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생명력의 감가상각, 소멸이 일어나고 배출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하면 피곤하게 되고 우리가 심지어 너무 고단한 일을 하면 비인간화되기도 합니다. 일은 대개 좋은 일도 우리의 생명력을 소각시키고 소멸시키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하다보면 우리의 인격이 거칠어지게 됩니다. 일은 힘을 빼앗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식사시간을 넘겨가면서까지 허기를 잊어버릴 만큼 일에 몰두하셔서 에너지를 소모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공급받으시고 주유 받으시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우리가 배출하는 힘과 정력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공급하는가, 하나님이 보내신바 된 그 일, 하나님이 하라고 나에게 부여하신 그 일을 하다보면 에너지가 공급됩니다. 2012년 새해에는 하나님이 보내셔서 하도록 위탁하신 위임하신 그 일을 잘 성취하여 원기가 많이 공급되고 능력이 충만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일 안 하고 계시는 분 없죠? 모든 사람은 일 안 하는 사람 없습니다. 장성 도계 탄광 1600미터 갱도를 보면 갱도를 내려갈수록 광부들 얼굴이 점점 일그러집니다. 지하 깊숙이 들어가면 100미터 200미터 1200미터 내려가면, 깊숙이 접근하는 갱도차를 타고가면 얼굴이 일그러지고 험악해지고 힘들어지고 고도의 고된 작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하철을 타고 출근시간에 가보면 장성 도계탄광으로 내려가는 광부 같은 얼굴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도 행복하게 보인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행복한 사람은 아마 전철을 안타겠죠? 뭔가 딴 차를 타고 다니겠죠? 전철을 타는 사람들은 모두 다 얼굴이 힘들어 보입니다. 그 일들은 우리를 아니꼽게 만들고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생계노동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두지 못하여 할 수 없이 하는 일들, 이것이 대개 생계노동이거든요.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노동이잖아요. 이런 노동은 우리의 힘 빠지게 만듭니다. 아침 출근길에 얼굴이 은총의 햇살이 비치지 않은 얼굴로 가는 걸 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는 현장을 의식하고 가면 그 속박된 생계노동,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보내셔서 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기만 한다면 그 직장도 원기를 고취시키는 직장이 되겠고 그 일도 해볼 만하겠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단순한 자기 확신, 내가 하고 있는 세탁소, 과일 가게, 채소 가게, 내가 하고 있는 이 작은 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신 일이고 부여하신 일이라는 자기암시라는 낙관적인 마음만 있어도 일이 재미있습니다. 포기를 안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상한 일도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이 보내셔서 하신 일이라는 신성한 사명감으로 재해석되지 않는다면 그 일은 우리를 몹시도 힘들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피곤에 지쳐서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정오 12시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처음 등장할 때는 피곤한 모습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약 1시간 정도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1시간 정도 이야기가 오고 가는 사이에 예수님은 갑자기 원기가 가득 찬 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제1의 가능성은 남자와 여자의 대화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자와 남자끼리 대화하는 것보다 남녀끼리 대화하는 게 에너지를 좀 더 고취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화가 적개심과 편견으로 두텁게 쌓인 장벽을 뚫고 진행된 대화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남녀사이의 교감, 본능적인 피조물 안에 있는 남녀가 특이하게 공급할 수 있는 그런 교제 때문에 힘이 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4장 9절에서 예수님에게 가시 돋히게 말했던 분위기를 볼 때 예수님과 이 여자 사이에는 최소한의 로맨스도 없고, 어떤 서로 주고 받을 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었던 교제 때문에 힘을 받은 건 분명 아닙니다. 그런데 이 대화가 깊어갈수록 예수님의 원기를 결정적으로 고취시킨 게 무엇일까? 논쟁으로 시작된 이 대화가 예수님의 어떤 부분을 공급했을까? 우리는 기대해볼만한 기대감을 가지고 본문을 봅니다. 27절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여자와 대화하는, 여자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다시 말해서 무슨 수작을 이렇게 몰입해서 하고 계십니까? 이 몰입된 수작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감히 묻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그 대화가 끼어들 수 없는 몰입의 대화였고 교감이 아주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교감이 깊은 것이 아니라 28절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마리아 동네로 떠나가서 사람을 다 데려오는 이 사태가 예수님을 원기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가 주는 힘입니다. 대화하면 힘이 빠집니다. 그렇죠? 가시 돋친 편견과 적개심을 가지고 시작된 대화, 쉽지 않죠? 사마리아 여자를 보십시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이 장면이 바로 예수님에게 엄청난 원기를 고취시킨, 엄청난 진수성찬을 잡수신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4주간에 걸쳐서 제가 이 본문을 다루었기 때문에 다시 요약하지 않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는 125년간 누적된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BC 125년에 유대인들이 군대를 동원해서 이 사마리아 여자가 있는 그리심산 사마리아 성전을 다 초토화시키고 그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사람을 다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심산에 예배를 드리는 것과 시온산에서 예배드리는 것 사이에 헤게모니 각축과 분쟁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산에서도 예배하지 말고 저 산에서도 예배하지 말라는 21절의 대화는 125년 전의 갈등을 순식간에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사마리아 여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다는 말은 정확하게 신명기 27장입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들이 그리심산에 올라가서 예배드립니다. 그 그리심산 밑에서 성전을 만들어놓고 예배드렸기 때문에 모세 시대까지 소급 가능한 오래되고 유서 깊은 산이 그리심산입니다. 예루살렘은 오히려 훨씬 후대에 생겼던 신생 예배터입니다. 그리심산 세겜 이 지역이 훨씬 더 뿌리 깊은 조상 야곱의 성소입니다. 세겜은 조상 야곱의 성소입니다. 조상 야곱과 아브라함이 터를 잡았던 곳이 세겜이기 때문에, 세겜이 있는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통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인들이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면 안 돼,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해, 하고 다 죽여 버렸습니다. 지금 정확하게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난 일, 남수단과 북수단에서 일어난 일,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 레바논에서 일어난 일, 전부 다 그리심산과 시온산의 신성성을 다투는 전쟁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 산이 더 신성하느냐 저 산이 신성하느냐고 하는 의미 없는 논쟁과 헤게모니 각축이 종교의 각축입니다. 지금 남수단과 북수단이 갈렸습니다. 남수단의 많은 사람들을 북수단의 사람들이 공격합니다. 이번에 나이지리아 19명 죽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죽었습니다. 종교는 지중해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지중해를 내해로 끼고 있는 이곳은 계속 앞으로 종교 갈등이 심해질 곳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도 봉은사에 가서 스님 머리를 쥐어박고 깎으려고 하고 깎은 머리를 또다시 한 번 더 학대했습니다. 이번에는 목회자가 그랬습니다. 봉은사 땅을 밟은 것은 오히려 신사적입니다. 그런데 스님의 몸에 육체적인 해를 가합니다. 이것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면 안 돼, 예루살렘 성에서만 예배해야 해, 일종의 이런 논쟁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국지적 논쟁 말도 안 되는 논쟁들을 일축했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소통되는 예배, 하나님이 열납하는 예배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125년 동안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는 본문입니다.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계에서 기독교 한기총과 조계종 일부 사이에 있는 갈등은 그리심산과 시온산의 갈등만큼 매우 하급갈등, 본질이 아닌 갈등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다원주의를 정당화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뽑아내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만 그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22절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신성성의 갈등과 각축에서는 누구의 손도 들어 주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사람의 중심이 더 예배를 예배답게 만든다고 말함으로써 산의 신성성에 대한 갈등과 경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처음 들은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125년 만에 처음 들은 말이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 산도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는 다는 이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장소에 매인 분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매이는 분이다, 하나님은 장소와 물질적 환경의 신성성 여부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 신령과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다짐하는 그 사람에게 매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에게 감화하신다, 이 말은 사마리아 사람이 처음 들은 말입니다. 유대인의 입에서 나온 이 첫 마디, 유대인의 입에서 나온 사마리아와 유대인을 형평케 만든, 평균케 만든 이 말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당신은 메시아 일지도 모른다, 메시아가 와야만 해결할 문제를 당신이 해결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가 그라’ 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125년 동안 있었던 국지적 헤게모니 논쟁 신성성의 각축들을 끝내버리는 것이 예수님의 이 말입니다.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의 중심이다, 우리 하나님은 산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 사람에게 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절하는 사람에게 매여 있습니다. 진심으로 두 세 사람이 모여 내 이름을 부르는 곳에 내가 함께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자기의 속박을 느낍니다. 우리 하나님은 산에 속박을 느끼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속박을 느끼는 겁니다. 이건 사마리아 사람이 들었을 때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놀라서 다가왔습니다만 예수님은 유대인에게서 구원이 나온다는 말을 구가함으로써 선민사상을 긍정했습니다. 중요합니다. 이게 왜 중요하느냐면 <복음과 상황> 12월호에, 과연 유일신 사상은 인류 문명의 적인가? 라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지방의 최유신이라는 철학과 교수가 질문을 해왔습니다. 쭉 하고 나서 유일신 신앙을 옹호하는 본문, 콘스탄틴 종교 공인 이전의 유일신 신앙은 괜찮다고 말하고 그 이후에 유일신 신앙만 안 좋다고 말하는 데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저는 유일신 신앙 모두가 문제라고 봅니다, 기독교가 유일신 신앙을 다 고집피우는 한 인류문명의 걸림돌이 된다고 믿습니다, 저는 참고로 기장교회에 다닙니다, 저는 예수님이 유일신 신앙을 고집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와 세 차례 긴 질문과 응답을 주고받았습니다. 마지막에 논쟁이 끝나서 이분이 감사하다는 메일을 보냈는데, 제가 새벽 일찍 기도하자마자 새벽 5시 반에 답장을 보냈습니다. A4 2장정도 보내고 답장이 왔는데, 그 내용을 제가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일신 신앙의 배타성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유일신 신앙은 자기를 특권화 시키는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비특권화하고 자기를 종처럼 낮추기 위해서 항상 유일하신 아버지를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아버지를 말했을 때는 자기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제로로 낮추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이런 배타적 유일신 신앙은 인류 모두의 공익을 위한 것이고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 유일신 신앙은 헤르만헤세와 임어당이 마지막에 부여잡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배타성, 즉 자기를 특권적으로 우대하는 자기복무적 배타성은 비난해야 하지만 자기를 낮추어죽기까지 복종시키기 위하는 그 사람이 말하는 배타적 신앙은 오히려 인류가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배타적 신앙에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배타성과 자기 비움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라고 해서 아닙니다, 참으로 배타적인 분이 자기를 비우는 일이 가능합니다, 이건 구약성경의 모순근사치적인 논리입니다, 그랬더니 알겠습니다, 하고 감사하다고 왔는데 자기소개를 소상하게 했더라고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은 자칫 잘못하면 다시 유대인의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은 하나님의 표준적인 구원은 유대인들의 구원경험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모든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이 경험한 구원, 비특권적 구원경험, 인류의 보편적 공익을 매개하는 구원경험, 다시 말해서 자기 민족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역사책에 나오는 천조대신의 후예라는 주장, 파라오의 계시문서, 메소포타미아의 이시타르 여인에게 받았다는 계시문서들, 세계 모든 신과 자기의 가족적 친정관계를 주장하는 모든 고대문서와 달리 우리 구약성경은 자기가 하나님 백성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 가장 자기를 비특권적, 인류에 봉사하기 위해서 선택받은 종으로 자기를 말할 때만 특권을 말했고, 선민사상을 말했고 택함 받았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택함 받았다는 주장을 할 때는 자기를 특권적 지위로 올려놓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를 착하다고 한 본문이 전혀 없고 오히려 자기의 처참한 죄성을 다 드러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은 구약성경에 적혀 있는 죄로 물든 이스라엘 백성을 끝가지 돌보시는 우리 하나님, 그런 은총의 절대적 주거성, 이런 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경험한 구원이야말로 인류모두가 알아야 할 구원입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 한 겁니다. 도올 김용옥이 한신대 2년 다녔죠? 한신대 2년 다니면서 구약성경을 아주 무시하고 깔보는 시대 때 독일에서 유학한 안병무로부터 구약을 배웠습니다. 안병무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할 때 anti semitism 이라고 해서 구약성경을 배척하던 독일신학을 배웠습니다. 안병무가 구약을 가르쳤을 때만 해도 기장측은 구약성경 안 들고 다녔습니다. 시편하고 신약성경 합본을 들고 다녔습니다. 구약이 없었습니다. 그때 공부한 사람이 김용옥입니다. 그것도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다가 말았기 때문에, 구약성경과 <일본서기>가 무엇이 다르냐? 오히려 <일본서기>가 더 낫다,라고 하는 망언을 했습니다. 2008년 <기독교 사상> 6-8월호 세 번에 거쳐서 <도올 김용옥의 성서 이해> 자세히 읽기, 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시간나면 읽어보십시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비특권적 선민 신앙, 인류의 공익을 위한 배타적 선민신앙은 구약성경의 독특한 모습입니다. 이 세계 어떤 종교문서에도 자기가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자기복무적 특권적인 작업의 맥락에서 쓰지 않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배려하고, 인류의 공익을 배려하는 맥락에서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구약성경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너무 독특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서 구원이 난다는 말은 절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이에 헤게모니 논쟁을 다시 끄집어내지 않고 오히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뜻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먼저 진리라는 말부터 설명합니다. 진리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자기에 대한 참된 지식 안에서 예배드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영으로라는 말은 하나님께 이끌린 채, 영이신 하나님께 감동받은 채, 즉 특정한 장소에 매인 분이 아닌 하나님, 오히려 인격의 중심과 양심의 중심에 의하여 소통의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 어떤 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 상태, 카인과 아벨 중에서 아벨 식으로 예배드리는 사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의 예배를 받으시고 신령과 진정이 아니라 마음속에 죄를 품고 살기를 품고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제단에 나올 때 그 제단의 예물을 안 받으시는 하나님,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영이신 하나님, 다시 말해서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인종을 특별화시켜서 특정한 장소를 신비화시키는 방식으로 인류에게 접근 당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사람의 진심이 하나님의 성품에 온전히 합당한 방식으로 나와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요구를 알고 하나님께 접근하는 자가 영으로 예배드립니다. 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의 가장 대표적인 본문이 로마서 8장 6-11절입니다. 영으로 예배드린 다는 말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여기 보십시오. 영으로 예배드리는 자의 반대말이 육신입니다. 육신이라는 말은 카인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카인방식으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는 마음이 없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할 의지가 없는 상태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안 받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순종할 의지로 감미롭고 자발적인 복종의지로 가득 찬 사람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단 말이에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은 영 안에서 예배드리는 사람과 정반대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괄호하고, 절대적 순종과 자발적 순종의 화신인 그리스도 영, 순종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라는 말은 하나님께 순종할 의지로 가득 찬 상태로 경배하는 사람만 하나님이 찾으신다, 그래서 이런 예배의 이해 때문에 초대교회는 거듭난 신자 아닌 사람을 예배 못 드리게 한 거예요. 예배에 끌려온 사람에게 하나님이 받으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제가 교목실장하면서 채플시간에 예배포맷을 바꿨어요. 그 동안 제가 채플하기 전에는 채플 시간에 믿지 않는 사람이 70%가 넘는데, 찬송가를 앞에 두고 불러야 해요. 그다음 숭실대교가 불러야 해요. 그러니까 더 막 부글부글 끓는 거예요. 제가 이걸 없앴습니다. 70%가 하나님을 모르는데 예배를 받으신다? 그 말은 하나님 안 믿는다고 몽둥이로 밤새 고문찜질을 당했는데 그 다음날 하나님이 퉁퉁 부은 사람에게 할렐루야 이런 소리를 들을 만큼 민망한 짓인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강제로 예배를 드리게 하면 민망한 짓인 거예요. 미션스쿨에서 강제로 예배를 드리면 안 돼요. 강의를 해줘야 해요. 예배는 영과 진리로만 예배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이유 때문에 미션스쿨에서 강제로 예배를 드리면 안 돼요. 요새는 목사님들이 서는 순간 학생들이 엄청 화를 내는데, 교수가 서서 수평적 맥락에서 강의하면 대부분 감았던 눈이 떠집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오는 순간 눈을 감아버립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보실 때 강제로 그 사람들의 구원 섭리상,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강제로 예배드리게 하고 무릎을 꿇리게 만드는 건 고문입니다. 그건 인권법에 걸려요. 이런 것은 강제로 무릎을 꿇린 거예요. 우리 거룩하신 하나님이 강제로 무릎 꿇린 사람을 어떻게 받으시겠어요? 안 받으시죠. 양목사가 저를 존경한다고 지나가던 숭실대 애들을 용역 풀어서 꿇려서 기독교학과에 앉혀 놓으면 제가 그걸 보고 좋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존엄의 파괴가 일어나고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거죠.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순종할 자발적인 마음상태가 된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자기에 대한 참된 앎을 가지고 예배할 때, 그런 사람이 예배드리면 예배는 사사로운 행위가 아니겠죠? 이런 예배를 드리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100명이 한번 예배드릴 때 한 단위의 순종이 일어나면 100단위의 순종이 일어나겠죠? 만 명이면 만단위의 순종이 일어나니까 만 명이 하나님 뜻에 동시에 순종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느냐고요? 월요일에 특히 좋겠죠? 월요일 화요일에 약발이 더 있겠죠? 예배드리고 감격이 있으니까, 월요일 화요일은 안식일 혜택의 햇살 아래 머물겠죠. 그게 예배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그거거든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면 예배행위는 기독교인의 사적행위가 아니라 우주적인 공적행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걸 원하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 우리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는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대변하는 사람이 사마리아 여자인 거예요. 사마리아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감격을 회복하고 막 자기를 왕따시키고 따돌림 했던 그런 사람에게 가서 와보라,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래서 많이 몰려오고 쇄도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딱 보자마자 예수님은 너무 힘이 났어요. 왜? 125년 동안 누적된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적개심의 담벼락이 무너지는 환희를 맛보았기 때문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아직 먹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잡수소서 하니까, 31절에 제자들이 집요하게 말합니다. 오호 마테 타일 레본 테스 라바히 바하게 바하게, 자꾸 잡수세요 하니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떼로 몰려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가 바로 나에게 원기를 북돋우는 일이야, 나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에 화해의 복음을 위탁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이 기쁨이야 말로 나에게 엄청난 원기를 공급하는 일이었어, 지금 떼로 몰려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나에게 진수성찬을 받은 것과 똑같아, 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2012년에 신적 에너지를 공급하는 성스러운 사명들, 여러분이 성취해야 할 성스러운 사명들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정신과 육체를 희열로 몰아가는 멋진 일들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야 노동의 비인간화를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에너지 말씀이 정말 가슴에 와 닿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 나를 사마리아로 보내신 자라는 뜻입니다. 이때는 나를 보내신 자가 세상으로 보내신 자로 보면 안 됩니다. 사마리아로 가라고 4장 4절에서 압박하신 분,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원래 사마리아로 가는 길은 이겁니다.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가 활의 원호모양으로 가던 길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올라갑니다. 사마리아로 직행하도록 압박하는 신적 압박감, 나를 사마리아로 통과하도록 압박하신 그 분이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 즉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평화를 만드는 그 일이 나에게 음식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생계노동, 나에게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아니꼬운 마음 보듬어 가면서 사직서 내기 직전 폭발직전까지 가는 그 구차한 일 말고 내가 직장에 와서 해야 할 더 성스러운 일,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받는 그 일을 내가 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 라는 말입니다. 너무 차원이 높은 말이죠. 두고두고 음미해야 할 말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이걸 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긴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2012년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이 나에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해야 할 일이거든요. 우연한 하루에 이렇게 가지 않고 이렇게 가야 하는 불편 역경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는 길 대신에 이 길로 가라고 하는 신적 압박감을 받아 갔던 길인데, 그 신적 압박감을 받아갔던 그 길에서 예기치 않은 화해의 잔치가 벌어지고 소통의 잔치가 벌어지는 일 때문에 예수님은 너무나 큰 음식을 차려 먹은 것과 같은 효과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2012년 한 해 동안 힘 빠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지라도 일하면서 새 힘 공급받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 일, 토 에레븐, 토 텔레마, 하나님 뜻과 하나님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일은 추상적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을 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일상생활의 현장에서 이렇게 걸어가는 정상적인 길 대신에 신적인 압박감에 따라 직행하고 북상하는 비인습적인 방법으로 예기치 않은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 뜻이 이뤄질 수 있는 거거든요. 여러분도 이렇게 평소에 가는 익숙한 길 대신에 정면 돌파하는 길을 가다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화해의 실타래를 맞이할 수 있고 소통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는 거거든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을 예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초대교회가 얼마나 대단했어요? 종과 자유자가 하나 되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고 헬라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고, 모든 장벽을 단숨에 넘어버린 직행 돌파 화해가 초대교회의 엄청난 에너지죠. 2012년 한 해 동안 혹시 여러분, 화목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위탁하신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내가 철조망 너머에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과 철조망 너머에 있다고 생각했던 그 지역을 통과할 압박감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 마련하신 예기치 않은 평화와 화해와 소통을 맞이해보지 않겠습니까? 엄청난 에너지가 공급되는 식사가 예비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꼭 한 번 해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신적 압박감을 주셔야 하는데, 이건 평소에 순종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옵니다. 평소에 순종을 많이 하는 사람, 평소에 기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이런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가 옵니다. 빌립 집사야, 가자 톨게이트로 뛰어 내려가라, 성경을 깨닫지 못한 한 사람이 벤츠를 타고 간다, 빌립집사가 질풍노도처럼 뛰어갔더니 벤처를 타고 갔던 한 사람, 에티오피아 재무부장관 내시가 타고 있습니다. 올라가자마자 이사야 53장 펼쳐놓고 까막눈을 가지고 쭉쭉 읽어내려갔습니다. 이런 즉시의 이 순종, 비구니아로 향했던 사도바울을 막아섰던 하나님께서 드로아에서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마케도니아로 와 달라는 기대를 받고 마케도니아로 갑니다. 순종하는 사람의 궤도는 이렇게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과업들,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인물들의 점점의 만남으로 너무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일상생활이 재미있습니다. 여러분 순종의 궤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고도의 영적 감화의 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의 감격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사마리아로 통행해야겠다는 순종의 결단이 일어납니다. 순종의 결단을 통하여 원기를 고취 받는 새로운 식단도 마련될 것으로 믿습니다. 2012년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철조망 너머에 있는 마을로 돌파하여 화해의 지평도 마련하고 예기치 않는 소통도 마련하고 원기를 공급받는 신적인 식탁에 참여하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맙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로 통행하라고 압박하신 하나님 뜻을 붙좇아서 비인습적인 길이었지만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갔을 때 처음에는 대화가 통하지 않고 답답했지만 마침내 하나님 생수를 들이키는 은총의 시간을 맞이했고,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125년 동안 누적된 적개심의 담벼락이 무너지는 창조적인 화해를 맛보았습니다. 주님 우리도 예기치 않게 때때로 순종하다가 이런 멋진 나날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하나님께 한 번 순종할 때마다 한번 절하고 경배할 때마다 엄청난 새 힘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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