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여기서 위로부터 오시는 이와 땅에 속한 이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the immediate context를 보십시오. 누굴까요?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계시, 어떤 계시를 받았죠? 이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계시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관하여 들은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받았던 계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자이다, 라는 계시를 누가 받았어요?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줄때 들었다는 거죠. 일단 세례요한 맞습니다. 그런데 이건 2차적으로 예수님으로 봐도 됩니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이건 secondary context, 일종의 확장된 맥락에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증언이라고 볼 수 있고,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관한 증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자, 그의 증언을 받는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3장 28절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사도요한과 같은 너희 제자이니라, 그의 복음을 증거한 이 사도요한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참되시다’, 이 말은 예수님이 보내주신 그 하나님과 구약성경의 그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임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큰 난제는 예수님과 구약 하나님이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AD 140년에 소아시아 출신이었던 마르시온이라는 성자가, 평신도 선박왕입니다. 그 당시의 오나시스, 선박왕 마르시온이 엄청난 돈을 로마교회에 헌금하고 성경을 연구했는데, 마르시온이 엄청 성경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연구와 연구를 거듭하다가 누가복음과 바울의 서신 10개, 바울의 서신 13개 중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만 빼고, 11권의 신학성경을 가지고 마르시온이 이것이 성경이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140년경입니다. 이때부터 30년 후, 170년에 리옹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가 마르시온을 반박하는 <이단반박>이라는 논문을 쓰기 시작합니다.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은 도올 김용옥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와 구약성경의 하나님 아버지가 너무 다른 분이다, 구약성경의 하나님 아버지는 열등한 신이고 부족신적인 옹졸함에 가득 차 화산처럼 폭발하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는 굉장히 진화한, 우주에서 가장 진화가 잘 된 하나님, 진짜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는데 이런 주장을 마르시오니즘이라고 말해요. 마르시오니즘이 이단으로 배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사실상 마르시오니즘이 이단으로 배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는 여전히 마르시오니즘이 남아서 구약성경을 가지고 하나님 사랑을 말하기는 힘들단 말이에요. 마틴 로이드 존스가 에베소서 사도행전 요한복음 길게 몇 십 권씩 이렇게 주석서를 썼는데, 한 권의 구약 주석서를 남기지 않았단 말이에요. 존 스타트 하용조 목사 옥한흠 목사 모든 사람이, 그 분들이 구약의 하나님을 마르시온처럼 명백하고 단호하게 배격하지 않았지만 구약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진노의 동선들을 전부 다 깡그리 신학적으로 소화를 못했거나 아니면 사실상 배척을 한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내신 그 하나님과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동일하시다는 걸 믿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왜 세례요한이 중요하느냐면 세례요한은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자들의 대표자입니다. 모든 예언자의 대표자인 그분이 예수님을 인정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과 세례요한이 믿었던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걸 같이 믿는 건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특별히 여러분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마르시오니즘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래서 구약성경 본문으로 하나님 말씀을 길게 강의하는 사람은 양진일 목사처럼 이렇게 무모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미가서를 벌써 몇 달째 하고 있어요. 진도도 나가지 않았는데, 미가서로 몇 달째 보내는 사람, 젊은 40대 목사가 많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본문을 주일강단에서 강의하는 건 우리나라 목회자 1%도 하지 않는 짓입니다. 그 말은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 배타적인 하나님, 독선적인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어딘지 나사가 풀린, 마음씨가 너무 좋은, 고모님처럼 마음씨가 좋고, 외삼촌처럼 마음씨가 좋고, 진리를 따지지 않고 그냥 용돈 잘 주는 외삼촌 고모님 이모님처럼 돼버렸다는 말이에요. 그런 구분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요. 그랬기 때문에 한국교회 교우들도 구약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 가향교회에서는 이렇게 구약성경을 읽지 않는 교우들을 위해서 상금 50만원을 걸고 퀴즈대회를 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거예요. 이렇게라도 해야 구약성경을 읽으니까, 그런데도 보니까 대범이는 읽지 않고 창기는 읽지 않았다고 민수는 읽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걸 보니까 오늘 퀴즈대회가 제대로 될지 모르겠어요. 왜 구약성경을 읽지 않느냐?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한 그 세례요한의 증언이 참되다는 걸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하나님은 구약성경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별에서 오신 분이고 다른 은하계와 다른 성단을 창조하신 분이고 다른 신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르시온과 같은 구약배척 분위기가 너무 많이 성도들에게 퍼져 있어요. 요한복음은 그걸 막으려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증언을 받는 자는 나사렛 예수, 폭풍 같은 설교로 이스라엘 죄를 고백하면서 이스라엘 죄를 무섭게 다그치는 나사렛 예수야 말로 구약성경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사무엘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보낸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믿는다, 그런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THE SAME GOD 똑같은 하나님이라는 걸 믿는다는 거예요. 그걸 인을 쳤다 말해요. 이건 너무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잘 안 읽게 되는 이유도 구약성경에는 진노하는 분노하고 화를 터트리는 하나님이 자주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너무 너무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주도면밀하게 심사숙고 끝에 진노하는 분입니다. 아무렇게나 진노하지 않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33절이 그런 뜻입니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 이게 삼위일체 교리의 가장 근본 신조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왜 나왔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성경에서 나오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 아들임을 믿는 순간 삼위일체 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의 반대개념은 뭡니까? 반 삼위일체교리인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의로운 인간이라 믿으면 유대교 에비온파,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를 최초로 사랑했던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분류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기독교인이 아니라고도 하기 힘든 사람들이 에비온파 팔레스타인 토착기독교인들인데,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께 순종한 예언자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긴 한데, 하나님 아버지께 창조된 하나님 아들로써 하나님 아버지 보다는 less divine 덜 하나님 적이다, less coeternal 하나님보다 나이가 더 어리다, 한때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님 아들이다, 에비온파보다 한 단계 더 진전했습니다. 아리우스파입니다. 아리우스파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맞는데 신이라는 것도 믿겠는데 좀 불완전한 의미에서 신이다, 왜? 한때 아들이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아리우스파 말고 우리가 정통으로 고백하는 아타나시우스 파의 삼위일체교리는 하나님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는 co-eternal, eternal하면 영원하다는 말이죠. coeternal하면 equally eternal 동등하게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co-eternal 하면 나이 똑같이 먹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동일한 영원성을 가진 분이라고 믿으면 정통교리가 됩니다. 왜 정통교리 삼위일체가 중요한가가 아주 중요한데, 삼위일체 교리가 무너지면, 여러분이 삼위일체 교리를 안 믿으면 두 가지만 남게 됩니다. 에비온파 같은 입장이 남거나, 즉 하나님께 매우 헌신했던 예언자라고 믿는 겁니다. 이건 지금 유대인들이 믿는 겁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마틴 부버 같은 사람이 예수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긴 하지만 온전한 의미의 하나님 아들은 아니다, 이게 몰몬교 같은 입장이에요. 몰몬교와 여호와 증인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긴 믿지만 우리랑 다른 의미로 하나님 아들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들, 충분한 의미의 하나님 아버지와 coeternal,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신 하나님 아들, 여러분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죠? 인격적인 하나님이 사유하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죠. 지금 저라는 존재가 저라는 몸뚱이만 있고 사유작용을 거치지 않는 내 몸이 없듯이 나 김회권이 존재하는 한 김회권의 사유 김회권의 말씀과 김회권의 존재는 같이 가듯이 하나님 아버지가 인격적으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고 전능하신 아버지로 계시는 순간 하나님 아버지 가슴 속에는 말씀이 살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습니다. 똑같은 시점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아타나시우스입니다. 1장 18절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요한복음 1장 1절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의 가장 대전제입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대전제는 우리 인류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믿으면 삼위일체교리를 믿은 겁니다. 예수님 나이가 2천 년 전에 태어났다고 믿으면 에비온파입니다. 예수님의 기원을 2천 년 전 마리아의 태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났다고 믿으면 에비온파, 마틴 부버, 여호수아 헤셀, 예수님에 대해서 우호적인 유대인들, 그런데 마리아의 태속에서 태어난 그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순간 삼위일체를 믿는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 삼위일체교리를 쉽게 설명하는 본문이 이사야 55장 10절입니다. 제가 처음 말씀할 때 했는데 계속 반복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모르실 때는 제가 지나갈 때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클리어 해졌습니다만, 여러분은 혹시 이걸 처음 들었을 때 힘들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과정을 아주 잘 설명합니다. 이사야 55장 10-11절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한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내가 보낸 말씀은 내 목적을 성취하고야 내게 돌아온다, 하늘에서 내린 눈과 비가 땅을 적셔서 곡식을 결실케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듯이 내가 파송한 말씀은 내가 뚜렷이 목적하던 바를 성취하고서야 내게로 돌아온다, 이런 뜻이에요.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이사야 55장 10절이 말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뭐하기 위해서? 왜 육신이 됐습니까? agent, 완전한 대리자가 되기 위하여, 말씀의 성취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을 입었지만 예수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머물러 있었죠? 이렇게 믿는 것을 우리는 삼위일체교리의 제1조를 믿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안 믿으면 인류구원의 근거가 설명이 안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안 믿으면 우리 죄를 용서해주는 걸 원리적으로 설명을 못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려는 걸 원리적으로 설명하려면 삼위일체 교리가 필요한데, 왜 갑자기 하나님이 한 때는 진노했다가 한 때는 용서하는지를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우리 안에 실천적 함의를 갖도록 설명하는 길은 삼위일체교리밖에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런 거거든요. 이 세상에 아담의 원죄가 있었다, 그다음 아담의 원죄를 대신 되갚아 주는 완전한 순종자인 둘째 아담이 나타났다, 둘째 아담이 아담이 저질렀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서 아담의 죄를 무효화시켰기 때문에 아담의 죄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오게 된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서 해방된 길이 열렸다, 이게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런 삼위일체 교리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지 용서하는 과정이 intelligible하게 납득이 잘 되게 설명하기 때문에, 삼위일체교리야말로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없다면 무슨 설명만 가능하냐면 하나님은 한때 우리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런데 한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진술만 계속 반복해야 해요. 실천적 함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를 믿으면 누군가가 아담 같은 원죄를 가진 사람이 있는 곳에는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같은 독생자가 아담의 원죄를 뒤집어쓰면 거기에 새로운 세상이 창조된다, 이런 실천적 함의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날 수 있는 근거가 나옵니다. 삼위일체교리가 없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우주적 변덕심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짓고 범죄한 사람을 심판하셨다가 갑자기 아무런 자기 해명도 없이 인간을 용서하기로 결단합니다. 해명 없이 우리 인간의 이성에게 납득도 없고 실천적 윤리적, 왜 우리 죄가 용서받았는지 윤리적으로 깨닫지도 못한 채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용서하시지 않고, 죄 용서되는 과정에 인간의 순종이라는 강력한 절차를 집어넣음으로써 죄 용서하는 그 과정도 인간의 협조를 요청하면서 일어나게 만드셔서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주적으로 격상시켜 주는 것이 삼위일체교리에요. 죄를 지은 인간도 참혹하지만 그 죄를 대신 뒤집어쓰는 인간이 더 위대하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순종한 인간의 착한 한 순종을 너무나 높이 치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에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윤리의 원천이 되는 것이고, 기독교가 이 세상에 끊임없이 독생성자급 성자를 배출할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이에요.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면 아담의 원죄가 상쇄되고, 죄가 넘치고 아담의 원죄가 지배하는 세상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죄의 세상에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다 없어지고 죄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죄 이전보다 더 충만한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 이 삼위일체교리야말로 우리의 독생성자다운 삶, 우리의 골고다 오르는, 하나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우리 삶이야말로 이 세계를 하나님 나라로 새롭게 창조하는 데 보탬이 되고 발판이 되고 통로가 된다는 실천적 함의를 주기 때문에, 인간의 우주적 순종의 가치, 인간의 순종과 믿음의 가치를 너무 높게 봐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삼위일체교리에 있는 겁니다. 이렇게 좋은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걸 여러분이 이해만 하면 삼위일체로만 설명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가 감동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삼위일체교리를 완성하러 오신 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만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님까지 모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누구의 순종을 하도록 기대되면서 부르심 받았어요? 비록 그렇게 못 되었지만 아브라함부터 세례요한까지 모든 구약에 나온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아 나온 인물들은 어떤 수준의 순종을 하도록 부르심 받은 거죠? 그렇게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같은 그런 순종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런 순종을 못했죠?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1500년 동안 못한 그 순종을 마지막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한 목적은 성취됐죠? 성취된 거예요. 이스라엘을 이 세상에 택한 백성으로 부르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했던 그 하나님의 일차목적은 달성됐어요. 왜요? 이스라엘 역사가 만든 최고 걸작품이 누구에요? 중국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은 만리장성, 이집트가 만든 최고의 걸작품은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인류 앞에 내 놓은 최고의 걸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믿음의 열조들이 도달하려고 했던 그 완전한 순종을 구현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택하신 목적의 성취가 일어났기 때문에 때가 찼고, 이 말은 완전한 순종의 때가 왔단 뜻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완전한 순종의 때가 왔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아담의 죄와 사망의 질서가 와해되고 생명과 성령의 역사가 시작될 때가 왔다는 뜻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못이 박히니까 폭포수 같은 성령의 역사가 와서 세계 만민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문명사의 대전환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죽음의 결과, 파푸아뉴기니에서 캐나다에서 뉴욕에서 한국에서 웨일즈에서 평양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곳에 성령이 파도쳐 온다는 말이에요. 1905년 웨일즈 1906년 미국 1907년, 3년 동안 세계 방방곡곡에 오순절적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단 말이에요. 1905-1907년 동안 3년 사이에요. 이게 왜 그랬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한 진실한 성도의 입술을 통하여 성령이 무차별 역사하니까 LA 아주사 스트리트에서는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고, 비슷한 시기에, 웨일즈에서는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평양에서는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이런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순종을 바쳐서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바친 결과,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온전히 돌아가셨음을 완전히 입증하는 사건이 성령을 보내주신 사건이거든요. 이건 사도행전 2장 34-38절 사건, 여러분이 이걸 원리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다면 너무 너무 은혜 받아요. 사도행전 2장 34-38절 찾겠습니다. 제가 처음 가향교회에서 설교했습니다. 반복해서 깨닫기를 바라고 계시의 정신을 주시사 여러분이 이걸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것만 깨달으면 헨델의 메시아를 생음악으로 듣는 것과 똑같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생음악으로 들으면 너무 좋죠? 너무 충만하죠? 그걸 들으면 무신론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걸 듣고도 무신론이 안 깨진다? 마음의 강퍅함이 안 깨진다? 깨지게 돼 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를 듣고도 마음의 강퍅함이 안 깨진다?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깨지게 돼 있습니다. 심지어 킬리만자로의 표범만 듣고도 깨질 때가 있는데. 헨델의 메시아, The Lord is risen, 주께서 부활하셨다, 요한계시록 19장을 가지고 나오는 그 부분을 들으면 다 깨집니다. 할렐루야, 모든 만민이 할렐루야 하잖아요. 주가 다스리신다, 그 마지막을 듣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 진짜 하나님 살아 계시구나, 그걸 느낍니다. 여러분 그런 느낌이 항상 오는 것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말씀 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가서 처음으로 하신 일이 성령을 보내주신 일이거든요. 성령을 받자마자,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도킹했네, 우주적 도킹이 일어났네, 이렇게 느끼는 것이 성령 충만한 거예요. 성령을 받자마자 예수님이 우주의 하나님 아버지 보좌, 자기가 원래 떠나왔던 우주 대 천상의 대발진기지로 다시 돌아가셔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딱 앉으셔서 이 세상의 주와 교회의 머리가 되셨음을 금방 확신한단 말이에요. 뭘 받으면요? 성령을 받으면, 사도행전 2장 34-38절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완전한 순종을 바쳤던 예수, 그래서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쓰신 예수, 다른 사람의 죄와 모순을 뒤집어쓴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자마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성령의 선물을 받는 순간,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셨음을 확신함과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믿는 순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음을 믿는 순간에 십자가에 못이 박힌 그것까지 동시에 연속적으로 깨달음이 온단 말이에요. 그래서 한량 없는 성령의 역사이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순종을 격려하시는 보혜사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순종이 심화되기 때문에 모든 재산과 우리의 기득권이 공공의 자산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지갑은 하나님 나라의 공탁 자산으로 바뀝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지식은 성령 충만한 재능은 더 이상 그를 위한 재능이 아니라 공탁자산이 됩니다. 제 인생이 통째로 공탁돼 버립니다. 제가 성령 충만 하자마자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공공재로 바뀌어버립니다. 저 김회권이 성령 충만 하자마자 경주 김씨에서 하나님 김씨로 바뀝니다. 그리스도 김씨로 바뀌어요. 그리스도 양씨로 바뀌고, 그리스도 권씨로 바뀌고, 성령 충만 하자마자 내 모든 재능과 앞으로 내가 미래에 얻게 될 모든 지식과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공탁자산이 돼 버려요. 그래서 여러분 성령 충만하지 않기를 잘 바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죄 좀 짓고 살려면 성령 충만이 늦게 오도록 기도해야 하고요. 바로 지금 20대 때 오면 인생이 힘들어져요. 너무 빨리 거룩해지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항상 20대 초반에 성령 충만해서 저는 노래방도 가본 적도 없고 저는 룸살롱도 가본 적이 없고 많은 것들을 못 해봤습니다. 이 땅의 많은 남자들이 하는 걸 못해봤기 때문에 노래방이 뭘까? 전기가 찌릿찌릿해서 감전이 와서 죽는다는데, 룸살롱이 어떤 곳일까? 골프는 어떤 것일까? 모든 게 궁금하지만 한 번도 못해봤어요. 그러나 한 번도 골프를 칠 수 없고 내가 룸살롱을 못 간다 하더라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지배하면 우리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 돼버려요. 바울은 교회의 것이 돼버렸듯이 김회권 양진일은 하나님의 것이 되고, 내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 되기 때문에 실제로 사유재산이 없어져요. 내 자신이 하나님께 공공재가 돼버려요. 김회권은 available to everybody, 모든 사람을 위해서 available 한 존재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 돼버려요. 여러분 잘 생각해야 해요. 이렇게 살아야 할지, 이렇게 살면 가문과 결별이 일어나요. 경주 김씨는 저에게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해요. 경주 김씨 가문은 저에게 기대했어요. 우리 가문 대표였어요. 국가대표 선수였어요. 씨족 대표로 제가 서울대를 왔는데, 씨족에게 아무런 기여를 못해서 씨족에선 아주 결별이 일어났어요. 저는 제사를 지내러 가지 않고 이장할 때 돈 내지 않습니다. 지방에서 계속 돈 내라고 연락오지만 안 냅니다. 그리고 저는 김씨 집안의 땅 선산을 16분의 1은 제가 가질 수 있습니다만, 땅도 다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도록 끊임없이 격려해주시는 분이 한량 없이 하나님 아들 예수에게 임한 성령입니다. 이렇게 믿으면 삼위일체를 믿는 건데, 삼위일체를 믿으면 세 가지입니다. 순종의 철저, 순종의 심화, 순종의 기쁨,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순종이 철저해지고, 순종이 심화되고, 순종하는 것이 기뻐지는 희열, 아주 중요합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한 번 순종할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중적 사역을 받기 때문에 너무 좋아요. 삼위일체 교리를 잘 믿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이건 진짜 너무 좋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맺히면, 이 세상에서 돈으로 환산하기에는 너무나 priceless 해요. 너무 좋아요. 고등학교 학생이 성령 충만한 것이 8학군 학원 다니는 것보다 더 좋은 겁니다. 성령 충만하면 매 주말마다 남산에서 이놈저놈 만나가면서 데이트를 신청하면서 선을 볼 필요가 없어요. 성령 충만하면 그 광채가 가득차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와서 줄을 설지언정 줄 설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혼인의 길이 열릴 것이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혼인의 길이 안 열립니다. 내가 성형수술 해야 하나? 그런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은 충만한데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롭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어야 실천적인 믿음이 생깁니다. 성령 충만하여 노총각 노처녀 신세를 면합시다. 성령 충만하여 실업상태를 면합시다. 성령 충만하여 삼위일체교리를 제대로 믿어서 성경퀴즈 대회에서 상 받읍시다. 성령 충만 삼위일체 믿어서 헨델의 메시아를 듣는 것처럼 을지로와 충무로에서 승리합시다. 신앙은 너무 강력한 에너지 덩어리입니다. 이런 삼위일체교리를 믿을 때 원리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고, 삼위일체 기독교야말로 온 인류에게 퍼트려야 할 만한 진리인 걸 알게 되고, 이런 멋진 삼위일체 교리를 안 믿으면 진노를 사게 돼요. 즉 화해와 용서 선물을 안 받으면 진노를 자기 머리 위에 쌓아 놓는 것이기 때문에 아담의 진노가 누적돼요. 아담의 진노가 누적된다는 것을 너무 나쁘게 금방 쓰러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담의 진노의 가장 큰 특징은 메마름입니다. 아담은 가시와 엉겅퀴를 경험했습니다. 그 풍성한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가시와 찔레와 엉겅퀴를 경험했습니다. 불모지 같은 삶을 사는 것, 기쁨의 불모지가 되는 것이 아담의 저주와 진노입니다. 진노는 기쁨의 불모지가 된 삶, 사랑할 사람이 없는 삶, 이것이 진노입니다. 더 큰 진노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진노는 사랑할 능력 없음, 사랑의 능력결핍, 희열 없음, 사랑할 사람 없음, 기뻐할 이유 없음, 이런 것이 바로 저주를 받은 것이고, 가시와 엉겅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관계 중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를 계속 쪼아댄다, 계속 갈증이 난다, 저주 받은 땅에서 사는 겁니다. 진노가 그 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돼요? 삼위일체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가 파송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를 영접하고 한량없는 성령을 받으면 헨델의 메시아를 듣는 것처럼 충만한 발걸음으로 살아가면서 성령의 은사를 가득 받고, 이 말은 고도로 나 자신의 개인기가 발달하고 나의 독특한 성품이 개발되고 내가 가진 이 세상에 기여할 바를 발견하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어떻게 돼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서 주변을 가득 향기롭게 만드는 엄청난 영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저주 아래 살면서 진노 아래 살면서 이것이 인생이려니 사는 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파송하신 아들 말씀을 영접하여 한량 없는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주님처럼 순종의 기쁨을 누리고 헨델의 메시아를 듣는 것처럼 강력한 행진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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