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 아들이란 말은 순종의 화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하나님 아들이란 말은 입양된 아들, 즉 다윗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차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창조할 때, 하나님 옆에 있었던 선재하시는 하나님 아들,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건 유대인들한테 굉장히 낯선 사상이었지만 헬라인에게는 이렇게 해야만, 즉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헬라인들의 머릿속에는 단순히 순종을 많이 해서, 누적적인 순종을 바쳐서 하나님아들로 인정받은 사람으로선 구원자로서의 요건이 충족이 안 됩니다. 그리스사람들은 영적혈통에 있어서 하나님 그 자체의 독생자, 또는 하나님 그 자체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에베소 일대의 그리스 교양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전파된 복음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계속 소개합니다. 모노게노스 히오스, 라는 말을 씁니다. 독생자는 ‘독생’이 한 묶음입니다. ‘자’가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아니라, 독생자입니다. 독특한 의미로 하나님 아들이 됐단 말입니다. 요한복음서가 공관복음서와 같은 점은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친아들, 하나님의 독생자 또는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 부를 때 이때는 죽음을 감수하고 극한의 순종을 드리는 맥락입니다. 죽음을 감수하고 극한의 순종을 드릴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합니다. 보통 큰 힘이 있는 유력자의 아들, 그 아들과 아버지 관계에서 오는 권력관계의 계승들, 권력 관계를 내가 이용하기 위해서 아들이 아니라 맥락이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는 극단적인 자기 낮춤과 비움과 죽음을 감수하는 순종을 말할 때만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뜻은 자기를 비움으로 종의 형체를 가진 자기를 낮춘 아들이란 뜻이 됩니다. 요한복음의 주장은 우리가 알기 힘든 것이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만 가지고도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예수님의 존재를 두고 하나님의 독생자, 만유 가운데 계시고 영원부터 같이 안 계셔도 돼요. 그렇게 안 해도 우리는 다 믿어져요. 요한복음이 우리의 상상력의 극한까지 몰아가는 복음서가 된 것은 에베소 등지의 고급 그리스 교양을 가졌던 이방신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썼다고 알면 됩니다. 오늘 핵심,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주장의 맥락은 첫째 이런 것입니다. 오랫동안 누적된 유대인의 종교적 권위를 순식간에 전복한다, 즉 엄청난 권위를 가진 분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종교가 누적시켜온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뒤엎어버릴 정도의 신적권위를 가진 자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란 뜻입니다. 두 번째로 유대인의 종교에 의해서 잘못 채색된 하나님의 이미지, 다시 말해서 값없이 만민에게 그저 은총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공짜로 구원과 치료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히 은혜롭고 자비로운 이미지를 다시 복권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다시 한 번 복권시켰습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인간이 극단적으로 자기를 잘 다그친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쉬나라는 안식일 규정에 보면 이런 게 나와 있습니다. 39가지 금지행동이 나옵니다. 첫째 씨를 뿌리지 말 것, 둘째 쟁기질을 하지 말 것, 셋째 추수하지 말 것,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2절에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추수하러 갑니다. 유대인들은 금방 미쉬나 탈무드에 보면 39가지 금지된 행동 중에서 가장 하면 안 되는 행동이 추수행동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추수를 하니까 바로 안식일에 왜 못할 일을 하느냐, 이렇게 말하죠. 39가지 마지막 행동이, to take object from the private domain to the public domain, 다시 말해서 사적영역에서 공적영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물건을 들고 이동하는 것, 내가 우리 집에서 책상을 1층에서 2층으로 들고 옮기는 것, 그것은 사적영역에서 물건을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런데 내가 우리 집에서 이 서방 최 서방 박 서방이 보는 데서 짐을 지고 운반하면 그건 바로 안식일을 범한 겁니다. transporting, 물건을 옮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안식일에 물건을 들고 어딘가로 옮기는 것 자체가 39번째 금지된 행동을 위반했기 때문에 지금 벌써 그럽니다. 하루 더 누워 있으라는 겁니다. 38년째 일어나보지 못했던 이 환자가 38년 만에 지금 일어나는데, 하나님 은혜로 기적적으로 일어나서 물건을 들고 집에 가는데, 제발 오늘 안식일이니까 39번째 금지계명을 고려해서 하루만 더 누워 있어 달라, 일종의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게 안식일의 신성성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안식일을 경배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신, 안식을 주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안식일을 경배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경배해야 합니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해요? 우리가 성경을 존경해야 해요?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삼위일체교리만큼, 일점일획이라고 오류가 없는 말씀인 성경을 혹시 누가 조금만 의심해도 금방 신성성을 위반한 놈이기 때문에 바로 지적으로 억압해버립니다. 그건 하나님의 마음과는 다르죠. 종교가 38년 만에 일어난 환자의 해방과 구원과 치료의 감격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신성성 자체를 절대적으로 강조한 사람, 안식일의 원래 계명은 출애굽기 20장 11절과 신명기 5장 15절에 나옵니다. 이런 겁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안식했기 때문에 안식하란 말이 출애굽기 20장 11절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4절 보면,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때 어떤 느낌이 들어요? 하나님이 일을 하고 쉬었다고 하니 무슨 느낌이 들어요? 일을 열심히 6일 동안 하고 7일째 안식했다는 말을 들으니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이 피곤하셨는가보다, 이런 느낌이 들죠? 벌써 그런 의심이 드니까 이사야 40장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절대로 지치지 않는 분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안식 하셨다, 하는 그 가운데서 안식일은 왜 나왔나? 그런데 창세기를 가만히 보면, 안식일에 왜 쉬셨는가 하는 이유가 나오지 않아요. 창세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창조설화에 있는 내용을 유일신 신앙의 이름으로 채색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많이 흐려져 있습니다. 근동 고대메소포타미아의 창조설화는 이런 겁니다. 혼돈의 세력을 물리치고 마르둑신이 안식을 합니다. 안식을 한다는 말뜻은 창조의 세력 창조의 권능에 반역하는 잠재적 반역세력들을 무장해제 시켜놓고 더 이상 반역하지 못하도록 승리하신 최고의 신이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런 구조입니다. 다시 말해서 혼돈의 세력들과 싸움을 벌이신 하나님이 안식에 들어간다, 창조자체가 혼돈의 바다 물결을 물리치고 땅을 창조하신 자체가 혼돈의 세력을 이긴 사건입니다. 이게 원래 고대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건데, 성경은 이런 다신교적 세계관을 그대로 쓰면 안 되니까 야훼 하나님이 혼돈의 신을 물리쳤다는 말이 거의 안 나옵니다. 이사야 51장 9절에 나옵니다. 시편 74편, 시편 104편, 욥기 38장 8-11절 등에만 열 몇 군데 구절에 시적운문에 고대메소포타미아의 창조전투, 창조를 위한 혼돈세력과의 전투에 대한 기억들이 운문으로 시적인 단편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걸 다 모아보면, 성경의 하나님도 모종의 전투를 치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안식을 했다는 말이 통하는데, 모든 창조의 전투를 빼버리고 안식을 했다고 하니까 독자들이 읽을 때는 감동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의 최초 독자들은 이걸 읽고 감동했습니다. 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설화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창조했다는 과정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관통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들어내는 하나님, 공작적인 무로부터 유 창조, 이건 감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아무런 정서적 감격이 없습니다. 감흥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해로운 존재를 억제하시고 나서 이렇게 멋진 세계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베르사유 궁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려면 베르사유 궁전이 들어서기 전에 거기가 얼마나 악어가 들썩이던 늪지대였고 거기에 전갈이 있었고 분화구와 같은 안 좋은 땅이었는데, 그걸 만들어서 베르사유 궁전이 멋지다, 그럴 때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보지 않으면 이게 별 의미가 없어요. 사진으로 보세요. 옛날에 난지도, 우리 대학교 때 난지도는 구더기와 지옥을 방불하던 곳이에요. 우리 70년대 말 난지도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에요. 그런데 그 난지도에 하늘공원이 들어서고 월드컵공원이 들어섰죠? 그 난지도와 같은 최악의 조건에서 엄청난 문명의 시설이 들어선 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자아내듯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혼돈세력과의 전쟁을 치룬 후에 승리하시고 왕으로 등극하셔서 보좌에 앉으신 것을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것과 똑같은 말, 이런 것을 되새길 수 있는 것이 사무엘하 7장 1절 ‘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이것 정확하게 안식했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안식했다는 말이 통하는데, 고대 근동의 설화를 세례를 줘서 유일신 신앙의 창조설화를 바꾸는 과정에서 전투장면이 생략되고 안식만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동을 못합니다. 이걸 어떻게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느냐? 이사야 51장 9절 시편 74편 10-14절 시편 104편 욥기 38장 등, 그런 많은 구절들이 창조의 이야기를 전투를 치룬 후에 승리하신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잔재가 어디 있느냐? 최고의 왕으로 등극하신 하나님은 성전에서 안식을 한다, 이것이 일종의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어드리려고 한 이유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부 다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최고의 신이었기 때문에 성전을 지어드린 겁니다. 하나님이 안식했다는 말은 피곤해서 쉬었다는 말이 아니라 승리를 축하하는 날입니다. 일종의 전리품을 나누는, 하나님이 심리적으로 이완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심리적으로 어떤 이완을 합니까? 이겼기 때문에, 더 이상 적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긴장을 푸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안식일에 안식하는 이유는 천지창조를 하셔서 악을 억제하신 우리 하나님이 나의 노동 나의 분투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내 노동보다 절대적으로 가치 있다고 믿을 때 안식일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안식일은 은총의 절대 가치설을 믿는 날이다, 즉 내 노동보다 내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쟁기를 갈고 씨를 뿌리고 나의 노동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내 인생의 절대 상수인 것을 믿는 나, 잠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잘 때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자야 합니다. 하나님 제 과제물이 끝나지 못했는데 일단 잡니다, 하나님 지켜 주십시오, 자는 것도 믿음이 필요하고 실제로 안식일에 한 번 쉬는 것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 하나님의 악과 혼돈과 모든 창조질서에 반역하는 자들을 억제하실 것을 능히 믿고 우리가 그 날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지 않습니까? 부활은 악과 사탄을 이긴 날이죠? 정확하게 유대교의 안식일 개념이 우리는 주일에 와 있는 것, 부활하신 그날, 요한계시록에 보면 밧모 섬에 있는 사도요한이 주의 날에, 즉 안식 후 첫날에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늘에 눈을 떠보니 보좌가 펼쳐져 있고 어린 양이 그 보좌에 앉아 있는 장면을 봅니다. 로마제국의 압제 박해가 서서히 고조될 때, 주의 날에 성령 감동 받아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었더니 바로 하늘에 하나님의 어린 양 보좌가 펼쳐져 있는 게 보인 겁니다. 안식일에 주의 성령으로 감동 받아 내 인생의 하늘 위에 어린 양 예수가 보좌에 앉는 장면을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운명주의의 침상을 들고 일어나서 집으로 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무기력을 깨치고 일어서서 직립보행자가 되는 겁니다.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되는 것,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안식일에 기대할 수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안식일에 일어서고 우리 죄짐을 들고 번쩍 정복하는 날이고, 우리 죄의 자리, 운명과 비참의 자리를 이겨내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주의 날, 안식일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은총입니다. 안식일 너무 좋은 겁니다. 금요일 6시부터 유대인들은 히두시라고 하는 안식일 기도문을 계속 반복합니다. 이건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딸인 수잔나 헤셀이 쓴 아버지의 책 <안식>이라는 책 서문을 보면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 안식일에 그 자녀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저는 지난 세월동안 이걸 다 못해봤습니다만, 아버지가 금요일 저녁부터 토라를 손질하면서 토라를 펼쳐놓고 돋보기를 쓰고 토라를 암송하고, 어린 아이들 식탁에서 과자를 먹고 요리도 안 합니다. 안식일은 불을 못 피우니까 자매님들은 전부 다 쉽니다. 그러면 금요일 여섯 시 전에 모든 음식을 다 해야 합니다. 안식일엔 불을 피우지도 않고 반죽도 안 하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매님들도 놉니다. 물론 그 전날 많이 하니까 노는 건 아니죠. 그러나 안식일은 놉니다. 노는 게 아니라 음식 차리는 수고가 없는 겁니다. 수염 탁 난 아버지가 아담 키 피시가가~ 이렇게 읽으니까 애들이 그걸 기억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썼는데, 우리 하은이가 그렇게 써줄지 너무 부럽습니다. 내가 죽었을 때 우리 딸이 그걸 써주면 좋은데 저는 기도시를 읽어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안식일은 축제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날, 안 믿어져도 믿으면서 축제를 즐기면서 형제우애, 두터운 애, 사랑을 나누면서 토라를 읽으면서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 보좌가 하늘에 설치된 걸 보는 날, 나의 죄를 이기는 날, 나의 죄의 침상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 은혜의 중량을 들고 가는 날, 그게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렇게 안식일 해석을 잘 하려면 하나님 아버지가 계속 속으로 뭔가 비밀로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지 못하면 이런 담력이 안 나오니까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기 전에는 여러분이 영락교회에 가서 난동을 부리면 안 됩니다. 바로 체포됩니다. 이런 기존의 누적되고 잘못된 종교가 우리를 비인간화시키는 걸 볼 때 그걸 뒤엎을 만큼 힘 있는 메시지가 그건 독생자급 교제가 굉장히 필요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아들이라는 표현에도 나오는데, 저는 이 표현이 너무나 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아들, 요한복음 1장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이슬람이 틀렸습니다. 불교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틀렸습니다. 오로지 기독교도 아닙니다. 이런 예수님을 대표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아닙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인류에게 보여주신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돈 없이 값없이 모든 인류를 차별 없이, 무차별적으로 은혜받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전부 다 환영하시는 그 아버지,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은총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무조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 요한계시록 21장 16절에 보면 천국은 장 광 고 1만2천 스타디움으로 돼 있습니다. 가로세로 높이가 2200km입니다. 천국 새 예루살렘은 2200km 되는 지상에서 출연해보지 못한 엄청나게 큰 도시입니다. 제가 책을 보니까 이렇게 큰 장방형의 구조물이 있으려면 중력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아야 한다, 350km 이상 지름을 가지는 우주의 모든 물체는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공이 돼버립니다. 중력이 끌어당기니까 공모양이 됩니다. 둥근 모양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사각형의 구조물이 있으려면 중력법칙이 없어야 합니다. 시간이 더 이상 가면 안 됩니다. 해도 없다는 말이 요한계시록에 있죠? 2200km의 큰 도시에 전 세계 만민이 같은 시대 사람과 파티를 하다가 순식간에 다른 시대 사람과 파티를 합니다. 에녹과 우리가 축구를 하다가 베드로와 갑자기 카드게임을 하러 갑니다.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가향교회 지체들과 놉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겁니다. 제가 요즘 읽은 <창조의 비밀>이라는 책에 의하면 우주에는 9차원까지 있다고 합니다. <초끈 이론> super strings 이론이 제가 요새 읽은 책 중에 가장 충격적인 내용인데 위키피디아에서 한참 찾아봤습니다. 이 이론은 우주가 DNA처럼 이중나선 벤더처럼 꼬여 있는데 그 벤더가 9차원이 돼 있기 때문에 3차원 세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9차원으로 가면 옛날 사람과 지금 현대인이 같은 만남이 가능하다, 그래서 제가 천국을 이해했습니다. 모든 시대 사람들이 다 한 장소에서 모이려면 9차원이 안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먼저 가신 주를 뵈러간다는 말, 먼저 간 성도를 보러 간다는 말이 맞는 겁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품 안에서 이렇게 멋진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타내신 하나님만 참입니다. 기독교도 참이 아닙니다. 제도교회도 많이 틀렸습니다. 제도교회나 제도기독교나 제도권 이슬람이나 똑같이 타락했습니다. 제도권 조계종도 다 타락했습니다. 오로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모노게네스 히오스 만이 ‘하나님을 나타내셨느니라’ 저는 여기에 희망을 겁니다. 그분이 죄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입고 척추가 상해 누워 있는 우리를 은혜의 직립보행자로 만들어주셔서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만들어주신 그 하나님이 바로 누구냐?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다, 그분은 그런 독생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들로 자임하다 이제 죽게 됐습니다. 유대종교의 엄청난 누적된 잘못된 전통을 창조적으로 혁신하기 위하여, 네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말하니? 네가 왜 안식일을 이렇게 급진적으로 해석하니? 내가 독생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다, 라고 강조함으로써 진실을 말하다가 죽게 됐습니다. 16절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다 박해를 초래했으니까 우리 죄로부터 우리를 건져주다 박해를 초래했으니까 우리 죄 때문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중요합니다. 안식일 개념은 유대인에게 일의 중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안식일은 일의 중지가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저등노동의 중지이면서 생명을 구하는 고등노동의 시작이다, 이렇게 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은 이런 겁니다. 안식일은 저급한 노동, 먹고 살기 위하여, 내 이익을 담보하기 위하여 즉 내 종을 부려서라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지주들의 저열한 노동의 중지이며 더 고등한 노동의 시작이다, 고등한 노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잠김, 내 존엄성을 회복함, 마멸되고 마모된 내 정서를 회복함, 이런 것이 바로 고등 노동의 시작입니다. 안식일은 일하는 날입니다. 어떤 날입니까? 저급한 노동대신에 우리 아버지가 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38년 된 병자를 구해내는 일, 이런 일을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하십니다. 안식일은 일의 중지가 아니라 일의 차원을 달리하여 계속 일하시는 아버지의 날이다, 어떻게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당시 어떤 문서를 봐도 이렇게 안식일을 해석하는 분이 없어요. 우리 예수님만 이런 해석을 합니다. 이건 고대 1세기 때 예수님 당시 모든 유대종교 문서를 다 뒤져봐도 이렇게 안식일을 기가 막히게 해석하는 분이 없어요. 아버지의 독생하신 하나님 아들, 아버지 품속에서 아버지의 완벽한 뜻을 공감하고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대리하신 그분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생명을 구하는 일을 태초부터 해왔었고 나도 아버지처럼 38년 동안 죄로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라고 말함으로써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했던 유대종교의 무작하고도 냉혈한적인 시선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공부하지 마라, 아닙니다. 어떤 이유로 공부 못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안식일에 친구 이삿짐 나르러 갔다가 토요일에 너무 지쳤다, 그런데 월요일에 시험을 치르는 대학생이 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해요? 친구를 도우러 가서 토요일 내내 몸살 나서 공부를 못한 사람이 월요일에 시험을 쳐야 하는데, 이런 사람은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 가서 공부를 해도 전혀 죄가 아닙니다. 불안함 속에 계속 떨면서 안식일 준수를 문자적으로 준수하다 드디어 F를 맞아 장학금도 못 받고 부모님께 엄청난 경제적 재난을 입히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안식일은 추가적으로 이미 토요일에도 공부할 시간이 있었는데 그냥 가향교회 예배드리고 남산도서관에 가서 11시부터 스타벅스 커피마시면서 A학점 다 받으려고 하는, 초과이익을 누리려고 하는 탐욕의 습성을 기르는 건 매우 나쁩니다. 그러나 양진일 목사나 명구 형제 이사를 도와주다 허리를 삐끗해서 종합시험을 치는데 주일날 안양 가서 공부하는 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다음 내 생계가 모자라서 일하는 것, 안식일 범하는 것 아닙니다. 가향교회 앞에 풀빵 장수가 있는데 이 사람이 가향교회 교인이 천명되기 때문에 주일날 이 풀빵을 안 팔면 도저히 안 되기 때문에 주일날 와서 생계를 위해서 풀빵을 판다, 이 사람은 안식일을 범하는 게 아니라 안식일을 누리지 못하는 비참함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안식일을 누리고 싶어도 못 누리는 사람이 있고 안식일을 범하면서 종업원을 일 시켜서 계속 초과 이익을 얻는 악당이 있는데,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당하는 사람은 이 악당들입니다. 안식일에 생존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안식일을 범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생존권 자체로 벼랑에 몰린 사람이 일하는 걸 생명을 구하는 것으로 봤고, 그것은 축복하셨어요. 그러나 쟁기를 갈고 종들을 시켜서 초과생산성을 누리기 위해서 일을 많이 시키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막으셨어요. 이 말은 노예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품꾼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주셨어요. 일종의 사회보장법이에요. 이런 의미의 안식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이교도와 유대인들 사이의 가장 큰 법입니다. 1967년 6.25 전쟁 이후에 제4차 중동연맹의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안식일에 유대인을 공격했습니다. 안식일에 42대의 공중비행기가 와서 이스라엘 탱크를 다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제4차 전쟁은 이스라엘이 집니다. 안식일에 전쟁을 했기 때문에, 안식일에 전쟁을 안 할 줄 알고, 이슬람도 안식일에 쉬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안식일에 공격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딴 날 공격을 해서 그 전세를 다 복구하긴 했습니다만, 여러분 여기서 우리 하나님은 안식일 자체의 신성성을 지키기 위해서 38년 된 병자를 하루 더 누워 있으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몰상식한 종교를 극복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의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독생자의 확신과 독생자의 단호함과 담대함과 독생자의 엄청난 자비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결론 맺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밀접하게 교제를 나누는 사람은 잘못된 종교의 해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이런 하나의 원칙이 나오는 거예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독생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독생자급 순종을 할 수는 있지만 독생자의 순종은 한번이면 족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품속에서 아무리 기도를 내가 오래해도 이렇게 예수님처럼은 안 됩니다. 다만 모방할 수 있고 예수님과 같은 효과는 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품속에서 기도하고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고이 생각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교제, 이것이 얼마나 사회적 공익성이 뛰어난지를 아셔야 해요. 바깥에서 하는 활동은 쉬워요. 제가 바깥에서 설교하는 건 쉬워요. 그러나 제가 남 안 보이는데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아버지 하나님 뜻을 묵상하면서 아버지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순종하는 건 어려워요. 여러분, 아버지 품속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야만 거리에서 이길 수 있어요. 아버지 품속에서 아버지 안 이래 진일보한 사람이 역사의 모순을 이길 수 있어요. 우리가 청계천에 가서 촛불 드는 건 쉬워요.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가서 아버지 품에 잠겨서 몇 시간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고도의 용기로 무장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이건 정말로 정직한 사람만이 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가 독생자급 확신과 독생자급 극한 순종으로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품속에서 오는 교제의 기쁨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교제의 기쁨이 큰 사람이었어요. 표정이 일그러지는 분이 아니라 엄청나게 천진난만한 확신과 열정이 넘쳤기 때문에 그 극한 악을 신적인 명랑 쾌활함으로 이길 수 있었어요. 신적으로 명랑 쾌활한 사람이 악을 이기는 거예요. 그런 신적으로 명랑 쾌활한 분, 자기 안에서 희열이 넘치는 그분이 악의 공격을 받고도 복수심에 넘치지 않게 돼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불렀더니 독생자급 교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오늘 날 행동이 많이 강조되는 시대에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 아버지 품속에 고요히 잠겨서 몇 시간 째 비밀한 초막 속에 감춰져 있는 고도의 영적훈련들, 이것은 별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집단으로 하는 행동은 쉬어요. 겉으로 성명서 내는 거 쉬워요. 내가 감옥 가서 5년 사는 거 쉬워요. 그러나 내가 일생 동안 아버지 품안에서 아버지랑 교제하면서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확신으로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종교의 폐해를 극복하는 위대한 사역을 펼쳐내는 것은 아버지 품속에서 오는 사랑의 열정과 어떤 위험도 감수하는 용감무쌍함, 독생자급 확신이에요. 이런 독생자급 확신이 넘칠 때 인재가 나오고 인물이 나오고 지도자가 나오는 겁니다. 우리 가향이 아버지 품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셨던 독생자처럼 아버지 품속에 잠겨서 이 땅의 모든 종교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 해방의 종교, 인간 해방적 기독교가 출현하는 데 앞장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셨고 아버지 하나님 품안에서 하루 종일 일생을 보내신 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너무 넘쳤기 때문에 그는 매를 맞아도 기쁨을 잃지 않았고 창에 찔려도 희열을 잃지 않았고 어떤 복수심에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의 품안에서 자라게 도와주시고 독생자급 순종을 완성시켜 주소서. 38년 동안 누워 있는 사람을 은혜의 직립보행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의 기독교가 되게 도와주시고 가향교회가 되게 하여주소서. 하나님 38년 동안 치명상을 입고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도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는 저희들의 무자비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무한 자비의 마음으로 은혜의 질주가 필요한 아들에게 선물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가향이 독생자급 순종을 바치는 아들딸들의 동아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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