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역사적 부흥의 이해와 미래
[제임스 뷰케넌과 W.B 스프레이그를 중심으로]
신동식 목사[빛과소금교회, 문화와 설교연구원]
1. 부흥을 왜 소망하는가?
지금 온 교회가 Again 1907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 교단들은 앞 다투어 부흥을 기대하며 거대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듯 모두가 2007년 에 다시 한 번 부흥을 부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감은 한국 교회에 전반에 불어오고 있으며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작금의 한국의 기독교는 부흥에 목말라하면서 다시 한 번 그 날의 기쁨을 소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이토록 부흥을 소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부흥을 기대하며 기다리는가? 그리고 하필이면 2007년인가?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군중 심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꼭 2007년의 부흥을 소망해야 하는가? 2006년은 안되고 2008년은 안되는가? 왜 100년 되는 해에 부흥이 임하여야 하며 그 날을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일부의 선동가들에 의하여 움직이는 꼭두까시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2006년에 아주사 거리에 부흥은 없었고, 2004년 웨일즈에도 부흥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07년에 부흥이 임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일까? 이러한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 정직하게 질문을 던지고 정직한 답을 얻어야 할 것이다.
사실 2007년을 소망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이해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관점이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 불리 우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자신의 생애에 부흥의 역사를 보고 싶어 했지만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생전에 보지 못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교회는 수천 명의 모여서 예배하였고 전 세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는 역사적인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였다.1) 로이드 존스는 역사적인 부흥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볼 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매 세기마다 부흥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본다면 첫째로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을 들 수 있다. 종교개혁은 단순한 교회 개혁 운동이 아니라 부흥운동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둘째는 17세기의 존 번연을 중심으로 하는 청교도와 경건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18세기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휫필드 그리고 웨슬리등을 통한 영적 대 각성 부흥운동이었었다. 19세기에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적 대 부흥이 일어났다. 스펄젼과 무디 그리고 찰스 피니등의 사역자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다. 20세기 초의 위대한 부흥의 역사는 영국의 웨일즈의 부흥과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이다.2)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많은 이들이 새로운 한 세기가 되는 2007년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부흥을 사모하는 것은 부흥이 임하면 영적인 대각성과 함께 사회변혁의 역사가 일어나으며 교회가 크게 성장하였기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변화한다면 그 열매는 모든 사회가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실체들은 역사적 부흥의 시대에 나타났으며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역사에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소망과 기대들이 어게인 1907을 외치며 2007년의 부흥을 소망하는 것이다.
2. 부흥인가? 교회 성장인가?
이러한 역사적인 부흥의 사건을 소망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부흥이 간절하게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흥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현재에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습은 부흥을 왜 소망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이다. 부흥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흥주의자들이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3) 인의적인 방법의 부흥을 요청하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흥을 요구하는 것은 교회 성장을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한 것인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장하기를 멈추고 점점 숫자적으로 줄어드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부흥이 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러한 모습은 부흥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지에 나타나고 있다. 청년들 역시 모여서 밤샘을 하면서 부흥을 열망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는 것인가?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 때문인지 곳곳에서 이루어졌던 포럼과 세미나 그리고 집회의 소리들을 보면 참으로 의미 있다. 그 소리를 보면 부흥은 회개 운동의 열매이며, 성경공부 운동이며, 그리고 부흥은 성품 변화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두가 한 결 같이 교회 성장을 위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교회 성장을 위하여 부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침체는 하나님 나라에 치명적이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보여준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부흥이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로서 필요하다면 우리는 부흥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에 대한 좀 더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3. 제임스 부캐넌과 윌리암 스프레이그
이에 대하여 본 소고는 역사적으로 부흥을 경험하였던 두 사람 제임스 뷰케넌과 W.B 스프레이그를 중심으로 부흥에 본질과 성경적, 역사적 의미와 부흥 시대에 나타났던 공통된 특징과 성령의 사역 그리고 부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방해 요소를 살펴보고 내일을 위한 우리의 갈 길을 제안하고자 한다.
제임스 뷰케넌과 W.B 스프레이그 이 두 사람에 대하여 대 부분 생소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부흥의 실제와 본질에 있어서 두 사람은 매우 의미 있다. 이 둘은 19세기의 부흥을 경험하였으며 이에 대한 의미 있는 저서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 저서는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제임스 뷰캐넌], 참된 영적 부흥[W.B 스프레이그]이다.
우선 윌리암 스프레이그는 1795년에 태어난 미국 장로교의 탁월한 목사였다. 그는 예일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을 졸업하고 약 50년동안 목회를 하였다. 그 중에 알바니아 지역에서 40년을 목회하였다. 이러한 그의 목회 사역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경험하였다. 스프레이그는 매우 중요한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참된 영적 부흥[Lectures on Revivals]이다. 이 책은 부흥에 대한 중요한 기술과 함께 부흥에 대하여 20명의 당시의 지도자들의 서신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쓴 목적에 대하여 스프레이그는 “진정한 부흥의 동인을 촉진시키는 것”1)임을 밝혔다. 또한 책을 출판하려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진정한 부흥과 외면적인 흥분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려고 부단히 애를 썻습니다. 부흥을 반대하는 자들의 트집을 반박하여 부흥을 옹호하고, 부흥이 산출되고 보존되기 위해 사용되는 매체들과 인간들의 방편성을 밝히려고 애를 썻습니다. 또한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부흥의 남용을 막으려고 애를 썻습니다. 그리고 이 부흥이 가져와야 하는 영광스러운 결과들을 예견하려고도 하였습니다.”2)
스프레이그는 이 책이 조나단 에드워즈나 무디 그리고 네틀톤과 같은 이들처럼 부흥을 위하여 비천한 정도라도 촉진하는데 쓰여 지기를 소망하였다.3) 스프레이그의 책이 부흥에 있어서 탁월한 이유는 이 책을 남기고 추천한 이들의 고백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초판본을 증정 받았던 영국 복음주의 지도자인 챨스 시므온은 자신의 유언집행자에게 이 책을 보존할 것을 요청한 것에서 볼 수 있다. 시므온은 그의 책 속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었다,
“매우 가치있는 책임, 본인은 본인의 유언 집행자에게 이 책을 보존하라고 당부함, 이 나라에서 이 책이 몇권이 될지 모르니 말이다. 나는 스프레이그 박사의 훌륭한 지각을 사랑한다.”4)
이 책에 대한 찬사는 여기에 끝나지 않았다. 20세기의 위대한 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였으며, 그리고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일 되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 하나님 교회의 부흥이라는데 있습니다. 저는 그 점을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상한 것이 된 것 같습니다. 심지어 부흥에 대한 생각 자체를 나무라는 것 같고, 실제적으로 부흥을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말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자세는 성경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교회사에 대한 애처로운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도할 수 있는 것은 어는 것이든지 매우 환영할 만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는, 본서가 유별나게 뛰어난 훌륭한 방식으로 그러한 교훈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프레이그 박사가 이 주제를 다루는 논조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이며,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합니다. 그 다음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아키발드 알렉산더,사무엘 밀러, 애쉬벨 그린, 그리고 천사 같이 거룩한 에드워드 페이슨과 같은 위대하고 성자답고 학식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내온 20통의 편지가 있습니다. 그 서신들은 그들 자신이 겪은 부흥에 대한 책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본서는 빼어난 공로와 탁월한 가치를 지닌 책이 되었습니다.“5)
두 번째로 제임스 뷰캐넌의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The Office and of Work The HOly Spirit] 역시 부흥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회심을 위한 성령의 사역을 기록한 것으로는 단연 최고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 뷰캐넌은 1804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토마스 찰머스에게서 신학 훈련을 받고 23세에 안수를 받고 목회하였다. 특별히 1844년 당시 당시 뉴저지에 있던 프린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글라스고우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임스 뷰캐넌은 조직신학자이지만 동시에 목회자로서 1859년도와 1860년도에 걸친 부흥의 때를 직접 경험하였기에 성령의 사역의 실례를 누구보다도 현장감 있게 분석했다고 여겨진다.
이 책의 탁월성을 잘 알고 있었던 마틴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 연구회에서 행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부흥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성령과 그 사역에 관한 1860년 이전에 쓰여진 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 뷰캐넌이 쓴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The Office and of Work The HOly Spirit] 과 같은 책입니다”6)
또한 박순용 목사는 이 책의 장점은 성경에 충실하며 종교 개혁적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리고 교리와 적용에 있어서 그 양 날개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학적이면서도 동시에 목회적인 성령에 관한 강론집이라며 추천하였다7)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부흥을 소망하면서 부흥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요구되어지는 이 시대에 이 두 권의 책을 통하여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4. 부흥의 본질과 역사적 의미
부흥의 본질을 논하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첫째 성경이 부흥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다. 이것은 우리의 부흥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러한 부흥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는 것이다. 특별히 역사적 부흥을 경험한 이들이 들려주는 역사적 기록은 우리가 부흥을 소망해야 하는 이유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8)
영어에서 부흥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침체 되어있는 삶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부흥이 교회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면 부흥이란 침체 되어 있는 교회가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일어났던 부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즉 사도행전의 역사와 같은 것은 교회가 있기 전에 있었던 부흥의 현상이다.9)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에서의 부흥의 의미를 성경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부흥은 무엇인가? 엘머 타운즈는 부흥을 말하기를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라고 하였다.
“ 복음주의적 부흥이란 하나님의 비범한 역사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역사속에서 그들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게 될 때 그들의 죄를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긍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과 개인적, 상호적 경험이 깊어져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관심이 고조된다.”10)
이안 머레이는 부흥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밝히면서 참된 부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진정으로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깊어져 가고, 성경 말씀에 경외감을 가지고 이에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날마다 거룩에 힘쓰며, 이웃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부흥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소유한 것에 더하여 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 이와 똑같은 특성들과 행동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부흥의 진위는 바로 이렇게 입증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은 우선적으로 눈여겨보지 않고 방언이나,계시,공적인 죄의 고백, 흥분의 상태등과 같은 다른 표적들을 부흥의 증거로 생각하면 잘못된 판단이 내려질 것이라 확신한다.11)”
분명 부흥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역사이다. 그러나 부흥을 경험하였던 스프레이그와 뷰케넌은 좀더 구체적으로 부흥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둘 다 부흥의 본질을 논하면서 신앙의 본질을 우선 언급하고 부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언급한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적 부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프레이그는 신앙의 본질을 통하여 부흥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마음과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그것은 영혼 안에 심겨진 순종의 원리[씨앗]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행동 속에서 그 원리의 작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동일합니다........신앙의 본질이 그러하다면 신앙의 부흥이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익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앙 부흥이란 성경을 아는 지식의 부흥입니다. 생명적인 경건의 부흥과 실천적인 순종의 부흥을 말하는 것입니다.”12)
스프레이그는 신앙 부흥이란 성경의 지식을 아는 것이며, 생명적인 경건의 부흥과 실천적인 순종의 부흥을 언급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부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에 대하여 스프레이그는 좀 더 세부적으로 언급한다.
“1) 하나님의 백성들의 열심과 경건의 증가 - 그들은 이제까지 자기들이 마땅히 행할 일에 너무나 태만하였음을 각성하기 시작합니다.......그들의 가장 주도적인 소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각자마다 차별이 없이 주어진 신앙의 의무들을 신실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2) 경성하여 깨어남 - 이제까지는 무심하였던 사람들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들의 처하여 있던 위치를 보고 경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러한 방면의 변화가 매우 점진적입니다. 한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을 더 잘하게 되며, 보다 심각한 자세로 듣습니다. 3) 거룩한 소망의 증거 -시시때때로 하나님과 화해하며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기를 소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신앙 부흥에 속하는 것입니다.“13)
좀 더 나아가서 스프레이그는 참된 부흥과 거짓 부흥의 표지를 논하면서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강조한다. 스프레이그는 거짓된 부흥과 참된 부흥의 표지들을 언급한다.14) 이에 대한 제임스 뷰케넌의 부흥의 본질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신앙 부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한 명백하고도 분명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첫째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활력과 능력을 분배하고 베풀어 주는 것이다. 둘째는 이제까지 부주의하고 방종하며 불 신앙적 삶을 살았던 영혼들에게 놀라운 각성과 회심을 주는 일이다. 환언하면 부흥이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해주는 것이며, 산 자들에게는 새로운 영적 건강을 분배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15)
제임스 뷰캐넌은 부흥의 분명한 정의를 내리면서 간과할 수 있는 부흥의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한다. 그것은 많은 영혼들이 동시적인 회심과 하나님이 백성들이 마음에서 신앙적 능력이 증가한다는 것이다.16) 이렇게 볼 때 제임스 뷰케넌과 윌리암 스프레이그의 정의는 동일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의 비교를 통하여 볼 때 부흥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부흥이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을 영적 회심으로 이끄는 것이며, 동시에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각성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충만함을 통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5. 부흥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사실
부흥이란 무엇인가? 그 본질에 대하여 앞서서 살펴보았다. 이제 부흥에 대한 성경적이고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부흥의 본질이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근거에 기반 한 것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특별히 제임스 뷰케넌은 신구약시대에 나타난 부흥과 교회사 속에 나타난 부흥을 통하여 오늘도 부흥을 갈망해야 하는 이유는 말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부흥의 사실은 셋의 시대이다. 이 때의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였다.[창4:26] 성경은 노아의 대홍수 이전에 일반적인 신앙의 부흥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수아 시대에 좀 더 보편적이고 놀라운 부흥이 있었다는 특별한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1) 여호수아 사역 하에 백성들 가운데 진지한 신앙의 깊은 각성이 있었으며 그것이 광범위 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수8:33-35,18:1,24:31] 뷰캐넌은 이들에 나타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광야2세대들의 신앙의 진지함과 열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하심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그들은 어릴 때부터 ‘광야를 통한 교육’을 받았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낭독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었으며, 그 영광스러운 진리의 말씀에 익숙해 있었다.”2)
여호수아 시대 이후에도 신앙의 각성이 일어나고 부흥의 모습이 보인 때는 바로 열왕의 시대였다. 요시야 왕 시대에 서기관 사반이 왕 앞에서 여호와의 율법 책을 읽었을 때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왕하22;11-13] 그리고 곧 이어 국가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아사왕과 히스기야 시대에도 발생하였다. 또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난 위대한 변화가 그것이었다.[스9:8]3) 구약의 모습만이 아니다. 이러한 부흥의 모습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영광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이 위대한 사역이 마치 멈추어진 것 같아 보였지만 오히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영의 광대한 부어 주심과 나라와 민족 가운데서 더 강력한 일반적 각성의 길을 예비하게 되었다. 이적적인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사도들에게 강림하심과 동시에 청중들에게 구원하시는 은혜가 임함으로써 오순절에 삼천 명의 영혼들이 단 한 번의 설교를 통하여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4) 오순절에 발생한 위대한 회심 사건은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사건은 아니다. 신약의 또 다른 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했다.5)
이러한 신구약이 증거 하는 부흥이 역사는 성경의 사건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교회사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종교 개혁의 시기였던 16세기는 신앙 부흥의 총체적이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매 세기마다 각 지역에서 이러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 낳으며 알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제임스 뷰캐넌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부흥의 역사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것과 동일하였음을 강조한다.
‘1623년부터 1641년까지 아일랜드의 얼스터[Ulster]지역에서는 매우 비범한 참된 신앙 부흥이 일어났는데 이때 적지 않은 상류층 인시들이 회심하기도 했는데, 잊지 못할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가장 위대한 부흥과 성공이 출중하고 학식이 많은 목사들의 설교에서가 아니라 재능이 떨어지고 율법이 선포하는 두려움과 공포 정도만 알고 있었던 이의 설교에 임했다는 사실이다.1625년에는 스테와튼[Stewarton]의 교구에서 주로 어빈[Irvne]의 목회자였던 딕슨[D. Dickson]목사를 통하여 괄목할 만한 부흥이 발생했다. 1630년도에는 역시 비범한 부흥이 나낙셔의 쇼트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발생했다. 글라스고우[Glasgow]에서 총회가 열렸던 해인 1638년에도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참된 신앙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이 부흥은 오늘날 우리에게 소중한 열매들을 기업으로 남겨 주었다. 이 부흥은 한 지역에 한정되지 않았고 스코틀랜드 전역에 광범위하게 발생했으며 교회 회중뿐만 아니라 사법부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1734년에는 주로 죠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사역을 통하여 노샘턴[Northampton]과 북미[North America]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서도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1794년에는 주로 발라의 찰스[Charles of Bala]를 통해 웨일즈의 여러 교구 교회에서도 역시 놀라운 신앙 부흥이 일어났다.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가 끝난 직후인 1649년에 이미 총회원들이 신앙적으로 황폐햇던 이 웨일즈 지역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후 웨일즈에는 몇몇 능력 있는 설교자들이 출현했는데 휴오웬[Hugh Owen],토마스 굿지[Thomas Gouge], 그리피스 존스[Griffith Jones], 하웰해리스[Howel Harries], 다니엘 로우란즈[Daniel Rowlands]가 바로 그들이다.
1812년에는 엠브라이드[M'Bride]목사의 사역 하에 스코틀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애란[Arran]섬에서 부흥이 일어났다. 이 부흥에는 무절제라고 불릴지도 모르겠지만 엄청난 흥분이 동반되었으며, 약 이백 명에서 삼백 명 사이의 영혼들이 회심하는 결과를 낳았다. 같은 해에 서부에 위치한 스카이 섬에서도 비범한 부흥이 일어났다. 그리고 1824년 루이스 섬에서 맥레오드 목사의 사역하여 위구르 족들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다.“6)
부흥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성경의 시대로부터 계속하여 진행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흥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도 더욱 간절히 부흥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흥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무엇이며, 교회에 주신 보편적 방편은 무엇인가? 이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은 성경적 역사적 부흥의 본질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6. 부흥을 위한 성령의 주권적 사역과 방식
부흥은 성령의 사역이라 말 할 수 있다. 그것도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부흥을 위하여 사역하실 때 한 방식에만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한 가지만을 고집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경우가 되어버린다. 성령께서 부흥을 위하여 그의 주도적인 사역을 한다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부흥을 위한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의 법을 존중하면서 진리를 방편으로 역사한다. 이를 위하여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첫째 부흥을 위한 성령의 역사는 일시적이고 비범한 방식으로 임할 뿐 아니라 조용하고 점진적인 복음 사역의 성공 둘 모두이다. 다만 그 선택권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혜와 은혜에 맡겨야 한다. 이것은 오늘도 많은 부분에서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부흥의 방식에 상반된 견해에 대하여 제임스 뷰케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단순히 그들의 회심에 위대한 신앙적 부흥의 외면적인 모습이 동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정한 목회 사역하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에 한 사람 한 사람씩 더해짐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회심사역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이들을 지지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교회가 모든 경우에 있어서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의 부어 주심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에도 역시 동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모든 부흥을 비성경적인 기만으로 여기고 오직 평범한 사역을 통한 신적 진리의 점진적 성장과 개인적 회심의 완만한 발전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자들의 생각에는 더더욱 찬성할 수 없다. 영혼의 동시적이거나 연속적인 회심이라는 두 가지 방법은 모두 동일하게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7)
제임스의 견해로 볼 때 부흥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일시적이고 비범한 방식으로 임할 뿐 아니라 조용하고 점진적인 복음 사역 모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는 영혼의 회심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둘째 성령은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 준다. 그것은 믿음의 기도의 유효성을 증명하며 교회에 인간적 도구들의 결점과 약점을 교훈해 주고, 모든 영적 능력의 참된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준다.8)
셋째 성령은 부흥을 통하여 교회에 믿음과 소망을 소생시켜 준다. 즉 교회가 여러 종류의 시험과 환란을 통하여 나약해지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도, 마치 세상을 변화시키고 중생시키는 사명이 이런 부족한 교회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처럼 교회의 믿음과 소망을 소생시켜 준다. 9)
넷째 성령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이 양심을 향하여 자신의 의도를 밝힌다. 그래서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는 것은 한결같이 양심의 가책을 동반하는 것이다. 고뇌하기까지 양심의 아픔을 진하게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죄를 깨달은 죄인들이 ‘가슴을 친다...’고 하는 말이 있게 되는 것이다.10)
다섯째 성령은 부흥을 통하여 회심케 하는 역사를 한다. 회심이란 영혼이 죄로부터 거룩을 향해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회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죄를 깨닫고 미워하는 데 있어서 행해지는 것은 이 회심의 준비 사역에 불과하다. 성화의 역사에서 행해지는 것은 이 회심의 계속에 불과하다. 특별히 성령께서 회심케 하시는 감화력을 행사하실 때, 직접 양심을 향하지 않고 의지와 정서를 향해 진리를 말한다. 의지, 혹은 행동을 결정하는 기능은 천성적으로는 그릇된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할 때 그 의지는 바로 잡혀지기 때문이다.11)
여섯째 ‘사람의 영혼이 거룩해지는 전 과정’에는 성령의 작용이 있다. 중생한 영혼은 처음에는 완전한 거룩의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일반적으로 그 영혼의 소원과 목적들이 변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자기 지체 속에 있는 한 법이 자기 마음의 법과 투쟁하는 것을 경험한다. 이 거룩케 되는 역사의 각 부분마다 성령께서 크고 작든 간에 직접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12)
위의 여섯까지 부흥에 대한 성령의 역할을 살펴 볼 때 부흥을 위한 성령의 사역과 방식에는 전적으로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뷰케넌과 스프레이그는 부흥이 일어나는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한 개인의 회심하는 데 작용하는 감화력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난다면, 수백의 사람들이 회심케 되는 상황에서 내리는 소나기와 같은 감화력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이 못지않게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시72:6]13)
7. 부흥을 위하여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방편들
부흥이 성경적아며 역사적인 사실임을 보았다. 그리고 더불어 부흥을 위한 성령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부흥을 위하여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보편적 방편과 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을 살피는 데에는 두 가지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는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의 참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 시대에 나타날 부흥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이다.
스프레이그는 성령께서 자신의 역사를 보존하고 진전시키는 데 있어서 높여 주시는 방편과 그 특징을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지정해 주신 방편들이요, 다른 하나는 복음 정신과 부합하여 사람들이 신앙 양심을 따라서 받아들이는 방편들이다.1) 이제 그 방편들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스프레이그는 하나님께서 부흥을 위하여 분명하게 지정해 주신 은혜의 방편은 다섯 가지라고 언급한다.
첫째는 진지함 혹은 엄숙함이다. 어떤 주제이든지 그것을 진지하게 존중하는 마음에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종교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는 경솔함의 모양을 띠더라도 전혀 격에 어울리지 아니하고 혐오될 만한 그런 상황이 존재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신앙 부흥이다.2)
두 번째는 질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데 있어서 모든 무질서들을 피하라고 길게 논술하고 있다.[고전14장]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고 선언하기도 하였고,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고 권면하기도 하였다.3)
세 번째는 단순성이다. 부흥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편들의 또 다른 특징은 ‘단순성’이다. 이 말은 모든 허례와 떠벌림을 반대하는 말이다. 감각들을 향하여 치러지는 의식이 충만한 의미를 가진다 할지라도 어린아이에게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의 진보를 위하여 채용된 모든 방편들은 분명히 그 시대의 보편적 영적 특성에 부합해야 한다.4)
넷째는 정직성이다. 부흥을 진전시키고, 부흥을 위한 선행적인 역사와 관련되어 하나님께서 추천하시는 방편들의 또 다른 특징은 ‘정직성’이다. 이 방편들은 세상적인 모든 인위성과는 반대된다.5)
다섯째는 애정이다. 부흥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하는 방편들 중에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특징은 ‘애정’이다. 복음은 정말 탁월한 자비의 체계이다. 복음이 성취하려는 위대한 목적은 죄인들의 구속인데, 그것은 사람과 천사의 마음이 언제나 애착을 느낄 가장 인애로운 대상이다.
바로 이러한 다섯 가지가 성령께서 부흥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부흥을 소망하는 우리들이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매우 유익한 내용이다. 우리는 부흥을 소망한다고 하면서 성령이 역사하도록 준비된 토양이 되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토양이 준비될 때 성령의 부흥케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준비해야 할 토양이라면 이 토양에서 부흥의 열매를 맺게 하는 방편들 또한 있다. 그 또한 다섯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설교되어 진다. 둘째 개인 기도와 공 기도가 불붙는다. 셋째 성도들 간에 성경적인 교제가 있다. 넷째 주일학교와 성경공부반의 활성이다. 다섯째는 영적인 부모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다.6)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토양과 열매를 맺게 하는 방편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시대의 모습에서 보는 것이 부흥을 촉진시키는데 있어서 무엇인가 왜곡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직 찬양과 기도가 부흥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부흥의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부흥을 촉진시키는 것이 찬양과 기도와 같은 이벤트성 집회가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인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즉 성경이 가르쳤던 사실들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말씀이 가감 없이 바르게 선포되어지고, 예배가 바르게 회복되어지고 성도의 온전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지하며, 단순하고 정직하게 서며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부흥을 촉진시키며 부흥을 유지하는 것이다. 특별히 주일학교와 성경공부 그리고 영적인 부모의 의무가 부흥을 위한 중요한 요소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사실상 지금의 부흥운동에는 이러한 본질적인 요소들이 빠져있다. 그러므로 부흥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부흥주의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안타까운 것이다.
8. 부흥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이제 우리는 부흥에 대한 진지한 소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부흥의 열매 즉 결과 때문이다. 부흥이 가져다 준 열매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 부흥이 왜 필요한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어느 정도 언급하였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부흥이 임하였을 때 나타나는 열매를 살펴보는 것은 부흥을 이해하고 소망하는데 더욱 큰 힘이 될 것이다.
스프레이그는 부흥의 결과를 현실세계에서의 결과와 영광에 세계에 미치는 결과들로 나누어서 강조한다. 그는 부흥이 이 땅에 가져오는 장대한 결과로 “세상의 도덕적인 상태를 철저하게 쇄신 시킨다는 것이다. 즉, 부흥의 열매는 첫째 직접적인 영향으로 사람들의 이지적,영적,사회적 조건을 고양시킨다.7) 두 번째는 교회의 도덕적 힘을 일깨움으로 세상의 도덕적 상태를 획기적으로 쇄신한다는 것이다.8) 그리고 세 번째로 부흥은 하늘 백성의 기쁨에 참여하게 되고 하늘 백성들의 수를 증가시킨다.9)
이에 대하여 제임스 뷰캐넌 역시 부흥의 결과에 대하여 다음과 말한다. “첫째 영혼이 각성되고 소생케 된다. 둘째 하나님의 진리 안에 참된 실재와 강력한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통치하시며, 성령께서 여전히 교회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넷째 대단한 열정과 진심으로 기도를 올리며, 진정한 마음으로 헌신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 다섯째 그리스도인들의 각성된 열정과 불붙는 기도는 다른 이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고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여섯째 모든 영혼이 신적 진리를 통하여 계몽되고 자신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각성되며, 죄를 슬퍼하는 경건한 근심에 휩싸이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무조건적인 구원을 붙잡도록 자극받으며, 새로운 견해와 새로운 감정,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취미,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습관으로 충만해진다.”10)
부흥은 개인의 관점에서도 엄청난 은혜의 선물이다. 메마른 풀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처럼 황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마른 땅에 홍수처럼 임하시는 성령의 부어주심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이다. 그러나 부흥은 개인적인 측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회를 각성시키고 말씀을 중심에 세우게 되고 목회자를 바로 세운다. 복음이 증거 되며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의 헌신이 일어난다.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이 오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9.부흥에 대한 오해와 버려야 할 거짓 요소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열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부흥을 불신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무익한 의구심이다. 왜냐하면 성경과 교회의 역사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이 생긴 이유도 있기에 그 사실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스프레이와 뷰케넌 역시 이러한 의구심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다. 뷰캐넌은 우리는 새로운 발명이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이 부흥의 사건들을 경계심이나 의심의 감정으로 대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1)고 하였다.
부흥에 대한 오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흥에 대하여 반대하는 주장이 있음을 본다. 부흥을 반대하는 주장들을 보면 첫째 부흥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신앙부흥운동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부흥은 열광주의의 온상이라는 것이다. 넷째 부흥기간 중 회심한 이들은 정신 착란에 빠진다고 이야기 한다. 다섯째 부흥은 종교적 낭비이다. 여섯째 부흥은 불화를 야기시킨다. 일곱 번째 부흥의 기간이 회심하기에는 너무 짧다. 여덟 번째 부흥은 상반된 타락을 몰고 온다. 아홉 번째 부흥은 교파주의를 조장한다.2)
부흥의 장애물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자세하게 살펴보았듯이 부흥은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다. 물론 부흥 시대에 나타난 문제들이 부흥을 반대하거나 오해되게 할 수 있다. 특별히 부흥의 본질을 모르거나 오해 할 때 그렇다. 또한 부흥을 방해하는 또 다른 장애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존재하는 세상적인 정신”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제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부를 획득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 것이 바로 부흥의 장애물이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개인적인 책임감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 부흥을 반대하는 또 다른 장애 요소이다. 네 번째는 교회 내에 있는 심각한 범죄들을 용납하는 것은 신앙의 부흥에 또 다른 중대한 장애 요소가 된다. 교회가 음란한 범죄들을 제하여 버리는 일에 게을리 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심각하게 불순종하는 행동이다. 다섯째는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형제를 사랑하는 정신이 부족한”것이다. 여섯째는 ‘기독교의 진리를 잘못되게 드러내거나 부족하게 제시하는’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성경적인 부흥을 저해하는 아주 잘못 된 것이다.3)
우리나라도 이러한 모습들이 없지 않아 있음을 본다. 부흥을 자기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것이 참된 부흥을 촉진 시키고 유지시키며 부흥을 반대하는 자들을 잠재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말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심령에 대해 그의 역사를 진행하실 때는 진리를 방편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대로 얼마나 정확하게 진리를 전했느냐에 따라서 그 합법적인 효력은 결정될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공정하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식과 다르게 진리가 전파되었으면 그만큼 그 효력은 절감되는 것이다. 특히 복음의 어떤 특별한 교리들 중에 어떤 것은 가볍게 취급하여도 좋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는 성경의 저자되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러한 모독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며 그들에게 효과 없는 역사를 나타내심으로써 징벌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어떤 교리들을 바른 관계를 무시한 채 전하는 방식도 있다. 그러한 방식은 신앙 부흥을 지극히 방해하는 것이다.”4)
그러므로 부흥이 성경적이고 역사적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참으로 소망해야 할 것이지만 부흥이 임하였을 때 동시에 사단도 함께 장난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렉산던 아키발드 목사는 참된 부흥이 진리와 정통과 짝하듯이 거짓된 흥분은 오류와 편당을 조성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하였다.5) 그는 교회가 언제나 부흥이라는 말을 듣는다 하여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동요와 효력이 지나간 자국과 방불한 폐허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 참된 부흥은 부흥회를 통하여 기독교 교리를 잘 훈련 받는 것이며, 죄를 깨닫는 정도가 깊고 겸허하며, 죄인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느껴지고 인정되며 그리스도 밖에는 모든 다른 것은 피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7) 참된 부흥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교제하며 그 진리를 나누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되고 인위적인 부흥은 진리를 중요시 여기지 않으며 오직 열심에만 과도히 집착하는 것은 부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특별히 아키발드는 거짓된 부흥을 질책하면서 부흥이란 자기들의 새로운 신학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참된 부흥과 거리가 먼 것임을 강조한다.8)
부흥에 있어서 피해야 할 악
그러므로 스프레이그는 부흥의 시대에 반드시 피해야 할 악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가 사장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단의 웃음소리만 난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심심치 않게 나타났던 것이다.
①.부흥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한 가지 두드러진 악행은 ‘거짓된 소망을 조장시키는 것’이다. 영원의 문에서 거짓된 소망은 지옥으로 가는 통행증이다. 그런 거짓된 소망에 일단 빠지기만 하면 끝까지 그 소망에 붙잡히게 되기가 쉬운 것인데, 그것은 감정의 변화가 있으면 회심을 하였고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반드시 피하여야 한다. 스프레이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특별히 목회자들이 정직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9)
②. 부흥에 잇어서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악행은 ‘자기 신뢰[확신]’의 정신이다.10)
③. 부흥에 따라 일어나기 쉬운 또 다른 서글픈 악행은 ‘비판적’인 정신이다. 부흥을 풍성하게 축복을 받은 교회가 기력이 쇠해진 상태에 있지는 않고 다만 보편적이고 갑작스런 성령의 역사는 만나보지 아니한 교회를 손가락질하면서 정죄할 수 있다.11)
④. 부흥과 관련하여 피해야 할 또 다른 악은 ‘신앙에 있어서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다. 12)
⑤. 과장은 부흥과 관련해 볼 때 경계해야 하는 악이다.13)
⑥.부흥과 관련하여 흔히 존재하는 또 다른 악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와 하나님께 속한 진리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14) 이것은 공적 예배보다 주중에 열리는 기도회와 도는 다양한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더욱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예배보다 기도원이나. 아니면 특별 찬양집회를 선호하는 것을 의미 할 수 있다. 또한 부흥이 때로는 성경의 진지한 교리를 싫어하게 유도하는 기회로 이용될 수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또한 교회 에 오류의 홍수를 끌어들일 기회로 이용될 수 있다.15)
⑦. 부흥의 기간 동안에 ‘목회자들의 직무가 가진 영향력을 약하게 하고 목회자의 존영을 손상시키기에’ 좋은 어떤 일이 때로는 일어나곤 한다.16)
⑧.그리스도인의 성격을 재는 거짓된 기준을 세울 위험이다.17)
⑨. 부흥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교회의 순결성을 부패하게 만드는’악행이다.18)
이러한 견해는 경험을 경험한 당대의 지도자들에게 동일하였다. 그 중에 한 사람이었던 프란시스 웨인랜드 목사는 부흥이 일어나는 기간에 그리스도인들은 비상한 회개와 정신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며, 죄를 고백하고 기도하고 싶은 정신이 가득 차고 더욱 거룩하게 되고 특히 영혼들의 구원에 더욱 은근한 관심을 쏟는다는 것이다.19) 그러면서도 신앙 부흥에 있어서 삼갈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의뢰하는 대신 방편을 의뢰하며, 과장하고 싶은 경향을 특별하게 피하여야 하고, 영적인 교만의 성향을 자주 고쳐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20)
이렇게 윌리엄 스프레이그 목사로부터 부흥에 대하여 견해를 요청받았던 20여명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죄에 대하여 각성하고, 기도에 전념하고 복음을 전하기를 기뻐하였다. 그렇다고 경박한 모습들이 있지 않았다. 감정의 충만함이 있었지만 그것은 균형 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성도의 수가 급증하였다. 이것이 부흥을 경험한 이들의 모습이다.
10. 성령이여 이 땅에 부흥을 주소서
지금까지 1800년대에 살았으며 부흥을 경험하였고 그 역사를 체험하였던 두 사람 제임스 뷰케넌과 윌리암 스프레이그의 두 책을 통하여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소망하게 된다. 그것은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이 우리 시대 가운데 임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가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이 된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씀의 깊은 진리에 이르면서 자신의 존재성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감정적으로 붕 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부흥집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찬양하고 회개하고 밤을 새지만 정작 삶의 터전에서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엄숙하며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여전히 일상은 일상이다. 자신을 헌신하고 포기하고자 하는 모습은 여전히 부족하다. 자칫하다가 부흥의 방해거리들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07년 부흥을 진정을 소망한다면 성경에서 일어 낳고 역사의 현장에서 부흥을 경험하였던 이들의 모습을 깊이 상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임스 뷰캐넌은 성경에서 나타났던 부흥과 역사적인 부흥의 모습이 동일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부흥의 모습과 역사적인 부흥의 모습이 다르다면 우리는 역사적인 것이 아무리 위대하다하더라도 부인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부흥과 역사 가운데 일어났던 부흥의 역사는 동일하였다.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시대에도 나타나야 할 부흥 역시 동일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지함과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회심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부흥은 감정적인 발흥이 아니다. 감정은 부흥을 통하여 일어나되 경박한 웃음과 울음이 아니라 진지한 고백과 나눔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특별히 말씀 선포가 부흥을 위한 성령의 방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흥을 소망하면서 말씀 선포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부흥을 오해하였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력한 선포가 있을 때 성령은 그 방편을 통하여 부흥을 주시는 것이다. 제임스 뷰캐넌은 성경의 기록된 약속을 통하여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시2:8,창28:14,시72:16,17,합2:14,로11:25-27]1)
“점진적인 진보를 선포하고 복음의 궁극적인 편만성을 보증하는 이러한 구절들은 회심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수행되는 것을 암시한다. 이 회심의 사역은 복음 설교하는 수단을 통하여 성취되고 능력을 동반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을 통하여 죄인의 마음과 양심에 적용된다. 만일 영감 받은 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하나님의 기적적인 섭리의 이적이 동반된 채 선포되었던 복음이라 할지라도 회심시키는 능력과 그 효과만큼은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면, 이제 복음이 영감의 빛도 없고 이적적인 능력을 행사할 힘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선포된다고 할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우신 역사는 기독교회를 통하여 계속되어야 하며, 죄인들의 회심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을 위하여 세상 끝나는 날까지 효과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의 예언이며 약속이다. 많은 이들은 이적적인 방언과 치유, 그리고 예언의 은사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멈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의 능력도 중지되었다고 너무나도 쉽게 단정하는 나머지 성령의 사역의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이 영구적이며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수행될 것이라는 실제적인 사실을 잊어버린다. 죄인들로 하여금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가게 하는 회심의 사역과 그들이 점진적으로 영화롭게끔 준비되는 성화의 사역은 사도들에게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게 하신 것만큼이나 큰 성령의 열매이다.”2)
이러한 분명한 인식하여 뷰케넌은 오늘도 분명하게 성령의 부흥케 하시는 사역은 계속된다고 확신하였다. 다음의 말은 성령의 사역으로서 부흥이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논증한다.
“거듭나야 할 모든 영혼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우신 역사가 오늘의 기독교회에서 종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회심의 사역이 종결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제 천국의 문이 폐쇄 되었으며, 한 영혼도 교회에 더해질 수 없고,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했는데 한 영혼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성령의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은 결코 종결되지 않았다. 아니 마지막 죄인이 회심에 이르고 구원으로 회복되기까지 이 사역은 절대로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신약 시대에 ‘성령의 거룩한 직분’이라고 강조되는,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계속되는 사역은 신실한 복음 설교를 통하여 위대한 부흥의 결과를 기대하도록 우리를 교훈하는 교리이다.3)
이에 대하여 윌리엄 스프레이그는 좀더 간절하게 요구한다. 그는 성령의 역사로서의 부흥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음을 의심하지 말고 오히려 확신하고 더욱 간절하게 부흥을 사모하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흥을 사모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함께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다음의 글은 이러한 간절함을 엿 볼 수 있다.
“부흥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적으로 확신하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리고 더 큰 열심과 부지런함으로 부흥을 위하여 서로 힘쓸 마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러한 노력이 그리스도의 담대함을 특정적으로 갖추고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와 충성을 특징적으로 갖추어서 여러분이 부흥에 달려 있는 부요한 축복들을 바라보게 되는 동안에 그 부흥이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잠잠케 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역사를 유지하고 진전시키는 데 여러분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4)
이처럼 성령을 통한 부흥의 사역은 오늘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아야 한다. 또한 확신하여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2007년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 부흥이 임하기를 간구하며 소망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땅에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이 임하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본다. 그리고 성령이 사역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방편을 바르게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버려야 할 악을 잘 분별하여 버리고 성령께서 마음껏 사용 할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소망한다. 성령의 강권적인 부어주심을 통하여 메마른 영혼이 힘을 얻고 죽은 영혼이 소생하고 어두운 나라와 민족이 깨어나고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화해하는 그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흥을 소망하면서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에 대하여 알고자 하지 않고 오직 감정적 차원에서만 머문다면 가장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5) 오! 성령이여 이 땅에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부흥을 내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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