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요한복음에만 있는 단어가 표적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로 세메이온이라는 말인데 54절에 보니까, ‘두 번째 표적이니라’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 수를 세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두 번째 표적, 세 번째 표적, 네 번째 표적, 이렇게 쭉 나간다는 겁니다. 첫 번째 표적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이죠. 이 표적은 질을 바꾸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수 있는 질의 변혁자이십니다. 이번에는 무슨 표적입니까? 거리를 초월하시는 표적입니다. 가시지 않고도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신하의 아들을 낫게 하십니다. 세 번째 네 번째 표적을 보겠습니다. 세 번째 표적은 5장에 나옵니다. 5장에 보면 38년 된 병자, 식물인간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38년 된 병자니까 인간의 의술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 내에 있는 환자를 고쳤습니다. 그다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노도강풍, 다시 말해서 바다 위를 걷는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 물 위를 걷는 표적인데 표적이란 말을 하지 않고, 5장 표적, 6장 표적입니다. 9장, 날 때부터 소경된 자, 이것도 표적이죠? 11장, 나사로의 표적입니다. 노도강풍까지 하면 모두 7가지 표적이 나옵니다. 그런데 7가지 표적은 요한복음 20장 마지막에 보면,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약간 과장법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의 표적도 이것도 많았음을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7가지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영적 본질, 내가 하나님 아들임을, 내가 창조주임을, 내가 구약에 나오는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투명하게 보도록 도와주는 기적을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표적은 예수님의 정체를 계시하는 기적을 가리킵니다. 기적은 기적의 수혜자한테만 의미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한테는 도움이 안 되는, 그러나 표적은 그 표적의 수혜자도 치료되고 회복되고 구원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어떤 분인가를 투명하게 계시해주는 그런 기적과 기사입니다. 요한복음은 7가지 표적을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요한복음의 표적과 마가복음의 표적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마가복음과 공관복음에서는 놀람과 경악이 계속 나타납니다. 그에 비해서 요한복음의 표적에서는 놀람과 경악이 나타나지 않고 비교적 밋밋하게 사람들 반응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분이라고 먼저 선언했기 때문에, 연역적으로 먼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먼저 선언했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신 그분이 하는 일들을 놀라지 않고 그냥 논리적 기개로써 설명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과 같은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보지 않고,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난 사람으로 보면서 쭉 귀납적으로 놀람을 축적해갑니다. 놀라고 놀라고 일곱 번 놀라고 나서, 이 분은 그냥 슈퍼 히어로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인가 보다 라는 귀납적 추론을 가능케 합니다. 결정적 마지막 표적이 요나의 표적,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마지막 절정의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것을 보면서, 그는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렇게 로마 백부장의 입을 통하여 결론을 내게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그렇게 놀람과 경악 같은 청중의 반응이 많이 부각돼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을 때는 마태나 마가나 누가를 읽을 때보다 기적과 표적 끝에 놀라는 장면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일으키는 모든 기적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즉 내가 독생자의 영광을 행하려고 온 자이다, 그걸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2장 11절 볼까요? 최초의 표적 뒤에 표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 없고,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표적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정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데 도움이 되는 기적이다, 즉 표적은 예수님 자신의 정체를 넌지시 알리는 기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기적은 무엇입니까? 문둥병자가 낫는 표적 같은 경우는 치료의 감격을 문둥병자가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표적은 예수 안에 있는 영광을 보게 만든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표적의 목적은 요한복음 1장 14절을 확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진리를 확정시키는 것이 누적적인 7가지 표적이다, 1장 14절의 진리,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죠? 영광을 두 가지로 분석하면 뭐가 나옵니까? 어떤 사람은 영광스럽다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는 값없는 은혜와 그리고 그 값없는 은혜를 경험하고 수행하는 우리가 바른 길로 돌아섬, 진리의 길로 돌아섬, 이것이 표적입니다. 이 표적을 두 번째로 행하는데 요한복음에는 이런 표적의 수를 헤아리고 있는 저자의 의도가 드러나 있다는 겁니다. 43절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어디서 떠납니까? 사마리아에서 이틀 걸었습니다. 아마 제가 생각할 때 하루 반나절 걸려도 이틀에 걸쳐서 간 겁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이건 누가복음 4장에 나옵니다. 왜 예수님이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이건 나사렛에서 한 말이거든요.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갈릴리가 아닙니다. 갈릴리와 나사렛은 차이가 납니다. 갈릴리 호수주변을 갈릴리라고 하고 나사렛은 내륙입니다. 이스라엘 평야 쪽입니다. 가나는 갈릴리 쪽에 가깝고 범 갈릴리에 속하긴 하지만 가나는 또한 갈릴리 호반의 도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 나사렛으로 가지 않고 왜 갈릴리로 갔는가에 대한 지문, 일종의 해설이 됩니다. 44절을 괄호 안에 집어 넣어보십시오. 왜 고향으로 안 돌아갔지?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고향 나사렛으로 떠나지 아니하시고, ‘갈릴리로 가시며’ 괄호하고, 왜 안 가셨지? 한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이런 말 때문에요. 왜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는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평범에서 비범으로 초월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평범한 농민으로 어제까지는 장기와 체스를 둔 평범한 농민이었는데, 어제까지는 우물가에서 같이 파전 먹고 막걸리 마시던 평범한 동료였는데, 갑자기 초월적인 지위를 획득해서 그 마을과 도시와 성읍 나라 전체를 향해서 공적담론을 막 쏟아내는 자니까 비근성, familiarity, 비근한 분위기에서, 존경과 그런 걸 수수하던 사이가 아닌 곳에서 갑자기 권위를 획득한 담론을 펼치기 때문에, 비근한 분위기에서 초월적인 메시지를 전했을 때 환영받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던지는 공적담론은 선지자 고향 사람들의 삶의 재조정을 원하는 말이기 때문에 충격과 격동과 반발을 삽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귀에 지금 이사야 61장 1-4절이 임했습니다. 이 말은 이 말씀대로 여러분이 살아야 한다는 무한한 부담감을 줍니다. 이사야 61장 1-4절은 채무노예를 석방해야 하고, 땅 원주인에게 땅을 돌려줘야 하는 모든 사회적 형평운동, 사회적 평균작업을 진두지휘하도록 들은 사람에게 무한 책임감을 안겨줍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 귀에 응했습니다, 임했습니다는 이제 실천하지 않고는 안 되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거든요. 그 말을 하니까 나사렛 회당에 있는 일종의 지주급 주인들이 예수님 멱살을 잡고 절벽으로 끌고 갔어요. 예수님의 절벽이 지금도 가면 있습니다. 예수님 절벽이라고 있는데, 나사렛이 채석장이거든요. 나사렛에 가면 큰 절벽이 네 군데 정도 있는데, 지나가다 보면 저기가 예수님을 떨어뜨리려고 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떨어지면 죽습니다. 부엉이바위보다 훨씬 더 높은 곳입니다. 그런 절벽이 많습니다. 그래서였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로 바로 가십니다. 가버나움으로 갔는데 예수님 집이 있는데, 예수님 집이 아니라 베드로가 공탁해버린 집입니다. 베드로가 집 전체를 예수님께 바쳐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기는 집 전체를 바쳤다고 주장할 때 그게 그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8절에 보면, 집과 전토를 다 바쳤다, 장모님 아내까지 베드로의 헌신에 합류했습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이 갈릴리인들도 전부 다 유력자들입니다. 갈릴리 유력자들만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무 기층민중은 가지 않습니다. 적어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명절에 올라간 사람은 땅이 있거나 재산이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절대 못갑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대부분은 그 사회를 책임지고 있는 유산자 계급에게만 전파됐지, 노예들과 하층민들에게는 이런 설교를 들을 기회가 없었고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그런 것을 기대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신문과 언론과 문자의 문맹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듣는 모든 사람이 무차별 책임을 집니다. 기층 민중들은 아우성치고 데모하고 소리 지르는 일을 져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갈릴리에서 명절에 올라가는 사람은 극히 적은 사람들입니다. 왕의 신하급들 이런 사람들만 가는 겁니다. 여기 갈릴리 사람들은 괄호하고, 유력자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 갈릴리 유력자들이 명절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을 보고 왔습니다. 가버나움은 여전히 예수님에 관한 기대가 충천해있습니다. 그런데 왜 가나로 다시 갔는지는 모릅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헷갈리죠? 갈릴리 가나로 간 이유는 모릅니다. 아마 제가 생각할 때 갈릴리 가나에 예수님 어머니 친척이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근거지, 예수님의 가버나움이 아닌 둘째 근거지가 되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록에 기록된 사람들의 사건들의 주인공은 전부 다 뒤에 큰 사람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표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나중에 위대한 사람, 또는 상당히 표적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된 사람들만 기록됐다는 말이에요. 갈릴리 가나 혼인예식에서 물에서 포도주로 바뀐 경험들은 그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고, longness relationship, 계속 이어지는 관계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록돼 있는 것을 볼 때 이 갈릴리 가나 사람은 예수님 사역에 강력한 후원자였을 것을 암시할 수 있어요. 예수님은 왜 그러면 갔을까? 식사하러 가셨다, 공궤를 받으러 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갈릴리 가나로 가셨는가? 예수님은 가나에서 피곤을 씻고 사역을 재정비하고 무언가 도움을 받으러 가셨다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왕의 신하가 있어’ 라고 돼 있는데, 왕의 신하가 거기 산다는 뜻인지 왕의 신하가 거기 왔다는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이것도 애매모호합니다. 가버나움으로 병을 치료하러 갔다는 것인지, 가나는 헤롯 안티파스의 치하입니다. 가버나움은 헤롯 빌립의 치하입니다. 헤롯 빌립은 안티파스의 동생인데 사람이 더 부드럽고 순한 사람이고, 헤롯 안티파스는 매우 악독하고 유능한 사람입니다. 악독하고 유능한 그 사람 동네에 쉬러 가셨는데 거기에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님이 상당히 유력자들과 긴밀한 네트워크가 이뤄지고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왕의 신하나 명절에 올라간 갈릴리사람들이나 실제로 유력자들입니다. 그런 유력자들 사이에 있는 네트워킹이 작동해서 왕의 신하가 자기 아들의 병든 사연을 아뢰면서,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표적과 기사를 본다고 다 믿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표적과 기사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입장이 양가적입니다. 표적을 보고 제자들이 믿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표적의 표면적 의미에만 갇히고 표적이 예수님의 정체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즉 표적이 주는 수혜부분, 표적이 주는 은총부분, 표적이 주는 감격적이고 흥분된 부분에만 집착하고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잘 모르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표적의 표면적 의미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을 약간 책망했습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신하가 자기 아들에 대한 사랑이 참 많죠. 복음서에 보면 자기 부하를 불쌍히 여기는 백부장 이야기가 나오고요. 자기 아들을 아주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 이야기가 몇 군데 나옵니다. 자기 딸을 불쌍히 여기는 엄마의 이야기가 나오고요. 소박한 본문이지만 죽음의 시간 속에 속박돼가는 아들 때문에 아버지가 간절히 매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이번 메시지에서 묵상하면서 49절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너무나 간절한 기도입니다. 주여 내 아이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내려오소서, 내 아이가 목매달기 전에, 내 아이가 투신하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 아버지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거의 죽게 된 아들의 병세를 알고, 이건 상식적이고 아버지에게 마땅히 기대되는 정도의 책임감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감동적인 것은 오늘 날 자기 자녀가 죽게 된 것을 알아차리는 아버지가 많지 않습니다. 제가 2006년에 제 아들이 쓴 편지를 새벽에 일어나서 읽게 됐는데, 아마 검정고시 시험을 치고 느슨하게 생활하는 걸 보고 제가 뭔가 성실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하는 핍박을 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편지 내용에, 엄마 아빠가 strict 한다면서, 긴 편지를 16절지에 썼는데 그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빠 나도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이 분명히 있는데 새벽에 좀 일찍 일어나지 않고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지 않고 낮과 밤을 normal하게 지내지 않는다고 이렇게 나를 이해를 못하냐면서, I don't completely agree with you or I don't completely trust you, however I love you guys, 이렇게 마지막에 편지를 썼어요. 그걸 보면서 너무 내 마음이, 2006년인데 내 가슴이 불타는 겁니다. 아들이 죽게 된 걸 안 아버지의 마음, 이번에 이걸 보면서 이걸로 설교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도 아이들이 많이 자살하고 병들어 죽어 가는데 아버지라는 존재가 너무 아들의 고통에 대해서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런 메시지를 생각했습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한마디가 딱 가슴에 박히기 시작하는데, 이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자기 아들의 경각에 닿은 생명을 앞두고 있으면서, 거의 죽게 된 아들을 두고 있으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조바심을 내면서 어찌 할 바를 모르면서 예수님의 전문을 전하면서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고 소리치는 아버지, 이 아버지가 우리 시대에는 참 낯선 아버지입니다. 너무나 우리 아버지는 늦다, 우리 아버지들은 지금 너무 늦다, 자녀가 죽게 된 상태를 알아차리고 아우성치기에는 어디엔가 유배당해 있고, 아버지는 너무나 자녀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에게 이런 표적과 기사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만약 이렇게 소리치고 아우성치는 우리의 기도가 거리를 초월하여 응답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만나는 감격의 많은 부분은 없습니다. 기도응답의 감격이 사실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이 하나님과 나와 함께 2인 3각으로 걸어가는 동행과 여정인지 알 수가 없는 거거든요. 저는 그래서 간절한 기도, 거리를 초월한 간절한 기도, 거의 죽게 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 안타까운 중보기도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의 큰 영성이라고 보거든요. 영성은 무엇입니까? 거리를 초월하여 완전히 연대와 중보의 마음으로 가득 차서 죽게 되었기 때문에 소리치는 기도의 마음, 이것이야말로 표적을 일으키는 하나의 내적 필요조건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표적을 경험할 때 예수님에 대한 앎이 깊어가니 얼마나 좋은 겁니까? 저는 이 안타까운 마음,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파괴적인 국면,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죽음 이후에 영생을 믿는 우리지만 죽음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파괴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런 기도가 되려면 거의 죽게 된 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차올라야겠지요? 이런 기도가 나오려면요. 신하가 이러기 쉽지 않습니다. 왕의 신하가 체면이 있고 위신이 있는데 이러기 쉽지 않죠. 다시 말해 장관이 무명의 목사님한테 요청하는 똑같은 겁니다. 한 나라의 대신,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소리쳤을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또 믿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어드리는 게 너무나 예수님께는 기가 막힙니다. 예수님은 거리를 초월하실 분임을 믿고, 예수님은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내 인생을 폭포수처럼 역동적인 희락의 현장으로 바꾸실 걸 믿고, 예수님은 감겨진 내 눈을 열어주실 분임을 믿는 것, 이 간절한 믿음이야 말로 표적을 완성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얼마나 순진하고 얼마나 간결하고 얼마나 에누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정직한 기도는 삶의 절박성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 같습니다. 삶의 절박한 이슈가 있는 사람들은 모든 미사여구를 다 걷어치우고 정직한 기도 핵심을 찌르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내 아들이 죽게 됐다는 사람에게 무슨 기도가 필요합니까? 기도가 얼마나 짧습니까?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렇게 정곡을 찌르고 핵심을 찌르고, 우리가 안고 있는 위기를 이렇게 정직하게 아뢰는 기도가 나오는데요. 여러분과 제가 이런 정직한 기도, 핵심을 찌르는 기도, 예수의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기도, 그 기도는 정직한 자아대면, 정직한 현실분석에서만 나옵니다. 이런 핵심을 찌르는 기도,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기도, 표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내적인 필요를 일으키는 기도, 정직한 자기대면입니다. 문둥병자는 얼마나 정직하게 기도했어요? 깨끗케 되기를 원합니다, 혈우병 걸린 여인은 얼마나 정직하게 기도했어요? 피가 멈추어지는 것을 원합니다, 이렇게 핵심적이고 정직한 기도제목으로 예수님을 불러 세우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중보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 인생으로 가로 지르는 핵심쟁점이 없다면 예수님의 발걸음을 중단시켜서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정직한 자기 기도제목을 토로하지 못하는 건 거짓된 자아 속에 사는 거거든요. 잘못된 자아 속에 사는 거거든요. 정직한 사람은 기도가 너무 쉬운 겁니다. 정직한 사람은 기도가 쉬울 뿐만 아니라 기도응답의 경험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정직하게 말하니까요. 우리 하나님은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런 핵심을 찌르는 기도 앞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대답하십니다. 가라 네 문제가 해결되었다, 반드시 응답하시거든요. 응답된 시점과 응답의 확신이 내 가슴에 파도쳐오는 시점을 비교해보면 사태가 해결된 시점과 동일하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표적입니다. 기도응답이 표적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아우성치는 기도제목을 반드시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 이상 나만 홀로 기도의 광야로 불러내는 기도제목이 없다는 건 이상한 겁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자녀이면 반드시 하나님을 새벽에 소리쳐 부르는 낮은 밤, 비오는 밤, 이슬 내리는 밤에 간절히 부르짖게 만드는, 나를 고독한 기도의 광야로 불러내는 기도제목이 있게 돼 있어요. 그 기도를 응답받는 경험이야 말로 우리가 늘 경험해야 할 두 번째 표적이 된단 말이에요. 첫 번째 표적은 우리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표적,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그 영광을 살짝 보는 표적이이고요. 안타까운 기도제목으로 우리 하나님 말씀의 권능을 경험하고 우리 기도가 응답되고, 우리의 정직한 인생의 핵심쟁점이 해결되는 경험이 바로 두 번째 표적이다, 이 두 번째 표적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우리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을 향해서 아우성치는 기도가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예수님의 응답을 재촉하는 핵심적이고 정직하고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기를 바랍니다. 51절 ‘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신하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까? 이 신하가 참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다시 말해서 하루 만에 만난 겁니다. 거리가 머니까요.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 사람도 뭔가를 믿어버린 사람이 아니라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고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이 집안이 또 예수님을 공궤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엄청난 물질을 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다음, 또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 걸 모릅니다. 누가복음 8장에 예수님께 재산을 바쳐서 사역을 도와줬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집일 수 있는 거예요. 헤롯신하니까요. 역사적으로 고증이 안 됩니다만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헤롯 왕가의 여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나와요.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굉장히 좋아하고, 요즘 같으면 세례요한의 사진을 들고 다니는 사람인 거예요. 그런 사람인데 자기가 죽인 거예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중에서 자기가 존경해마지 않는 예언자를 죽여야 하는 헤롯의 고뇌가 <살 랭보> 라는 작품에 나와요. 헤롯의 청지기 구사가 만일, 이 사람이거나 이 사람 친척이거나 이 사람과 관련된 모종이 있단 말이에요. 예수님도 결국은 헌금은 갈취하시진 않지만 대개 나은 사람이 도와주신 건 맞습니다. 헌금을 왕창 해주신 거죠. 왕의 신하도 매우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이었고, 그런 심사숙고 끝에, 모든 것을 다 계산해본 끝에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 사람도 나중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이적과 표적의 수혜자 또는 현장 목격자는 초대교회의 다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결론 맺습니다. 이런 표적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건 거리를 초월한 기도응답의 경험인데요.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밖에 없는 핵심쟁점을 가지고 주님의 발길을 가로막으면서 재촉하는 기도제목이 있다면 우리는 표적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인생이 예수님의 긴 그림자 안에 접수됐다, 예수님이 지금 내 인생의 문턱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만큼 예수님이 가까이 있다는 임재의식, 이것이 성령 충만함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과 일상생활이 엮어가는 만큼 친근함을 느끼고 이런 기도가 가능해집니다. 여러분이 지금 자녀도 없고 별로 소리지를 일도 없을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인생에도 여러분 연령대에 맞는 절박한 이슈가 있죠? 그 절박한 이슈를 가지고 정직하게 대면하시면 두 번째 표적의 경험자가 되고 그 표적은 예수님의 정체를 더 깊이 깨달아가는 기적이기 때문에 서로 좋은 거죠? 내 아들이 병 나아서 살아나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기쁨이 또한 좋은 것이죠. 이 두 번째 표적이 여러분 인생에도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직한 대면, 아우성치는 기도, 표적의 내적 조건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왕의 신하가 자기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음을 깨닫고 소리쳐서 아우성쳐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했을 때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안타까운 음성에 그 절박한 아우성에 공감하셔서 가지 않고도 그를 낫게 하셨습니다. 주님 이것이 두 번째 표적입니다. 가향에서 기도응답의 표적을 많이 일으켜주시고 홀로 광야에서 예수님 발걸음을 재촉하도록 불러내는 왕의 신하들이 많아지게 하여주시고, 내 가슴속에 죽어가는 귀한 것들을 되살려내려고 하는 왕의 신하의 음성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하여 주소서. 가향이 주님의 표적을 불러일으킬 만한 믿음의 공동체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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