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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9(주일 1부예배설교)

by 【고동엽】 2022. 1. 30.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

 

오늘 본문은 38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우연한 방문을 받고 회복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언가를 배울만한 것, 우리가 어떻게 하면 38년 된 병자와 같이 자기 초월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 편에서 할 능동적 행동은 실제로 거의 없습니다. 우리 바깥에서 결정적으로 우발적으로 우리를 방문해주시는 그분이 없다면 우리는 38년째가 아니라 48년째 50년째 무기력하게 누워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죄를 율법에 복종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 즉 걸을 수 없는 상태라고 봅니다. 성경에서 걷는다는 할라크라는 동사입니다. 할라크라는 동사는 순종한다,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이것이 걷는다는 동사가 쓰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했다, 이때 걷는다는 동사를 썼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행하여 완전함을 추구했을 때도 걷는다는 동사를 썼습니다. 걷지 못하고 누워 있는 상태,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거의 바닥난 상태,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 무능력 상태가 바로 죄입니다. 죄는 무능력입니다. 죄인의 특징은 무능력, 죄인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취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죄인은 아무 것도 의미 있는 성취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실제로 성취한 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인생의 업적이 아닙니다. 전부 다 마이너스 업적입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해서 얻은 성취, 탐관오리 짓을 해서 받은 부, , 재산, 이건 하나님 앞에서 빛 가운데서 내 놓을 만한 성취가 아닙니다. 그건 전부 다 그를 지옥으로 빠트리는 것이 됩니다. 누워 있는 상태,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 것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식물은 심겨진 그곳에 가만히 있습니다. 동물은 심겨진 곳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신체의 거주이전 자유권이 있습니다. 인간은 식물과 동물보다 훨씬 더 고상하게 내가 내 삶을 복잡하게 계획하여 내가 내 존재를 완전히 구성할 수 있고, 완전히 새롭고 풍요롭게 구성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 자아형성권이 있습니다. 동물은 그렇지 않죠. 개는 비슷하게 개입니다. 프란체스코 같은 개가 없고, 이스카리욧 유다 배신자 유다, 전두환 같은 개도 없고, 이태석 같은 개도 없는 겁니다. 개는 비슷하게 개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전두환 같은 악인도 있는 반면에 이 세상에 모든 죄를 자기가 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고 남수단에 있는 톤즈강에서 썩은 물을 먹고 살아가는 문둥병자들의 불편한 몸과 썩어 문드러지는 육신이 자기 책임이라고 믿어버렸던 이태석 같은 사람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인간은 자유를 통하여 자기를 결정하고 완전히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식물과 동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누워 있는 상태, 38년 째 누워 있는 것은 죄인 상태입니다. 무기력 상태입니다. 척추가 부서지고 피가 공급되지 않는 겁니다. 이런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는 곳이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베데스다 연못은 너무 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자기하고 비슷하게 불행 한 사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꺽쇠 괄호 안에 있는 것은 어떤 사본에만 있고 거의 대부분 사본에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꺽쇠 괄호 안에 있는 건 읽지 마시고, 누워 있는데 분사구문,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그 안에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이런 사본이 있습니다. 이 사본 상의 증거가 있는데 이건 두 가지죠. 첫째 천사가 물을 휘젓는다는 건 우리식으로 말하면 간헐천온천 정도가 되는 겁니다. 갑자기 붕 끓는 겁니다. 그걸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한다고 봤고,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그 말은 천사가 물이 부글부글 끓을 때 마그네슘과 미네랄 같은 종류가 엄청 많이 올라오겠죠? 최초로 분출할 때 그 물을 뒤집어쓴 사람이 나았다는 말이겠죠? 이건 일종의 카더라 통신입니다. 그런 말이 있는 것인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릅니다. 다만 먼저 내려간 사람이 나았다는 말은 있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 먼저 내려간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먼저 내려간 사람이 다 가버렸기 때문에 먼저 내려간 사람만 낫는다는 선착순 구원론을 가진 사람만 지금 앙심을 품고 여기 누워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물이 부글부글 끓을 때 그 순간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이 동역을 했으면 어땠을까요? 한 사람은 방향을 보고 한 사람은 다리가 성하니까 둘이 다니면 되겠죠? 그런데 이런 21조의 팀을 이루기 힘든 사람은 38년 된 병자 같은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희망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항상 선착순 구원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희망이 없는 거죠? 그래서 38년째 누워 있는 거죠. 38년째 누워 있는 건 지금 저희로선 상상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루만 누워 있어도 인생이 비참하고 온갖 절망의 기도를 다 찾아보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참 공감이 안 되는 건 아픈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저의 목사로써 치명적 약점입니다. 아파보지 않아서요. 그래서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동정하는 체 하는데 실제로는 마음 깊이 뼈저린 동정이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폐도 한쪽 잘라내고 간도 잘라낸 사람이 동정심이 많은데, 저는 폐활량도 좋고 간도 다 괜찮으니까, 물론 지방간이 있긴 합니다만, 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낄 만큼 아프지 않기 때문에 목사로써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우리 양진일 목사는 치통도 심하기 때문에 목사훈련도 잘 받고 하는데 저는 그 흔한 치통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38년 째 누워 있는 이 병자의 마음을 30년째 공감하려고 하는데 안 됩니다. 30년째 보고 있는데 이 본문이 공감이 안 돼요. 이 본문은 공감이 안 되지만 마땅히 해석은 해야 해요. 이 차례가 왔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아픈 사람의 연약함에 정상인이 뼈저리게 사무치게 공감하고 동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38년 된 병자는 절망적입니다.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에 성전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명절 축제 환호성에 배제된 사람인 베데스다 연못 보건소로 온 것입니다. 시립보건소로 온 겁니다. 시립보건소에 와서 누워 있는 자에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지금 크리스마스에 명동성당과 영락교회 가지 않고 행려병자수용소에 온 겁니다. 예수님은 축제의 환호성이 지배하는 황금의 도시 예루살렘 요새로 가지 않고 베데스다 연못에 가서 행려병자들의 절망이 겹겹이 쌓여 있는 곳에 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오자마자 38년 된 병자를 의도적으로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 분명히 의도적으로 오신 겁니다. 의도적으로 오셨는데 그 중에서 예수님의 시선을 자아내고 시선을 집중시킨 사람은 38년 된 병자입니다. 아마 다른 병자들보다 훨씬 더 예수님께 비탄을 자아내는 모습이었겠죠?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보시고 지각동사 아시고,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보시고 아신다, 동정심이 발동하는 가장 기초적인 관찰입니다. 우리가 누구누구를 지속적으로 보고 알고 여기까지가 동정심의 90%입니다. 우리가 눈을 가진 까닭은 동정심을 단련하기 위한 겁니다. 누구누구의 누워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누워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 비참하게 오그라들고 생명이 파손된 것을 보시고, 그리고 38년 된 오랜 숙환, 오랜 질병으로 고통 받는 것을 아시고, 보고 알았다는 두 가지가 예수님에게는 큰 하나의 메시아적 동정심, 메시아적 지각 동사입니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았다 해서 공감까지 가는 단계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보고 아는 단계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아무도 여기까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거든요.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여기까지는 보통 성자도 할 수 있지만 네가 낫고자 하느냐이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끄집어내서 낫게 할 수 있는 희망의 실마리를 제시할 수 있는 인 단계는 굉장히 깊숙한 단계입니다. 책임 있는 질문입니다. 책임을 지겠다, 낫는 것에 도움을 주겠다, 낫는 것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책임을 동반한 질문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겁니다. 이런 겁니다. 우리가 지나가다가 아주 못 사는 집을 심방해서 또는 그 못 살고 아주 빈한한 집 그 자녀를 보고, 너 정말 공부 잘하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묻는 것은 잘할 수 있게 만들어줄 실마리가 있을 때만 묻는 질문이지, 그냥 객기어린 질문이 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보고 낫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이건 너무 상식적이고 마땅히 인간이 이래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불행과 고통을 보고 그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그를 건져주고 싶은 평상시 같은 상식적인 동정심이 발동하는 것이 부서지지 않은 존엄한 인간의 원래 형상입니다. 이게 원래 하나님 형상입니다. 원래 하나님 형상은 이렇게 아파 있고 죽어가는 이웃을 향해서 책임감 넘치는 부담을 안고자 하는 질문을 터트리는 것입니다. 원래 아담이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됐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손되지 않은 감수성과 동정심, 원래 인간이 이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얼룩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렇게 됩니다. 죄로 오염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공감을 잘 하게 되고 책임감 넘치는 질문을 하게 되고 그 사람의 불행에 발을 디뎌놓고 그 사람의 불행, 38년 동안의 식물인간 상태로부터 그를 건져내고 싶은 열망을 책임지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이웃의 고통과 불행을 나누어진다는 뜻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살아내고 있는 저주 어린 질병, 저주를 대신 져준다는 거거든요. 저주를 대신 져주는 거예요. 대신 짐지는 것 아닙니까? 이 질문을 통하여, 사랑은 뭐죠? 우리가 예수님을 실컷 믿는 것은 38년 된 이런 병자 같은 사람을 볼 때 메시아적 동정심과 메시아적 책임분담에 관련시키기 위한 것이거든요. 우리가 예수 믿는 까닭, 그럼 무엇이 보입니까? 우리가 죽어서 가는 게 구원입니까? 바로 이런 38년 된 병자 같은 이웃을 보고 내가 이렇게 책임분담을 하겠다고 발을 내딛는 자체가 구원입니까? 이렇게 착한 일 하고 나면 오는 게 구원입니까? 이렇게 착한 일 하는 것 자체가 구원입니까? 이것 자체가 구원인데, 우리가 생각할 때 이런 일을 하고 나면 주는 어떤 선물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니까 많은 강남 사람들이 구원을 지금 자기가 누리는 삶의 격조와 상관없이 뚝 떨어지는 구원, 몽환적인 구원을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 몽환적인 구원이 아니고 38년 된 병자를 보고 이렇게 묻고 공감하는 자체가 구원받은 거란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아들 형상을 회복한 거란 말이에요. 그게 구원 받은 건데 그런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으면서 다른 구원을 생각한단 말이에요. 예수 믿는다는 말은 유대인의 명절에서 배제된 채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메시아적 동정심으로 메시아적 시선을 가지고 메시아적 공감을 하면서 메시아적 책임 분담을 하는 것, 이게 바로 예수 믿는 궁극적 목적이고 이렇게 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구원받은 거란 말이에요.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감,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들 형상을 회복함, 하나님의 아들 형상을 회복하면 메시아적 동정심 메시아적 시선 메시아적 책임분담의식이 일어나서 38년 된 병자의 아우성이 있는 그곳에 내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감, 이렇게 사는 것이 구원입니까? 아니면 이런 아픈 사람이 전혀 없는 압구정동 도곡동 타워팰리스 들어가서 날씬하게 입은 예쁜 사람들 만나서 이탈리안 피자 먹으면서 이렇게 머리 파마하고 명품 가방 들고 다니고 천만 원짜리 밍크코트 입으면서 명함 주고받으면서 왔다 갔다 하며 구역예배하고, 장애인이 하나도 없고 아우성치는 사람도 전혀 못 만나는 그렇게 사는 그것이 구원이겠냐고요?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주는 구원은 저 갈릴리 황토밭 아우성이 있는 그곳에 가서 메시아적 시선을 가지고 38년 동안 누워 있는 사람의 인생에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이 가서 물어보는 것까지 가는 책임분담행위, 다시 말해서 불행한 사람의 삶의 틀거지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메시아적 시선으로 신문읽기, 메시아적 시선으로 공감하기, 책임분담하기, 이게 예수 믿는 자의 social action, 사회적 행동이고 구원받은 사람 특징입니다. 보시고 아시고 낫고자 하느냐? 낫게 해주고 싶은 열망이 가득할 때 가능한 질문이거든요. <모토 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에 보면 체 게바라라는 사람이 나오죠. 아주 집안이 좋은 명문집안의 자손이죠. 의과대학생입니다. 그 사람은 천성적인 천식환자였어요. 이 사람이 모토 사이클을 타고 라틴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일대 모든 풀뿌리 민중의 삶의 틀거지를 샅샅이 민중시찰을 합니다. 메시아적 시선 메시아적 동정심을 가지고 온 라틴 아메리카를 돌다가 마침내 문둥병자 촌에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체 게바라가 의료행위로는 다 치료할 수 없는 엄청난 라틴아메리카의 탐욕과 악의 사슬을 보면서 이건 혁명을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다, 혁명을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는 문둥병, 혁명을 통해서만 고칠 수 있는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병을 본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사람은 총을 들었습니다. 25세에 쿠바의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 즉 총 들지 않고 쿠바의 가장 악한 친미정권을 총 들지 않고 선전선동으로 쫓아내면서 제1차 혁명을 합니다.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총 들지 않고 무혈로 민중을 계몽해서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치료하려고 했던, 민중의 의사가 되려고 했던 체 게바라가 쿠바 카스트로에게 외무부 장관직을 제안 받습니다. 나는 혁명의 귀결이 정치적 성공에 있지 않다,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질병 고통의 아우성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는 들판에서 싸우련다, 그렇게 하고 다시 갔습니다. 그때 그 유명한 체 게바라의 모자입니다. 체 게바라의 베레모입니다. 체 게바라 베레모 티셔츠 있죠? 체 게바라가 누군지 모르고 게 이름인지, 오양맛살인지 대부분 모르더라고요. 우리가 학교 들어갈 79년만 할 때도 체 게바라를 잡는 순간 눈물이 나서 체 게바라 전기의 끝을 읽지 못했습니다. 책을 들자마자 정치에서 이렇게 깨끗하고 이렇게 의롭고 이렇게 정직한 사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나 할 정도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내전에 가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60년대가 체 게바라와 호치민이라는 공산당 지도자 중에서 가장 성자 같은, 예수님과 같은 가장 성자 같은 두 지도자가 베트남의 호치민과 체 게바라, 호치민은 수상이 되고도 어린아이들이 수상 할아버지 수염에 열 명씩 매달려서 수염을 만졌습니다. 수상 할아버지가 어린 아이들을 늘 껴안고 너무나 검소하게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게 호치민입니다. 호치민과 체 게바라, 우리가 체 게바라처럼 될 수는 없지만 민중시찰을 통해서 철두철미하게 아우성의 담금질 되면 동정심에 무한책임의 시선이 나오고 책임감이 나오는 거거든요. 여러분, 아픈 사람 이야기를 많이 아는 것이 성숙에 도움이 됩니다. 신문 기사 읽을 때 연약하고 아픈 사람 기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거의 다 특히 폭력에 희생이 되거나 공권력에 희생된 사람이 죽어가는 소식은 거의 신문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 정권에서 특별히 더 그랬습니다. 보시고 아시고 낫게 하고 싶은 강력한 책임감으로 38년 된 병자의 삶의 반경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갔습니다. 이런 자태, 예수님이 자아내는 총체적인 시선의 힘, 동정심의 포스, 낫고자 하느냐하고 묻는 질문의 강력한 책임감, 이런 것을 총체적으로 느끼게 만들어준 후에 예수님께서 묻는 것이, 당신 낫고 싶습니까? 선착순 구원론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마음이 병든 이 사람이 말합니다. 7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선착순 구원론이 지배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정확하게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 다시 말해서 속도경쟁에서 졌기 때문에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수능시험 잘못 쳤다고 해서 불행 이런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선을 믿는 사람들은 반전의 기회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절대로 지금 당장 대한민국의 수능시험을 못 쳤다고 해서 구원 못 받는 것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지금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기 때문에 나는 구원 받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심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그 질문으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치료를 기대하도록 만들었는데, 이 사나이는 그 질문을 주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치료를 생각하지 않고 아직까지 저 희망도 없는 연못에게 구원을 기대합니다. 이 세상 사람의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삭아버린 마음, 이 죄악된 마음, 이 무너져 버린 마음, 파손된 마음,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걸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묻는 그분의 시선 중심으로 자신의 치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졌기 때문에 나는 구원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만 있다면 구원이 온다는 이런 신자유적인 이데올로기를 이 사람도 믿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빨리 집을 사도 구원 아닙니다. 빨리 장가가도 구원이 아니고 빨리 고시 합격해도 구원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 절대로 구원 아닙니다. 경쟁에서 이겨도 구원 아니고 져도 구원의 박탈이 아닙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내 구원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 있지 않고, 저 미신적이고 저 불확실한 연못의 힘에 절대로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 구원은 우발적으로 내 인생의 비참한 순간, 내 인생의 고통의 반경 안에 뚜벅뚜벅 걸어오신 그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건 지극히 우발적이기 때문에 지극히 우발적인 그분의 방문을 받는 것은 내가 논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나의 무슨 매력이 그를 유인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비참함이 예수님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신명기 7장과 9장 두 군데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까닭은 훌륭하고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가장 인구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가장 엉성하고 가장 못났고 가장 초라해서 하나님께 선택됐다고 말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매력으로 예수님을 유인한 게 아니라 나의 불리함, 나의 치명적 약점이 예수님을 내 인생의 반경 안으로 catch attention, 불러들이는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예수님이 이렇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이 돼서 다른 사람 인생의 반경 안에, 그 고통의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는 걸 이 본문은 가르치는 거죠. 예수님이 또 내려와서 하기를 기대하면 안 되고 예수님 얼과 영으로 가득 찬 우리가 복제예수가 돼서 다른 사람, 숱한 각 나라 각 민족의 38년 된 병자에게 나가라는 뜻이죠. 이 본문은 그런 뜻이죠.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구원을 찾는 많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 그들을 주목하여 그들의 상상력이 빈곤한 인생의 반경 안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 반경 안에 뚜벅뚜벅 걸어가서 우린 명령해야 합니다. 우린 질병 앞에서 죽음의 힘에 짓눌려 있는 사람에게 생명의 힘에 순종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어나고 순종해야 합니다. 실험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이때 치료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려다가 치료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할 때 치료가 일어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힘이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가서, 들어 짊어질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43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여러분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 38년 동안 네 운명을 속박했던 운명주의를 들어버리고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지만 걸어가 보려고 노력해보아라, 걸어갈 힘이 생기리라, 이런 뜻입니다. 걸어가려고 애쓰고 순종하려고 애쓰면 순종할 힘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초월은 이것입니다. 누워 있는 인생이 걷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누워 있는 것,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과 기피의 대상이 됐던 그 인생이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하나님과 23각의 동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다른 사람을 끌어가면서 주체성을 회복하면서 내가 내 존재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경험하는 것, 그래서 내가 너무 좋은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I am proud that I am. 내가 나인 것이 기쁜 게 진짜 구원 받은 겁니다. 지금 자기가 자기인 것이 기쁜 사람이 구원 받은 거예요. 직립보행인간이 되고, 자기 짐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 제 짐을 들고 가는 사람, 언제부터 우리가 일어날 힘이 생깁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면서 하나님 말씀 때문에 일어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 때문에 절망을 극복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38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39년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런 리얼리즘, 이런 현실주의, 이건 냉정한 현실주의 정확한 과학주의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주의 안에서 인간의 쇠퇴해갑니다. 이런 현실주의를 이기는 것은 내가 38년 동안 일어나지 못했지만 이제 나의 인생의 반경 안에 들어오셔서 나에게 책임 분담을 하시고 내 인생의 반전을 일으키실 그분이 나에게 하는 명령,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명령하셨으니 이 명령은 나에게 곧 현실이 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순종할 때 일어날 힘이 생깁니다. 정말 순종이 중요합니다. 비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능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한 번 순종할 때마다 말 두 마리가 끄는 숱한 마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앙망하고 하나님 말씀만이 삼성과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같은 이 세상의 온갖 잡설과 세상의 재테크보다 우리 하나님 말씀만이 이 세상의 성공을 보장한다, 이런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만 계속 들고 파는 것, 이때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는 새 힘이 생깁니다. 자기 초월의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충분히 순종하지 않으면 무능력상태에 빠집니다. 하나님 말씀에 오랫동안 순종하지 않으면 식물인간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오랫동안 순종하지 못하면 힘이 없기 때문에 민폐를 끼치고 자립보행하지 못하고 직립보행하지 못하고 비틀비틀 거리고 드디어 눌러 앉아 현실주의적인 냉담함에 빠져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날마다 한 번씩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 능력을 공급받아 자기초월을 맛보고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갈 뿐 아니라 마침내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는 새 힘을 공급 받습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합니다. 안식일은 뭐하는 날이죠? 자기 침상을 들고 일어나 자기초월을 맛보는 날, 안식일은 하나님 말씀으로 아멘으로, 가슴깊이 아멘 순종합니다, 제가 제 죄짐을 들고 일어나겠습니다, 주님 제가 식물처럼 한 곳에 매여 있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동하겠습니다, 제가 제 자리를 들고 일어나겠습니다, 하나님 제게 명령하셨으니 현실이 될 줄 믿습니다, 제가 경험하는 현실보다 하나님 말씀이 열어젖히는 현실이 더 실제적인 현실입니다. 걷는 내 모습, 이것이 나의 미래입니다. 누워 있는 내 모습은 과거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걷는 내 모습을 창조하셨다면 뛰어가는 내 모습을 창조하시고 날아가는 내 모습을 창조하셨다면 그대로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한 번 크게 결단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온 힘을 다하여 아멘 하면서 자기 초월을 맛보면서 제 짐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마침내 순종한 번 할 때마다 큰 힘을 공급받는 경건의 비밀을 터득하는 날입니다. 여러분, 지금 고착상태, 다시 말해서 진보가 없는 삶, 영적 전진이 없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비의 활동에서 멀어져버린 삶, 신앙생활의 감격과 감흥을 상실한 삶, 이 사람이 바로 38년 된 병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이 싫은 사람, 아침에 말씀 펴는 것이 싫은 사람, 찬양하는 것이 싫은 사람, 형제들하고 어울려서 믿음을 도모하는 것이 싫은 사람, 냉담한 사람, 38년 된 병자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모양 이 꼴 된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다, 다른 사람 직장동료를 탓하는 사람, 모든 걸 이명박 탓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거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의 정세와 권세가 내 인생의 행복을 다 박탈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반경에 오셔서 터트리는 전광석화 같은 말씀을 들고 일어나서 지금 내 삶의 작은 반경 안에서 우리는 초월을 맛볼 수 있고 능력을 맛볼 수 있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볼 수 있는 거거든요. 우리는 안식일에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일어난 순간, 자기 초월, 즉 독립적 보행, 직립보행, 다시 말해서 독립적인 신앙생활, 아무도 안 봐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일삼는 즐거운 영성생활, 이것이 38년 된 병자가 회복되는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이런 은혜의 직립보행으로 경건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진보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 인생의 반경 안에 들어가서 38년 된 병자 인생의 반경 안에 들어가서 메시아적 동정심을 구상하면서 메시아적 책임분담을 구상하면서 또 다른 복제예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안식일은 주님 말씀 듣고 순종함으로 순종할 힘으로 다시 자기 갱신을 맛보며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안식일날 무거운 죄 짐을 들고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가서 죄를 우리 등 뒤에 집어던지는 결단을 주소서.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되게 해주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감격을 회복하는 이 날 되게 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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