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지역적인 이동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다시 보면, 요한복음 1장 19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이곳은 에논강,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요단강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장 9절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요한의 세례현장으로 옵니다. 갈릴리 나사렛이 예수님의 발착지가 되는 것이죠?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사역을 마치고 갔는데, 요한복음 순서를 보면 요한복음 2장에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이 있고, 3장에 다시 예루살렘 장면이 나오고, 다시 예루살렘 유대에서 가고 사마리아로 가고 오는데, 먼저 유대사역 갈릴리사역 유대사역 갈릴리 사역 이런 순서로 돼 있는데,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잔치 사건은 니고데모 이전 사건입니다. 니고데모를 만나기 전 사건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하시는 표적이라는 말을 하는데, 예루살렘에서는 지금까지 표적을 하지 않았거든요. 지금 우리 기록에는 예루살렘 표적사건이 안 나와요. 3장 2절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 표적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고, 2장 23절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그 표적이 무엇인가 없습니다. 현재 내용이 없어요. 예루살렘에서 잔뜩 대단한 표적을 일으킨 것처럼 전제가 돼 있는데, 우리가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보았다고 하는 그 표적도 지금 없는 거죠? 누락돼 있습니다. 4장 44-45절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아무 일도 안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5장에 보면 니고데모에게 충격을 주었을 만한 사건이 나타나요. 어떤 사건입니까?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38년된 병자를 고친 이 사건이야말로 니고데모가 말한 앞에서 말한 그 표적일 가능성이 많고, 요한복음 4장 45절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행하셔서 니고데모에게도 경악을 일으키고, 갈릴리사람들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우호적 기대감을 일으킨 사건은 표적인데, 요한복음 3장에서 이 표적, 요한복음 4장에서 말한 이 표적, 내용은 안 나와요. 1-4장까지는 안 나옵니다. 그럼 우리가 추정을 해야 합니다. 1-4장에서 안 나온 이 표적은 무엇일까? 예상컨대 유대인의 명절에 일으킨 표적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에 일으킨 표적은 5장밖에 없네요. 5장의 이 표적이 유대인의 명절에 일으킨 표적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우리가 말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쓴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참 기록상으로 보면 매우 어색하죠? 아무 표적도 없는데, 이 표적을 보고, 이런 말을 하시면 안 되죠. 우리가 이렇게 헷갈릴 걸 아셨어야 하는데 이분은 몰랐습니다. 3장 2절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아무 표적도 없는데? 그래서 우리는 짐작컨대 이 표적이 아마도 5장을 가리키는 표적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5장은 아니나 다를까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으킨 그 표적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벌떡 일어나는 표적 정도가 되어야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경악과 충격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4장 34절입니다. 말 되게 읽어봅시다. 사마리아에서 이틀 동안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를 따라서 갈릴리로 갔습니다, 좁은 의미의 갈릴리는 갈릴리 호수 주변의 북서쪽 일대, 갈릴리는 감자를 거꾸로 세워 놓은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프모양으로 위가 넓고 밑이 좁은, 갈릴리 일대가 갈릴리입니다. 넓은 의미의 갈릴리는 갈릴리 호반의 평야지역 플러스 왼쪽, 지중해 쪽으로 있는 평야, 이스라엘 평야까지 가는, 예수님 고향 나사렛까지 커버하는 넓은 지역도 갈릴리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가나, 갈릴리 나사렛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나사렛과 가나가 넓은 의미의 갈릴리에 속했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장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전에 갈릴리 나사렛이 예수님의 발착지니까 돌아갈 때 그리로 가야 하죠? 그런데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는 것이 마땅한데 그리로 가지 않고,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요한복음 앞에 이런 말이 있었다면 이건 인용부호가 되겠죠? 그런데 없습니다. 누가복음 4장 24절에 나옵니다. 선지자가 고향 할 때 고향은 나사렛을 가리킵니다. 자기 고향 나사렛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나사렛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다시 가버나움으로 간 겁니다. 예수님은 고향에 가고 싶은데 못 간 겁니다. 배척받은 사람입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갈릴리인들은 남자입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 남자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모든 일 괄호하고, 5장부터 나오는 사건들, 갈릴리 남자들은 유력자들입니다. 예루살렘까지 올라가서 명절을 celebration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유력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하층민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의무도 갖지 않았고, 올라갈 여비도 없었습니다. 160km 정도를 3,4일 동안 걸어서, 아이들까지 천천히 걸어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갈릴리 남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그 이유는 표적입니다. 표적은 능력입니다. 능력에 대한 찬미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모든 것입니다. 표적만큼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포츠나 기술이나 소위 도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엄청난 능력은 찬미를 자아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을 통해서 단숨에 교육적 배경, 미천한 가정배경, 지역배경, 모든 불리한 것들을 극복하고 바로 단숨에 예루살렘과 갈릴리 일대에서 최고의 태풍의 눈이 돼버린 겁니다. 표적 때문에, 표적은 보통 사람들의 경험과 자연법칙적인 상식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신적영광을 발산시키는 사건입니다.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문둥병자를 말로 깨끗하게 낫게 하는 것입니다. 12년 동안 혈우병 걸린 여인을 그냥 접촉만으로 깨끗하게 만든 겁니다. 여러분, 이건 우리가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것이고, 이런 권능을 함부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영적으로 기초도 없는 우리가 만일 어떤 사람을 갑자기 지나가다 만져서 악수한번 하고 나서 낫게 하고, 그 표적의 열기를 감당할 수 있는 영적 그릇이 안 됐는데, 우리가 지나가다 거쳤더니 치질도 낫고 무좀도 낫고 폐병도 낫고 폐렴도 낫고 그러면 뒷감당을 못합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표적의 능력을 가졌지만 계속 피해 다녔습니다. 표적을 한 번 일으키고 피했습니다. 은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품 안에 가서 고요한 사막에 가서 하루 종일 보냈습니다. 표적이 얼마나 웃기냐면 표적을 행하지도 못한 사람이 표적을 행할 예감을 주는 말을 합니다. 40일 금식기도 5회 실시, 부흥사 광고에 보면 그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은 웃긴 겁니다. 그 말은 능력이 좀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줍니다. 40일 금식기도 5회 실시한 사람은 정상식사 한 사람보다 능력이 좀 많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은 망가졌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사건 중 하나가 신림2동 작은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는데, 40일 금식기도 5회 실시로 신유집회가 나타난다고 주모모 라는 부흥사가 와서 광고를 하는데, 서울대학교 학생 한명이 그 집회에 참여했다가 바로 현장에서 부흥사 멱살을 붙잡고 실랑이를 벌이는 걸 봤습니다. 지금도 인생을 포기한 사람은 거기에 모든 걸 걸어버립니다. 지금은 신유집회가 안 될 것 같죠? 진짜 많이 모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우리 이성과 양심을 깨끗하게 해주고 착한 사람 만들어주겠다는 데는 전혀 사람이 안 가지만 능력을 보여준다는 데는 사람이 갑니다. 사람을 착하게 만든다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거예요. 우리는 대개 이 설교를 들으면 효과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착해집니다. 그건 인기가 없습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표적은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많이 불리했어요. 그런데 표적을 행했기 때문에 갑자기 예수님은 무시 못 할 인물이 됐는데 갈릴리 남자들 자체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명절 중 모든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환영했는데 예수님은 이 환영이 따뜻한 환영이 아닌 걸 알았습니다. 48절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지 않으면 환영하지 않는 것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약간 냉랭하지만 표면적인 열기가 가득 찬 갈릴리에 왔다가 이 갈릴리 사람들을 피했습니다. 왜? 따뜻한 환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렀습니다. 갈릴리 가나와 나사렛은 가깝습니다. 고향은 고향인데 고향에 가지 못하고, 옛날에 자신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던 예수님 어머니 친척집으로 갔습니다. 갈릴리 가나로 가서 예수님은 여기서 밥을 드시고 제자단은 식사를 공급받으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갈릴리 가나에 갔느냐면 먹고 사는 일, 예수님께서 직업적인 선택이 없지 않습니까? 갈릴리 가나 가서 음식을 공급받고 사역의 물질적인 공궤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근거는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이 말은 예수님이 사역의 물질적 공궤를 받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직업도 없으시고 연금도 안 받으시고 실업수당도 안 받으시고 무엇으로 먹고 살았습니까? 순전히 주는 걸로 먹고 살았습니다. 완전히 후원에 의존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 갔다는 말끝에 이 말을 붙여놓은 것은 예수님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러 가셨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갔더니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님이 왕의 신하와 연결됐다는 말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헤롯 분봉왕, 헤롯 왕실의 신하들과 아는 유력자들임을 더더욱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의 신하가 와서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런데 48절에서 다시 가버나움 가고 싶지 않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내가 예루살렘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기 전까지는 냉랭하게 대하더니 내가 예루살렘에서 개인기 몇 개 보여주었더니 나를 환영하느냐? 이런 예수님의 약간 속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표적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냥 냉대했어요.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대단히 뭔가를 했습니다. 그걸 보고 오니까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표면적인 열기를 뜨거워지니까, 표적과 기사를 행하기 전까지 내가 바른 말씀을 증거 할 때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녀석들이 이제 유대 땅에서 좀 보여줬다고 너희가 나를 찾는구나, 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약간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예수님의 약간 시큰둥한 마음을 녹였습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굉장히,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던 갈릴리의 표면적 대중의 열기와 달랐던 진정한 아우성 육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육성입니다. ‘내려오소서’ 그런데 예수님이 안 가십니다. 한 번 속이 상하셔서 잘 안 가십니다. 이렇게 오시라고 하면 가면 좋을 텐데 안 가시고 끝까지 마음이 해결 안 되셨습니다. 안 되셨는데 이 간절함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지 않으시고 낫게 해주는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이 신하가 자기 아들이 죽어가는 심정과 아들이 죽어가는 과정을 총체적으로 공감하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친 겁니다. 이런 아버지 많지 않죠. 우리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도 모르고, 자기 자녀에게 경각으로 옥죄는 죽음의 위기를 잘 모르는 아버지가 많은 이때에 이 왕의 신하는 너무나 고무도 바빴을 텐데 생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신하가 얼마든지 죽으면 또 낳으면 되지, 이런 것도 아니고,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생명에 대한 열망, 살고자 하는 열망, 그 사랑, 자기 아들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일체성을 가지고 권위의 훼손을 무릅쓰고 거절당할지도 모르는데, 왕의 신하, 높은 장관급 왕의 신하가 이제 막 언더에 있다 뜨기 시작한 나사렛 예수님께 그냥 요청합니다. 거절의 위험을 무릅쓰고요. 갈릴리 사람 모두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냉대를 받는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렇게 소리칩니다. 너무 간절하고 핵심적입니다. 여러분, 간절하고 핵심적인 기도가 예수님의 응답을 유발합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핵심적인 기도가 있을 때 예수님이 응답이 온다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구체적인 쟁점을 가지고 기도하면 왜 응답을 못 받겠습니까? 애매하게 하지 말고, 정곡을 찌르면서 핵심을 찌르면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할 만큼 중요한 핵심을 찌르면서 이렇게 기도한다면 표적을 경험하는 거죠. 표적입니다. 이런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이 가능합니다. 표적은 거리를 초월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위력입니다. 기도응답입니다. 기도응답이 바로 표적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기도응답의 표적입니다. 우리가 진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기도응답의 표적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에게 이런 크고 작은 간증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께서 가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믿고 갔다, 계속 믿음이 강조되죠.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다시 말해 말씀을 해준 그 시점, 오후 1시에 열기가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이걸 표적이라고 증거한 사람이 왕의 신하입니다. 왕의 신하는 낫고도 입막음하고 모른 척 지나갈 수 있거든요. 자기 아들의 치료를 통하여 예수님 제자가 된 왕의 신하의 신앙 간증이거든요. 이 왕의 신하는 초대교회에서 유명한 사람이 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왕의 신하 간증이 실린 거거든요. 왕의 신하를 보십시오. 그냥 무언가를 확 믿어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다시 말해서 확인해 본 겁니다. 아들이 병이 나은 시점과 예수님 발설이 일어난 시점을 비교해보니까 똑같아 보이거든요. 너무 감사해서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괄호하고 다 믿었다는 말은 예수님께 왕창 헌금했다는 뜻입니다. 믿은 사람들의 낸 물질이 결국은 예수님 제자공동체의 3년간 생활비를 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3절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제가 볼 때는 이 사람이 헤롯의 청지기 구사일 가능성이 매우 많고, 구사가 자기 아내를 통하여 헌금을 전적으로 드렸다는 것을 볼 때, 이 왕의 신하가 아마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일 가능성이 많다, 왜? 이 기록 외에는 왕의 신하와 예수님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데 누가복음 8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 전 재산을 바친 사람들 이름 중에서 헤롯 왕 청지기 구사가 나오거든요. 이건 주석적인 상상력이지만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그래서 온 집안이 믿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다면,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만 표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간절하고 적실한 간구제목을 하나님께 아뢸 때 거리를 초월하면서까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정직과 진실의 언어를 토해낸다면 거리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구만리 장천, 먼 하나님 나라 보좌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시간 정직한 기도제목으로 예수님의 마음자리를 돌려낼 수 있는 정직한 기도제목, 내 아이게 죽게 되었습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어서 내려와서 고쳐주십시오, 이렇게 간결하고 핵심적인 기도제목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간다면 두 번째 표적을 맛 볼 수 있거든요. 여러분, 우리 일상생활을 순식간에 파고들고 움켜쥐는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신앙생활을 다이내믹하게 만듭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불교에서 행하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내가 나에게 끊임없이 가하는 정신의 집중도 아니고 명상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하나님 능력이 뻗쳐옴,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나의 일상생활을 침투해 옴, 하나님의 권능이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고역이 아닙니다. 그건 자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범용할 일상생활을 움푹 파고들 때, 이런 기도응답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순식간에 그 정체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정체를 순식간에 알려주는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러분의 인생주변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까? 여러분 인생을 고요하게 비추는 것이 은혜와 진리입니까?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여러분의 인생을 비춰오는 서광이 절망의 어둠입니까? 이 시대가 자아내는 악한 공기입니까? 여러분 인생의 앞길에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 은혜와 진리입니까? 은혜와 진리가 내 인생을 둘러 비추고 있다는 것이 표적입니다.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만드는 것이 표적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14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내 인생을 둘러 비추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건이 바로 표적입니다. 그건 찬양 중에 올 수도 있고, 기도 중에 오는 확신일 수도 있고 예배 도중에 우리가 경험하는 확신일수도 있거든요. 여러분의 정직한 기도제목, 예수님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드는 정직하고도 핵심적인 기도제목 하나씩을 가지고 표적을 일으키시는 내재적 조건, 필요조건을 만들어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믿음에 하나님은 응답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갈릴리 사람 모두가 평가를 나쁘게 받았지만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는 냉랭한 평가를 내렸던 우리 예수님이 이 남자에게 그 마음에 합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우리가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왕의 신하만큼 정직하고 진실하게 할 수 있다면 우리교회 기도제목은 살겠죠? 응답을 많이 받겠죠? 왕의 신하는 동정심이 많았던 분이고 책임감이 많았습니다. 동정심과 책임감은 교회가 왕 같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왕의 신하의 마음처럼, 죽어가는 아들에 대한 동정심과 책임감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를 잘 볼까요? 여러분 주변에도 죽어가는 아이가 있고, 아니면 여러분 안에 이제 막 갓 싹 피기 시작한 신생아 같은 여러분 믿음이 죽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는 간절하고 핵심적인 간구가 예수님의 응답을 유발하고 이런 것이 누적되면 표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표적입니다. 두 번째 표적은 기도응답으로 오기 때문에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지금도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와 달라고 요청할만한 핵심쟁점도 없고 어떤 이슈도 없고, 예수님과 내 인생이 비켜가고, 예수님은 예수님 나는 나, 예수님과 내 인생이 인생의 교차점에서 만나서 예수님을 간절하게 불러드리는 내 상황이 없고, 예수님이 나를 도와줄 일도 없고, 예수님과 내 인생이 계속 평행선을 달리거나 만날 수 있는 궤적이 돼버린다며 우리 기도의 언어가 죽어버리는 거죠. 기도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내 인생에 오셔야만 하는 적법한 이유, 적합한 이유를 가지고 아우성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의 언어나 예수님 자신이 내 인생 한복판에 찾아오는 그 사태나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진짜 여러분의 누추한 집에 여러분의 인생에 와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시오. 그게 바로 표적의 내재적 조건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오기만 하면 표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들어오기만 하면 우리 믿음에 화답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의 힘만 받고도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와 주십시오, 예수님 제 인생에 와 주십시오, 라고 예수님을 필요로 한 그 한마디를 오늘 외치시기를 바랍니다. 그 한마디, 예수님이 여러분 인생에 오시도록 유발하는 그 정직한 요청 한마디, 아우성 한마디, 그걸 꼭 터트리십시오. 예수님 찾아뵈셔서 예수님 말씀만으로도 열기를 떠나게 하고 죽은 아들을 살려내실 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왕의 신하의 간절한 믿음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없이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내 인생을 만족하지 않고 내 안에 죽어가는 아들, 내 안에 죽어가는 나의 지체들을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간결하고도 정직한 왕의 신하의 간구를 들으셔서 두 번째 표적을 일으켜주신 것처럼 주님 내 인생도 두 번째 표적이 필요한 가운데 있사오니 주님 와 주셔서 말씀을 보내주셔서 죽어가는 내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어가는 내 지체를 살려주시고 내 가족을 살려주시고 이 겨레를 살려주십시오. 이 세계만민을 살려주시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죽음의 열기를 제하여주시고 소생시켜주시고 우리가 주님께서 응답하는 기도응답의 두 번째 표적을 통하여서 믿음 회복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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