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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약속의 하나님 (1)

by 【고동엽】 2022. 1. 30.

약속의 하나님 (1)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

 

            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오늘 주일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이 대림절을 대강절, 강림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대림절을 영어로 Advent라고 하는데 그 말은 “출현, 오심, 도래”라는 뜻입니다. Second Advent하면 “재림, 또 오심”이라는 말입니다. 이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을 말합니다. 이 대림절은 6세기부터 지켜왔습니다. 기독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림절이고 또 하나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40일간(주일제외)을 말하는데 고난 받으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40일 동안 묵상하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대림절은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대림절은 사순절과 함께 경건하게 보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이사야 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장차 메시아인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리라고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예언은 이사야가 기록했는데 이사야는 BC 739년에서 680년 사이 약 60여 년 동안 활동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700여 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리라는 예언은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가 비로소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나실 예수는 어떤 분인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 그 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라 했습니다. “정사”라는 말은 “큰 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태어나실 예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실 분이라는 말입니다. 또 “그 이름이 기묘자라 모사라”고 했는데 이 두 단어는 같은 뜻입니다. 인간을 초월하여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말이고 장차 태어날 예수는 그 나라가 영원하고 공의로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장차 이런 일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을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

 

 

 

 

하나님은 지극히 질서를 존중하시고 화합을 소중히 여기시고 조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이 질서를 요구하십니다. 질서는 너를 인정하고 너를 배려하는 법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너를 배려하는 이 부분이 아주 약합니다. 그래서 질서가 문란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은 질서의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무시하고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많은 법들이 있습니다. 그 법들은 모두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법은 나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너를 배려하고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너를 보호하는 법이 무시될 때 가장 먼저 약한 이웃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과부의 하나님이요 고아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가장 약자의 상징이 과부와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눈물 흘리게 하고 아프게 하면 반드시 내가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상식의 하나님이시고 약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과 제도와 생각과 삶은 상식의 법입니다. 이 상식이 있는 곳에는 조화가 있고 질서가 있고 존중이 있습니다. 상식이 결여된 곳에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발생하고 온갖 부조리들과 차별과 무질서가 난무합니다. 북한이 저렇게 살아가는 것도 상식이 결여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도발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상식이 있는 삶을 요구하시고 질서 있는 신앙을 요구하시고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교회는 미덕의 공동체입니다. 그 미덕의 기준은 상식입니다. 덕은 더불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게 하고 덕을 쌓게 합니다. 그러려면 그곳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절제가 없어지면 미덕이 발휘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대에는 술과 담배를 다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각종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술 때문에 많은 문제들 발생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술을 많이 마십니다. 서양인들이 볼 때는 비상식적으로 괴물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서양인들은 술을 마실 때는 작은 잔에 1/4정도 따라 냄새를 맡아가며 홀짝홀짝 1시간씩 마십니다. 그것이 서양의 주도문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막걸리를 마실 때는 사발에 따라 마십니다. 서양인들의 눈에는 그 사발이 대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단숨에 마셔버립니다. 놀랄 일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변화를 받는데 집에만 가면 술을 마시고 취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주 절제가 없는 민족입니다. 절제가 없다는 말은 상식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1901년 장로교 공의회에서 7대 신앙생활이라는 지표를 발표하였습니다. 예배출석 잘할 것, 성수 주일할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일부일처 할 것, 온 집안을 전도할 것, 근면 성실할 것, 금주 금연할 것 등입니다. 모두 절제와 질서의 삶을 요구하신 내용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또 피우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914년에 음주자는 장로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공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이 마침내 오늘까지 내려오는 전통이 되어 기독교에서는 음주를 하지 않는 법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방화사건과 익사사고의 80%는 음주 때문이라고 합니다. 폭력의 60%, 자살의 30%도 술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사건들은 상식이 결여되어 일어나는 사고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많은 주문을 하시고 율법을 주시고 계명을 주신 것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상식의 삶을 살게 하시려는 뜻에서 입니다.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하나님

 

 

 

 

 

하나님은 상식과 질서도 존중하고 강조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초월의 하나님이시고 치료의 하나님이시고 회복의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소극적인 질서나 상식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병든자를 고치십니다. 죄인들의 죄를 씻으십니다. 때로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십니다. 또 죽을 자를 구원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도록 함께 하십니다. 용서하십니다. 이해하십니다. 영적으로 감화하십니다. 회심하게 하십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십니다. 죄를 씻어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십니다. 천국을 이루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기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왜 기적이 많으냐 거짓말 같다고 말하는데 그래서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상식이나 이론이나 지식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은 살리시고 죽이시고 고치시고 치료하십니다.

 

 

 

 

심판의 하나님

 

 

 

 

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용서하시는가 하면 무한정 용서를 강조하십니다. 제자들이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 용서하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 법으로는 일곱 번 용서가 최대치였습니다. 그 한계만큼 용서하는 것은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용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7숫자를 완전수로 생각합니다. 7수는 수가 아닙니다. 무한대의 수적 개념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은 하나님께는 용서의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용서의 모습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문을 열어놓고 한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맨발로 뛰어나가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사 용서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점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가 문을 열어놓은 기간에 돌아왔으니까 용서하신 것입니다. 만일 기다리다가 지쳐서 문을 닫았을 때 아들이 돌아왔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일단 시간이 지난 후 와서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 주실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나는 너를 모른다” 입니다. 그런 모습을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표현하셨습니다. 열 처녀들이 밤새워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중 다섯 처녀는 등에 기름이 떨어져갑니다. 그래서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그리고 문을 굳게 닫혀버렸습니다. 기름을 넣고 다시 돌아온 다섯 처녀는 굳게 잠긴 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열어 주셨을까요. 그때 대답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 였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정상참작이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 처녀들은 많은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온 대답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는 단호한 대답뿐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용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하시고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살리시는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고치시지만 병이 들게도 하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회복시키시기도 하시지만 또 악화시키시기도 하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살리시지만 또 때로 하나님은 죽이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는 곳에 강림하셨습니다. 보니까 의도가 불순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간 높이 쌓아올린 바벨탑을 산산이 부서지도록 무너뜨리셨습니다. 소돔성이 너무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불로 그 도시를 심판하셨습니다. 노아시대에 사람들이 너무나 타락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물로 그 세상을 쓸어버려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약속하셨습니다. “장차 이 세상이 또 그렇게 타락하면 이번에는 불로 또 심판하겠다.” 그 약속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때로 시간이 다 되면 심판도 하십니다. 심판하시되 무섭게 심판 하십니다. 사울을 심판하시는 것 보십시오. 아합을 심판하시는 것 보십시오. 이세벨을 심판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용서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하나님은 당장 심판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믿으십니다. 그래서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무한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선을 행할 자유도 악을 행할 자유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할 자유도 주셨고 하나님을 떠날 자유도 주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도 부여하셨습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동반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유를 행사한 책임도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당장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기다리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죄를 짓는다고 당장 심판하고 벼락을 내리치지 않으십니다. 기다리십니다. 참으십니다. 돌아오기를 고대하십니다. 기다리시다가 오지 않는다고 강제로 돌아오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돌아옴 그것 자체도 내 마음대로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무한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지금 내가 자유를 누리지만 하나님은 언젠가 결산하듯이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책임을 생각하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은행카드를 사용합니다. 그 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입니다. 나는 얼마든지 비시카드를 긁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카드를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사용하는 데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지금은 내 마음대로 사용이 가능하지만 월말이 되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때 책임을 지지 않으면 무서운 책임이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물으십니다. 아담의 자유를 하나님은 무섭게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평생 땀 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침내 죽어 흙으로 돌아가라고 죽음을 선고하셨습니다. 소돔사람들에게도 이 책임을 무섭게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불로 심판하셨습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이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그들을 물로 쓸어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미래에도 반드시 하나님은 이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제하시지 않으시지만 주어진 무한한 자유에 대한 책임은 강하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 점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약속의 하나님

 

 

 

 

성경 안에는 많은 약속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이라 하고 신약성경이라고 합니다. 구약이라는 말은 옛날에 주어진 약속의 책이라는 말입니다. 옛날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의 중심이고 핵심내용입니다. 신약은 새 약속의 책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은 약속하신 그대로 예수께서 태어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들을 다 지키셨습니다. 마태복음 518절을 보면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남김없이 그대로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가장 큰 약속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장차 세상에 예수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고 또 하나는 장차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재림하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오시리라는 약속은 이루어졌고 재림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주님은 언젠가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장차 세상에 예수를 보내실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태어나시기 700년 전에 세상에 알리십니다. 714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700년 전에 예언하시고 700년 후에 때가 되니까 약속하신 그대로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까 그 예수는 예언하신 그대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도 승천도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세상에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하시고 때가 되면 이루십니다. 아직도 두 가지 큰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재림의 약속입니다. “너희가 보는 대로 다시 오시리라”(사도행전 111) 이 재림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 약속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약속은 심판의 약속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이 심판의 약속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 세상을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무책임하게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고 힘씁니다. 우리는 때로 실패도 하고 타락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아주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타락을 해도 아주 타락하지 않습니다. 정도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들이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장차 주어질 심판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을 함부로 살고 순 인간적으로 쾌락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는 이 재림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에게는 장차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약속이 있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약속이 주어진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약속하신 그대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이 대강절에 오신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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