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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요한복음 6:1-15

by 【고동엽】 2022. 1. 30.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본문은 대개 목사님들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초점을 맞춰서 설교하는 본문이죠.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616절부터 마지막에 나오는 생명의 떡에 관한 논쟁에서 완전히 재해석됩니다. 오병이어의 핵심, 이걸 세메이아라고 하거든요. 표적의 핵심은 초자연적이고 기적과 같은 사건 자체에 초점이 있지 않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더 깊은 영적 진실, 표적은 뜻이 세메이아입니다. 세메이아는 표적 표식인데, 부산에서 대전으로 올라올 때 보는 서울 가는 길이 몇 km 남았다, 사인 표지가 있죠? 그게 표적입니다. 오병이어는 표적인데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영적진실을 쉽게 설명하는, 당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서론 본론 결론의 논문을 쓰지 않고 다섯 개의 떡덩이와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너무 위험한 일을 하신 거예요.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면 오래 못 사세요. 왜냐하면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는 그 사태를 겪고도 왕으로 추대 안 받아요? 너무 힘들죠. 지금도 추대 받죠. 양 목사나 제가 만일 서울역에서 그렇게 한다? 노숙자들이 우리들을 가만히 두지 않죠. 바로 노숙자들의 왕이 됩니다. 바슬레이아가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자체의 초자연스러움이 사람들한테는 놀람의 대상이 돼요.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신뢰, 능력 때문에 왕이 됩니다.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보지 말고 자신의 본질 존재의 본질, 내가 하늘에서 온 떡임을 즉 나를 먹고 마셔야 할 것임을 가르치는 일에 초청했어요. 요한복음 6장은 공관복음서의 성만찬 본문과 대응되는 요한복음의 성만찬 본문이다, 요한복음 6장은 공관복음서의 산상수훈과 공관복음서의 성만찬 본문이 합하여진 것이다, 그런 이해를 가지고 보면 됩니다. 왜 산상수훈이라 봐야 하는가? 왜 이걸 성만찬 본문이라 봐야 하는가? 요한복음에 성만찬이 없죠? 요한복음 13장에 원래 성만찬이 이뤄지던 마지막 현장입니다만, 없습니다. 거긴 세족식만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6장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13장에서 성만찬의 본문을 완전히 빼버리고 발을 씻는 세족하는 그 장면만 남겨놓았습니다. 여러분께서 한글성경 또는 영어성경 그리스성경을 다 보면 압니다.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디베랴의 바다 갈릴리 바다입니다. 원래는 사마타스 페스티베리야스, 디베리아의 바다 곧 갈릴리 바다, 로마의 2대 황제가 디베리우스죠? 그 디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어디서 건너갔는지 모르죠. 아마 가버나움에서 건너편으로 갔을 수 있어요.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여러분 병자들에게 한 표적은 요한복음 5장에서부터 많이 나오죠? 그런데 병자들에게 한 표적은 이미 누적된 표적입니다. 많이 누적된 표적, 놀람을 누적시켜서, 책임감을 누적시켜서 예수님께 엄청난 추종세력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칠 때 예수님은 어떤 진리를 보여주기 원합니까? 병 고치는 은사라는 단순한 진리, 초자연적인 miracle maker라는 miracle performer 그 정도로 알려지기 원했을까요? 아니면 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창조사역을 계속 하고 있는 하나님 아들이다, 그 진리를 드러내기 원했어요? 우리가 병이 낫는 것은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창조사역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창조주입니다. 하나님은 단한 번 창조주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가서 제가 자세히 말씀드릴 것입니다만, 그때까지 살아계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9장까지, 몇 년 걸릴지 모릅니다. 이재철 목사님 요한복음 강해 7년 했죠? 요한복음 7년 사도행전 7, 그 분 교회 가면 성경이 두 권밖에 없는 걸로 압니다. 66권 다 공부 못했다고요. 우리는 그래도 미가서와 요한복음 해주니까 헌금 많이 낼만한 교회 아닙니까? 그렇죠? 요한복음 9장을 가긴 갑니다. 병자들을 고친 그 사건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의 초자연스러움의 누적이 아니라 부서지고 파괴된 창조의 여러 국면들을 고쳐가면서 창조를 유지하고 창조세계를 maintain 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관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는 것이 창조주적인 무한책임의 감수를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병이 낫는다 하더라도 그건 하나님이 우리 질병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갖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요. 하나님의 duty입니다. 우리 병을 고쳐주는 하나님의 duty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앞으로 다 고쳐주실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 몇 사람을 고쳐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부서진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을 소생시키시고 고치셨어요. 그게 바로 예수님에게는 계속 창조, 창조주 하나님 아들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계속 창조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바로 마태복음 424- 51절과 똑같습니다. 병자들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이게 바로 카테마이 동사, 가르치려고 폼 잡고 앉는 것, 카테마이 동사, 앉는 겁니다.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산상수훈 본문과 똑같습니다. 4장 마지막 51절 장면과 똑같아요. 산상수훈이 기대되는 본문에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5장보면 유대인의 명절이지 않습니까? 51그 후에’ 6장에서도 그 후에니까 이 그 후에라는 말은 메타파우타, 메타, 파우타, after this things, 메타는 뒤에, 파우타는 이것을, 메타파우타는 맥락이 다른 글들을 연결할 때 이걸 씁니다. 메타파우타, 5장과 6장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단 말이에요. 4장과 5장 사이에 메타파우타가 그 후에란 말이 실린 것은 4장과 5장 사이에 시공간의 일치 맥락이 없어요. 서로 다른 주제를 도입한단 말이에요. 메타파우타, ‘그 후에이 말은 5장과 맥락상 그 뒤에 연속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맥락이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예수님께서 5장에서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그런데 이번 내용에서는 안 갔습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예수님의 3년 유월절 명절 중 한 번은 예루살렘에 안 간 겁니다. 7장에 가면 또 유대인명절이 나와요. 72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예수님이 왜 이렇게 명절을 배경으로 이런 사역을 하실까요? 7장에서는 원래 초막절에 있어야 할 참된 사건을 말합니다. 6장에서는 참된 명절은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이다, 참된 유대인의 명절 축제는 무엇이죠? 굶주린 무리가 다 같이 잔디밭에 앉아서 축제의 밥상을 나누는 것이다, 그게 참된 유대인의 축제에요. 5장에서 참된 명절은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서 걷고 뛰는 축제의 환희가 샘솟는 것이 참된 명절이다, 명절과 절기가 무엇이냐? 38년 된 병자가 식물인간의 무기력상태를 퇴치고 일어나는 날이다, 5장입니다. 6장의 참된 명절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에는 왜 진정한 명절이 없어요? 공동체가 산산이 조각나 있고 부서져 있고 분열돼 있기 때문에 명절이 없는 겁니다. 공동체적인 명절은 무엇이냐? 명절이란 말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내가 이 사회에 속했다는 느낌과 소속감을 갖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대한민국에 소속감을 못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면 명절스러움 축제스러움이 안 되지 않습니까? 참된 명절은 6장에서는 자기가 가진 오병이어를 내어놓아서 5천명을 먹이는 날이 참된 명절이다, 이런 메시지가 이 안에 있는 거예요. 이런 것이 전부 다 표적이에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건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는 거리를 초월하는 것 아무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고 놀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못하는 걸 하나님 이 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원하는 그 진실 앞에 우리가 놀라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놀라야 합니까?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그것에서 놀라야 합니까? 물 같이 무미건조한 우리 삶이 환희와 축제로 가득 찬 잔칫집 같은 분위기로 바뀌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음을 보고 놀라야 해요? 어디를 보고 놀라야 해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그 초자연스러운 현상을 보고 놀라야 해요. 기쁨 없고 씻기만을 강요하는 유대 종교, 자꾸 씻어야 하고 물로 정결케 하는 정결강박증에 빠진 그 유대교가 변화와 환희와 축제의 기독교로 바뀌어야 될 것을 알려주는 그 하나님 마음을 믿어야 해요? 어떤 게 표적의 진실이에요? 후자란 말이에요. 유대교는 요한복음 2장 맥락에서 보면 물로 씻어서 자기를 깨끗케 하려는 정결강박증 종교에요. 자기를 자학하고 씻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물로 사람을 씻어 존재를 변화시킬 수 없단 말이에요. 우리 하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뀌어서 축제의 그 환호성이 이어지도록 만들어주셔야만 참된 종교가 가능하거든요. 무엇이 표적일까요? 물을 가지고 씻으려고 하는 강박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유대인교인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물인 복음의 새 포도주, 이사야 25장에 말한 오래전 하나님이 준비했던 극상품 포도나무에서 만든 포도열매로 만든 포도주, 하나님이 만국에게 주려고 거룩한 양조장에서 만들었던 포도주를 먹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하나님 은총을 찬미하면서, 역동적인 찬미와 환희의 삶을 살아라, 이게 표적의 핵심이란 말이에요. 정결강박증에 빠져서 자학하던 사람들이 성령의 새 포도주를 마셔서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때문에 바뀌는 걸 경험하는 사람들이 터트리는 환호성이 교회의 중심이 된단 말이에요. 그게 2장이에요. 5장에서는 참된 명절, 솔로몬 행각 다섯에 방치돼 있는 없는 존재와 같은 병자들, 천신만고의 불행을 안고 사는 이 불쌍한 자들이 일어나는 그 날이 참된 유대인의 명절이 돼야 한다, 6장에서는 오래 굶어 남자 5천명이 직장을 떠나서 일터를 떠나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 위험한 현상, 이 위험한 굶주림과 기아의 시대에 참된 명절은 하나님께 자기가 가진 소박한 1인분 양식을 바쳐서 5천명과 같이 나누어 먹는 이것이 바로 표적, 이것이 바로 진실이에요. 우리 하나님은 여기서 두 가지 진실을 보여주십니다. 굶주린 무리들이 5천 명씩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 상황에서 이 난국을 돌파할 때는 내가 가진 작은 실마리, 내가 가진 1인분 음식을 내면 5천명 먹일 수 있다는 이런 나눔의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순전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만 기대했습니까? 우리의 능동적 실천도 이 기적에 동참해야겠습니까? 우리의 능동적 실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진공상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어요? 아니면 우리의 작은 헌신의 실마리를 바탕으로 이런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의 핵심은 안드레아스가 발견했던 이 어린 아이가 가진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덩어리입니다. 이것이 무얼 가리키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1인분 음식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께 갖다 바쳐서 오천 명을 먹이는 역사가 되게 만드는 초자연스러운 축제, 그러면서 인간의 능동적 실천이 여전히 중요한 축제가 교회의 본질이다, 이것이 참된 축제다, 5천 명의 음식을 가로채는 강도와 삯꾼 목자들이 많은 이때에 안드레아스가 발견한 이름도 없는 이 작은 아이가 갖다 바친 오병이어에서 오천 명을 먹이는 축제의 환희를 창조했다, 이것이 핵심이에요. 예수님의 열두제자의 이름 중에서 빌립과 안드레는 그리스식 이름이거든요. 시므온은 샤마 동사입니다. 듣다, 유다는 찬양하다는 말이에요.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주신다, 나탄 + 엘이거든요. 마태, 마탄 선물이에요. 빌립과 안드레아스는 완전히 그리스이름이에요. 이들이 그리스 이름을 썼다는 말은 그리스 말을 매우 잘했고, 그리스 헬라어에 매우 능통했단 뜻이에요. 헬라어에 능통했다, 열두 바구니 이건 이방인이 쓰는 거예요. 이건 이방인을 상대로 일어난 기적이에요. 지금 누가 굶주려요? 전 세계만민이 굶주리는 겁니다. 헬라어를 쓰는 빌립과 안드레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걸 보면 여기가 헬라어를 많이 쓰는 동네에 와 있는 유대인들이란 뜻이에요. 헬라어를 많이 쓰는 동네란 말은, 예수님 동시대에 세포리스 티베리우스 가이사랴 전부다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 지주 밑의 유대인들이 소작인들이었어요. 헬라어를 많이 쓰는 동네에 있는 굶주린 무리들이에요. 그런 굶주린 무리들이 전부 다 유대인들이에요. 그래서 빌립과 안드레가 주도했고 또 이백 데나리온, 1 데나리온이 75천 원 정도 된다고 보면 돼요. 그렇게 많은 떡, 7개월 동안 일한 품삯이에요. 7개월 동안 일한 품삯의 떡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너희가 이 많은 무리를 먹이라 하시니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예수님이 시험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대답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이 말은 돈으로 사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여기서 한신대 기장 측에서 해석하는 방법 이런 겁니다. 오병이어를 냈더니 전부 다 자기 도시락을 내기 시작했다, 합리주의적 설명이에요. 그러면 이건 초자연적인 표적이 아니라 초자연적 감동과 설득의 현장이죠. 예를 들어 미진자매님이 오병이어를 냈어요. 내니까 전도사님도 내고 목사님도 내니까 전부다 도시락을 내서 오천 명을 먹인 거예요. 이건 사람을 잘 감동시키는 설득력이죠. 이것도 표적 아닌 건 아니죠. 아무도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린 상태에서 오천 명을 먹게 만든 사건이니까 그것도 비범한 것 맞죠. 한신대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걸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러나 본문에 보면 그보다 훨씬 더 큰 놀람이 있는 걸 볼 때 초자연적인 기적, 우리 하나님은 하나 가지고 두 개 만드는 건 힘들지 않죠? 하나님은 이 세계만물을 빛을 창조하고 다 만들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만 만들었죠.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남자들입니다. 이 남자들로 앉게 하라, 사람들 하면 안드로포스이고, 안네 하면 남자만 가리켜요. 안드로포스는 남자 여자 다 같이 있을 때 쓰는 말이에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이때 앉게 하다 카테마이 동사가 영어로 reclining 인데 식사대형으로 앉게 하다, 이 단어의 원래 뜻을 안다면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식사대형으로 앉게 하라, 식사가 곧 제공될 거라는 기대감을 앉고 믿음을 고취하면서 앉게 하라는 뜻이에요. 이 말 뜻 자체가요. 식사가 곧 제공될 거니까 식사대형으로 앉게 하라고 말한 거예요. 이렇게 굶주린 무리들이 식사대형으로 앉을 때는 무슨 기대가 일어나요? 무언가 배고픔이 충족될 거라는 예감이 들면서 앉겠죠? 이런 일련의 행동으로 예수님은 믿음을 점차적으로 준비시키는 겁니다. 식사대형으로 앉게 하라, reclining at the table, 앉게 하라, 그 말은 매우 친밀하게 앉게 하라, 이런 뜻입니다. 식사대형으로 앉게 하라, 우정이 있도록 한통속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만큼 잘 앉게 하라, 이런 뜻입니다. 보세요. 식사대형으로 앉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우애를 나눈 형제자매지간으로 앉게 하라, 서로 우애를 먹을 수 있도록, 여러분이 여기서 식사할 때 그렇게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앉아요? 식사대형으로 앉죠. 한 사람도 밥맛없다는 사람 없죠? ? 단순히 chemical을 먹는 게 아니에요. 사랑을 먹는 거예요. 사랑과 함께 있는 식사를 먹기 때문에 맛있는 거예요. 그렇게 앉으란 말이에요. 4층 가향 마룻바닥처럼 앉으란 말이에요. 이름도 새들마루, 새들마루 대형으로 앉으란 말이에요. 우애감이 넘쳐흐르는 대형으로 앉아라, 친밀성을 경험하도록 앉아라, 참 중요합니다. 친밀성이 경험되도록 앉는 것 자체가 치료에요. 한 번 앉기만 해도 치료가 됩니다. 인간이 인간을 치료합니다. 사랑이 가득 찬 회중에 앉기만 해도 우울증이 낫는 거예요. 신적인 명랑쾌활함을 유지한 사람들과 찬양만 한 번 해도 우울증이 나아요. 실제로 너무 중요해요. 식사대형으로 앉게 하라, 형제자매의 우애감을 먹을 수 있을 만큼 형제자매의 친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앉게 하라, 그렇게 앉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식사대형으로 친밀감을 향유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그 남자의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베드로가 오천 명을 전도했다는 말은 요한복음 6장의 재현입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오천 명을 전도했다는 말은 생명 떡이 진짜, 요한복음 6장이 진자 실행됐다는 뜻이에요. 하늘의 생명 떡을 진짜 오천 명이 먹었다는 사건, 그 성만찬적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의 오천 명 전도한 사건이에요. 오천 명이 예수 믿고 새 생명을 얻었다, 그 말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 사건이 진짜 영적 버전으로 바뀌었다, 이건 육적 버전이에요. 그런 뜻이에요.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떡을 가지고 축사하다는 말은 에오리스시제, 부정과거 시제, 한번 딱 강조하고 있습니다. 떡을 가지다는 말은 자기 몸을 찢어 할 때, 에오리스시제, 한 번 가져, 한 번 일어난 시제는 동원전도사님 헬라어에서 무슨 말이라 해요? 부정과거시제, 한 번 일어난 사건, 떡을 떼어 축사함, 이 말은 자기 몸을 한 번 찢어 십자가에 영 단번에 죽으심, 나눠주시다, 미완료시제, 예수님의 한 번 죽으신 그 효력이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미완료시제, 나눠주시다,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괄호하고, 미완료시제,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저는 이 메뉴에 대해 매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먹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간장도 있어야 하고 샐러드도 있어야 합니다. 저는 떡하고 물고기 먹는 건 아무리 식욕이 좋아도 이 본문에서는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반찬도 없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불평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하늘의 독생자 그분은 물고기와 채소샐러드도 없이 김치도 없이 드셨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런데 저는 어쨌든 간에 원대로 주시니라에 웃음이 났습니다. 뭐가 먹고 싶어서 이렇게 배가 터지게 먹었다 이렇게 말하는지, 원하는 대로 다, 과장법, As much as demand, as much as they want. 주었다, 저는 이 본문에서는 괄호하고, 식욕은 돋아나지 않음, 이렇게 항상 씁니다. 12그들이 배부른 후에마가복음 83절을 보면, 이들이 매우 많이 굶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이 예수님 사건은 또 구약의 무슨 사건을 재현하는 사건일까요?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신명기 1818절입니다. 모세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의 굶주린 자를 먹일 그 선지자가 온다는 예언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는 코테이션 마크가 붙어서 괄호하고 메시아였어요. 예수님은 하늘의 만나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였던 그 사건을 representation, 다시 한 번 재현한 것이죠.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괄호하고 신명기 1818절이 말하는 그 선지자,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의 별칭 메시아의 별호 또는 별명으로 불리는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걸 초자연적인 표적이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신대나 기장교회들처럼 해석하는 건 그건 인간의 머리에 하나님의 능력을 끼워 맞추는 수준이라고 보기 때문에 별 매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오병이어라는 그 실마리를 가지고 양을 엄청 많게 하셨다고 봅니다. 양을 엄청 많게 하신 이 사태가 무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원대로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한 그분은 우리의 왕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이때 하파르제인 이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하파르제인, 억지로 붙드는 거거든요. 강력하게 붙들다, 힘으로 밀어붙여서 붙든 겁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놀라야 하는 장면은 앞의 이 장면도 놀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 굶주린 무리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이들이 엄청 영적으로 기갈된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기갈된 사람을 먹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양목사님과 이동원 전도사님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대의 젊은이들을 먹이려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들의 영적기갈을 먹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이들의 기갈을 먹이려는 마음이 간절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만 되는데, 이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있는 우리는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권을 받아야 해요. 여러분 찬송 중에서 그런 찬송 있죠? 세상 모두 사랑 없어, 이제는 503장으로 바뀌어버렸네요. 옛날에는 제가 다 번호 알았는데 저는 이 찬송을 참 많이 불렀습니다.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받기 원하네 저들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예수님은 무리들을 피하여 산에 올랐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서 영적 고도를 높이자마자 영적견인력, 영적흡입력이 많아지니까 또 많은 무리가 따라 올라갑니다. 우리가 신령한 메시지를 전하면 신령한 추종자들이 따라옵니다. 우리가 영적고도가 높아지면 분명히 따르는 자가 많아집니다. 이때 우리가 신령한 메시지로 감동을 주는 순간 더 많은 추종자가 불어나서 우리를 임금 삼으려고 하는 일련의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어떻게 됩니까? 우리한테 아직까지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닙니다. 우리가 산에 다시 들어가야 할 만큼 우리는 일단 추종자가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안전합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어찌될런지 모릅니다.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우리가 사람들의 영적기갈 영적 필요를 채우기만 하면 감당이 안 됩니다. 오늘날 엉터리 부흥사 보세요. 모든 사악한 부흥사들 보세요. 기적을 경험했다고 아예 프로그램으로 병자를 낫는 전문치료사 또는 영적지도사라고 매번 치유집회라고 광고를 하고 돌아다닙니다. 저는 이건 성경적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손기철 장로가 그런 점에서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사역의 현장에서 쓰임 받았다고, 그게 마치 라이센스처럼 오해를 일으킬만한 집회를 상시하는 것, 그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치유집회를 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집회에 때때로 치유가 일어났지만 치유집회를 프로그램처럼 만들어놓고 아예 광고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요즘 엉터리 부흥사 보세요. 신유의 기적 청계산 한얼산, 얼마나 많아요. 산은 산이에요. 얼마나 엉터리가 많아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자리에 우리를 놓고 예수님 닮자 하는 건 너무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 한 가지는 예수님이 대중들의 영적인 필요까지를 충족하지 못하고 육적 필요까지만 충족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임금 삼으려는 운동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저는 그래서 절대로 대중주의자나 군중주의자가 아닙니다. 저는 군중과 대중에 대해서 아주 경계를 합니다. 제가 군중과 대중에 대해서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군중과 대중은 집단적으로 깊은 사유에 이르는 결정을 할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맨체스터 축구팀 응원하는 군중이나 붉은 악마들은 다 군중에 불과합니다. 지금 군중에 불과한 사람들의 판단은 우리가 책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군중 자체 위에 그들이 밀어젖히는 파도위에서 정치력을 끌어내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군중의 노예가 됩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노예가 안 됐습니다. 우리가 중요합니다. 군중의 필요 영적필요를 채워주고 육적필요를 채우는 것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아젠다에 휘둘리는 것은 안 됩니다. 저는 그래서 악성댓글 문화 소셜 네트워크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기본적인 신중한 접근 경계심이 있어요. 통합진보당이 저렇게 된 건 너무나 명약관화 예견된 일입니다. 광주의 박주선씨 선거 운동했던 동장이 자살했습니다. 아파트에서, 그게 군중의 세계입니다. 군중은 절대로 집단적으로 동시에 깊은 사유, 즉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유에 이를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 부인할 수 있지만 스무 사람은 자기 부인 못합니다. 2만 명이 자기부인 못합니다. 큰 교회가 안 되는 이유, 큰 교회가 착해지기 힘든 이유는 2만 명이 동시에 집단적으로 자기 부인 하는 것은 2명보다 2만 배나 어려운 겁니다. 사랑의 교회와 가향교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 100명이 집단적으로 갱신되고 결단하는 것, 우리보다 1만 명 많은 교회는 만 배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교회나 큰 교회는 좋은 메시지를 전해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목사님 설교가 좋게 될 수 없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 설교가 안 좋은 이유는 그 회중 자체의 구성 때문에 안 좋은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설교를 듣고 점점 많아지는 무리들, 그들 위에 왕노릇 하려고 하는 순간 메시지 자체가 죽어버리기 때문에, 일종의 자기 존재를 변질시키는 군중의 파도 위에 춤을 추는 거거든요.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큰 교회도 아닌데 너무 길게 할 필요는 없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파도 칠 군중은 없습니다. 우리를 왕 노릇 삼으려는 사람도 없고, 앞으로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간에 예수님이 군중과 초연한 거리를 두고 이들의 요구를 과감하고 냉정하게 거절했다는 것, 예수님은 종교지도자와 다릅니다. 종교지도자는 군중의 파도위에 권력을 창조합니다. 마호메트는 너무 다릅니다. 마호메트는 너무 군중 지향적입니다. 마호메트의 그 종교에는 군중의 집단역학 심리학을 이용하는 놀라운 구조가 있기 때문에 지하드, 성전이 가능합니다. 마호메트와 예수님을 같은 위치에 놓으면 안 되는 이유는 마호메트는 실제로 사람을 많이 죽였고 전쟁을 지도한 장군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안에는 집단 심리학적 역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기독교 안에는 집단적 역학이 없고, 이슬람의 그 군중동원을 그대로 본받은 사람이 제1차 성전 십자군 승리를 했던 교황 우르반 3세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잘 보세요. 이슬람이 720년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종교의 명분으로 전쟁을 해서 아프리카부터 시작해서 아시아를 다 정복하는 것을 보고 서방에서 종교를 가지고 사람을 전쟁에 동원하는 걸 배운 겁니다. 이슬람으로부터 종교로 전쟁하는 법을 배워서 제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종교를 이용해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한 원조가 스페인이거든요. 스페인은 사백년 동안 사라센 제국의 지배를 받았어요. 스페인은 기독교가 아니라 사라센 제국의 4백년 지배를 받아서 이슬람 기독교 가톨릭이 짬뽕한 겁니다. 가톨릭 교황이 이슬람 제도를 도입해서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겁니다. 똑같이 칼로, 거기에 반대한 사람이 바르돌메 라카사스입니다. 구티에레즈 신부가 페루 리마에서 바르돌메 라카사스 연구소 소장입니다. 이슬람의 집단심리학적 역학이 마호메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저는 이슬람이 최악의 교회보다 더 나쁘다, 그렇게 봅니다. 권력과 무력을 장악한 이슬람은 최악의 교회보다 더 나쁘다, 저는 그렇게 봐요. ? 교회는 일단 권력과 완전히 분리됐습니다. 정치력과 물리력과 분리됐어요. 교회는 핍박받는 쪽이 돼야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건 종교권력이 miracle making power가 표적을 일으키는 이것이 음해일 수 있어요. 신령한 설교를 잘 해서 엄청난 은혜를 끼치는 이런 모든 따위의 대중흥분 촉발용 리더십이 거짓된 왕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군중적 역학심리에 빠지면 안 된다. 우리 예수님은 군중의 에너지를 해소시키지 않고 그걸 거부했고 reject 했기 때문에 우리 교회도 이런 군중이 억지로 권력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거부해야 한다, 이런 겁니다. 이 본문이 지금 당장 우리에게 맞지 않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습니다. 군중이 우리에게 요구를 많이 할수록 깊은 고독 속에 잠적해야 한다는 것, 이건 맞습니다. 우리 모두 바쁜 일상 속에 우리를 왕으로 삼으려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를 산산 조각내고 우리를 갈가리 찢어서 우리 마음의 관심을 찢어내는 모든 요구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산으로 잠적하신 예수님과 같이 내가 무시해도 되는 모든 군중적 요구들을 무시하고 내가 산으로 잠적하는 것, 우리한테 필요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그 요구를 냉정히 거부하시고 배척하시고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잠적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의 영적자유함과 이 고결한 품격과 이 놀라운 자유를 우리도 본받게 하시고 우리도 산에 잠적해서 하나님과 오래 있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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