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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연보에 내포된 고백적 의미

by 【고동엽】 2022. 1. 28.

연보에 내포된 고백적 의미

 

연보한 자의 명단을 주보에 싣거나 목사가 그들의 명단을 불러가며 예배시간에 특별 기도를 해주는 것은 잘못이다: 성도들이 매주일 공 예배 시간을 통해 연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돈을 내는 행위와 개인적인 정성 때문이 아니다. 예배 시간을 통해 연보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삶에 대한 고백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보의 액수가 많고 적음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중한 것은 거기에 연보하는 자의 고백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 하는 점이다.

모든 성도들이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날마다 음식을 먹고 잠을 자며 제각각 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을 자기의 능력 때문이라 말하겠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것으로 믿으며 고백한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물질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이는 인간 자체가 물질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의식주에 연관된 방편들은 인간들의 노동력에 기초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금전이 그에 동반되는 가치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들은 노동의 대가로 급여를 받아 그것으로써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 예배 시간에 연보를 하는 것은 종교적 기부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성도들의 삶의 고백을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연보는 개별 성도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전체 교회가 공유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의미를 지닌다. 즉 개인의 연보이지만 그것은 교회 가운데 이루어지는 공적인 고백행위인 것이다. 이는 공 예배 시간에 여러 성도들이 다양한 음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목소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찬송이 되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연보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공적인 위치에서 고백적으로 연보한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 그것은 연보의 본질적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보는 결코 개인의 경제적인 형편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교회는 그것을 은근히 부추겨서도 안된다.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특색 가운데 하나는 공 예배 시간에 연보를 하면서 봉투에 이름을 적어내는 것이다. 교회에 따라서는 목사가 연보한 사람을 위해 공적으로 특별한 기도를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주보에 그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연보와 관련된 그런 모든 행위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연보가 성도의 삶에 대한 고백을 동반한다면 구태여 이름을 적어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 뜻을 다 알고 계신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 연보의 액수에 신경을 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리고 연보한 자들의 이름이 교회 앞에 공개되기 때문에 체면을 생각해 연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만일 연보의 액수를 자랑거리로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 신앙이 어리다는 징표이다. 그리고 연보의 액수를 통해 교인들의 신앙을 가늠하는 교회나 목사가 있다면 그것 역시 신앙이 어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도리어 많은 액수의 연보를 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조심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 가운데 어떤 형제들은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데 부유한 자라 해서 이름을 드러내며 고액의 연보를 한다면 그것이 다른 형제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들과 가난한 자가 연보하는 것을 보시면서 그에 관해 특별히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1-4).

 

예수님께서는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가 연보하는 것을 보시고 연보의 의미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위 본문말씀을 통해, 부자들은 연보를 하면서 당당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반해 가난한 과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당시 부자들은 많은 액수를 연보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가난한 과부는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당시 어리석은 자들은, 많은 액수의 연보를 하는 부자들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에 못 미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부자들이 풍족한 재산 중 일부를 연보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많은 액수의 연보를 했지만 저들의 실제적인 삶은 돈에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는 연보를 통해 자기의 삶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연보한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연보의 액수가 많고 적은 것 자체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진정한 고백이 담겨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공적 의미를 지닌 고백의 방편인 연보를 돈의 액수와 연관지어 평가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연보하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적어내거나 그들의 명단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나아가 공 예배 시간에 목사가 연보한 자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복을 빌듯 기도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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