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대전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의 세계는 피조물의 제한성 속에 갇혀 있는 세계입니다. 죄와 죽음이 역사하는 세계입니다. 창세기의 아담의 범죄이래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흙으로 됐죠?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은 땅을 원재료로 만들어진 몸도 저주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질병은 언제 생겼는가? 가시와 엉겅퀴가 생겼을 때 생겼다고 봅니다. 그래서 육체의 질병은 땅이 저주를 받을 때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신학적입니다. 우리가 아담의 범죄 이래로 죽음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있는데 그 죽음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있는 육신의 세계에 말씀이신 하나님 아들이 들어오셨습니다. 들어온 까닭, 들어온 목적이 무엇인가? 독생자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은혜는 우발적으로 찾아온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내 인생의 반경 안에 뚜벅뚜벅 걸어오신 구세주가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의 목적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충성심, 의리 있음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의 말로 진리 안에 머문다는 말은 일관성 안에 머문다, 하나님의 명령의 항구적인 영향력 안에 머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를 베풀러 오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독교를 만들러 오신 게 아니라 기독교를 만들어서 일부 사람에게만 추종 받고 예배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곳에, 육신의 저주 아래, 즉 저주 아래 사는 모든 인생에게 예수님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다 오시지 않고 symbolic하게, 대표적으로, 인간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한계 안에 갇혀 있는, 즉 죽음의 공세가 가장 맹렬하게 공격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38년 된 병자를 고쳤다는 말은 37년 된 병자를 고쳤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고, 결국 38년 된 병자 안에 일어난 이 사건은 우리한테 일어난 사건과 같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신적영광은 무엇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불멸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은혜와 진리를 발산하는 인생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발산하는 인생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그저 값없는 은혜 즉 사랑을 베푸는 것, 대가를 바라지 않고 손을 내밀어 사랑을 베푸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진리,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가능케 하는 그 이유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은 축제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 축제의 환호성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은 지금 말하면 보건소입니다. 그 보건소에는 간헐천 온천을 믿고 와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누워 있습니다. 다섯 병동, 병동이 다섯 개입니다. 칸막이가 쳐져 있는 다섯 개의 병동에 사람들이 누워 있는데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그런데 누워, 까지 하고 꺽쇠괄호가 있습니다. 누워, 까지 하고 5절로 넘어갑니다. 3절 중반부터 4절 전체는 꺽쇠괄호 안에 있음으로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유력한 사본들, 신약성경 대부분에는 이게 없습니다. 어떤 신약성경 그리스 사본에 이게 있단 말이에요. 괄호 안에 있다는 말은 가장 중요하고 권위 있는 성경책에는 없지만 어떤 책에 있단 말이에요. 괄호 안에 있는 내용 볼까요?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상당히 베데스다 연못가를 힘들게 만드는 구원론입니다. 선착순 구원론입니다. 먼저 내려온 사람이 구원을 받으니까 38년 된 병자는 38전 38패를 한 겁니다. 왜? 38년 동안 먼저 내려간 사람 때문에 구원을 못 받았으니까, 이 사람은 38년 동안 한 번도 잘 풀린 일이 없는 겁니다. 살 만한 가치가 있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엄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계속 일이 안 풀릴 때, 시험도 안 되고 입학시험 안 되고, 입사시험 안 되고 맞선 봐도 안 되고 소개팅 해도 안 되고, 이리저리 아무것도 안 되고,
이런 불운한 일들이 38년 동안 우리를 계속 타격할 때 우리는 식물인간 상태가 돼버리거든요. 이렇게 나쁜 일을 많이 안 당해도 우리는 일어날 힘이 없는 치명상을 입어버립니다. 선착순 구원론, 이 냉정한 구원론, 먼저 내려가는 사람이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는 이 배타와 독점의 구원론, 신자유적인 구원론이 지배하는 연못에 이 사람은 불리합니다. 이 사람은 눈은 떴지만 눈 감은 사람들은 방향은 몰라도 일단 뛰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다리를 저는 사람들은 속도감이 문제가 되지 희망이 있습니다. 혈기 마른 사람은 피가 안 통하는 사람입니다. 피가 안 통하면 산소가 공급되지 않습니다. 혈기 말랐다는 말은 산소가 통하지 않는 겁니다. 산소가 통하는 것, 피가 안 가면 혈기마른 사람이 됩니다.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었기 때문에 저는 감히 이 본문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주일만 누워 있어도 우리는 가장 비관적인 사람이 됩니다. 사실 일주일만 누워 있어도, 그래도 14년 간 누워 있었던 미우라 아야꼬, 척추결핵으로 14년 동안 누워 있었던 미우라 아야꼬가 <이 질그릇에 대해서>라는 책을 썼는데, 자기가 14년 동안 누워 있어보니 죽어버린 사람이 훨씬 부럽다는 겁니다. 죽어버린 사람이 훨씬 부러워지기 시작한 겁니다. 14년 째 누워 있으니까요. 이건 진짜 성하고 말짱말짱하게 신체거주이전권을 가지고 다니는 우리들은 도저히 공감이 안 되는 그런 사람입니다. 38년 동안 선착순구원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38패를 거듭하는 이 사람이 예수님 시선을 끌었습니다.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예수님이 개인에게 주목을 했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주목을 했습니다.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대단한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한 번 보시고 나서 그 병이 오랫동안 그 사람을 괴롭히고 치명상을 입혔다는 사실을 아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보고 아는 것, 지각동사 다음에 공감이 일어납니다.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공감하도록, 고통을 알도록 하나님께서 눈을 주신 겁니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서로 잘 쳐다보셔야 해요.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자연스러운 전개입니다. 눈을 가지고 공감을 일으키는 메시아적 동정심으로 작동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이렇게 착하게 단련된 사람은 참 감사하죠. 그런데 우리가 메시아적 시선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 단계까지 가려면 하나님께 은혜를 특별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워 있는 걸 보더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38년 된 병자는 냄새가 많이 났을 것입니다. 냄새나고 퀴퀴한 사람, 기피대상이지 절대로 접근대상은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해야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냄새나고 38년 동안 누워 있는 사람에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알바니아의 수녀였던 테레사수녀가 콜카타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몸, 식어버린 몸에 염을 해줍니다. 존엄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 어떤 가치도 없는, 어떤 이유로 행려병자가 됐는지 모르죠. 행려병자가 되어 죽어가는 몸에 마지막 체온을 안겨주고 죽어가는 과정을 잘 도와주는 것이 테레사수녀가 한 일입니다. 어떤 생산성이 넘치는 일도 하나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자의 존엄,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이 테레사수녀가 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너무 많이 하다가 이 분이 신앙을 잃었습니다. 테레사수녀의 편지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까만 하늘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신부님,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요? 무신론자가 됩니다. 너무 비참한 사람을 많이 보면, 우리가 너무 비참하고 돌봄 받지 못하는 고통과 응답받지 못한 아우성을 너무 많이 보고 나면 우리 마음이 까맣게 의심의 흙구름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우리 목사도 그렇습니다. 우리 목사들도 안 좋은 사람 A B, 10사람을 상담하거나 전화통화를 하면,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우리가 실제로 실족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목사님은 잘 해야 합니다. 잘 되는 사람도 만나고 안 되는 사람도 만나고, 잘 모두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우리 신앙을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수녀님이 신앙을 잃을 수밖에 없었는데, 너무 비참하고 죽어가는, 계속 모래보다 더 많은 시체를 보며 인생은 무엇이며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며 하나님의 존엄은 어디 갔으며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 갔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 갔으며, 계속 이런 고백을 털어 놓거든요. 신부님께요. 고통의 현장에 많이 있는 사람일수록 냉담해지고 신앙심이 없어져요. 예수님이 그렇게 귀신 들린 사람과 병자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그 착한 신심을 유지하고 또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목회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진짜 기도 안 됩니다. 우리도 마음이 냉담해집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예수님이 얼마나 엄청난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보시고 아시고, 여기까지는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찌무라 간조도 갔고 니시다 벤조 같은 일본 사람도 갔고, 마더 테레사도 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인간의 종교성이 이룰 수 있는 경지입니다. 동정심은, 그런데 그다음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건 신적위엄을 가진 사람만이 터트릴 수 있는 질문이지 절대로 동정심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건 개인기가 있어야 합니다. 뭔가 보여줘야 합니다. 이건 절대로 동정심이 극에 달했다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건 뭔가 히든카드가 있는 분이 물을 수 있지, 이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신적 숭고함이 무한책임적인 부담감을 가진 분만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 목사님들이 환자 심방해서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저는 그래서 목사로서 심방을 가서 보고 안 되면 찬송가를 불러줍니다. 504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 이걸 계속 불러줘야지 딴 찬송을 부르면 안 됩니다. 그다음 곧 돌아가실 분들에게는,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그걸 불러줘야지, 나을 수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이걸 불러줘야지, 신종인플루엔자나 암 1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이렇게 불러줄 수 있지만 책임감이 있는 질문은 저는 못합니다. 왜? 목사는 할 수 없는 겁니다. 이건 동정심으로 할 수 없고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이런 질문을 예수님이 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more that human, more that super human, 인간보다 큰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독생자의 자신감을 가지고 독생자의 신적 비장 무기를 가지고 한 겁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예수님처럼 안 됩니다. 절대로 집안이 좋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독생자 가문에서 나왔지, 절대로 내가 6두품이니까 성골진골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독생자 아버지 품에 있다가 왔기 때문에 되지만 우리가 아무리 수련하고 힌두교 경전 읽고 불교경전 읽고 다 읽어도 이 질문은 안 됩니다. 그 질문은 예수님께만, the only begotten son, 독생자만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분위기가, 짧은 맥락 안의 분위기가 38년 된 병자에게 주었을 임팩트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첫째 38년간 방치됐던 황량한 야산 같은 인생의 반경에, 그 고통의 아우성, 응답받지 못하고 38년 동안 한 번도 메아리가 없었던 고통의 아우성에 예수님이 뚜벅뚜벅 가서, 울상이 아니고 인간의 파괴된 존엄을 갖고 뭔가 갖고 싶은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그 사나이를 보고, 내 존재를 눈치 채고 있는 분이 내 인생의 반지름 안에 나타났어요. 동정심의 반지름 안에 누가 나타난 거예요. 이 사람에게 끼친 임팩트는 엄청 큰 겁니다. 오늘은 여느 날과 다른데? 뭔가 공기의 질이 달라, 햇빛 색깔이 다른데, 하면서 조금씩 뭔가가 소생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신 겁니다. 이때 이 질문은 38년 된 환자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비장한 무언가를 보여주실 준비를 하는 것이고, 이 사나이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낫고 싶냐고요? 낫는다는 그 말을 처음들은 겁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이렇게 느낄 만큼 깜짝 놀랄 말입니다. 자비로운 예수님의 시선에서 나온 말, 그 자비롭고 은근한 메시아적 동정심이 넘치는 그 시선, 메시아적 동정심으로 가득 찬 걸어 다니는 동정심과 같은 예수님의 음성에서 들려온 말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이때 믿음이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자체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착순 구원론을 완성하실 분으로 알았기 때문에 드디어 한 마디 안 해도 될 말을 합니다. 주여 당신은 내 선착순 구원론을 완성시키러 오신 분인가요? 이런 뜻입니다. 7절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사실은 언제 물이 동할지 모르기 때문에 24시간 대기하기도 힘들어서 처음에는 가족들이 왔겠죠? 그런데 전혀 물이 동하지 않으니까 갔겠죠? 몇 년 째 해도 안 되니까 갔을 겁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믿음이 생긴 게 아니라 알고 보니까 선착순 구원론, 저 연못 즉 미동도 하지 않는 연못이 부두둥 끓을 줄 알고, 그 물이 일단 끓여야하고 예수님의 명령도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조건이 되려면 물도 일단 끓어야 하고 예수님도 오랫동안 계셔줘야 합니다. 못에 넣어 줄 사람, 즉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못에 넣어줄 사람 없음, 결핍을 탓하면서 그는 엉뚱한 구원을 상상합니다.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어야 하는 시점에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전제 하에서 이렇게 묻는데 예수님은 그 사람 물음을 cut in 합니다. 묵살합니다. 선착순 구원론으로 마음이 오그라들었던 이 사람의 말을 cut in 합니다. 잘라버리시고,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일어나라, 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세 가지 연속동작입니다. 말은 명령법이지만 초청의 언어라고 봐야 합니다. 명령법이 주는 냉담함이 아닙니다. 일어나! 이런 게 아닙니다. 명령법이 주는 냉담한 비인격적인 일방통행이 아니라,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세요, 청원입니다. 초청입니다. 일어나세요, 선착순구원론 믿지 마세요, 딴 사람 탓하지 마세요, 지금 일어나세요, 당신이 온 힘을 다하여 일어나세요, 38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당신이 일어날 생각을 하시고 실험적인 마음으로 일어날 의지로 가득 차서 내 말을 믿고 다리에 힘을 줘보세요, 이렇게 초청을 한 겁니다. 초청이 담긴 명령을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기분 나쁜 명령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명령, 내가 그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명령, 일어나세요, 형제님 일어나세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자리 침상 번쩍 들어보세요,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걸어보세요, 들고 걸어보세요, 이거 가능한 일입니다, 라고 쭉 설득을 길게 한 겁니다. 설득을 길게 한 과정에 마지막 말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겁니다. 이것만 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만 하면 아무도 안 듣습니다. 중간에 무슨 말이 많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 닮는다고 갑자기 백병원에 가서 일어나! 이렇게 절대로 우리 목사들이 하면 안 되고, 그 동안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마지막 단계에는 이렇게 정리한 거다, 초청이 완성된 거다, 이런 말이지, 목사에 대한 믿음도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 일어나! 그러면 안 됩니다. 내 딸 아들도 안 일어나는데 그런 건 안 됩니다. 저도 가끔은 신유은사가 나타납니다. 정말 가끔인데 저를 너무 믿는 사람, 저를 진짜 하나님의 종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신유은사가 나타납니다. 저는 이 말을 특별한 그걸로 하는 게 아닙니다. 너무 당연한 겁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 책에 나옵니다. 두통이 사라졌다, 여러 사람 책에 나오는데 제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아무튼 생애에 여러 건의 신유가 일어났습니다. 여러 건이라고 하니까 혹시 또 관심을 가지고, 나도 한 번 가볼까,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신유를 했는데 도저히 안 돼서, 갑상선 암에 걸린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일산 두레교회 목회할 때인데요. 갑상선 암에 걸린 24세 자매님인데 보니까 너무 안타까워요. 자기 언니가 사법연수원 다녔던 자매님인데 언니 따라 우리 교회 등록을 해서 다녔던 자매님입니다. 제가 아무리 기도해도 이 자매님의 갑상선이 낫지 않고 제가 탄식하고 있으니까 소설기 조성기라는 사람이 있는데,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입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차도도 없고 나도 확신이 안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했더니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난 신유의 기적을 경험한 권사님을 소개하더라고요. 조성기라는 소설가가 죽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안수를 받아 나았던 경험은 <내 영혼의 백야>라고 하는 시집에 나와 있습니다. 얇은 책인데, 그 책 한 번 읽어보세요. 죽기 직전까지 간 사람의 기록입니다. 소설가 조성기 아시죠? 오늘의 작가상 받았는데, <라하트하에렙>이라는 작품을 쓰고, 이 사람이 소개한 데가 용산 역에 있는 서산 복음동지회입니다. 여기가 옥한흠 목사님 병을 고치는데 엄청 도움을 줬던 권사님입니다. 이분이 조성기라는 사람을 치료해서 나았습니다. 조성기 씨가 치료해 낫는 과정이 자세히 <내 영혼의 백야>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와 오정현 목사가 그분의 안수를 받았는데, 내 문제로는 내가 안 가겠는데 그 자매님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내 신학 상 참 낯설지만 이 자매를 데리고 권사님한테로 갔습니다. 갔더니 훑어보더니 일단 침대에 나부터 올라가라고, 나는 아니에요, 일단 올라오래요. 나는 아니래도요, 했더니 무조건 목사부터 올라와야 한 대요. 그런데 저는 병이 안 들었는지 전혀 아프지도 않고 누르면 전기가 찌릿찌릿 온다는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고요. 탁 배를 누르더니, 위장이 엉망이구나, 이러면서 의사가 하는 말 비슷하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지방간이 나았다고 하는데 안 나았어요. 제가 거기 두 번 갔는데 세 번째부터는 저는 안 갔습니다. 최근까지도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저는 목회를 그만 두고 그 자매님은 대전으로 내려갔습니다. 갑상선 대부분이 잘 낫는다는데 이 자매님은 낫질 않아요.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경험, 좌절감을 안고 있습니다. 이 자매가 살아나야 내 목회에 부담이 안 될 텐데, 그래서 연락이 안 오면 죽었는가 싶어 전화해보면 살아 있고 그래요. 그런데 이 분도 신유가 엄청 많이 일어나다가 요새는 또 안 일어납니다. 요새는 나았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신유도 개인기가 아닌 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동정심이 목사님들이 많아야 하는데, 의사가 동정심이 많아야 하는데, 의사나 간호사나 목사가 훨씬 더 마음이 강퍅해져 있습니다. 고통의 일상적 경험 때문에, 특별히 목사님들은 더 심하죠. 얼마 전 <크리스천 투데이>라는 잡지에 보니까 울프 목사의 바쁜 하루, 이런 기사가 실렸는데, 울프 목사는 상가교회에서 시작했다가 교인이 수 만 명 된 큰 교회의 목사입니다.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이 울프 목사가 상가교회일 때는 동정심이 굉장히 많았는데, 이제 교인이 2만 명 되니까 이 울프 목사를 만나려면 비서한테 전화를 해서 며칠 동안 기다릴 만큼 훌륭한 사람이 됐습니다. 괄호하고 훌륭하다는 말은 인용부호 하고 훌륭하다는 겁니다. 어떤 자매님이 전화 왔습니다. 목사님 잠깐만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렇게 했습니다. 옛날 상가교회일 때는 바로, 아이고 자매님 감사합니다, 하고 바로 시간 내서 면담했을 텐데, 1분이면 돼요, 그렇게 했는데도 울프 목사가, 아니오 저를 만나려면 비서실을 통하라고 여러 번 광고했을 텐데요, 이렇게 한 겁니다. 그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남자가 자살했습니다, 그 우울증 앓던 남자의 아내가 긴급하게 만나러 왔는데, 목사님 심방해줄 수 있습니까? 제 남편이 목사님을 참 좋아하는데, 그런데 심방 갈 시간이 없었어요. 무슨 전략기획회의 간다고, 이게 목사가 돼버립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아버지라고 자녀에게 엄청 동정심이 많습니까? 우린 다 인간성이 마멸되고 동정심이 고갈돼서 일단 보이지가 않습니다. 안 보여요. 그냥 알게 되지도 않아요. 남편이 아내를 알 수 없고 아내가 남편을 알 수 없고, 서로 몰라요. 알고보고 그리고 책임분담까지 내포하는, 낫고 싶습니까? 이런 말까지 가는 건 지상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천연기념물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독생자의 영광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이건 쉽게 모방하려고 하지 맙시다. 잘 안 됩니다. 우리는 아래에서 났습니다. 땅에서 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다만 우리는 불감증호소, 감히 예수님처럼 되겠다고 내가 할 수 없지만 그런 예수님의 신적동정심이 내 거듭난 심령에 깃들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안 되더라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동정심이 가득 찬 메시아적 시선, 메시아적 공감능력, 메시아적인 책임분담까지 가는 것은 우리가 일생동안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옛날에 82장 찬송이 참 좋아했는데, 지금 이 찬송이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사모하는 목자는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계시면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나에게 함께하는, 이리저리 방황하는 내 마음을 알고 계시는 선한 목자, 그런 예수님의 마음, 그것이 우리에게 있기를 일생동안 앙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여러분이 선착순구원론으로 구원 받았습니까? 냉혹한 신자유적 선착순구원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우발적 방문을 받고, 아무 이유 없는 방문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여러분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이 일어나서 새 사람 되었습니까? 연못에 먼저 뛰어들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초청했습니다. 김회권 일어나라, 네 운명주의를 극복하라, 그리고 나와 함께 동행 하자, 걷자, 뛰어 가라, 걸어가라, 직립보행자가 되라, 은혜의 직립인간 거룩한 호모 에렉투스가 되어라, 이렇게 초청하셔서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걷는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율법을 준행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 그게 바로 은혜와 진리입니다. 은혜의 목적은 무엇이죠? 은혜를 베푸신 목적은 진리를 행함이에요. 우리가 구원받고 치료받고 자기초월을 맛보고 뚜벅뚜벅 걷는 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동행하는 삶, 하나님과 함께 에녹처럼 동행하는 삶, 아브라함처럼 행위 완전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이게 바로 구원 받은 거죠. 결론 맺습니다. 이런 은혜의 직립보행으로의 부활 소생 갱신이 안식일에 기대하는 거예요. 안식일에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해요. 안식일은 무엇이죠? 6일 동안 노동으로 우리 몸이 쇠퇴하고 우리 몸이 병들고 우리 몸이 무기력하여 식물인간 상태가 되고 냉담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다른 사람 때문에 먼저 내려가지 못하고 먼저 승진되지 못하고 먼저 집사지 못하고 먼저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냉담자가 되어 있고 식물인간처럼 자포자기로 누워 있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 듣고 일어나고 우리 운명주의 팔자소관 번쩍 들어서 집어던져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천로역정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안식일에 기대하는 마음이에요. 안식일에 일어나야 할 것, 안식일은 말씀 듣고 일어나기, 말씀 듣고 순종할 결단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동역자와 함께 하나님 나라 향해서 진군하기가 안식일날 기대할 것이죠. 이날은 안식일이다, 이 안식일에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말씀 듣고 명령 듣고 일어나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준행하는 삶, 그 감격을 회복하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의 말씀으로 제 인생이 식물인간 상태에서 은혜의 직립보행자로 일어났습니다. 주님 79년에 제게 일어났던 이 구원이 2012년에 우리 젊은 형제들에게 일어나게 해주시고, 하나님 모르는 숱한 베데스다 연못가의 신자유주의적 구원론, 남을 탓하는 구원론, 남을 미워하게 만드는 구원론에 빠져 있는 이 땅의 억조창생들이 예수님 방문 받고, 예수님 닮은 사람의 방문을 받고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이 이 땅의 모든 억조창생들이 예수님의 말씀 듣고 일어나 운명주의 극복하고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되게 하여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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