라오게 하심, 형제자매끼리 소출을 즐겁게 나눠먹음, 이게 바로 에덴동산에 있었던 삶이지 않습니까? 에덴동산의 삶이 영생입니다. 형제자매끼리 사는 삶이 영생입니다. 그 영생 예수님을 믿어야만, 다시 말해 당대적으로 헤롯 분봉 왕처럼 나라를 절단해서 40%의 소작료를 거둬가며 농민을 착취하는 건 영생이 아닙니다. 동족끼리 서로 착취자가 되고 비착취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고 희생당하는 자가 되는 갈가리 균열된 세상, 로마제국이 군대를 놓고 성전을 부수고 이스라엘 지방민들을 갈라놓고 친로마파와 반로마파로 갈라놓는 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헤롯 분봉왕 체제는 예수님께는 영생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체제 영생이 아닙니다. 가야바와 안나스의 성전지배체제는 영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한 영생은 하나님의 초월적 축복을 누리면서 50명씩 100명씩 잔디밭에서 떡을 나눠먹음, 오병이어의 기적이 베풀어진 자복, 병이 낫고 생산력을 회복할 수 있는 노동인구로 전가됨, 이런 모든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말한 영생은 하나님의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치료와 초월적인 은혜 내려주심의 삶으로 형제자매가 땅에서 견고하게 뿌리내리는 삶입니다. 영생은 탈출이 아니라 땅에 귀속되는 것입니다. 땅을 품고 사는 게 영생입니다. 그래서 구약적 영생의 핵심을 다시 한 번 요약합니다. 영생은 땅에 오래 살아남는 겁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이 영생입니다. 땅을 마지막까지 차지하는 그 자가 영생을 누리는 겁니다. 영생은 땅으로부터 탈출하여 이슬을 먹고 살면서 먹지 않고도 사는 피조물의 한계를 없애는 삶이 아니라 피조물에게 주신 피조물의 유한한 한계를 인정하면서 돈독하게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영생과 사회주의의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총에 영생 즉 인간의 노동이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가 없다면 인간의 노동자체만으로는 생산이 안 되거든요. 비를 인간이 못 만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노동을 완성한다, 자연스러운 은총, 자연스러운 인간의 자연적 조건에 노동을 누가 완성해요? 은총이 완성한다, 영생은 인간의 노동과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으로 구성돼 있는데, 땅에 사는 삶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말한 모든 영생은 바로 땅에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요한복음입니다. 제가 주석을 이런 방식으로 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석하는 책이 거의 없는데, 결론은 제가 잘났다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이게 구약적인 해석입니다. 마땅한 건데, 서구의 모든 학자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초탈, 땅을 탈주하고 땅을 떠나는 삶을 은연중에 전제하기 때문에 땅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주석사 대부분, 볼트만 같은 사람이 독일 사람인데 전 세계 70% 신학자들이 볼트만의 봉신들입니다. 볼트만의 봉신들이란 말은 볼트만의 전제를 믿고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가 되는 놈들입니다. 볼트만에게 종주권을 인정하는 놈들, 그런 놈들이 세계 신학계의 70%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너무 슬픈 일이 아닙니까? 볼트만은 이런 걸 전혀 몰랐습니다. 그럼 네가 볼트만 보다 낫다는 말이냐? 그런 암시는 했지만 그런 말은 아닙니다. 저는 볼트만의 책이 너무 답답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구약을 모르는 사람이 신약의 학자를 했을까? 너무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영생은 peaceful life in land,입니다. 신명기와 시편을 읽어보면 땅에 대한 고도의 몰입과 집착이 나타나고 땅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아요.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 경작하는 겁니다. 그때는 땅이 분쟁적 다툼 혁명적 정치변화의 원인이 아닙니다. 땅은 형제사랑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지금 누가 천국입니까? 땅과 돈을 가지고 형제 사랑의 통로로 쓰는 건 이미 천국 들어간 사람입니다. 영생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땅, 내가 가진 생산수단을 가지고 내가 직업적으로 벌어들이는 소득을 가지고, 숭실대교수직이 지금 제 땅입니다. 제 생산수단입니다. 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얻은 소출을 무차별로 나누는 삶이 바로 이미 영생 안에 들어간 겁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갔다는 말, 땅이 저주를 받아 땅이 효력을 잃어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는 비옥도가 완전히 상실된 땅이 됐죠? 그런데 땅이 저주 받았다는 말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너무나 충격적인 경우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기록에 보면 땅이 저주 받은 기록을 이렇게 말합니다. 땅이 하얗게 됐다고, 그다음 문명이 망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은 전 세계의 문명의 멸망에는 땅이 하얗게 됐다, 표토가 비옥토가 상실되고 더 이상 경작할 수 없는 땅이 됐다, 그리고 나서 문명이 망합니다. 수메르 문명이 바벨론한테 망할 때 정확하게 땅이 하얗게 됐다고 나와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이 망할 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올라간 아이들이 수메르 문명을 다 멸하고, 황무지에서 올라왔던 아이들이 땅을 새로 객토했습니다. 그래서 함무라비가 나옵니다. 함무라비가 수메르 문명이 땅의 표토를 유실시켜 엉망으로 만들어서 저주받아 죽는 그 순간에 바벨론 사람들이 와서 다 정복한 겁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라는 개념은 지속가능한 삶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지속가능한 삶이란 생태학적 선순환이 있는 삶입니다. 생태학적 선순환은 내가 노동하면서 노동의 결과를 가지고 형제자매를 살리는데 쓰는 이런 구조만이 생태학적 선순환이고 이게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쓰신 영생은 이것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게 영생이죠?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니까 그분들의 삶의 수준에 공감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한히 양보하고 무한히 주고 무한히 베푸는 삶, 무한히 공급하고 무한히 공급당하는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양도와 위임의 선순환,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께 모든 걸 양도하십니다. 위임하세요. 능력도 주시고 모든 걸 다 주십니다. 아들인 예수님은 이걸 받아서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독차지 하는 게 아니라 이 땅의 치료가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그 능력을 나눠주십니다. 또 하나님께 영광이 올라가게 합니다. 누가복음 7장 11-17절 보세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이때 나인성 사람들이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님이 한 모든 사역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모든 열매를 누구한테 돌렸습니까?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영생은 이겁니다. 당대적 맥락에서 갈릴리 농민들이 헤롯에게 착취당하고 성전체제에 착취당하고 로마제국에게 착취당하는 삼중적 착취구조, 지주가 소작인을 착취하면서 동료끼리 싸움을 하는 갈릴리 농민사회가 완전히 균열돼서 지옥같이 적개심이 출렁거리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마라,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면서 갇힌 자를 풀어주면서,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풀어주라는 겁니다. 왜? 너는 1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 받은 사람이니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풀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100데나리온 못 갚았다고 서로 감옥에 집어넣은 그 갈릴리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마태복음 18장입니다. 3개월 월급 못 갚았다고 감옥에 집어넣은 겁니다. 동료가 동료를 집어넣은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한 영생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빚을 갚을 수 없어서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풀어줘야 한다, 서로 얼싸안고 형제자매끼리 나눠야 한다, 옷 두벌 가진 사람은 한 벌 나눠야 한다, 빵 두덩이 가진 사람은 한 덩이 줘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영생이다, 이게 바로 신명기가 말한 영생이고 구약의 모세가 말한 영생이고, 이렇게 살면 로마제국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고, 헤롯권력지부도 들어설 필요가 없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사랑이 왕노릇 하면 로마제국은 왕노릇할 수가 없고 헤롯은 왕노릇 할 수 없다, 상호 베풂, 서로 끊임없이 나누어줌, 이것이야말로 영생이 지배하는 공동체다, 이렇게 살면 사망에서 지금 생명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살면 로마제국의 압제와 헤롯분봉왕 체제 같은 탐욕에 가득 찬 죽음의 삶에서 영생으로 옮겨버린 삶이다, 이것이 그토록 신명기가 강조하던 생명의 삶이다, 신명기 30장, 신명기 전체가 그렇게 강조하던 생명의 삶은 무엇이냐? 형제자매끼리 오순도순 땅에 살며 땅의 소출을 나누는 것이다, 땅이 없는 사람과 땅의 소출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나 스웨덴 국가정부는 서로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국가가 강제로 하는 겁니다. 그건 영생이 아닙니다. 그건 국가주의입니다. 국가가 개입할 틈도 없이 서로 시민단체 레벨에서 민중 레벨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렇게 살아버린 사람에게는 경찰도 필요 없고 사법부도 필요 없고 국세청도 필요 없는 겁니다. 왜? 형제자매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나누려는 사람에게 무슨 세금을 징수할 것이 있으며, 무슨 범죄가 있을 것이며 무슨 재판이 필요할 것이며 무슨 국가기관이 필요합니까? 국가기관을 서서히 축소해가겠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버리면 국가기관이 서서히 없어지겠죠? 그럼 법조문이 점점 줄어들겠죠? 이렇게 두껍던 법조문이 줄어들겠죠? 그 다음은 법조문이 없어지겠죠? 그리스도의 사랑만 지배하겠죠?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 영생입니다. 영생은 권력 강제기구 없는, 폭력적 위협 없는 베풂과 나눔의 무한한 영속적 지속, 이게 바로 땅을 중심으로, 지금은 생산수단, 삶의 생계수단으로부터 나오는 즉 나에게 소출을 가져다주는 모든 생산수단과 직장의 열매를 무한히 나눔, 그런데 10분의 1씩 나눔입니다. 10분의 1씩만 나눠도 영생과 방불한 삶이 나오기 때문에 십일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십일조씩만 나눠도 사회는 절대로 폭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시민이 10분의 1씩 내버리면 폭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청담동 사람들이 아이들도 10분의 1, 할아버지들도 10분의 1을 내버리면 그 일대가 영생벨트가 돼버립니다. 예수님이 말한 영생은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왜 영생을 받습니까? 당대적 맥락에서 봅시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힘써서 몰두했던 것은 신정국가의 회복입니다. 신정국가의 회복만이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존심과 신앙생활을 가능케 한다고 봤기 때문에 로마제국을 군사적으로 몰아내려고 봤죠? 로마제국과 맞서는 군사력이 필요하겠죠? 왕 같은 자가 필요하겠죠? 권력기구, 상비군이 필요하겠죠? 로마제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로마제국보다 더 큰 지옥을 경험해야만 영생을 맛볼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대안이 아니라면요. 예수님 대안은 지금 당장 성령의 감동으로 놋뱀처럼 높이 쳐들린 예수를 믿으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나누고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놋뱀처럼 들리는 삶, 희생되는 삶, 지고지순한 순종을 드리는 그 삶을 살면 지금 영생이 임한다는 거죠. 그 영생은 갈릴리 영토를 지킬 수 있어요. 갈릴리 곡창지대를 다 누리고 살 수 있는 거예요. 지금 그렇게 살면요. 이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당대적으로 매우 적합한 말 아닙니까? 이 적합한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말은 군사주의적 모험주의, 다시 말해서 전쟁주의 투쟁주의로 갔다는 말이에요. 예수님 때부터 AD 66-70년에 제1차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다음 115년에 2차 전쟁이 일어나요. 제1차 유대인반란, 66-70년. 제2차유대인반란 115년, 제3차 유대인반란 135년입니다. 135년 하드리아누스 때 완전히 유대가 초토화 돼버립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이 이교도의 땅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예루살렘이란 도시기능 자체가 없어져버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한 것은 당대적 맥락에서 가장 적합한 것입니다. 당대적 맥락에서 의미해명이 안 되고 바로 이걸 우리 구원론으로 읽어버리면, 지금 이 구원론이 너무 잘못된 구원론인데요. 지금 서구 대부분 주석서들은 요한복음에서 영생을 얻었다는 말이 어떤 사회적 경제적 함의가 있는지를 전혀 밝히지 못해요. 참으로 어리석은 주석들이에요. 어리석은 해석들이고 틀린 해석들이에요. 왜? 요한복음을 읽어서 영생을 받으면 지금 반드시 형이하학적 사회적경제적 함의가 있어야 해요. 정치적 함의,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그게 답이 돼야 해요. 그게 참 해석이에요. 그런 맥락에서 보세요.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여러분 이게 무슨 느낌이 들어요? 예수님 직업경험상 무슨 느낌이 들어요? 예수님의 생업의 분위기상 예수님은 여기서 뭘 배운 거예요? 도제, master와 도제의 관계, 아버지 master 목수로부터 목수 일을 배운 느낌이 들죠. 자기의 일상경험을 가지고 천부하나님께서 아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천부하나님이 하시는 일, 가난한 사람을 돌보시고 정의를 돌보시고 악을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그 일을 예수님도 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20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이런 주장을 했어요. 나는 하나님 아버지 친아들이다, 5장 18절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친 아버지라 한 말을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라 해서 한국의 모든 이단교주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해서 이단교주가 되고 자기 사적이익을 취하지만 나 예수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친 아들이라 말하지만 그건 절대로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복무적인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self serving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할 때는 고도의 책임감, 무제한적 책임감 감수를 의미한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이재용이 이건희 아들이죠. 삼성내부 보고에 의하면 이재용이 하는 일은 엄청 적자를 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희가 이재용이란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데, 김일성이 김정일 세울 때도 그렇게 많이 했답니다. 김정일이 실수할 때마다 김일성이 몰래 몰래 돈을 투입해서 성공한 것처럼 거짓말로 선전했답니다. 이건희와 이재용 사이에도요. 이재용이 이건희 아들이란 말은 특권을 의미합니다. 사업을 망해도 복구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란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절대복종, 하나님 아버지가 이 땅에 하실 일을 완전히 감수하고 대리하심, 복종과 대리하심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22-23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이건 어디가 생각나요? 아버지가 보낸 아들은 공경해주겠지? 마태복음 21장 34절의 포도원농부 비유에 정확하게 나온 말이죠. 아버지가 아들을 대신 보내 자기 대신 공경을 받게 하는 것, 그런 본문 기억 안나요? 나잖아요. 예수님 말씀은 맥락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 목수의 도제와 장인의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함, 둘째 지주와 지주의 소작료를 받으러 간 아들관계를 통해서 또 한 번 자기를 소개함, 즉 자기는 아버지 하나님께 직접 배워서 한다는 것, 두 번째로 자기는 아버지 하나님께 전권을 받아 파송된 아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소출 받지 못한 사람, 즉 땅의 경작을 엉망으로 하고 비옥토를 상실케 했던 게으른 농부들을 심판하러 왔다는 겁니다. 아들에게 심판의 권세를 줬습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다는 말은 헬몬산 이슬의 경험 같은 함께 사는 능력과 땅에 오랫동안 정착하는 삶의 비법을 터득했고 더 이상 심판이 되지 않습니다. 로마제국 군사적 행동과 정면충돌하지 않기 때문에 심판하지 않습니다. 로마제국의 군사적 공격의 대상에서 면제되기 때문에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 당대적 해석을 먼저 하고 나서 2차적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론적 해석이 됩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갈릴리 지주와 같습니다. 교수는 지주와 같습니다. 오늘날 목사는 지주입니다. 자기는 꾸준히 받는 월급이 있기 때문에 지주입니다. 소작료로 먹고 사는 겁니다. 교수와 고급관료 국회의원 월급이 어디서 나옵니까? 소작료입니다. 소작인이 바치는 월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주입니다. 갈릴리 지주 같은 대학교수와 지식인들이 그걸 나눠야만 이 사회 공동체가 해체되거나 파탄되지 않기 때문에 엉생, peaceful 한 삶이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이걸 나혼자 꼭 쥐고 있고 내가 소작인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풀어주지 않으면 폭발해서 로마제국 군사적 침략의 밥이 돼버립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하나님 음성을 듣고 응답하면 베드로처럼 살아납니다. 요한처럼 살아납니다. 베드로 요한은 땅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유산자계급이었습니다. 이 유산자 계급은 예수님 말을 듣고 전 재산을 예수님께 공탁해버립니다. 열두제자는 전 재산을 예수님께 바쳐버린 사람들입니다.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 괄호하고, 극단적인 순종을 바친 예언자, 인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100% 순종하는 순종의 담보자라는 뜻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저 먼 곳,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내려온 것 아닙니다. 인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이사야 55장 11절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그말, 하나님께 100% 순종하는 신적인 순종, 절대순종을 인자, 즉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는 겁니다. 인자라는 개념에는 절대 순종하기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는 자라는 뜻이 예수님이 쓰신 인자개념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기 위하여 희생을 감수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죄인들의 죄악 때문에 부조리한 고난을 받았던 그 분이 이 세상의 죄인들을 심판할 수 있는 권세를 받은 건 당연한 거죠? 5장 27절은 이런 뜻입니다. 인자, 괄호, 절대복종의 화신, 천상적 기원을 가진 절대복종의 예언자인 그 천상적 메신저인 인자가 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복종했기 때문에 심판하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의 말을 지금 당장 갈릴리 1세기 때 듣는 그 사람은 이미 생명의 부활을 맛본 사람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예수의 음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멸망당하게 됩니다. 왜? 로마제국과 군사적 충돌을 일삼게 되고 군사적 모험주의, 권력집중적인 왕조를 세워야만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필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당대적 맥락에서 먼저 해명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오늘 날 당대적 맥락에서 했던 그 말을 우리 시대 적용합니다. 제 경우를 봅시다. 대학에서 공부 많이 하고 자기 땅이 있는 지주급 소득을 누린 자들이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음성을 들으면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들, 생계를 위해서 빚진 자들을 다 풀어주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야만 이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고 시편 133편과 같은 삶이 가능한 겁니다. 오늘 제가 강조한 것은 요한복음은 철두철미하게 구약적 울림이 있는 책이므로 구약의 맥락에서 풀어야 합니다. 둘째로 요한복음이 말한 영생은 예수님 당대의 청중에게 가장 적합하고 의미가 충만한 말이었다, 세 번째로 요한복음의 영생은 땅에서 형제자매들이 오순도순 사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로 오늘 날 땅은 생산수단입니다. 자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지주급 지식인들 유산자계급들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내어 함께 사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영생은 사회경제적 함의가 풍부하고 지금 당장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준다, 마지막으로 시편 133편 읽고 마치겠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신명기 30장 15절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생명은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은 바로 땅의 형제자매들과 오순도순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주러 오셨다, 이 땅에 오순도순 사는 것, 예수가 정치의 해답이다, 예수가 정치경제학의 원조이면서 정치의 해답이고 경제의 해답이고 복지의 해답이다, 예수는 4.11총선의 해답이다, 예수는 대한민국 MB가 돌아가야 할 귀착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사는 구차한 삶의 언저리에서 나오는 적실성 적합한 말씀인데 너무나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먼 선문답처럼 읽었습니다. 우리 구원의 목적이라는 그 목적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주님,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먼 데 아무 상관성도 없는 말씀을 하신 분이 아니라 그 당대 청중에게 진짜 살길을 제시한 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구약의 깊은 울림을 신명기적 시편적 영생개념을 회복하게 도와주시고, 예수님 믿고 이 땅의 정치경제학적 사회복지학적 정의를 회복하는 데 저희 작은 실천을 드리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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