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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27-34(주일 1부예배설교)

by 【고동엽】 2022. 1. 30.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임진년 새해가 밝았는데 힘차게 출발했습니까? 아니면 구정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임진년 새해 지난해보다 훨씬 높은 거룩한 삶의 목표가 있어야겠고, 우리가 계획한 바를 성취하여 성취한 기쁨이 우리에게 각각 넘쳐야겠습니다. 저는 오늘 요한복음 4장 말씀으로 신년예배를 드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들어가야겠다는 마음의 압박감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가까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44절에 보면 사마리아를 통과할 내적 압박감 또는 신적 압박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사마리아가 부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마리아 유다를 지날 때마다 사마리아를 비켜가면서 요단협곡이라는 활모양의 원호, 긴 부자연스러운 도로보다 직행도로인 사마리아 도로, 옛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건너갔던 도로입니다. 그 족장도로입니다. 족장도로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도로입니다. 그 직행도로인 사마리아를 제쳐두고 길게 우회하는 게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족장들의 길을 따라 즉 사마리아를 직행하는 길을 가야 하는 압박감을 가졌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할 이유가 분명했는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뜻밖에 우연치 않게 하나님께서 예비한 인물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앉았을 그 시간은 정오 12시였습니다. 식사시간이었고 매우 기진했습니다. 그래서 46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그랬습니다. 우물곁에 그대로 앉았기 때문에 이때는 매우 시장할 때입니다. 31제자들이 청하여계속 청하여입니다. 레곤테스입니다. 랍비여 잡수소서이렇게 계속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장하셔서 털썩 기진한 채로 우물에 주저앉으셨던 분인데 사마리아 여자를 통하여 영적 소통을 하시고 사마리아와 화해를 성취하신 후에 원기가 가득 찼습니다. 27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예수님과 사마리아 사람의 대화가 절정에 도달하여 감히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몰입 상태가 된 겁니다. 28절 보십시오. 여기가 예수님의 기분, 원기가 매우 고취되는 순간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정상인들의 동아리, 공동체로 들어갔습니다. 29-30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여기가 바로 예수님의 식사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개인적인 수준의 영적 소통이 사마리아사람과 사마리아인공동체와 예수님 사이의 영적화해와 소통으로 이어지는 길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먹어야 할 양식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음식을 드시진 않았습니다. 음식을 아직 드시진 않았지만 잡수소서자꾸 요청할 때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먹지 않고 여자가 데려 온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면서 음식을 가득 먹은 것과 같은 효과, 원기를 가득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합니다. 32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이 말은 내가 지금 먹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너희가 모르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다, 너희가 모르는 음식, 내가 너희가 준비했던 화학성분으로서의 음식을 먹기 전에 해야 할 더 우선적인 일, 원기를 고취시키는 사명이 나에게 있다, 너희가 준비한 음식을 먹는 그 일보다 더 나를 원기 있게 만들고 힘차게 만들고 나를 energetic 한 과업, finish 해야 할 과업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임진년 새해에는 1차원적인 욕망을 잠시 제쳐놓을 수 있을 만큼 emergent 하고 더 긴급하고 나에게 원기를 고취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energetic한 음식입니다. 여러분 1차원적인 삶은 physical 양식을 우리가 먹는 겁니다. 화학성분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을 먹는 겁니다. 그런데 그 1차원적인 영양분을 섭취하는 식사보다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 내가 일을 해야 만 에너자이저가 되고, 내 기분이 좋아지고 나를 원기 있게 만드는 그 일을 관여해야 합니다. 원기 있게 만드는 그 일을 성취해야 합니다. 임진년 새해에는 모든 사람, 모든 단위, 모든 인생의 한 시점에서 올해 해야 할 일에 매진하고, 일을 하면 소모가 일어나죠? 일은 소모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일은 영적 소모와 피폐화를 가져오는 노동인 것은 분명하지만 내 속에서 빠져나갔던 원기를 능히 보상하는 새로운 에너지가 나에게 주유되고 주입되는 게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생명의 정서적 육체적 소모를 분명히 일으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육체적 소모와 생명력의 고갈을 일으키는 그 일이 끝나는 그 순간 더 많은 신적인 영양분, 하나님의 원기가 나를 사로잡을 때, 이게 바로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음식입니다. 여러분, 이런 음식이 다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음식을 다 드셔야 합니다. 이 말은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음식을 먹는 겁니다. 우리가 동물적으로 살지 말고, 동물적으로 사는 것은 삶의 기초적인 최소한의 수준이거든요. 동물적 수준의 원기고취 생명력 고취 말고 하나님이 나를 할 일 많은 대한민국 이 땅에 보내신 그 목적을 위하여 내가 매진하여 내 정서적 육체적 신체적 피폐함과 소모를 가져오는 일임과 동시에 훨씬 더 큰 에너지를 나에게 주유해주고 주입시켜주는 그 일을 성취하는 한해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모든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일상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그 일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일상 속에 나에게 주어진 그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일상생활에 나에게 주어진 직장 일은 mask of god, 하나님의 가면입니다. 루터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생업 노동도 하나님이 더 크고 고상한 노동과 소명으로 나를 이끌기 위한 잠정적인 단계의 일이라는 것, 생업노동, 나에게 주어진 일상적인 노동, 진부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은총의 광채가 전혀 비춰오는 것 같지 않은 평범한 나의 노동현장,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을 발견하게 만드는 하나의 문턱입니다. 계기가 된다는 것, 참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적 존재입니다. 소모함으로 에너지를 원기를 공급받는 사람입니다. 영적 소모, 영적 원기에 drain, emotion drain, 정서를 고갈시키는 겁니다. 다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어주는 행위, 그것이 원기를 고취 받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힘을 공급받는 행위래도요. 이 신적노동, 예수님의 노동이 갖는 변증법적인 이중구조를 잘 알아야 합니다. 제가 말씀을 연구할 때 설교할 때 피곤한 일이지만 저는 에너지가 넘칩니다. 강의할 때 이것이 저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일입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이 보내주신 일이 아니면 3시간짜리 강의가 얼마나 길겠습니까? 그런데 3시간짜리 강의가 저는 길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일이기 때문에, 그런데 제가 특정 정당에 가서 무슨 민정당 수련회에 가서 민정당원 교육을 시킨다면 30분도 너무 길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일의 특징은 내가 그 일을 하여 영적인 에너지를 누수 시키고 소모시키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나에게 오는 일이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게 바로 소명입니다. 소명과 생계노동,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마에 땀 흘리는 노동의 차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이마에 땀 흘리는 노동은 정서적으로 데미지를 입으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노예노동이고 속박노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내신 노동은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생계노동, 노예노동 속에 하나님이 보내신 성스러운 노동이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그 생계노동도 매우 눈여겨보기는 해야 합니다. 일하는 분이죠? 일꾼들이죠? 일 안하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백수도 정말 힘들답니다. 백수과로사라는 말이 있는데, 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라도 부른답니다. 이사할 때도 부르고 다 부르기 때문에 백수과로사라는 말이 있는데요. 일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면 다 부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이 사람이 백수라고 알려지는 순간 과로사에 걸릴 만큼 그렇게 바쁘대요. 백수마저도 엄청 바쁘다, 우리가 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우리가 일할 때 지하철 타보면 표정이 너무나 어둡습니다. 일이라는 게 dehumanizing, 우리를 비인간화시키는 노동현장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처럼 너무 힘든 겁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5분 식사시간만 온전히 자유 시간 개인의 시간이고, 나머지 모든 시간은 포로로 잡힌 시간이고 dehumanizing 시간이거든요. 그런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비인간화, 나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십장의 잔악함, 자기 존엄을 방어하는 길은 일의 신성성을 부여하는 거거든요. 일이 재미있고, 석수장이였던 그 주인공이 내가 채찍 때문에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마음으로 예술적인 혼은 불어넣고 일을 할 때 존엄이 확보되고 채찍질이 와도 견딜힘이 나오는 거거든요. 속박되어서 하는 노예노동을 성스러운 사명감으로, 심지어 인위적으로 발명된 사명감이라도 필요하다는 거거든요. 우리가 의미 없이 이반 데니소비치처럼 수용소에 갇혀서 해야 하는 그 일마저도 그 일이 나에게 dehumanizing, 비인간화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이 일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거거든요. 인위적으로 고안된 것이라 할지라도 사명감을 부여해야 해요. 그러면 노예 채찍질로 우리의 등짝을 때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노동을 하면 우리 생명의 빛이 다 꺼져갑니다. 우리가 노동을 하면 우리 몸에 있는 좋은 것들이 다 데미지를 입고 손상됩니다. 내가 일하는 현장에서 직장상사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것, 우리 인간의 존엄의 빛이 꺼져있기 때문에 우리를 동물처럼 쉽게 학대하는 겁니다. 내가 노동자 작업이라 할지라도 고도의 장인처럼 자긍심을 가지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적인 몰입을 가지고 나의 직장생활을 한다면 우리 직장동료나 상사가 함부로 우리를 학대하지 못할 존엄의 빛이 나온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임진년 새해에는 예수님이 먹었던 음식, 소모하면서 소진하면서 더 큰 에너지를 공급받는 그 길에 반드시 연루돼야 하고 관여해야 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 힘이 납니다. 여러분 모든 일은 비인간화시킵니다. 모든 일은 우리의 육체적 소모와 정서적 소모와 감정적 소모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소모를 만회하고 상쇄시키는 것은 우리 주님이 주시는 사명,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셔서 하는 일이라고 하는 사명, 그래서 미국 필라델피아 한 교회에 세탁소 교인이 직접 해준 간증입니다. 몇 년 전 미국 흑인 변호사 때문에 우리 한인세탁소 업자가 천 8백 몇 십억의 소송이 걸린 거 알죠? 세탁소 일은 정말 천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천한 일을 천하지 않게 감당해서 대성공을 거둔 필라델피아 세탁업자가 어떻게 천한 일을 천하지 않은 고상한 일로 만들었는가를 간증했는데, 내가 오늘 맡아서 빠는 옷은 스랍 천사가 입는 세마포이며 성도가 입는 세마포이며 우리 주님이 입는 세마포이다, 그런 마음으로 엄청 최선과 정성을 다하여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인위적으로 고안된 거죠. 그게 천사의 세마포가 아니죠? 그냥 잡놈들 죄인들의 옷이죠? 그런데 그 옷을 천사의 세마포라는 믿음으로 인위적으로 고안된 사명감을 가지고 했을 때 이 사람의 태도와 손님 접대하는 눈빛이 달라져 명성을 얻어 대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주어서 하는 일로 영접하는 것, 이건 상식적이고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대화결렬 상태로써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졌습니다. 초기에 어떤 인내를 가졌습니까? 편견과 적개심을 가지고, 유대 남자인 당신인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왜 수작을 겁니까? 라고 했던 최초의 불편했던 순간들을 예수님은 이겨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마리아 여자의 진실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의 영적 목마름을 인지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살았던 기구한 인생을 순식간에 육박했습니다. 그녀의 기구한 인생의 놓여 있는 영적 기갈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물 한 컵 얻어 드시러 오셨다가 예수님이 여인의 목마름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깊어졌습니다. 125년 동안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 누적되었던 적개심의 쟁점들도 금방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뭡니까?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것과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 125년 전에 그리심산 대학살 사건을 순식간에 상기시키는 이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있는 적개심, 125년 동안 누적된 헤게모니 정통성 등의 싸움의 역사를 예수님께서 싸매 안으십니다. 그리심산도 시온산도 아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올바른 것은 이 산의 정통성과 저 산의 신성성에 관한 논쟁이 아니고 예배드리는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면 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때,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와 유대의 국지적 헤게모니 전쟁이 끝나는 때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시온산과 그리심산의 국지적 분쟁이 끝나는 날은 언제인 줄 아십니까?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닙니다. 그리심산도 아니고 시온산도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삶, 그곳이 하나님이 찾는 예배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마리아 그리심산도 찾지 않고 시온산도 찾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찾는 산,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습니다.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있는 오래 묵은 갈등을 풀었습니다. 그 말은 너무 중요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누구, 그 당시 랍비도 사마리아와 시온산, 그리심산과 시온산 둘 다를 이렇게 동등하게 상대화시키는 말을 함으로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있는 BC 125년전에 있었던 그리심산 성전에 대한 유대인들의 초토화 공격과 학살사건을 이렇게 치유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과 예수님 사이 대화의 결정적인 화해의 물꼬는 이것입니다. 그리심산도 아니고 시온산도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 찾는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러신줄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나 교파의 신성성과 헤게모니를 다른 교파나 다른 산들보다 더 신성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종교다원주의가 여기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심산도 아니고 시온산도 아니다라고 하면 모든 산은 다 동등하냐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등산로 비유가 나옵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그런데 예수님의 종교다원주의로 갈 수 있는 말에 어떤 쐐기를 박았느냐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리심산과 시온산의 헤게모니 전쟁은 무효화시켰습니다만,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특별한 선민을 통하여 온다는 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선민사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계만민에게 동등되게 접근되시는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민족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과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모든 민족에게 자기를 충분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은 유대인이라는 택한 백성을 통하여 인류에게 전파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보편적 구원사를 특수한 선민을 통하여 성취하였기 때문에 여기도 변증법적입니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깨달아야 할 그 진리를 예수님은 특수한 선민, 유대인의 역사 속에 집중적으로 드러나게 하셔서 유대인들이 경험한 그 구원이 표준적인 하나님 경험임을 못을 박음으로써 전 세계 모든 산들의 동등성을 다 인정해버리는 종교다원주의로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참 절묘합니다. 유대인들에게서 구원이 나온다는 말은 유대교가 옳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의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 인류에게 매개하고 운반하는 역사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체를 살렸습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다 살아났습니다. ? 유대인들을 통해서 인류에게 매개될 구원이 전파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역사, 구약의 역사가 예수님의 이 한마디 때문에 다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기 때문에, 이 말은 우리 하나님의 보편적인 접근 가능성, 우리 하나님의 보편적인 예배가능성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로부터 구원이 나온다는 말은 비대칭적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가 갖는 특권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이 말은 유대교 또는 유대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서글프고 한 많은 역사 속에 나타난 그 경험된 구원사가 참 구원사고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참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 경험이 압축된 책이 구약입니다. 구약은 분명히 특수한 선민사상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 선민사상의 가장 근본에 자기복무적인, self serving ideology, 자기 복무적인 이데올로기가 전혀 없는 선민사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의 선민사상은 선민인 자기를 특권적으로 우대하는 어떠한 발언도 없습니다. 오히려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 자신은 most critical 합니다. self critical 합니다. 선민인 자기 민족의 역사를 가장 냉혹하게 심판하고 가장 냉혹하게 판단하고 비특권화하고 있습니다. 중요합니다. 비특권화, 내가 택함 받은 백성이라고 내가 모든 걸 다 가져버리는 선민사상이라면 배척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그게 아니라 비특권적 선민사상입니다. 비자기복무적, 영어로 말하면 self serving 자기를 섬긴다는 겁니다. self serving 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의 하나님 경험이 압축된 구약성경에는 우리가 배척해야 할 선민사상이 나타나지 않고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상대화시키고 비신앙화시키고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이 <여자란 무엇인가> <기독교성서의 이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본 서기>와 구약성경의 차이가 뭐냐? 똑같다, 이런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이 얼마나 어리석고 구약성경을 모르는지, 구약성경은 이렇게 써놨습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아느냐? 간음 폭력, 그래서 제가 2008년에 제1회 인문학 포럼에서 도올 김용옥 성서이해에 관해 250매 장문의 논문을 써서 발표했습니다. <기독교 사상> 6-8월호 3회에 걸쳐서 실려 있습니다. 한종호 목사가 그 원고를 그대로 제 허락을 받고 <기독교 사상>에 실었습니다. 원고지 250매이니까 꽤 긴 원고입니다. 한 번 읽어보면 도올이 더 이상 요한복음 강의를 못합니다. 도올이 다시 노자 도덕경으로 돌아갔죠? 원래 요한복음 하다가 논란 끝에 끝났습니다. 도올의 구약 폄하에 대한 설명을 쭉 했는데, 구약성경에 유대인들의 처참한 초라한 자아상이 나오나? 이게 바로 자기민족을 선민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일본 자신이 천조대신의 자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일본이 신의 자손이라는 말, 이집트가 파라오 신의 자손이라는 말하는 것과 성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말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요. <일본서기>와 이집트 문서에는 우리가 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영원히 지배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유대인들의 맥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고 이방인을 위하여 섬기는 종이 돼야 한다는 비특권적 선민의식만 나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구원이 나온다는 말은 비특권적 선민의식을 가지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하나님의 이해가 표준적인 하나님 이해이며, 이 하나님의 구원이 표준적인 하나님 구원이라는 말뜻이에요. 절대로 유대가 사마리아보다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나요? 이게 이해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이 4장 본문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정말 깊은 본문이에요. 유대인들에게서 구원이 나온다는 말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우위에 관한 종결적 선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괄호하고, 천대 받고 박해받았던 하나님 경험, 그 구원 경험이야말로 표준적인 구원경험이기 때문에 인류만민에게 전파돼야 할 그 구원은 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이 경험한 그 구원경험이라는 뜻이에요. <일본서기>와 이집트 파라오 문서와 너무 달라요. 고대 어떤 종교문서와도 구약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이 하나님 자녀고 하나님 택한 백성이라는 말을 쓸 때는 특권의 완전한 포기와 부정을 의미했지, 특권의 옹호를 의미한 게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에 비해서 이집트 많은 문서들, 모든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문서들, 에살핫돈 사르곤 산헤립 이런 왕들의 문서, 신이 나타나서 자기에게 왕권을 주었다고 주장, 이시타나의 여신이 나타나서 나에게 왕권을 맡겼다는 모든 고대 바벨론 문서들은 전부다 특권의 영속화를 위해서 신을 언급합니다. 특권의 영속화 특권의 세습화를 위해서 신을 언급하는데 구약성경은 특권의 완전한 부정과 포기,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자기 비움, 그걸 말할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써요. 맥락이 완전히 달라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의 논쟁에서 사마리아를 기죽이고 유대인들을 우대하는 발언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유대인들이 경험한 그 구원이 세계만민이 알아야 할 표준적인 경험이다, 하나님 경험이다, 이런 뜻이에요. 핵심은 결국 이런 유대인 하나님 경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게만 알려져요.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잘 들으세요. 예배 매일 드리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 라는 뜻입니다. 참 진리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라는 뜻입니다. 자기에 대한 참된 이해로 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느냐면 자기에 대한 참된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로 하나님이 내 절을 받으시고 내 경배를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가 하나님께 고개 숙일 때 내가 고개 숙이는 걸 유효하게 만들어주는 영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절을 하고 기도할 때 내 기도의 언어, 내가 절하고 경배하는 몸을 구부리는 종교적 몸짓들을 유효한 하나의 의사소통 행위로 만들어 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감동시킬 때 내가 예배드릴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는 초청받은 자만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 영으로 견인된 그 자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겁니다. 지금 신약시대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영으로 인도함 받은 그들이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으며 예배드릴 수 있는 거란 말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 우리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는 세계 만민을 다 포섭하시고 포용하시고 사랑하시는 보편적인 하나님임과 동시에 유대인들의 역사적 경험 속에 화석화된, 유대인들의 비특권적 하나님 구원 경험 속에 자기를 드러나시기를 기뻐하셨던 우리 하나님, 파라오의 문서,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문서, 일본의 천주대신의 거짓된 계보들 그런 것들에 드러난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구약의 독특한 증언 속에 자기를 드러나시기를 기뻐하셨던 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 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와 자기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종교의 경계선을 뛰어 넘어 영과 진리로 모든 만민 중에서 예배자를 찾을 거예요. 이게 바로 세계 선교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 이게 바로 invisible church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곳이 예배에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곳이 이 땅의 교회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날까요? 자기가 영으로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받아서 영적인 자기부인이 잘 일어납니다. 로마서 86-11절을 읽어볼까요? 영으로 예배드리면 이렇게 됩니다. 영성이 생깁니다. 영적인 감화 감동이 생깁니다. 영성은 영적 감동받기 쉬움, 성령의 감동받기 쉬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부인하기 쉬움, 자기부인 하기 쉬움은 타자중심으로 사는 사랑의 능력 배가, 이런 뜻입니다. 로마서 86-11절은 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영으로 예배드리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굴복 순복 가능성이 늘어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자기의 기득권과 혈과 육의 모든 욕심을 가진 채로는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카인의 예배는 받으실 수 없습니다. ? 카인은 선을 행하지 않고 형제를 죽일 욕구로 가득 찬 마음으로 드렸기 때문에 카인의 예배는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예배당에 가면 안 됩니다. 거듭난 사람만 예배드릴 수 특권을 줘야 하고 거듭나지 못하면 예배공동체에 출입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3년 간 내내 예배공동체에 가지 못하고 계속 성경만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초대교회에서 예수 믿기로 결단 하고 나서 3년 후에 예배에 참여한 겁니다. 우리가 원래 이것도 구분해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겁니다. 우리가 진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경험에 신성하고 초월적인 경험이 모자라니까 아무라도 막 들어오는데, 문제는 안된다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경험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make sense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0-11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이게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 진리 즉 하나님은 예루살렘 시온산이나 그리심산 등의 특정한 산의 신성성에 의해서 매인 분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은 보편적인 하나님이라는 것, 이걸 아는 것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위에서 자기에 대한 참된 지식 위에서 드리는 예배가 예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자만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자녀만 드릴 수 있습니다. 숭실대에서 교목실에서 하는 건 예배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찬양을 하는 건 그건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도 모르는 사람이 때리고 몽둥이 몇 대 맞고 나서 할렐루야 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안 합니다. 예배의 감격은 참 어렵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기 때문에 탈자기중심성이 계속 일어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면 계급적 기득권의 포기가 일어납니다. 계층적 지역적 민족적 우월감의 포기가 일어납니다. 세계가 동시에 예배를 드리면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모든 국경과 종족과 계급의 장벽이 해소되기 때문에, 한 번 예배를 드리고 나면 세계평화의 능력이 확 늘어납니다.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드리고 나면 그리심산과 시온산의 적대감이 확 극복됩니다. 한 번 예배드리자마자 남자와 여자 종과 자주자의 차이가 없어집니다. 갈라디아서 3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이게 얼마나 사무친 말인지 아세요? 여러분이 지금 노예제 시대에 살지 않기 때문에 노예와 자유인이 얼마나 큰 장벽을 가지고 살았는지 모르죠? 그 장벽이 극복되는 과정이 얼마나 감격인지 우리는 모르죠? 그런데 바울은 그걸 본 거예요. 종과 자유자와 남자와 여자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구약의 원래 하나님이 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이에요. 그걸 깨닫는 게 구약의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고 그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타민족들과 타종교를 적대시 하는 게 하나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계만민을 자녀처럼 여기는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산과 시온산의 도토리 키 재기 각축에 우리 하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신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으시고 영이신 우리 하나님, 자기 부인을 잘하는 타자를 배려하고 타자를 고려하고 타자를 섬기려는 자기부인을 하는 그런 소통이 예배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습니다. 예배드리고 나면 무엇이 증가할까요?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재산권의 포기입니다. 그런데 십의 일은 십 전체를 포기하겠습니다가 일을 드리는 겁니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 드시고 십 분의 구는 내가 먹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십의 일은 십을 대표하는 일이기 때문에 전체를 드리는 마음으로 일을 드리는 겁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말은 재산권의 포기이기 때문에 권력의 특권의 포기입니다. 특권의 십일조, 그래서 예배드릴 때 사회적 형평작업이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나면 그리심산과 시온산에 뭉게구름처럼 올랐던 그 적개심이 싹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 마음을 이해해야 해요. 먼저 은혜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성경 말씀을 깊이 이해해야 해요. 먼저 즉흥적으로 실용적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게 읽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본문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고 그 속에 깊이 우리가 들어가야 해요. 저는 기뻤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왜 식사를 하지 않는지 납득하면서 저는 기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가득 몰려오니까 그 몰려오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 전하고 싶은 마음,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화해의 가교를 구축할 그 벅찬 사명감, 그게 바로 에너곤입니다. 물리학에서 에너거 하면 힘의 자리죠? 이게 바로 에너곤입니다. My food, 에몬 브로호 에스티 히나 엘로호 텔레오사시, 내 음식은 이것이다, 주님 음식 잡수세요 하니까 네가 알지 못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 음식은 이것이다, 아직 먹지 않았어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그런데 지금 사마리아 여자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저렇게 많이 데려와서 내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일깨웠기 때문에 나는 배가 안 고프다, 이 일자체가 나를 원기 있게 만든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내 앞에 서 있는 것, 휘어져 추수 밭이 된 이 상태가 바로 내 음식이다, 이 일을 내가 해야 원기 있게 된다, 여러분 이런 원기를 원하시죠? 이런 일에 여러분도 involve 되시기를 바라고 꼭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나를 보내신 그 뜻,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 사람 사이에 있는 해묵은 125년 동안 된 갈등 장벽을 부수시는 그 일을 온전히 완성하는 것, 이것이 나에게 감격이 된다, 나는 125년 동안 누적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을 해소할 기쁨에 넘쳐 있고 이 기쁨이 내가 밥을 먹은 것과 똑같이 만들 것이다, 이 일을 하면 내가 원기 있게 될 것 같다, 이렇게 말 한 겁니다. 35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이건 씨를 뿌리지 마자 바로 추수가 됐죠? 1시간 만에 이렇게 엄청나게 몰려왔죠? 그러니까 추수가 된 거죠. 뿌리자마자 추수가 되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음식을 드시는 거예요. 결론 맺습니다. 임진년 새해에 여러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토요일에는 말씀을 많이 읽으세요. 말씀 읽고 신령한 독서 하면서 글을 쓰시면서 많이 보세요. 두 시간 세 시간 정도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보니까 큰 죄를 지을 상태도 아니고 비자금도 받지 못하고 300만원 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여러분 죄 지을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여러분은 두 시간만 말씀을 묵상하면 은혜 충만해질 줄 믿습니다. 이 평범해 보이는 일 속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원기 충만해지는 한 해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가향이 그리심산과 시온산의 헤게모니와 갈등 안에 사는 모든 국지적 갈등을 종식시켜주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엎드려 경배합니다. 한번 엎드릴 때마다 한 번 거룩해지게 하시고 한 번 경배할 때마다 더 자기부인이 쉬워지게 도와주시고 한 번 순종할 때마다 원기 넘치는 한해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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