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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부흥의 역사적 실제와 미래 -1-

by 【고동엽】 2022. 1. 28.

부흥의 역사적 실제와 미래 -1-

서론


부흥은 부흥을 경험한 나라와 교회만이 부흥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로마 카톨릭은 부흥이 없기에 부흥을 소망하지 않는다. 또한 부흥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기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부흥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교회는 부흥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우리 민족은 부흥을 경험하였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기에 부흥을 그 토록 소망하는 것이다. 지금 온 교회가 again 1907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집중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와 단체들이 앞 다투어 부흥을 기대하며 거대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2007년 에 다시 한번 부흥을 부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부흥을 소망하는 진정성의 문제이다. 정직하지 못한 소망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 글에서 부흥에 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진정성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흥을 소망하고자 하는 것이다.


1. 부흥을 소망하는 이유


그토록 부흥을 소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부흥을 기대하며 기다리는가? 그리고 하필이면 2007년인가?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군중 심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왜 2007년의 부흥을 소망하는가? 그에 대한 이해는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관점이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 불리 우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자신의 생애에 부흥의 역사를 보고 싶어 했지만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생전에 보지 못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교회는 수 천명의 모여서 예배하였고 전 세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는 역사적인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역사적인 부흥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볼 때 매 세기마다 부흥의 역사가 있었음을 말하였다.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본다면 첫째로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을 들 수 있다. 종교개혁은 단순한 교회 개혁 운동이 아니라 부흥운동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둘째는 17세기의 존 번연을 중심으로 하는 청교도와 경건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18세기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휫필드 그리고 웨슬리등을 통한 영적 대각성 부흥운동이다. 19세기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적 대 부흥이 일어났다. 스펄젼과 무디 그리고 찰스 피니등의 사역자들이 그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20세기 초의 위대한 부흥의 역사는 영국의 웨일즈의 부흥과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많은 학자들은 새로운 한 세기가 되는 2007년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부흥을 사모하는 것은 부흥이 임하면 영적인 대각성과 함께 사회변혁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변화한다면 그 열매는 모든 사회가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실체들은 역사적 부흥의 시대에 나타났으며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역사에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소망과 기대들이 어게인 1907을 외치며 2007년의 부흥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흥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부흥의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007년은 한국 교회에 부흥이 임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 아래 부흥을 갈망하는 이들의 모습이 한국 교회에 퍼져있습니다. 이 때에 부흥의 참된 실체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칼빈대학교 세미나에 발표한 내용입니다.]


부흥의 역사적 실제와 미래 -2-


2. 부흥의 정의


부흥에 대한 기록들은 참으로 많다. 특별히 최근에 들어서 더욱 많은 자료들이 속속 출판되고 있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다. 부흥에 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내용에 대하여 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흥의 역사를 아는 만큼 그 기대감은 더욱 크기 때문이다. 평양 대부흥 운동을 기록한 박용규 교수는 부흥의 역사적 자료들을 볼 때마다 흥분과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부흥의 역사를 아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흥의 모습은 무엇인가?
부흥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침체 되어있는 삶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부흥이 교회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면 부흥이란 침체 되어 있는 교회가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일어났던 부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즉 사도행전의 역사와 같은 것은 교회가 있기 전에 있었던 부흥의 현상이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에서의 부흥의 의미를 성경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부흥을 무엇인가? 엘머 타운즈는 부흥을 말하기를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라고 하였다.“복음주의적 부흥이란 하나님의 비범한 역사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역사 속에서 그들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게 될 때 그들의 죄를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긍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과 개인적, 상호적 경험이 깊어져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관심이 고조된다.”또한 1995년 휘튼 대학의 부흥에 대한 공동저자인 로버트 콜만은 부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부흥의 기본적인개념은 언제나 어떤 것을 그것의 본래의 본질이나 목적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구속상의 관점에서 부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회복하시고, 생기는 다시 불어 넣어주시고, 자유케 하셔서 충만한 복을 누리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주권적인 사역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부흥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에 부흥에는 언제나 신비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즉 부흥의 때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 부흥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역사이다. 이에 대하여 부흥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깊이 있는 연구와 영향력을 끼친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흥을 정의하느라고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 부흥이다. 일차적으로 성령께서는 교회에 속한 지체들 속에서 그러한 역사를 한다. 그러므로 부흥은 신자들의 부흥이다. 생명이 없던 것을 부흥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부흥이란 정의상 무엇보다 먼저 나른해지고 잠들어 거의 죽어가는 교회의 지체들을 활기 있게 하고 깨워 소생하게 하는 것이다.”


부흥의 역사적 실제와 미래 -3-




이에 대하여 전기 작가이자, 부흥사가인 이안 머레이는 부흥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소개한다. 대부분 이 세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부흥은 단회적이지 반복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즉 부흥은 특별한 것으로 또는 일정한 시기마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는 오순절기간과 같고 마지막 시대이기 때문이다. 즉 구약의 교회는 부흥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성령의 부어 주심에 의해 그의 백성을 부흥시킬 것을 약속하셨으며, 이 기도의 약속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사건을 통해 영원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흥은 사람의 노력에 의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성도들이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힘쓰면 우리는 부흥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부흥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회개와 갱신된 개인의 거룩함의 필요성이 강조되어야한다.
셋째는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반복될 수 있다. 즉 부흥은 성령의 부으심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교회의 삶을 새롭게 바꾸는 결과는 가져오는 것이며 불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가는 은혜의 물결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비상하신 교통하심이며, 성령의 형언할 수 없는 풍성한 역사이며, 그의 능력이 뚜렷하게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이 상에서 부흥에 대한 정의와 현존하는 세 가지 견해를 보았다. 이제 결론 적으로 말한다면 부흥은 성령의 비상한 역사로서 반복되어 질 수 있는 한번 오신 성령은 다시 오시지 않지만 성령의 비상한 역사는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흥은 인간의 어떤 인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역사 하실 때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우리의 준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준비는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준비됨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3. 부흥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사실


부흥이란 무엇인가? 그 본질에 대하여 앞서서 살펴보았다. 이제 부흥에 대한 성경적이고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부흥의 본질이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근거에 기반 한 것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특별히 신구약시대에 나타난 부흥과 교회사 속에 나타난 부흥을 통하여 오늘도 부흥을 갈망해야 하는 이유는 살필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부흥의 사실은 셋의 시대이다. 이 때의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였다.[창4:26] 성경은 노아의 대홍수 이전에 일반적인 신앙의 부흥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수아 시대에 좀 더 보편적이고 놀라운 부흥이 있었다는 특별한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여호수아 사역 하에 백성들 가운데 진지한 신앙의 깊은 각성이 있었으며 그것이 광범위 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수8:33-35,18:1,24:31]
여호수아 시대 이후에도 신앙의 각성이 일어나고 부흥의 모습이 보인 때는 바로 열왕의 시대였다. 요시야 왕 시대에 서기관 사반이 왕 앞에서 여호와의 율법 책을 읽었을 때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왕하22;11-13] 그리고 곧 이어 국가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아사왕과 히스기야 시대에도 발생하였다. 또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난 위대한 변화가 그것이었다.[스9:8]1) 구약의 모습만이 아니다. 이러한 부흥의 모습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


부흥의 역사적 실제와 미래 -4-




그리고 영광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이 위대한 사역이 마치 멈추어진 것 같아 보였지만 오히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영의 광대한 부어 주심과 나라와 민족 가운데서 더 강력한 일반적 각성의 길을 예비하게 되었다. 이적적인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사도들에게 강림하심과 동시에 청중들에게 구원하시는 은혜가 임함으로써 오순절에 삼천 명의 영혼들이 단 한 번의 설교를 통하여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오순절에 발생한 위대한 회심 사건은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사건은 아니다. 신약의 또 다른 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했다.
이러한 신구약이 증거 하는 부흥이 역사는 성경의 사건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교회사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종교 개혁의 시기였던 16세기는 신앙 부흥의 총체적이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매 세기마다 각 지역에서 이러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 낳으며 알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부흥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성경의 시대로부터 계속하여 진행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흥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도 더욱 간절히 부흥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흥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무엇이며, 교회에 주신 보편적 방편은 무엇인가? 이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은 성경적 역사적 부흥의 본질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4. 부흥의 열매


전자에서 부흥의 정의에 대하여 그리고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여러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에 못지않게 부흥에 대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부흥의 열매이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아는 것이다. 부흥의 열매를 통하여 정의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된 부흥의 열매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이안 머레이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진정으로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깊어져 가고, 성경 말씀에 경외감을 가지고 이에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날마다 거룩에 힘쓰며, 이웃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부흥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소유한 것에 더하여 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 이와 똑같은 특성들과 행동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부흥의 진위는 바로 이렇게 입증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은 우선적으로 눈여겨보지 않고 방언이나, 계시, 공적인 죄의 고백, 흥분의 상태등과 같은 다른 표적들을 부흥의 증거로 생각하면 잘못된 판단이 내려질 것이라 확신한다.”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의 참된 모습은 영적인 각성을 통한 전 인격적인 변화가 주어지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집중적인 사모함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이었던 평양 대 부흥 운동의 특징에 대하여 박용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로 한국의 부흥운동은 단순한 부흥운동이 아니라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 둘째 부흥운동은 정치적 암흑기를 극복하고 민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다지게 만들어 주는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셋째 한국 교회 운동은 1890년에 채택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된 사경회 운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이것이 부흥의 시작이라면 그 열매는 분명한 삶과 성품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부흥의 역사적 실제와 미래 -5-




윌리암 스프레이그는 부흥의 결과를 현실세계에서의 결과와 영광에 세계에 미치는 결과들로 나누어서 강조한다. 부흥이 이 땅에 가져오는 장대한 결과는 “세상의 도덕적인 상태를 철저하게 쇄신시킨다”고 강조 하였다. 그는 첫 번째 직접적인 영향으로 사람들의 이지적, 영적, 사회적 조건을 고양시킨다. 두 번째는 교회의 도덕적 힘을 일깨움으로 세상의 도덕적 상태를 획기적으로 쇄신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제임스 뷰캐넌 역시 부흥의 결과에 대하여 다음과 말한다. “첫째 영혼이 각성되고 소생케 된다. 둘째 하나님의 진리 안에 참된 실재와 강력한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통치하시며, 성령께서 여전히 교회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넷째 대단한 열정과 진심으로 기도를 올리며, 진정한 마음으로 헌신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 다섯째 그리스도인들의 각성된 열정과 불붙는 기도는 다른 이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고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여섯째 모든 영혼이 신적 진리를 통하여 계몽되고 자신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각성되며, 죄를 슬퍼하는 경건한 근심에 휩싸이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무조건적인 구원을 붙잡도록 자극받으며, 새로운 견해와 새로운 감정,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취미,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습관으로 충만해진다.”


그리고 이안 머레이는 부흥이 오면 나타나는 시대의 여섯 가지의 특징을 말하였다. 첫째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시킨다. 언제나 믿음의 회복을 경험했던 시대는 언제나 성령의 일깨움과 중생의 사역이 명백히 나타난 시대였다. 부흥은 사도시대와 같이 복음이 사람들의 지혜와 부딪힐 때 일어나는 사건이다. 둘째 부흥은 성도를 성도답게 한다. 셋째 부흥은 복음전도를 가속화한다. 넷째 부흥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다섯째 부흥은 목회자를 목회자답게 한다. 6]부흥은 예배를 예배답게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뛰는 모습인가? 우리 모두 부흥을 갈망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사역의 현장에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한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주시는 부흥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흥은 개인의 관점에서도 엄청난 은혜의 선물이다. 메마른 풀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처럼 황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마른 땅에 홍수처럼 임하시는 성령의 부어주심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이다. 그러나 부흥은 개인적인 측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회를 각성시키고 말씀을 중심에 세우게 되고 목회자를 바로 세운다. 복음이 증거 되며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의 헌신이 일어난다.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이 오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열매들이 있기에 우리는 부흥을 소망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며 어두움이 물러가고 부정직이 사라지며 정직의 영이 온 세계를 사로잡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부어주시는 부흥의 영광인 것이다. 신비함과 영적 감흥이 그 초점이 아니고 삶의 변화이다.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열매이다.


부흥의 역사적 실제와 미래 -6


5. 참된 부흥과 거짓된 부흥
지금 까지 부흥의 정의와 그 열매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부흥의 정의와 열매를 보면 부흥을 소망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에 대한 열망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된 부흥에 대한 이해이다. 거짓된 부흥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부흥의 참된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거짓된 부흥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윌리암 스프레이그 박사의 견해는 매우 유익함을 볼 수 있다.
거짓된 부흥의 표지다. 첫째 ‘큰 감정적인 격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부흥이 일고 있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할 하등의 근거는 없다. 둘째 신앙고백의 측면- 매우 많은 사람들이 ‘나는 회개하였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부흥의 확실한 증거는 되지 않는다. 세 번째로 격렬한 반대와 광범위한 반대가 있다는 것이 그 부흥의 참됨을 입증하는 어떤 증거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할 것 있다. 그것은 부흥은 감정과 관련이 있지만 부흥이 반드시 감정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부흥의 성격을 회심하였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숫자로 평가하는 데 기울어지는 경향이 너무나 강하는데 그러나 사람들의 수, 그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진정한 부흥을 불확실하게 시험하는 시금석은 없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회심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여전히 죄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회심하였다고 상상케 하도록 만드는 교리들이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된 부흥의 표지다.부흥이라고 외쳐지는 어떤 것이 ‘성경적인 방편들’을 통하여 나온 결과였다는 사실은 그 부흥이 참되다는 것을 우호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복음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방편들로 인하여 산출된 신앙 문제에 대해서 강력한 흥분과 복음이 인정하지 아니하는 교리의 전파, 그리고 복음이, 근본적인 초석으로 알고 있는 교리들이 생략된 채 전하여지고, 성령의 검이 신실하고 청결하고 정직하게 사용되는 대신에 동물적인 격정을 산출할 양으로 의도된 한 다발의 인간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면 또한. 신앙의 본질을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거룩하게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대신에 뒹굴고 흐느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대치시켰다고 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순전한 역사일 수 없다고 서슴없이 말해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진리를 명백하고 진실하게 설교하여 그 넓이와 길이에 있어서 하등의 거짓이 없이 일어난 관심이 신앙에 모아지고 있다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공정하게 추천하고 있는 단순하고 정직한 방편을 사용하여 그러한 관심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여기에 성령의 순전한 역사가 일고 있다고 말하는 데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순전한 부흥은 그에 비례하는 반성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들이 참된 부흥의 증거로 취할 수 있는 주도적인 것은 ‘부흥의 견실하고 언제나 열려 있는 열매’이다. 소망스러운 회심의 개인적인 경우에 해당되는 법칙이 부흥에 대하여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종교의 문제에 대한 흥분이 아무리 큰 것이었다 할지라도 지나가 버리고 지속적인 어떤 선한 것이 거의 남지 않으면, 부흥이라 이름 붙이기가 부족한 것이다. 흥분이 사라진 뒤에도 거룩한 열매들이 여전히 남게 되고 더욱 더 무르익게 되며, 회심하였다고 고백하였던 사람들이 겸비로운 길을 계속 걷고 있으며 자신을 부인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런 경우의 사람들은 참된 신앙 부흥으로 소생 받은 사람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생활에서 구현된 신앙은 그 신앙이 마음에 거하고 있다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참된 부흥은 말씀과 참된 교리의 선포를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이지만 거짓된 부흥은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격정의 도가니가 된다고 해도 거기에 바른 복음이 없으면 우리는 참된 부흥이라 말할 수 없다.


부흥의 역사적 실제와 미래 -7-




6. 부흥을 위한 성령의 주권적 사역과 방식


부흥은 성령의 사역이라 말 할 수 있다. 그것도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부흥을 위하여 사역하실 때 한 방식에만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한 가지만을 고집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경우가 되어버린다. 성령께서 부흥을 위하여 그의 주도적인 사역을 한다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부흥을 위한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의 법을 존중하면서 진리를 방편으로 역사한다. 이를 위하여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첫째 부흥을 위한 성령의 역사는 일시적이고 비범한 방식으로 임할 뿐 아니라 조용하고 점진적인 복음 사역의 성공 둘 모두이다. 다만 그 선택권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혜와 은혜에 맡겨야 한다.
둘째 성령은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 준다. 그것은 믿음의 기도의 유효성을 증명하며 교회에 인간적 도구들의 결점과 약점을 교훈해 주고, 모든 영적 능력의 참된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준다.
셋째 성령은 부흥을 통하여 교회에 믿음과 소망을 소생시켜 준다. 즉 교회가 여러 종류의 시험과 환란을 통하여 나약해지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도, 마치 세상을 변화시키고 중생시키는 사명이 이런 부족한 교회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처럼 교회의 믿음과 소망을 소생시켜 준다.
넷째 성령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이 양심을 향하여 자신의 의도를 밝힌다. 그래서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는 것은 한결같이 양심의 가책을 동반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령은 부흥을 통하여 회심케 하는 역사를 한다. 회심이란 영혼이 죄로부터 거룩을 향해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회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별히 성령께서 회심케 하시는 감화력을 행사하실 때, 직접 양심을 향하지 않고 의지와 정서를 향해 진리를 말한다. 의지, 혹은 행동을 결정하는 기능은 천성적으로는 그릇된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할 때 그 의지는 바로 잡혀지기 때문이다.
여섯째 ‘사람의 영혼이 거룩해지는 전 과정’에는 성령의 작용이 있다. 중생한 영혼은 처음에는 완전한 거룩의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일반적으로 그 영혼의 소원과 목적들이 변화된다. 이 거룩케 되는 역사의 각 부분마다 성령께서 크고 작든 간에 직접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위의 여섯까지 부흥에 대한 성령의 역할을 살펴 볼 때 부흥을 위한 성령의 사역과 방식에는 전적으로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부흥이 일어나는 때마다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한 개인의 회심하는 데 작용하는 감화력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난다면, 수백의 사람들이 회심케 되는 상황에서 내리는 소나기와 같은 감화력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이 못지않게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시72:6]


부흥의 역사적 실제와 미래 -8-




7. 성령이여 이 땅에 부흥을 주소서


지금 부흥을 온 나라가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고백한다. 부흥은 모든 세대에 참된 복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을 더욱 간절하게 소망해야 한다. 부흥은 부흥을 경험한 나라만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부흥을 경험한 참으로 복된 민족이다. 그러므로 부흥을 참으로 소망하여야 한다...
부흥을 경험하였던 윌리엄 스프레이그는 좀더 간절하다. 그는 성령의 역사로서의 부흥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음을 의심하지 말고 오히려 확신하고 더욱 간절하게 부흥을 사모하라고 촉구한다. 뿐만 아니라 부흥을 사모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함께하기를 강조한다. 다음의 글은 이러한 간절함을 엿 볼 수 있다.


“부흥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적으로 확신하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리고 더 큰 열심과 부지런함으로 부흥을 위하여 서로 힘쓸 마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러한 노력이 그리스도의 담대함을 특정적으로 갖추고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와 충성을 특징적으로 갖추어서 여러분이 부흥에 달려 있는 부요한 축복들을 바라보게 되는 w동안에 그 부흥이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잠잠케 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역사를 유지하고 진전시키는 데 여러분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통한 부흥의 사역은 오늘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아야 한다. 또한 확신하여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2007년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 부흥이 임하기를 간구하며 소망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땅에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이 임하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본다. 그리고 성령이 사역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방편을 바르게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버려야 할 악을 잘 분별하여 버리고 성령께서 마음껏 사용 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소망한다. 성령의 강권적인 부어주심을 통하여 메마른 영혼이 힘을 얻고 죽은 영혼이 소생하고 어두운 나라와 민족이 깨어나고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화해하는 그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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