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영원히 누리는 생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영생의 영은 신령 령자가 아니라 영원 원자, 길 영자, 물 수변 위에 갓이 들어 있는 겁니다. 영생은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이란 뜻입니다.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이란 뜻은 시편 133편에 나오는 이 말이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쭉 가서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때 영생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하인 하드 아올람, life for eternity, 영원까지 지속되는 인생이 영생인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숙달 된 삶이다, 어떤 삶이 영원히 지속된 삶인가하면 성경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몸에 배어 있는 그 삶이 영생이라고 지금 돼 있어요. 영생의 근거는 제가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신명기 30장 14절 19절 등에 나오고 시편 133편에 나옵니다. 요한복음이 말한 영생은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 영어로 말하면 eternally sustainable life, 영원히 지속가능한, durable 한 삶, 그게 영생이죠. 영생의 특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계속된 삶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끌고 가는 사랑이죠. 다시 말해서 사랑이 영생이다, 이렇게 할 수 있죠. 이 영생을 예수님이 주기 위하여 오셨는데, 이 영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자기 독특한 칭호가 인자라는 칭호입니다. 이 인자라는 칭호와 같은 말이 독생자라는 말인데요. 이 인자라는 말뜻이 무슨 말인가가 참 중요합니다. 5장 27절 ‘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3장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인자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천래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인자가 하나님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철두철미하게 복종한 자, 이런 뜻입니다. 구체적 의미는 하나님께 당신의 뜻을 준행하기 위하여 철두철미하게 복종한 자, 또 하나 뜻이 추가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철두철미하게 순종하기 위하여 죽음까지 감수한 자, 이게 인자입니다. 그다음 인자의 마지막 의미는 하나님께 내려오셔서 하나님 뜻을 순종하다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다가 죽임을 당한 그분이 높이 들린 자까지 될 때 인자가 완성됩니다. 인자는 네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하늘에서 내려온 자입니다. 두 번째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피파송의식이 매우 강한 자, 하나님께 보냄 받았다는 의식이 너무 강한 자, 그런데 오직 그 인생전체가 하나님 뜻을 성취하는 데 바쳐진 자, 독특한 피파송의식으로 하나님 뜻을 준행하기 위해 온 인생을 변주하는 자가 인자입니다. 세 번째 뜻은 인자는 하나님 뜻을 준행하다가 목숨까지 바치는 자, 고난을 감수하는 자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로 이 고난을 자처하고 죽음 감수한 이 인자가 높이 들려 십자가에 못이 박혀 들려서 마침내 하나님 보좌까지 들린 자입니다. 하나님 보좌까지 들린 자가 인자란 말은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나오네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인자가 들려야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복음 12장 33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라고 돼 있습니다. 이렇게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돼 있습니다. 지금 이 심판하는 문제가 나오는 이유는,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나는 예수님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 괄호하고 사도 또는 사도적 증언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예수님과 예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뜻 자체를 잘 봅시다. 영생의 뜻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정통으로 숙달 돼 지장이 없는 것, 천국은 공동체 생활이거든요. 사회생활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육신을 가진 사회생활이 천국이에요. 물론 새로운 육신입니다. 새로운 육신을 입은 사회생활이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충족단위가 개체 개인이에요. 우리 몸이 개인 개체이기 때문에, 욕망을 충족하는 단위가 내 개인이기 때문에 이기심이 발생해요. 내가 배고플 때 내가 먹으면 내 굶주림이 충족돼요. 내 옆 사람이 충족되는 게 아니라, 육신 때문에, 육신의 개체성 때문에 몸을 가졌다는 말은 필시 자기보존능력이 어떤 도덕보다 앞서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고 싶은 욕구를 준 까닭은 내 몸을 보존하는 것이 이웃 사랑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굶주리면 내가 먹어야 해요. 우리나라 법에서도 물에 빠졌을 때 물에 널빤지가 하나밖에 없어요. 그때 나하고 다른 사람이 널빤지를 동시에 집었을 수 있어요. 그때 내가 널빤지를 먼저 잡고 그 사람을 밀어뜨려도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나라 헌법도 긴급피난권 긴급구조권 개인생명보존권을 높이 치는 거예요. 도덕보다, 전쟁할 때 사람을 죽이는 원리와 똑같은 거예요. 전쟁할 때 사람을 죽인 게 살인이 아닌 이유는 자기 생명보존행위에요. 총알이 날아올 때 그 총알이 나의 심장을 관통하지 않도록 먼저 쏘는 것, 이것은 살인행위가 아니라 자기생명보존행위에요. 그래서 전쟁할 때 총을 쏘는 걸 살인행위라 보지 않는 이유는 생명의 자기 보존권을 굉장히 높게 치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자기 생명을 잘 부양하고 자기 생명을 잘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 주신 명령이에요. 그래서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님 주신 명령을 거부하는 거거든요. 그 사람이 형사상 무슨 나쁜 죄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그걸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 사람 책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를 지킬 수 없게 만든 사회가 책임져야 해요. 그러나 자기 생명을 단절한 그 사람도 면죄가 안 돼요. 이렇게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육신을 입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는데, 문제는 이 육신 때문에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잘 안 돼요. 내가 뼈저리게 사무치게 느끼는 감동은 내가 개별적으로 느껴야 해요. 내가 개별적으로 느끼는 이 행복은 내 육신의 존재가 독립돼야 해요. 내가 몸이 붙어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개인적으로 내가 책임을 못 져요. 예를 들어서 내 몸과 양진일 목사님 몸과 오근재 장로님 몸이 붙어 있으면 사회생활 자체가 안 돼요. 오근재 장로님 파고다공원에 가겠다고 하고 나는 숭실대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이게 안 돼요. 양진일 목사는 비산동에 가겠다고 하면 안 돼요. 인격의 주체성이 확립이 안 돼요. 몸이 붙어 있으면, 한 사람의 주체성에 몸이 하나가 있어야 해요. 한 사람의 주체성에 몸이 하나가 있는 이것 때문에 불행이 발생해요. 고도의 이기심부터 시작해서 만행에 가까운 이기심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개체성인 육신을 입으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웃 사랑을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거예요. 영생은 바로 고도의 개체성과 육체성을 입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고 이웃 사랑하는 그 일에 숙달된 상태를 말한단 말이에요. 이 영생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받는 거예요. 기억하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헤파게센 호 데우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때 영생은 영으로 가는 혼백의 삶이 아니라 육신을 입은 사회생활입니다. 영생은 육신을 입은 새로운 개체의 사회생활입니다. 영생은 공동체 생활입니다. 그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님 믿을 때 신령한, 즉 개인의 개체성도 파괴되지 않고 공동체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완벽한 삶이 가능한 거예요. 그게 바로 영생이에요. 그래서 역사의 진보는 이거에요. 개인의 주체성도 강하게 살리면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헤겔이 말한 것처럼, 개인의 자유도 극한으로 커가면서 아울러 공동체적인 함께 사는 능력도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것, 이것이 역사의 진보에요. 역사의 진보라는 말이 암시가 에르고스 하일랜드 카아는 사람이 쓴 책, E. H 카아라고 하죠, E. H 카아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 5장에 나와요. 5장에 이런 내용이 암시가 나와요. 역사의 진보가 무엇이냐? 개인의 존엄성이 확장되는 것이다, 자유가 커져가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역사의 진보란 함께 사는 능력이 증가하는 것이다, 역사의 진보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함께 사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서 육체노동자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권력을 다 주는, 우리를 개미적 지성으로 축소시켜서 함께 살도록 만든 거예요. 북한에서는 육체노동자에게 월급을 많이 주기 때문에 광부에게 월급을 많이 주고, 의사와 교수에게 월급을 똑같이 주기 때문에 인텔리계층이 살기는 불편해요. 그러나 육체노동자가 살기에는 진짜 천국이에요. 북한에서 육체노동자 자체가 불만을 터트리지 않는 이유, 인텔리는 불만을 터트려요. 가난으로 96년 97년 200백만 명이 굶어죽을 때는 고난의 행군을 그렇게 하고도 지금도 북한이 유지되는 이유는 철두철미하게 육체노동자를 통해서예요. 그런데 북한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은 요한복음적인 영생이에요. 우리는 영생을 믿습니다. 영생하셨습니다. 실제로 2006년에 제가 북한에 갔을 때 서열17위급 위원장과 대화를 하게 됐는데, 김 선생님 영생은 무엇입니까? 저한테 물었는데 제가 답변을 하려고 하는데 침례교 목사가, 영생은 우리가 죽어서,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우리는 당과 인민속의 영생을 믿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 톤으로 했어요. 김일성대학 부근 식당에서, 영생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와요. 그런데 북한이 요한복음적 영생이라는 말을 쓰는 게 참 희한하더라고요. 원래 영생은 함께 사는 능력이에요. 영생의 가장 고전적 의미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에 나와요. 마하 토 쉐비트 께킨 아하드, 함께 사는 거예요. 함께 사는 게 힘든 거예요. 형제간도 함께 사는 게 힘들어요. 어렸을 때는 같이 멱도 감고 사냥가고 다 했어요. 형제간 부인이 다 달라요. 제 제수씨 형수 제 아내가 다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친했던 김씨 3형제가 부인과 함께 6명이 동시에 친해질 확률은 너무 적어요. 저희 형수는 전주 사람이에요. 제 아내는 논산 사람이에요. 제 제수씨는 진주 사람이에요. 전부 다 달라요. 문제는 학력이 다 달라요. 저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제 형님은 석사학위를 받았고 우리 동생은 학사학위를 받았어요. 소득수준이 다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가 되긴 너무 힘들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한 번도 지금처럼 사이가 안 좋을 줄,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서먹서먹해질 줄은 몰랐어요. 왜 서먹서먹해졌냐면, 어렸을 때 우리는 사이가 좋을 줄 알았어요. 형제자매가 연합한다는 게 동생이 힘들면 그때부터 우리 모두가 부담이 되는 거예요. 누님이 못 살면 우리 모두가 누님 식구를 다 먹여 살려야 해요. 지금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완전히 우리 어머니가 감화 감동을 받고 있어요. 형제간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내 죽더라도 누나를 잘 돌봐라, 이게 우리 어머니 생각이었어요. 잘 돌볼 필요도 없이 저보다 빨리 집을 구했어요. 임대주택이지만, 형제자매가 연합한다는 말은 우리 친인척 안, 혈육 안에도 이것은 긴장이 발생하는 거예요. 못 사는 동생이 있다면 형들이 힘들어요. 사회적으로 이렇게 되는 게 너무 당연해요. 그런데 이 일이 가능한 것은 miracle이에요. 성령이 우리를 천국에 산다는 몽롱한 확신 속에서 사유재산권에 관한 집착을 없애줘야만 가능한 거예요. 성령이 우리를 거룩한 기만상태로 몰아넣어야 해요. 천국 온다, 일종의 최면상태, 성령 받으면 말짱말짱한 동물적 본성이 약해져요. 성령 충만하면 사유재산권 자체가 공중에 떠버려요. 성령 충만 하니까 초기교인들이, 그들이 도덕적으로 선량해서 재산을 내 놓은 게 아닙니다. 그들이 사도의 발 앞에 온 재산을 다 바친 이유는 성령이 임하자마자 역사가 끝났다는 종말론 의식이 너무 강해서예요. 그러니까 재산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내일 모레 예수님이 오는데 신사임당 할머니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 나라가 오는데,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바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성령 충만이 주는 종말론적인 타산 때문에 사람이 도덕적으로 착해지는 것이지, 도덕성이 개선돼서 절대로 사도의 발 앞에 전재산을 갖다 바칠 수 없어요. 생이란 말은 개인의 주체성도 뚜렷해지고 공동체생활도 가능해지는데 그것이 폭력으로 가능하지 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가능한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에요. 이것을 폭력으로 하려고 한 것이 마르크스 같은 레닌 같은 모택동 같은 사람이에요. 진짜 모택동은 영구혁명론을 주장했어요. 왜? 혁명하자마자 13년 만에 중국공산당이 들어오니까, 66년부터 문화혁명이 시작됩니다. 그 전에 1949년에 공산당국가가 들어와서 15,6년 만에 공산당을 보니까 완전히 너무나 부패해버렸어요. 혁명이전으로 돌아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모택동이 대약진운동을 해요. 인민공사를 해서 대약진 운동을 했는데, 더 생산성이 떨어져요. 공동체생활에 적응이 안 돼요. 인민들이 공동체에 전혀, 그래서 실각됐어요. 모택동이 실각된 거예요. 실각되자마자 유속이라는 사람이 국가주석이 되면서 약간 개인의 인센티브를 주는 쪽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려 했어요. 이걸 주자파라고 해요. 자본주의로 달려가는 자, 그걸 보고 홍위병을 일으켰어요. 실각당한 모택동이 쓰촨 성에서 홍위병을 일으켜서, 홍위병과 목욕탕에서 세례를 같이 받았어요. 양쯔 강에서 같이 목욕을 하면서, 그 홍위병들이 유속 등을 10년 동안 다 숙청한 것이 문화대혁명이에요. 그 이유는 공산주의 사상을 영원히 계승시키기 위하여, 즉 완전히 공동체적인 인간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랬더니 너무 많이 죽었어요. 스탈린은 2천 2백만을 죽였습니다. 공산당 영구혁명을 하기 위해서, 즉 공동체생활에 적합해지기 위해서, 육체노동자 중심의 공동체 생활을 끌어가기 위해서 2천 2백만을 죽이고 모택동은 수백만을 죽였어요. 중국인 유아주라는 소설가가 쓴 소설에는 유속의 마지막에 관한 소설인데 비참하게 끝나요. 그런데 유속의 아내가 강청, 모택동 부인의 사형 받는 판결 마지막 현장에 있어요. 자기 남편을 사형시켰던 모택동의 부인 강청이라는 사람이 물론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졌죠. 어쨌든 사형당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럼 왜 그 사람들이 피의 혁명을 했냐? 영생하도록 한 거예요. 영생이 무엇입니까? 함께 사는 능력의 비약적 증가, 인텔리 계급이나 지식계급층은 함께 사는 걸 원하지 않고 반드시 특권을 원해요. 그래서 특권을 가진 사람이 사회를 층층시하로 나눠서 사회를 관리하면 저 육체노동자는 부려먹기 쉬워요. 휠씬 더 많은 육체노동자들이 있고, 지식계급이 부려먹기 쉽기 때문에 피라미드 사회를 만드는 거예요. 모세가 바로 깨부숴버렸던 사회가 피라미드 사회에요. 절대왕정 파라오가 대다수의 노예를 부려서, 절대다수의 노예가 구축한 피라미드 사회를 모세가 깨어 부수려고 한 사회죠. 가나안, 가향교회, 피라미드 체제를 깨부수고 하나님 땅 만드는 것, 평화의 꿀과 우애의 젖이 흐르는 땅으로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영생은 역사의 목표입니다. 마르크스 레닌이 꿈꿨던 사회가 영생입니다. 그런데 그 영생을 이룰 때 엄청난 사람을 죽이는데, 우리 예수님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자기의 피를 흘려 사람들의 마음에 영구혁명이 일어나고 부단히 부단히 시시각각 프랑스 대혁명적 변화가 우리 마음에 일어나서 우리가 특권적 삶을 버리고 형제자매들과 한 데 어울려 사는 삶을 선호하도록,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끼도록 계속 감화 감동 시켜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에요. 그런데 그 성령님의 예언을 받기 전에 책으로 되고 문자로 된 성령님이 성경이고 사람으로 된 성령님이 예수님이에요. 성경을 많이 읽으면 영생에 적합한 인물이 되고, 예수님을 자꾸 보고 사랑하고 존경하면 영생에 적합한 공동체가 되고, 성령의 감화 감동에 많이 노출되면 정신이 몽롱해져서 점점 착한 사람이 돼요. 성령은 한 번 마시기만 하면 바보가 되는 물과 같아요. 성령을 많이 마시면 사도행전 2장과 4장 사태가 벌어져요. 여기 재산 많은 사람이 누구에요? 특별히 아버지한테 유산상속 받을 때 성령 받지 않도록 애를 써야 돼요. 그래야 특별히 돼요. 저도 우리 고향에는 땅이 많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땅이 많아요. 제가 팔순 없지만 산과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팔수는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산과 땅과 모든 것들을 바로 앞에 이웃 사람한테 바칠 수 있으려면 절대로 인간적인 도덕적 결단으로는 안 됩니다. 그건 양자역학적 비약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차원을 바꿀 때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매우 위험한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 탐욕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고 우리의 이기적인 삶에 너무 너무 순식간에 정신을 탈구시켜서 우리를 착하게 만듭니다. 즉 영생에 적합한 공동체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이가 셋입니다. 첫째 세례요한 둘째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 기적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늘에서부터 온 하나님 아들인 것을 입증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들었던 마가복음 1장 11절,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그 음성, 네 번째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말은 무엇이에요? 완전한 순종을 바치는 그 상태가 성경이 끊임없이 지향하는 겁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게 이스라엘의 온전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의 완전한 순종 이삭의 완전한 순종, 모든 성경의 등장인물들이 온전한 상태의 순종을 하는 것을 기약하면서 기대하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세요. 성경은 온전한 순종상태를 기대하면서 주신 책이기 때문에 온전한 순종을 구현하신 예수님에 관한 책이 돼버려요. 그래서 성경 또한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많이 쳐다봐서 감화 감동받는 것과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똑같은 효과가 와요. 왜 그럴까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하는 교양을 구비하게 하는 책이거든요. 성경은 개체성, 내 개인의 개성도 뚜렷이 자각하게 만드는 책, 만일 개체성이 없으면 영생 아닙니다. 두 번째로 내 개성이 뚜렷해지면서 내 안에 성령 충만하여 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내 성령의 은사가 발휘됨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사회에서도 적합하게 만들어주는 책,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촉진시키는 책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읽으면 영생에 적합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즉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거예요. 영생을 얻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많이 읽는 것과 똑같은 효과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랑과 존경을 바치면 성경 읽는 효과와 똑같아요. 성경 66권 읽는 것과 예수님 쳐다보는 것은 똑같아요. 그다음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과 성경 읽는 것과 똑같아요. 성령 충만하면 개성화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여러분 가향교회나 비산동이나 우리 가정에 성령이 충만하면 내가 무엇에 적합한지 뚜렷이 드러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오시자마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무기력한 자책감, 내가 무용지물이라는 느낌, 그게 다 순식간에 사라지고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분명한 일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회생활에 적합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요한복음적 성령 충만한 세상, 요한복음적인 영생 공동체를 누리려면 이 대한민국에서 이웃 사랑을 할 때 방해가 되는 모든 법적규제를 해결해줘야 합니다. 지금 처녀총각들이 결혼적령기가 늦어지는 이유는 주택을 구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하려면 1억 5천만원정도 듭니다. 1억 5천만 원 중 9천만 원은 주택입니다. 오피스텔 값, 주택에서 살지 못합니다. 5천만 원 정도는 혼수비용입니다. 너무나 큰돈입니다. 딸 하나 결혼시키면 남는 게 없는 상태입니다. 딸 가진 부모 너무 불쌍합니다. 아들 가진 부모도, 결혼적령기가 늦어지니까 출산율이 떨어집니다. 출산율이 떨어지면 우리는 고령인구가 많아져서 노동인구보다 연금 타는 인구가 많아지는 너무나 비극적인 세상이 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명기 28장에서 인구가 감소되는 것은 저주 받은 사회의 특징입니다. 대한민국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다면 처녀총각이 혼인적령기 때 결혼해야 복 받은 증거이고, 새 아이가 계속 탄생해야 합니다. 새 아이가 탄생해서 새 구성원이 도착하는 게 하나님께 복 받은 사회인데, 지금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결혼하지 못하도록, 주택을 갖지 못하도록 주택을 상품처럼 파는 이런 나쁜 세상에서는 영생이 불가능합니다. 영생을 자꾸 죽어서 가는 공동체로 생각하지 말고 이 땅에서 하나님이 이미 주신 영생을 생각한다면 이 땅에서 우리 젊은 사람들이 행복추구권을 실현할 때 방해가 되는 법을 고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영생입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영생을 위해서 애 쓰는 것 중 하나는 헌법 안에 있는 행복추구권 안에 주택보유권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것이 들어가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안정된 주거에 살 권리가 있다, 이 말은 대한민국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나는 공기를 마음대로 마시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번에 19대 국회에 이번에 또 이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입법하는데 애를 쓸 것입니다. 성경정의 토지모임 같은 데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곳곳에 가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택보유권을 헌법적 요강 안에 넣으려면 20대 30대가 투표를 80%만 해줍니다. 투표를 80% 해주면 프랑스 대혁명이 매일 일어나는 겁니다.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이번에 제발 80%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20대 30대 아젠다가 즉시 입법이 됩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웃사랑 해야 합니다. 환경을 정화해야 하고, 대한민국 우리 후손들이 깨끗한 환경에 살도록 삶의 여건을 만들어주고 가는 것이 영생공동체에 제가 참여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웬델 벨이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자연주의자가 컴퓨터를 켤 때마다 이 생각을 한답니다. 내가 애팔래치아 석탄광산에서 나오는 석탄으로 만든 전기를 낭비하는 구나, 웬델 벨이 컴퓨터를 켤 때 애팔래치아 광산에서 나오는 석탄 때문에, 즉 화석연료를 써서 내가 지구를 덥게 만드는 구나, 이렇게 하면서 컴퓨터를 쓰지 않는 극단의 실천은 우리에게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극단의 실천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우리가 아름다운 환경을 이 땅에 물려주고 가는 것, 우리 후손 후세대를 사랑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인의 구체적인 영생의 관심이 돼야 하지, 너무나 병적이고 아편을 먹은 사람들처럼 죽어서 가는 확신도 없는 그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영생을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웃 사랑을 하려면 고난 받는 이웃의 조건에 해박한 정보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해박한 정보와 지식이 없고 이웃이 당하는 고통의 종류와 그 숨결무늬를 모르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의 영생을 많이 알수록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우리 세상에서 영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삶의 조건에 대한 이해가 폭넓어져서 사회참여가 일어날 수밖에 없고 사회적 투자를 할 수밖에 없고 사회생활에 대한 폭넓은 참여와 의식이 증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거예요.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영생을 주러 오셨는데 그 영생이란 개인의 개체성이 뚜렷해지고 공동체생활, 함께 사는 능력의 비약적 증가가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성경을 읽으면 가능하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참 중요합니다. 성경 읽지 않고 그 당시 유대인들은 무얼 읽었는지 아세요? 우리는 성경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장로유전>을 읽었습니다. <장로유전>은 이 성경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유대교적 해석입니다. <장로유전>에 들어 있는 것은 유대인을 특권화 시키고 유대인의 특권적 지위 아래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섬기는 육체노동자로 봉사하는 이사야 61장 5절 이하,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그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특권과 비 특권으로 나눠진 그런 세상에 대한 미래상을 영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영생상은 이런 겁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상은 아마,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의 영생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영생은 보통 타락한 죄인의 영생과 같습니다. 첫째 영생은 다른 사람을 무한히 부려먹고 내가 특권을 누리는 걸 생각합니다. 지금 아마 우리나라의 기업인들은 그걸 영생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영생은 그게 아닙니다. 내가 특권을 가지고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이웃 사랑을 위해서 내 온 몸을 거룩하게 소진 시키는 삶입니다. 이 때 우리가 가장 내 존엄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장자가 돼요. 김회권이 언제 내 존엄을 최고로 만끽하도록 만들어졌느냐면 내가 참 가치 있다, 내가 멋지다고 느끼고 생각하는 순간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을 위해서 내 모든 이 존재를 연소시킬 때입니다. 특권적으로 남을 빨아먹을 때가 아닙니다. 그때는 내가 타락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놨습니다. 어떻게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몸과 열정을 연소시킬 때만 내가 가장 행복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어요. 우리 하나님은, 그게 영생이에요. 참 역설적이죠? 다른 이의 살과 피를 빼앗아 먹고 뚱뚱하게, 최근에 상속전쟁 벌이는 뚱뚱하고 얼굴 두꺼비처럼 생긴 그 사람, 그 표정도 이상해진 그 사람, 그런 사람처럼 되어버려요. 두꺼비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뭐에요. 이렇게 비틀어져서, 그런 탐욕으로 일그러진 사람은 자기 존엄을 자기 스스로 한 번도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못해요. 그러나 이태석 신부처럼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자기 생명력을 소진하면서 연소하면서 그런 사람이 영생을 하시는 거예요. 자기 존재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껴요. 존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하나님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어요. 얼마나 공평해요. 절대공평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얼마나 공평해요. 드라큘라같이 남의 살과 피를 뺏어먹고 자기가 왕처럼 살고 다른 사람을 포도원농부나 양치기로 삼는 그런 피라미드 적인 세상구조에서는 영생을 못 누리도록 만들고, 반대로 내 몸과 살을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내어주는 우리 예수님과 같이 이태석 신부와 같이 본회퍼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한민국의 사회정의를 위해서 분투하는 것이 바로 영생이에요. 우리 민족의 분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평화를 심기 위해서 애쓰는 게 영생 공동체를 위해 애쓰는 거란 말이에요. 여러분 영생을 육신을 입고 사는 삶입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삶이 물론 생명의 부활로 더 온전케 됩니다만, 지금 이 땅에서 영생이 시작됩니다. 이 영생을 잘 누리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영생을 지금부터 선물로 주셔서 성령 충만함으로 예수님 사랑함으로 영생누리도록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이 세계는 영생을 파괴하는 위험 물질로 가득 차 있고 영생을 파괴하는 탐욕의 피라미드 체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 숨이 막힙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 영생에 대한 확신을 잊어버릴 만큼 죄악된 세상에 삽니다. 하나님 그럴수록 성령으로 우리를 격동시켜 주시고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담력과 모험심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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