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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9-29( 주일 2부예배설교)

by 【고동엽】 2022. 1. 30.

제가 가향교회에서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방법은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요한복음 이런 관점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요한복음을 읽는다는 뜻은 요한복음이 말한 영생이 이 땅에 사는 일생생활의 구체적인 함의가 풍부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받을 종말론적 먼 미래, 또는 죽어서 누릴 영생을 말하지 않고, 신적인 불멸의 삶, 신적인 안전보장이 보장된 삶이 영생이라는 뜻입니다. 영생이라는 개념을 이 땅에서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우리 삶의 질을 평가하고, 우리 삶의 수준을 해석할 때 기준이라는 겁니다. 영생의 기준에 맞춰서 우리 일상생활을 재해석하고 우리가 영생에 들어갔는지 영생 바깥에 있는지를 해석할 때 상관성이 매우 풍부한 이런 영생을 부각시키는 방식입니다. 요한복음 3장부터 영생에 대한 담화가 어렵게 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죽어서 누릴 after life, 내세의 삶과 영생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영생은 신적으로 안전보장이 보장된 삶이란 뜻입니다. 요한복음의 영생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땅에서 사는 삶, 구약적 되울림이 있는 삶입니다. 이 땅에서 적의 침탈에 공격받지 않는 삶, 다시 말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세력에 의해서 침탈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peaceful life in land입니다.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사는 게 영생입니다. 영생의 구약적 정의는 시편 133편에 나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초월적인 하나님 은총이 이 땅에 내려서 형제자매가 행복하게 동거하고 연합하여 사는 삶, 다시 말해서 분자적 또는 원자적 결속감으로 단단하게 유대감을 가지고 사는 삶, 정서적 충족감과 사회경제학적 삶의 생태학적 선순환이 보장된 삶을 영생개념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3015절에 나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선택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하야 르올람입니다. 르올람은 life for eternity 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을 직역합니다. 하야, 르올람, 르는 전치사 for 이고, 올람 eternity, life for eternity 영원히 지속되는 삶이 영생이지, 불멸한 삶, 오랫동안 보존 가능한 삶, 요즘 가장 많이 쓰는 말로는 sustainable life, 지속가능한 삶이라는 말을 쓰죠? 그런 말과 비슷합니다. eternitylife를 수식하지 않습니다. eternal life가 아닙니다. life for eternity입니다. 영원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사랑이 가득 찬 삶이 영원까지, carry the over into the life. 영원까지도 이어지는 삶,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유통 가능한 가치, 이웃사랑, 자기를 내어 줌, 이런 삶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구약적 되울림이 있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은 구약적 되울림이 있는 말이기 때문에 구약에서 그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의 영생은 그레코로만의 문명에서 있던 영생, 개인이 혼자 어떤 영의 생에로 잠입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플라톤의 <파이돈>이라는 대화편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죽기 한 시간 전에 토해냈던 말입니다. 파이돈이라는 제자가 듣고 말해 준 것인데 굉장히 긴 내용입니다. 이때 영생을 이렇게 말합니다. 다이몬과의 결합, 우주에 충만해 있는 신과의 결합이 영생입니다. 이 영생의 개념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통해서 기독교로 들어왔습니다. 기독교에서 영생은 신과의 결합을 가리킵니다. 육체를 벗어버린 영과 영의 순수한 결합을 영생이라고 가르치는데, No, 아닙니다. 성경의 영생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땅에서 분자적 또는 원자적 결속감으로 단단히 뭉쳐져 헤체될 수 없는, indestructible bond, 파괴될 수 없는 결속함으로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파괴될 수 없는 견고한 결합을 가리키는 그것이 영생의 개념에 들어가지, 무시간적, 육체의 한계 벗어버리는 그것이 아니에요. 아닙니다. 플라톤 <파이돈>에 나오는 그 영생이 아닙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의 그 영생 아닙니다. 그게 기독교에 들어와서 이런 영생 개념 같은 것들을 퍼트리는 사람들이 불트만의 신학인데, 세계 신학학계의 대종주입니다. 70% 이상의 책이 불트만의 학설에 고개를 숙이는 봉신들입니다. 학문적 봉신입니다. 이 불트만의 신학에 이의를 제기하면 박사 논문이 안 되고 교수 장학금을 받지 못합니다. 저는 거부합니다. 틀렸습니다. 이런 구약적 되울림을 가진 영생 개념의 실마리를 주신 분은 튀빙겐의 마틴 헹엘입니다. 2008년에 돌아가신 마틴 헹엘 이라는 유명한 분, 우리 김세윤 박사를 자기 신학의 양자로 삼으려고 했던 분입니다. 그 마틴 헹엘이 구약적 되울림을 가지고 요한복음을 풀려고 했고, 김세윤 박사 또한 그런 점에서 계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요한복음 주석을 쓰진 않았습니다. 마틴 헹엘은 요한복음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만, 아직까지 이분들이 어떤 점에서 영생이 구약적 개념이 있고, 이 땅에서 견고하고도 결속력 넘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입증하는 글을 쓰진 않은 거죠. 예수님은 그 당대에 적합한 말씀을 하신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구원론을 펼쳐놓고 선문답 식으로 하고 가신 분이 아니라 그 당대의 그 사람에게 매우 적실한 말씀을 하신 거예요. 헤롯 체제와 로마제국의 가혹한 착취 밑에 사는 그 갈릴리 농민들이 갈가리 찢겨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 들린 자가 한 무리 있고 문둥병자가 한 무리 있고 병든 자가 있고 간질을 하는 자가 있고, 100데나리온 빚 갚지 않았다고 이웃끼리 서로 드잡이를 하면서 감옥에 집어넣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친로마파가 있고 반로마파가 있고,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지평선 너머에 큰 뭉게구름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예루살렘에 신정왕조, 군사력, 무장병력, 상비군, 관료조직, 강력한 군주를 가진 신정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흐름이 갈릴리 일대에서 서서히 일어났어요. 예수님은 벌써 30년 후 40년 후에 일어날 대전쟁의 기운을 보고 멸망당한다는 말을 그 맥락으로 한 겁니다. 316절에 멸망당한다는 말을 했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예수님이 구약성경의 이상사회였던 영생을 갈릴리 농민들한테 실천하고 실현하려고 했던 것인데, 갈릴리 농민 안에 예수가 펼쳤던 비무장 시민자치 민중 자치적 고도의 평화로움 나눔 베풂 하나 됨, 이것은 예루살렘에다 왕조를 설치해 세우려는 신정국가에 비해 훨씬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깝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정의를 만들지 않고, 정의와 사랑을 베풀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한 가지 약점은 예수님 같은 강력한 개인기가 없어요. 그게 약점이에요. 우리는 병을 못 고쳐요. 우리가 병만 고치고 귀신만 쫓아내면 우리도 되는데 우리는 이게 없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힘들어요. 예수님은 국회의원 출마 안 해도 그 자체로 손도 만지시고 일어나기도 하고 나사로도 막 나와 주고 우리는 아무도 안 나오잖아요. 우리는 국회의원에 나가야만 정의를 실현하는 피조물적 한계가 있어요. 예수님은 몰래 하나님께 은총을 받으셔서 심지어 돌로 떡을 만들어서, 삼립 빵 같은 걸 만들어서 줄 능력도 있으셨던 분이에요.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잔디에 앉아 먹이시고, 새벽 4시에 바다위도 걷고 하시니까 얼마나 몰렸겠어요? 우리는 아무 것도 지금 못한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하늘의 문이 확 열려 초월적인 하나님 보좌에서 엄청난 걸 받으셔서 서서히 꾸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실 필요가 없어요. 보여주기만 하면 돼요. 우리는 아무 것도 개인기가게 없기 때문에 엄청나게 설명해야 해요. 지금 제가 몇 달째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야 하고 논문으로 써야 하는 인간들은 너무너무 형편없는 서기관인거예요. 직접 보여주는 게 최고예요. 예수님은 논문을 쓰실 필요가 없어요. 바로 보여주면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안 되니까 논문 쓰고 옛날처럼 각주 달아서 이래도 안 돼요. 제가 계룡산에 올라가서 40년 기도를 하면 비슷해져요. 계룡산 올라가서 40년 기도하면 죽은 지 나흘이면 안 되지만 죽은 지 2시간 된 사람은 고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논문도 못 쓰고 지성사회에서 다 배제가 돼요. 제가 갑자기 계룡산에 올라가면 정상사회에서 멀어지고 몇 사람밖에 추종자가 없어요.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하셨던 영생이라는 개념,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이 개념을 당대적 맥락에서 먼저 해명해야 해요. 그게 더 중요해요. 예수님을 안 믿으면 왜 멸망하느냐? 예수님 같이 갈릴리 농민 가운데 평화롭고 구약적이고 신명기적인 자발적 민중자치 공동체가 탄생하지 않으면, 전쟁을 통하여 신정국가를 세우려는 군사무장 세력이 헤게모니를 쥐게 되기 때문에 군사헤게모니를 쥔 유대인들은 전멸을 면치 못하게 되고, 마침내 AD 66년에 제1차 반란 AD 115년에 제2차 반란, AD 135년에 제3차 반란이 일어나서 1948년까지 망해버린 거예요. 파멸됐어요. 예수님께서 인자를 믿지 않으면 멸망된다, 파멸된다 할 때 그 맥락 자체가 먼 말이 아니라 당대적 맥락에서 적합한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영생이라는 개념을 자칫 잘못하면, 신앙고백 야무지게 한 사람들이 몰래 몰래 따로 헤쳐모여 천상에서 유성우처럼 춤을 추고 다니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영생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농사를 짓고 경작을 하고 삶의 소출을 나누는 거예요. 영생이라는 개념에 이 개념이 분명히 들어갔어요. landed life for eternity. 땅에서 사는 영원한 삶, 이게 영생이다, 이 개념은 무엇인가? 시편 133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신명기 3020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이게 바로 영생입니다. 장수, long life in the land, 땅에서 오래 사는 것, safe from every kind of danger,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땅에서 오래 사는 삶, 기근의 곤경에서 벗어남, 기근 우박 적군침략,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 영생을 우리 예수님은 주려하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궁극성은 무엇일까? 어떤 상비군도 갖지 않고 어떤 전제왕권을 휘두르는 왕도 없고, 어떤 관료조직도 없는 고도의 사랑자치 민중자치 공동체가 바로 영생이다, 사실 민중을 괴롭히는 건 누구였어요? 로마제국이 민중을 괴롭히기 전에는 누가 누구를 괴롭혔어요? 왕과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가진 지배계급이 민중을 괴롭혔죠? 누가 땅의 농민을 괴롭혔어요? 농민에게 영생이 무엇입니까? 먼 나라의 침략꾼 아닙니다. 지금 토착왕조의 관료조직과 경찰병력과 전제왕권이 영생의 방해물입니다. 팔레스타인 영생의 방해물은 누구입니까? 먼 외국 침략꾼이 아니라 토착 압제세력입니다. 우리가 토착압제세력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행정부와 사법부 국세청 등 국가의 강제 권력기구가 필요 없게 만드는 사랑의 자치가 나오면 되겠죠? 예를 들어 가향시라는 인구 50만 명의 도시에 10년 동안 범죄가 하나도 없다, 국세청이 요구하는 세금보다 훨씬 더 십일조가 많다, 그러면 여기에 국세청도 갈 필요도 없고 내무부도 갈 필요 없고 행정자치부도 갈 필요 없고 교과부도 갈 필요 없고, 여기는 무엇이 됩니까? 인구 50만과 가향시장 양진일과 그 무리들은 전부 다 완전히 성령 안에서 고도의 민중자치를 하니까 국가 행정기구가 없어지고 육법전서가 점점 얇아져요. 드디어 로마서 1310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육법전서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면요. 그게 영생이란 말이에요. 영생이라는 말과 마가복음 마태복음의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똑같은 말이에요.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 로마서가 말하는 구원,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영생 구원은 똑같아요. 영어로 말하면 coextensive, 똑같은 면적을 차지해서, 논리적으로 똑같은 면적을 가리켜요. 구원도 같은 말이고 영생도 같은 말이고, 하나님 나라도 똑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구원이라는 말을 썼고 요한은 영생이라는 말을 썼고 복음서기자는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라는 말을 썼단 말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왜 영생을 받는가가 중요해요. 예수를 믿으면 왜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는가를 갈릴리의 당대적 맥락에서 먼저 해명하고 나서 우리 시대를 해명합니다. 갈릴리 당대적 맥락에서 예수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는 이유입니다. 오늘 인자를 설명해야 하는데, 인자를 많이 써왔는데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인자는 다음 주에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은 영생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천국을 바로 보여주지 못하고 설명하는 서기관의 비참한 한계를 보십시오. 저는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뭔가 보여주고 싶은데 비참합니다. 못 보여주니까요. 저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진짜 매력 있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는 사람에게 울지 말라고 하시고 울음을 그치게 해주십니다. 독자, 죽어버린 과부의 아들에 손을 얹고 얼마나 멋져요? 장례식을 부활의 현장으로 바꿔주는 멋진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멋진 예수님을 많이 찬미하면 예수님다워질 줄 믿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영생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 서기관 제한성, 이게 제가 탄식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서 영생을 예수님과 방불하게 성육신적으로 보여주는 여러분도 나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대적 맥락에서 영생은 시편 133편의 회복이라고 했고 신명기 3015절과 19절의 회복이라고 했어요. 갈릴리 농민들에게 임한 영생은 아무도 플라톤의 <파이돈>편에 나오는 그런 영생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요한복음 이 말씀을 듣는 갈릴리 농민들은 순식간에 신명기 3019절에 나오는 그 영생을 생각했고 시편 133편이 말한 그 영생, 하야 르올람, 영원까지 지속가능한 가치 있는 삶을 생각했지, 영이 죽어서 저기로 올라가 소행성 318호에 하나 되는 것, 그건 아닙니다. 당대적 맥락에서 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느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가 펼쳐내는 신적인 영역과 축사와 치유와 은혜로운 하나님의 평화, 그것을 누리려고 하면 재산을 내놨어요. 그래서 열두제자는 전 재산을 공탁하고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1927-29절 보세요. 전 재산을 다 바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전 재산을 다 바치면 급진성이 듭니다. 예수님께 전 재산을 바쳐버린 사람은 진짜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게 됩니다. 우리가 안 바치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590년 그레고리 교황 때까지, 힐데그란트가 그레교리 교황이 될 때까지 그때까지 모든 주교는 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어거스틴 안토니 베네딕토 전재산을 다 바친 사람이 성직에 나갔습니다. 재산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만 온전히 구원할 거라 믿었기 때문에 성직자가 됐고요. 성 어거스틴의 스승이었던 암브로시우스, 유명한 갑바도기아의 바아실 같은 사람은 주교로 추대하니까 며칠 동안 친구집에 가서 주교 안 하려고 제발 살려달라고 했고, 강제로 끌려나와 주교가 된 사람이 밀라노 대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입니다. 그는 주교 취임식 때도 울고 있었습니다. 이제 죽었다고, 바아실 더 그레이트, 위대한 바아실이라고 하는 갑바도기아의 교부들, 암브로시우스, 모두 전재산을 다 바친 거예요. 영생은 지주급 부호들이 전재산을 다 바쳐서 소작인급 형제를 아울러 같이 살기로 결단함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런 삶의 질서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그런 삶의 질서가 갈릴리 농민사이에 퍼지면 갈릴리 농민들은 이미 예수님이 가져온 천국의 질서에 도래했고, 로마제국 군사들과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갈릴리 농민들은 전쟁에서 보호를 받기 때문에 바로 정확하게 구약적인 영생을 누리는 거예요. 그런데 갈릴리 농민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로마제국에 대한 증오심이 심해지고 소작인과 지주들의 갈등이 심해지면 누가 그들을 희생시켜 동력으로 삼겠어요? 이렇게 빈부격차가 심하고 이렇게 적개심이 심하고 이렇게 로마에 대한 미움이 강한 소작인들이 많을 때 누가 이들의 목자가 되겠습니까? 예수님 같은 분이 목자가 될까요? 열심당원이 목자가 될까요? 열심당원이 목자가 됩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이 갈릴리 농민들은 인구의 8할입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의 8할입니다. 8할되는 그 인구를 만일 군사무장세력들이 장악하면 어떻게 돼요? 전쟁이 벌어지죠? 전쟁이 벌어지면 로마제국 제10군단 제6군단 최정예로마군단과 전쟁을 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다 죽게 되죠. 전멸이 오게 도니까 예수님은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신 거예요. 이게 당대적 맥락이라고요. 요한복음 316절의 당대적 맥락은 그런 뜻이었어요. 우리 공동체 아무 것도 안 보고 나만 믿고 김회권이 믿어서 지옥 같은 세상 떠나서 플라톤 <파이돈> 편에 나오듯이 김회권 혼백이 죽어서 데굴데굴 굴러가서 저 멀리 가서 신과 결합하면서 여기 있는 양진일 목사는 비참하게 사는 걸 모르고 헬렐레 좋아서 영생 영생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개념은 너무나 낯설어요. 영생은 어디까지나 지상주의에요. landed life for eternity. 지상에서 영원까지 앞으로 올 내세까지 하나님이 만드실 새로운 세계까지 이월될 수밖에 없는 가치 있는 불멸의 성령의 가치, 무엇이 불멸합니까? 자기 희생적 사랑만이 불멸합니다. 하나님 다운 행복만이 불멸해요. 자기를 소모시키는 거룩한 자기내어줌, 이것만이 불멸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가? 이미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갔습니다. 미안합니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 영생에 들어갔다는 말은 매우 심플한 말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내는 마음으로 자기 삶의 자원을 나누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미 십일조를 나누고 하나님 은총을 돌봄 받은 사람들은 십의 이조를 나눕니다. 마지막에 다 줘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영생에 들어간 겁니다. 이 말은 지주급 형제가 소작인급 형제와 같이 살기로 작정하는 순간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간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이 언어를 구약적 관점에서 풀어야만 해명이 되고 그래야 내가 구원받은 이 사건은 사회경제적 낡은 질서를 재구성하는 함축 함의가 생겨요. 그렇지 않고 플라톤 <대화록>에 나오는 구원관 영생관을 가지면, 영생이라는 말이 너무 많이 나와요. <파이돈>편에서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영생을 많이 다뤄요. 요한복음의 영생개념이 그런 거라면 그건 너무나 무책임한 것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이고, 예수님이 아무리 영생 받은 사람을 늘려도 이 땅의 삶의 틀거지는 바꾸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요한복음을 읽으면 구원 받고 영생을 받은 사람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이 세상이 벌써 영생의 질서에 거룩하게 영향을 받기 시작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좋아지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예수 믿는 행위는 공익행위가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 행위 자체가 애국행위가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좋은 거예요. 그러면 기독교는 혐오시설이 아니에요. 저 좋은 사람이 일주일에 떼로 몰려 우리 동네에 온다, 그러면 땅 값이 올라가요. 서울대학교 학생 한 명 배출하면 평당 197만원 올라갑니다. 비참하잖아요. 예수 옳게 믿는 사람이 우리 마을 한바퀴 밟아주면 땅 값 올라간다, 서울에서 올라가면 안 되겠죠. 그러나 굳이 올라가려면 그런 식으로 올라가야 되겠죠? 그런데 지금 교회는 납골당보다 더 형편 없는 혐오시설입니다. 우리 목사님들은 바깥에서 내가 목사라고 하는 순간 아고라에서 돌 맞아 죽습니다. 우린 다 부장님 사장님 이러고 다녀야 해요. 절대로 청계천에서 내가 목사라고 하면 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됐습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즉 예수가 가져온 하나님의 무차별적인 사랑의 폭포수 같은 공급 치병 치유 귀신 쫓아냄, 오병이어로 사람들을 먹여 살림,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주심, 갇힌 자를 풀어주심, 탐관오리 세리들이 착한 세리로 바뀜, 예수님께 접촉 당한 모든 세리가 있는 곳에 해방과 자유가 옴, 그런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 믿는 세리의 영향권 있는 사람들, 예수 믿은 삭개오 관할권 밑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을 맛보는 거예요. ‘영생을 얻었고 심판나라전체가 멸망당하는 위기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런데 여러분들은 종말의 때라 말한다, 그런데 내가 말한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써 음성을 들려준다, 지금 내 말을 들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 아들이다, 이 말할 때 예수님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쓸 때 이건희와 이재용 사이에 있는 아들이 아니다, 특권의 상징이 아니라 나는 무한책임적 희생의 상징이다,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 말할 때 나에겐 털끝만치도 나를 이롭게 하는 말은 없다,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순간 나는 죽음을 감수하고 높이 들린 놋뱀처럼 들리는 인자를 생각한단다, 인자라는 말은 천상적 기원을 가진 무한책임적 예언자입니다. 천상적 기원을 가진 무한책임적 희생을 감수적인 하나님의 종을 인자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뜻에 무한책임적으로 응답하고 하나님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난 당하면서 아버지 하나님 뜻을 성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게 27절입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한 영생은 신명기 301519, 시편 133편이 말하는 영생과 같은 개념으로 굳이 영어로 말하자면 landed life for eternity, 땅에서 사는 영원까지 이월되는 멋진 삶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형제자매가 분자적 결속 상태를 유지하는 안정되고 어떤 외부의 침탈도 없는 그런 삶이다, 이때 침탈이 없다는 개념 안에서는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가진 전제군주의 가렴주구가 없고 그런 전제군주를 닮은 외국군대의 침략도 없다는 뜻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런 삶이 가능한가? 강제적 국가기구를 필요 없게 만드는 성령충만한 공동체의 출생밖에 없다, 성령충만한 개인들이 서로 베푸는 사랑을 부단하게 하면 경찰서도 들어올 일이 없고 사법부도 들어올 일이 없다, 국가기구는 더 이상 필요 없다, 고도의 민중 자치적 성령충만 공동체가 들어오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생에 들어갔고, 이런 영생에 들어간 공동체에게는 다시는 토마스홉스가 말한, 마키아벨리가 말한 폭압적인 국가기구가 필요 없다, 하나님의 통치밖에 없다, 어떤 인간적 폭압적 국가기구가 없는 상태를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다, 로마서 138절과 10절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다, 토마스홉스가 리바이어던, 강력한 행정국가, 폭력적인 행정국가의 불가피성을 말한 정치학자들의 말은 쓸 데 없어진다, 우리 예수님의 영생은 경제의 대답이고 정치의 대답이고 우리 시대의 궁극적 대답이다, 이게 오늘 본문이에요. 우리는 총선도 필요 없는 거예요. 지금 정부도 필요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이 역사하면 거룩한 무정부주의자가 되고, 전부 다 성령 충만하면 마을만이 필요해요. 이 사상과 가장 유사한 사상을 말한 사람이 너무 역설적이게도 간디에요. 간디는 인도가 중앙집권적인 영국을 닮은 주권국가, 폭압적인 국가기관이 들어서는 국가로서의 인도는 파멸될 인도, 틀린 인도, 샤키아그라, 내가 진리 파종운동으로 세우려는 인도는 그런 인도가 아니라 70만개의 마을로 분리된 인도, 70만개의 마을 협동체로서의 인도, 이 인도의 구상을 그의 제자 네루가 배반했습니다. 네루는 왕가를 구성했어요. 강력한 중화학 공업으로 강력한 인도를 구성하기 위해서 인도 국민 90% 의 모든 구성원들을 강력한 인도건설로 다 말아 먹었어요. 그런데 간디는 그러지 않고, 인도가 독립해서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는 것은 영국 밑에서 시달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간디에게 전세계 어떤 신학자가 꿈도 꾸지 못했던 미래상을 위탁했는지 참 신비합니다. 간디가 신약성경을 엄청 읽었다는 것을 추론하지만 간디가 이런 멋진 말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우리에게 너무 기가 막힌 놀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왔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온 사람의 특징? 신적 안전보장감의 부단한 향유, 지주급 형제가 소작인급 형제랑 같은 교회 다님, 십의 일조 이상으로 점점 누적되는 희생의 자발적 감수,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계속 바치게 됨, 내 모든 재산과 물질과 나의 땅, 나의 생산수단인 직장 이 모든 것을 공탁함,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생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영생을 누리는 삶, 영생에 들어간 삶, 그런 사람은 landed life for eternity, 이미 영원까지 이월될 만한 가치 있는 삶을 삶, 이런 영생공동체에게 우리 하나님이 복을 명하셨어요. 성령을 보내셔서 그런 영생공동체를 부단히 유지하도록 매순간 감동을 주세요. 이 영생 공동체에 위탁하여 소속감이 느슨해질 때마다 다시 한 번 분자적 결속감 원자적 결속감을 주셔서 단단하게 유착시켜 주세요. 성령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해요. 저 김회권이 제 정신으로 돌아갈까 싶어서 성령이 또 저를 홀려주세요. 밤마다 주일마다 홀려주시고 양목사 설교 들으며 홀려주세요. 그런데 제가 양목사 설교 안 듣고 MB 같이 여의도가서 설교 듣고 그러면 점점 제가 제정신 돌아오게 되고 드디어 뱀파이어가 돼가요. 내가 30년 동안 잘못 살았구나, 나도 권리찾자, 김회권 독립만세, 이렇게 가요. 그러나 제가 계속 양목사 설교 듣고 신령한 교우들한테 감화감동 받으면서 간신히 하다가, 엄청 훌륭한 교인들 만나 안도의 한숨을 쉴 때 영생안에 머물게 돼요. 분자적 결속감 원자적 견고한 유지가 일어나는 거예요. 영생은 이것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유일하신 아들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은 예수의 밥상공동체에 참여하여 살가운 접촉과 신령한 교제를 일삼는 것입니다. 예수의 식탁자리는 나눔의 자리입니다. 받침의 자리에요. 지금 십의 일조 또는 그에 준하는 걸 바쳐본 사람은 영생에 접근했거나 도킹 직전에 있는 상태다, 이미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저는 그것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재물을 바치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고, 재물을 바쳐놓고도 위선자가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재물을 안 바치는 위선자보다 재물을 바치는 위선자가 백번 낫습니다. 사기치는 사람은 십일조 하고도 사기치지 않느냐? , 맞습니다. 십일조 내고 사기치는 사람을 희망이 있습니다. 점점 사기칠 일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십일조 안 내고 사기치는 사람, 즉 교회가 도덕적으로 뭐가 특별하냐? 그렇게 조롱하는 사람에게 저는 말합니다. 교회가 특별하지 않다면 그렇게 사기를 치면서까지 십일조를 내는 도덕적 부담은 어디에서 오느냐? 그게 바로 하나님 자녀에게서 오는 것이다, 저는 교회가 엄청 특별하다고 봐요. 한 명의 교인과 한 명의 세속인의 착한 사람의 차이는 별로 안 나지만 100명의 이런 사람, 가향교회 100명 정도의 착한 사람을 동시에 매번 헌금하게 만드는 것은 명동 압구정에서 100명 무작위로 모아서 천년 만년 가도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만 되는 것이지, 내가 압구정동에서 그물로 100명 잡아서 노자 한 번 말하고 공자 한 번 말해서 헌금 10원도 하기 힘듭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동시켜서 우리는 십일조의 삶에 참여했고, 십일조 이상에 참여했고, 나눔과 베품, landed life for eternity입니다. 다만 땅은 오늘날 아닙니다. 우리는 땅은 없고 오늘 날 땅이 없는 사람들은 직장이 바로 땅입니다. 직장이 내 땀의 현장이니까 직장을 하나님께 바친다, 직장 내 삶의 모든 재능, 내 삶의 모든 생산력 재화 용역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이때 가족이 포함됩니다. 가족이 이웃이에요. 가족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에 충만하면 landed life for eternity, 영원한 삶이라는 지향성이 뚜렷한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이런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차길 바라고, 제가 이런 영생을 누렸기 때문에 저는 이 세상에 대해서 강한 거부와 보이콧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을 강하게 보이콧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세상을 강하게 보이콧 했습니다. 탐욕과 지주적인 독점과 배타의 세계, 저는 강하게 보이콧 하고 지워버립니다. 내 인생에 그런 걸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우리가 이런 일에 앞장서서 바로 예수님의 영생이 지금 이 땅에서 해답이 되고, 이 땅의 정치경제학과 이 땅의 복지와 이 땅의 모든 정치자체에 우리 예수님의 영생공동체가 해답이 되는 날이 오길 원합니다. 이 땅의 교회가 예수님의 영생을 살아 있는 영생으로 재해석하여 살아내는 교회가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농민들에게도 너무 적합한 말씀을 해주셨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합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 우리를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landed life for eternity 영원까지 이월되는 사랑에 미치게 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지주급 형제들이 소작인 형제들을 부둥켜 안고 덩실덩실 화해의 춤을 추는 그날을 허락하여 주시고, 가향교회가 폭압적 국가기구가 필요 없는 하나님 나라의 해방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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