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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인가 결단인가.

by 【고동엽】 2022. 1. 28.
중생인가 결단인가.
원제 : 중생 vs. 결단주의식 전도의 우상 (Regeneration vs. The Idolatry of Decisional “Evangelism”)


폴 워셔


로마서 1:16을 보면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어떤 사람들은 사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할 임무를 띤 그가 이런 말을 해야 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육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그의 문화에서 신봉하는, 거룩하다고 믿어지는 모든 것과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당시 문화에 적응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문화와 협상하여 메시지를 문화에 맞게 각색하고 재조합 하려는 시도, 다시 말해 오늘날 복음주의권에서 그토록 두드러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최악의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저주인 십자가에서 죽은 한 나사렛인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들에게 복음은 최악의 부조리였습니다. 외딴 곳에서 온 이 유대인이 육신을 입은 진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지 않는다면 입을 열어 복음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배척 당하고 조롱 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복음을 합당하게 전한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그 수치스러움을 덜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살았던 인물들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젊은 플리니(Pliny the Younger)의 기록입니다. “고문 받는 두 노예 소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조사해보니 터무니없고 도착적인 미신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마르쿠스 미누시우스 펠릭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그들의 의식은 범죄를 저지르고 십자가라는 죽음의 나무에 달린 한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라고 조롱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참된 종교를 파괴할 역겨운 망상, 무감각하고 미친 미신을 내세운다”라고 말합니다.


듣기 싫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현대 교회 성장 전략들은 제가 방금 읽은 이 일들을 피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는 자기 부인이 기독교 신앙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아폴로의 신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라. 계속해서 헛된 망상을 하고, 재판관들의 옳은 판결로 정죄 받고 청춘기에 철에 묶여 최악의 죽음으로 처형된, 망상 속에 죽어간 한 신에 대해 슬퍼하며 노래하도록 내버려두라.”


고대의 볼테르와 같은 사람이었던 루키아누스는 그의 작품 <페레그리누스의 죽음 De Morte Peregrini>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의 신들을 거부하고 대신 십자가에 달린 궤변가를 숭배하며 그의 법에 따라 사는 가련한 악마들이라고 조롱합니다.


오리게네스의 <켈수스에 대항하여 Contral Celsum>에서 켈수스는 선언합니다. “어린 아이를 잠재우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술 취한 노파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일들을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원색적인 복음은 마찬가지로 불쾌하게 여겨집니다. 상대주의, 다원주의, 인본주의 등 우리 문화의 모든 ‘주의’들에 대해 복음은 여전히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잠시만 살펴봅시다.
우리는 상대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절대적 확신 위에 세워진 신앙 체계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는 사람을 칭송하는 위선을 보이면서도 정작 진리를 찾았다고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개처형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암흑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연인은 타락한 피조물이며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스스로 지옥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점검하고 악을 제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합니다. 진리가 자기 상태를 드러내고 남아 있는 양심을 괴롭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진리, 특히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고 싶어합니다. 진리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며, 그리하여 심지어는 마치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존재하더라도 알 수 없거나 우리 삶에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까지 합니다.


복음에 대해 다음을 알아야 합니다. 숨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결코 지성이 아니라 의지가 문제입니다. 저는 성경이 무신론에 어떤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을 미워하여 마음에서 진리를 밀어내는 자들이 있으나 ‘무신론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롬1:21). 달려드는 소를 피하기 위해 모래 속에 머리를 숨긴 사람처럼, 현대인은 양심을 잠재우고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다가올 심판에 대한 생각을 밀어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도덕적 절대성들을 부인합니다.


상대주의와 그 문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 일을 복음이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스스로 부과한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타락상과 반역을 깨닫고, 자신에 대한 자치권을 거부하고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을 진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진리를 끝장내는 신념 체계인 다원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진리일 때, 즉 정반대로 모순되는 진술이 모두 진리라고 명명될 때 진리는 죽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제 말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기독교 신앙의 처음 몇 세기 동안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라고 낙인 찍히고 박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것이 여러분이 감옥에 가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둘러싼 문화는 유신론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신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었고 종교는 급속히 발전하는 사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신에게 관대했을 뿐 아니라 신들을 마치 야구 카드처럼 바꾸고 공유했습니다. 기독교가 나타나 손으로 만든 신들은 결코 신이 아니라고 선언하기 전까지 전체 종교 세계는 잘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저와 그에 대한 숭배를 부인하고, 다른 소위 신들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하였으며 예수님만이 만유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렸습니다. 온 세상이 그 엄청난 오만함을 보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노를 발했습니다. 관용을 용납하지 않는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이 말들, 엄청난 오만함을 보십시오. 똑 같은 시나리오가 오늘날 우리 세계에도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종교와 도덕에 관한 견해들은 그것들이 아무리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모두 다 진리라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합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언론매체와 학계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인해 이 견해가 순식간에 다수의 견해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병을 치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환자를 마취시켜 더 이상 느끼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잠에서 깨우고, 그런 비논리적 입장에 의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수치입니다. 복음은 어떤 결론에 도달할 것을 강요합니다. 두 견해 사이에서 망설이기를 얼마 동안이나 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주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바알이 주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참된 복음은 철저히 배타적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복음주의자들 앞에서 해야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복음이 철저히 배타적이라는 이야기를 복음주의자들에게 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유일한 길로서의 그리스도를 포기하기 시작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참된 복음은 철저히 배타적입니다. 예수님은 한 길(one way)이 아니라 유일한 길(the way)이며, 다른 길들은 전혀 길이 아닙니다.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좀 더 관용적인 에큐메니컬주의로 한 발짝 조금만 내밀어 정관사 ‘the’를 부정관사 ‘a’로 바꾼다면 수치스러움이 제거되고 세상과 교회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이해되십니까? 우리가 단순히 “야훼는 한 신이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아무런 박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예수는 한 구원자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해 되십니까? 우리가 그저 그는 우리의 구원자 이시다 라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모든 수치가 제거될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너희의 구원자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구원자가 있다. 너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언쟁도 없을 것이다. 너희 길이 그렇다면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우리가 이렇게만 한다면 결코 아무 박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순간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고,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는 부정되고 세상에는 구세주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인본주의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인류는 양심과 문화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제단을 모두 다 부숴버리고 종교적 광신자의 열정으로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것을 세속주의가 종교적 사고에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속주의자는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종종 자신의 종교에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광신적이 됩니다.


인간은 자신을 모든 일의 중심과 척도와 목표로 만들어 왔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찬양하고, 자존감에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하며, 자아실현을 최고의 선으로 격상시킵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에 스며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신다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정확히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의 찌꺼기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자기 주변의 도덕적 혼돈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사회를(최소한 자신에게 계몽 받지 못한 사회의 한 부분을) 비난합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양심의 증언이 옳을 수도 있다거나 세상에 있는 거의 무한대의 다양한 병폐들에 대해 자신이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에게 복음은 수치입니다. 복음이 자신에 대한 망상을 폭로하고 그의 타락상과 범죄를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첫 번째 필수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참된 복음 설교를 그토록 혐오하는 이유입니다. 참된 복음은 인간들의 잔치를 망쳐놓고, 거짓을 드러내며, 임금님은 옷을 입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거치는 돌과 미련한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은 수치일 뿐 아니라 수치여야 합니다. 옛 부흥사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에 거했던 가장 거룩하신 분과 잘 지내지 못한 세상이 어찌 우리와 잘 지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수치가 되어야 합니다. 수치가 되기 위해 광신자의 무리처럼 될 필요도 없고 온갖 미친 일들을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라는 이 한 가지 선언에 신실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메시지에서 수치스러운 것을 제거하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구원의 능력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이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수치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복음의 미련한 것을 통해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폐하시고, 가장 위대한 지성들의 지능을 좌절시키시며, 모든 사람의 교만을 낮추기로 하셨습니다. 아무 육체도 그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며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고전1:31) 하려 함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당시의 종교, 철학, 문화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정치적인 전쟁, 군사적인 전쟁이 아니라 진리에 관한 영적 전쟁입니다. 복음은 세상과의 휴전이나 협정을 거부하고 오직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까지도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합니다. 바울의 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을 오늘날의 사조나 육적인 인간의 욕망에 순응시키고자 하는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주의해야 합니다.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역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사역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성경적이지 않은 사역들입니다. 자라나는 선교사들인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역은 인류학자나 사회학자, 새로운 문화 사조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성경 해석자나 신학자, 성경 연구가들에 의해 규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신성한 문서에 따라 사역과 전도를 하는 것이며 월 스트리트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타락한 세상 혹은 육적인 교인들에게 더 호소력 있게 만들기 위해 복음의 거치는 것에 물을 타거나 복음의 혁신적 요구를 부드럽게 만들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들은 복음을 재포장하고, 그 거치는 것을 제거하며, 육적인 사람에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복음의 날을 무디게 함으로써 복음을 좀 더 구도자 친화적(seeker- friendly)으로 만들려는 전략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seeker-friendly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찾으시는 분(seeker)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와 메시지를 순응시키려거든 하나님께 순응시킵시다. 교회와 사역을 세우려거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정과 그의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소망 위에 세웁시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맞섭시다. 우리는 땅의 영광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설교에 앞서 한 가지 더 지적하겠습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논증했듯 바울의 육신에는 그가 전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온갖 이유가 있었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믿을 수 없는 메시지이며 세상의 지혜에게는 바보 같은 소리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 우리의 메시지를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지를 잊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복음은 너무나 억지스럽습니다. 복음이 로마 제국 전체에 퍼졌다는 것이 복음의 초자연적 성격을 증명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구약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리스 철학이나 이교의 미신에 뿌리 내린 이방인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에 대한 메시지를 믿도록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는 의심스러운 환경, 즉 로마 제국에서 가장 멸시 받는 지역 중 하나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처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직업은 목수였고, 공식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순회 종교 교사였으나 복음은 그가 그리스 철학자와 고대 로마의 현인들의 지혜를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가난하였고 머리 둘 곳도 없었으나 복음은 그가 삼 년 동안 말씀으로 수 천명을 먹이셨고, 온갖 질병을 고치셨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신성모독자이자 국가의 적으로서 예루살렘 바깥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복음은 그의 죽음이 모든 인류 역사의 중추적 사건이며 죄로부터 구원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복음은 그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자기를 따르는 많은 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40일 후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복음은 자기 백성들에게 미친 신성모독자로 거절 당하고 국가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힘 당한 한 가난한 유대인 목수가 이제 세상의 구세주이시며, 주의 주이자 왕의 왕이시며, 시저를 포함하여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 앞에 꿇어야 할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의 시대에 이 메시지를 믿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아시겠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누가 이런 메시지를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복음은 로마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 바깥과 세상의 온 나라까지 결코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직을 관리하는 능력이나 설교자의 유창함 또는 변증 능력에 의지했다면 그 메시지는 태어나자마자 사라졌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교전략들과 월 스트리트에서 빌어온 똑똑한 마케팅 계획들은 복음이라는 어리석은 거치는 돌의 진보를 조금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틴 헹겔은 십자가의 오랜 수치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의 한 분 선재하신 아들, 창조시의 중보자이며 세상의 구원자인 그 분이 최근 외딴 갈릴리에 유대인이라는 미천한 민족으로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십자가에서 평범한 범죄자로서의 죽음을 맞았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미쳤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이 진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에게 격려와 경고를 함께 줍니다. 첫째, 단순하고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할 때 세상에서 끊임없이 복음의 진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격려를 줍니다. 둘째, 휘황찬란함, 달변, 똑똑한 교회성장전략을 통해 복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거짓말에 굴복하지 말라는 경고를 줍니다. 이런 것들은 회심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일어나게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희망 찬 절망을 품고 복음을 진보시키는 성경적 방법, 즉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믿고 영광스러워하는 메시지를 담대하고 명확하게 선포하는 일에만 자신을 투신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불신앙과 회의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희망 없는 신화라고 조롱 당하고, 사람들은 우리를 편협한 고집쟁이나 종교적 책략에 속아넘어간 저능한 희생자들로 묘사합니다. 그런 공격은 종종 우리를 방어적으로 만들고 우리는 변증을 통해 반격하고, 우리의 입장과 적실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저는 변증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훈련이 매우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능력은 여전히 복음의 선포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도록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그리고 사람의 지혜나 지적인 전문기술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역사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만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이 믿을 수 없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롭고 강력한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믿기는 고사하고 우리 말을 들어주기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의 선포가 얼마나 희망 없는 일인지요! 선포자가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인지요!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전도는 바보 같은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실하게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 37:1~10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저는 방금 사람의 회심을 묘사하였습니다. 선포하러 나갈 때면 언제나 여러분은 에스겔입니다. 언제나 죽은 뼈들의 골짜기에 서서 그것들이 매우 말랐음을 봅니다. 에스겔의 시대에는 생명 없는 뼈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이 뼈들의 골수는 완전히 말라버려 단지 먼지와 같을 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기술도, 어떤 설득도, 어떤 능력도,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뼈들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지금 그것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전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죽었을 뿐 아니라 죄에 메여 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생명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들은 눈 멀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모든 조각을 제한하고 결박하려고 능력껏 모든 일을 합니다. 양심이 더 이상 그들에게 말하지 않도록 정지시키기 위해 모든 능력을 다 합니다. 무릎 꿇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영원토록 마귀의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가서 전도 기술을 배워 사용해 보십시오. 기나긴 강단 초청을 하고, 온갖 종류의 감상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그들의 열정과 감정을 조종해 보십시오. 당신에게 남는 것은 배나 지옥 자식이 된 한 무리의 사람들뿐일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 받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골짜기 한가운데서 에스겔과 같은 사람이 한 발짝 걸어 나와 하나님께서 복 주기로 약속하신 유일한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모집할 때, 아니면 후보자를 면접할 때 우리는 한 가지를 바랍니다. 사역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죽은 자는 살아날 수 없고 세상은 무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회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자신이 전쟁에 나가면서 몇 개의 무기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무기들-복음의 선포, 중보기도, 자아 사랑에 대한 희생적 죽음-이 강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보내 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복음이 진보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육신의 수단에 의지하면 할수록, 교회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기 위한 최신의 방법을 찾아 성장하려는 시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현대 사회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스스로를 원수들 사이에 있는 바보로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교회는 예수 놀이공원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육적인 수단들을 사용한다면 육적인 수단들을 사용해서 그들을 붙잡아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하는 기본적인 초청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현대의 표준적인 초청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당신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기도로 요청하고 싶습니까? 기도할 때 그분이 들어오셨습니까? 당신은 진지했나요?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것은 현대 복음주의계에서 너무나 신성한 금송아지로 여겨지기 때문에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로 인해 마음이 상합니다. 저는 이것이 성경적인 언어들도 아니며 기독교 역사의 대부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임을 확실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문구가 없이는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만 이것은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상태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전도의 현장은 교회 건물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참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회심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건물 안에’ 입니다. 폴 형제, 우리에겐 많은 교회들이 있어요 라고들 말합니다. 아니요. 우리는 아름다운 마당 위에 세워진 수많은 멋진 벽돌 건물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곳에서 떠났으며 그 문에는 이가봇(영광이 없음이라는 히브리어)이라고 씌어있습니다.


이 초청문구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인생과 결혼, 재정, 자존감을 교정합니다. 죄인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그들이 자아 중심적이고, 자율적이며, 자기의 일을 하고 싶어하며, 자신의 꿈을 갖고 있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걸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그가 말합니다. “앗,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구요? 환상적이군요. 나도 나를 사랑해요! 이건 놀라워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한단 말이죠? 그건 불가능한 말 같네요. 누가 그런 큰 사랑을 가질 수 있겠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구요? 나도 내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어요! 내가 예수를 받아들이면 그가 내 모든 놀라운 계획들을 도와줄 것이고 나는 당장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단 말이죠?”“맞아요!”“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선택하겠어요. 당신은 그 두 가지를 가졌나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폴 형제, 우리는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아요. 하지만 결과가 이렇습니다. 폴, 당신 참 고약하네요. 비꼬기만 하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이 나라가 실제론 그렇지 않으면서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심지어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고 난 후에도 이어서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은 이런 초청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적절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게 하고 난 후에는 마치 교황처럼 그들이 구원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그런 종교적 거짓말을 믿습니다. 훗날 그들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와 복음을 전하려 할 때 그들은 듣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종교적 거짓말이 그토록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이 질문은 종종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제시됩니다. 다음과 같이요. “어이, 당신은 우리 모두가 죄인인 걸 알지요? 그렇죠?”만일 그 사람이 “네,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알아요”라고 대답하면 그 다음 질문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입니다. “네, 가고 싶어요.”“그럼 당신의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기도로 요청하시겠어요? 단지 5분이면 됩니다.”“겨우 5분이라구요?”“네,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요.”“5분이면 되나요?”“딱 5분입니다.”“좋아요.”


그 사람이 기도하거나 혹은 전도자에게 인도 받아 기도하고 난 후에는 그는 자신이 진지했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셨다고 보장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며, 만일 들어오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들이 진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보다는 과거 오래 전에 했던 결단의 진실성에 더 의지해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십니까? 종종 몇 분 동안의 상담 후에 그들은 즉각 교회 앞에 세워져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 받습니다. 제가 틀렸다고 말하시겠지요. 저는 그런 장면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단체 상담을 위해 훈련 받은 상담자들에게 넘겨집니다. 초청이 진행되는 동안 오분 내지 십분 동안 이야기하고 즉각 교회 앞에 세워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그들 중 대부분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회심 상담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만일 그들이 성장하지 않거나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면 다시 데려옵니다. 그들이 기도했던 그 날로 돌아가 그들의 결단의 진지성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구원을 의심하며 목사를 찾아온 사람들을 그 날로 다시 데리고 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기도한 일이 있나요?”“네.”“진지했나요?”“그랬던 것 같아요.”“그렇다면 이건 마귀의 방해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결코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자도가 부족하거나 육적인 그리스도인 교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간주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수련회에서는 그곳에서 결신한 사람의 60%가 한 번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이 병폐에 대해 그들은 제자훈련을 더 잘 해야 한다는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훈련시키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우리는 제자도를 행해야 합니다. 과거 70년대에는 개인적 제자도가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교회의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 제자도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회심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간 이유는 한 번도 우리에게 속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회심에 5분을 사용하고는 염소를 제자훈련 시켜 양을 만드느라 50년을 보냅니다.


제가 분을 잘 내는 사람이라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화가 난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정치가가 문제가 아니라 복음주의 전도자가 문제입니다.


열매가 없다는 사실과 극도의 세속성으로 인해 그들의 회심이 혹시라도 의심을 받게 되면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이 한 기도의 진실성과 종교 지도자들의 확증에 기대어 자기들의 절망적인 구원을 방어합니다. 만일 상담을 한다면 침체 상태로부터 돌이켜 다시 주님을 섬기기 시작하라는 권고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회심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결코 시험 받지도, 의심 받지도 않습니다.


어린이 전도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방학 중 성경학교의 98%에는 제 자녀를 참가시키지 않겠습니다.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한데 모여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고 이어서 “너희 중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지?”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사탄 숭배의 영향을 받아 등에 사탄의 상징을 인쇄한 가죽 재킷을 입고 뒷줄에 앉아 있는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아이들은 일어나 말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요.” “너희 중에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니?” “저요!” “이 기도를 할 사람?” “저요.” 그리고는 침례를 받으러 줄줄이 끌려가는데 많은 경우 그들이 그 시간을 정말로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티장에서와 같은 옷을 입힙니다. 그들이 부모에게 반항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들은 실제로 반항하며 커다란 부도덕과 죄 속에서 살아갑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25세나 30세쯤 되었을 때 도덕적인 삶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어그러진 일들을 바로잡기로 결심하고는 삶을 재헌신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길 지속합니다. 그들의 도덕성은 자기 양심을 흐리게 하고 지옥으로 직행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도덕성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린 친구들이 길을 떠나 방황하며 여자 친구와 자고, 마약을 하거나 팔고, 다른 모든 일들을 행하기 시작할 때 그의 부모나 목사가 찾아와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살기를 그만둬야 해.” 다음과 같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어. 그리고 잠시 동안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믿음에서 돌아섰구나. 그것은 네가 한 번도 그리스도를 몰랐으며 처음부터 사악한 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거라!” 이것이 차이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 현대판 주문을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선언으로 대치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만물을 유지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경배와 순종을 받으실 분입니다. 출애굽기에서의 하나님의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출34:6-7).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계시 중 하나입니다. 모세는 바위 사이에 숨었고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모세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모세의 반응을 보십시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출34:8).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하는 대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 주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형태의 신을 제시한다면 그들은 분명 받아들일 것이지만 그 신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 주십시오. 그들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들의 인생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되어야 함을 말해주십시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믿으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입니까?


다른 질문을 살펴봅시다. 당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 이토록 놀라운 일을 하셨다는 복음을 들었으니 한 때 사랑했던 죄를 이제는 미워하십니까? 마귀에게 가서 자신이 죄인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렇지. 그것도 아주 대단한 죄인이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요.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알아요.” 그들이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마치 “나는 하나님을 영접했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영접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것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죄인이예요” 라고 하는 말도 다른 의미일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요 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꿰뚫는 검을 사용하셔서 그 말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수 년 전 제가 설교할 때 그곳에는 한 여성이 인도하는 모든 면에서 준비된 상담자들이 있었는데 이 여성은 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제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습니다. 왼쪽에서 울음이 시작해 전체 강당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울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거의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치기도 전에 한 소녀가 달려나와 울기 시작했습니다. 상담자들을 바라보자 그 인도자는 나를 쳐다보며 마치 뭔가 좀 해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가만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 설교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설교를 마무리한 후 그녀는 앞으로 걸어 나왔고 저는 그녀가 저에게 따지려 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밑으로 내려가 그녀 곁에 서자 뭔가 좀 해보세요 라고 했고 저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나를 쳐다보고는 뭔가 조치를 취하려 했고 저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자매님, 하나님의 법궤에 손 대지 마십시오. 죄에 대해 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찢으시는 영혼을 위로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세요.”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당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하지만 친애하는 여러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역사하기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죄를 보시는 방식대로 여러분도 죄를 바라보기 시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죄를 미워하는 그런 신성한 태도의 씨앗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죄를 자랑하던 것이 부끄러움으로 변화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무언가를 행하고 계십니까?


이번에는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아니요, 나는 차라리 지옥에 가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저는 몇 사람 봤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네, 천국에 가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이해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질문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가 아니라 “하나님을 원하십니까?”여야 합니다. 정치 이론과 선거는 모두다 유토피아에 관한 것입니다. 모두 다 사람이 살기에 멋진 곳을 만드는 일에 관한 것들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죄인들을 향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인생에 무언가를 행하셨습니까?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귀히 여기고 있습니까? 당신의 인생 내내 하나님을 모르는 체했고, 미워했고, 냉담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십니까? 그분을 따르고, 찾고, 알고, 그분 안에서 기뻐하고자 하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까?


몇몇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하면 이어서 질문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당신 마음에 들어오시라고 기도로 구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런 공식 혹은 언어가 없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마가복음 1장은 다음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마음에 나를 영접할 사람이 누구인가?” 오순절에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거기 손 드셨습니다. 거기 손 드셨습니다. 지금 앞으로 나오실 분이 계십니까? 모두 앞으로 나오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이 기도를 합시다.”


폴 형제, 지금 비웃고 있군요? 네, 그렇습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런 방법을 통해 구원 받았단 말입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가 아니라 그런 방법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폴 형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절들이 있잖아요. 좋습니다. 한 번 살펴봅시다. “영접하는 자…” (요1:12). 정말로 이 구절이 영접기도를 의미한다고 믿고 계십니까? 정말로 이 구절이 기도하기가 편치 않다면 나를 따라서 기도하십시오 라는 의미라고 믿고 계십니까? 그런 의미입니까? 생각해 봅시다. 그런 말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한 전도자가 심지어 기도를 따라 하는 것 조차도 원치 않는 사람을 향해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이 말씀만 드리지요. 내가 말할 테니 그것이 당신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거든 내 손을 꽉 잡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세요.”


영접한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신학이라는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계속되는 교제에 자신의 인생을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요17:3). 자기 삶의 실체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혹은 그를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요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 자신에 대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그들은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순간, 믿음의 순간에 그들은 자기 삶을 예수님께 엽니다. 그들이 특정 수준의 진실성을 가지고 영접 기도를 했다는 것은 참된 증거가 전혀 아닙니다. 마음은 사악하여 속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마음의 진실성의 정도를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신약성경 전체에 증거가 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어 구원에 이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믿은 증거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점점 더 그분과의 교제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예방주사를 놓듯이 복음으로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초청합니다. 만일 그 순간에 그들이 참되게 회개하고 믿는다면 그들은 그 순간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그 증거는 기도의 진실성 이상의 것입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삶 속에서 성화를 통해 하나님이 끊임없이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롬10:9-10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중심 혹은 핵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좌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남은 생애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라는 말을 살펴봅시다.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마음에 믿으라”는 말을 우리는 “마음에 그가 들어오시도록 요청하시겠습니까?”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마음에 믿으라는 말은 당신 존재의 중심 혹은 핵심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비밀의 방을 열고 그를 들어오시라고 요청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증언이자 모든 건전한 복음주의적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시인[고백]하는 것을 참된 회심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전체를 통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바울이 여기서는 왜 시인하는 것을 추가할까요? 바울은 오직 믿음의 교리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공적인 시인이 마음으로 믿은 것을 보여주는 증거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말과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시인할 것입니다. 이것은 회심 했다고 추정되는 그 밤에 교회 앞에 서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일입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말과 행실로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입니다. 제가 말과 행실이라는 말을 추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나를 주로 시인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행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은혜를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제 말은 구원에 관한 잃어버린 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이라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때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소생[중생]시키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십니다. 그가 새로운 피조물처럼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이 중생의 증거입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에 참으로 믿은 사람의 삶의 특징은 말과 행실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성경적인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믿음이 진정한 구원하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그의 입을 통해 듣고 그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문화적인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우리가 1세기 로마 제국의 20여명 모인 교회라고 합시다. 로마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들 중 일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양과 같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20명이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고 가정합시다. 로마의 어떤 건물을 짓느라 일하고 있고, 아무 문제 없는 아름다운 날의 점심 시간입니다. 우리는 봄 날의 잔디밭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갑자기 북 소리가 들려옵니다. 눈을 들어보니 군인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작은 향로와 불이 얹어진 작은 제단을 가져오고 있고 우리는 겁에 질립니다. 모든 건설 인부들이 그들의 발 앞에 모여드는데 대부분은 불신자입니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있는 작은 교회입니다. 군인들이 우리 모두를 불러모으며 “이리 와서 시저에게 경의를 표하라”라고 말합니다. 불신자인 첫 번째 인부가 나가 약간의 향을 취해 불에 던지고 “시저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고는 최대한 행복한 표정으로 물러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지나 드디어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 첫 번째 사람의 차례가 됩니다. 그가 걸어나가고 군인은 “시저에게 경의를 표하라”라고 하며 창으로 찌릅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그리고는 죽습니다. 다음 사람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고 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사람.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 참으로 믿는다면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이라는 그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미국 교회에서 우리는 그 아름다운 진리를 한 무리의 사람들 앞에서 짤막한 기도를 하면, 당신이 진지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켰습니다. 그것은 이 구절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부르는 순간 그는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증거는 영접기도를 하는 인생의 한 순간 그들이 진지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구원의 증거는 참된 회개가 있는가? 믿음이 있는가? 복음의 은혜가 그들의 삶과 성장에 지속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신칭의의 증거는 성령님을 통한 계속되는 성화의 사역입니다.


계3:20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첫째, 이 구절은 복음 초청의 문맥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는 죄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습니다. 정도에서 벗어난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문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전도자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폴 형제, 나도 알아요. 하지만 효과가 있다구요.”


둘째, 이 구절이 명확하게 회심이나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에게 만일 그들이 마음을 열면 예수님이 들어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데 이 구절을 사용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반면에 회심과 마음을 여는 것 모두를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행16:14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왜 이 구절은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까?


셋째, 단순히 삶을 열도록 초청하는 대신 죄인들이 자신을 시험하고 그 순간 주님이 무엇을 하실는지 살펴보도록 사랑으로 돕는 것 또한 합당한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 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 복음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셨습니까? 성경의 진리와 제자도의 요구 가운데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점점 더 마음을 열고 있습니까? 당신이 들은 일들에 대해 반응하고, 당신의 죄된 삶 가운데에서 자아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 신뢰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까?”


넷째, 설사 우리가 이 구절을 전도에 사용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삶을 그리스도께 열었다는 증거는 마찬가지로 지속되는 교제일 것입니다. 문을 열면 그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을 참으로 그리스도께 열었다는 증거는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설교로 인해 그리스도와 아무런 교제도 없고, 경건의 소망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면서도 그들이 한 때 교회에서 예수님을 기도로 초청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회심했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건 사실입니다.


이제 45초 남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알라스카 남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들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25명 정도가 모여 있는 설교단에 제가 올라갔을 때 어떤 키 큰 사람이 걸어 들어왔는데 그는 제가 만난 가장 슬퍼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일 앞줄에 앉았습니다. 저는 즉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고 난 후 전 아래로 내려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는 봉투를 하나 꺼내어 저에게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지금 의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3주 안에 죽는다는군요.”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숲 속에서 소를 방목하며 살았습니다. 거기 가려면 산을 넘거나 수상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나는 평생 교회를 가본 일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은 일도 없구요.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믿습니다. 내 평생 아무 것도 두려워해 본 일이 없는데 내가 죽을 것이라니 두렵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지난 45분간 저는 복음, 즉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전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셨습니까?” “네.”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이 순간 무엇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기도로 요청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폴 형제, 나는 이해했어요. 누구라도 이해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이제 이해했으니 기도를 한다. 그게 다인가요?” 저는 회개와 믿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 후 그는 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해가 안가요.” 저는 말했습니다. “보세요. 당신이 살 날은 3주가 남았고, 저는 내일 아침 떠나야 합니다. 제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당신이 죽을 때까지 3주간 함께 있겠습니다. 당신이 구원 받거나, 아니면 죽어서 지옥에 가겠지요. 이제 시작합시다.”


주목하십시오. 전도자가 되는 것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설교하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나오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고 상담해 주십시오. 결단하는 이가 많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그저 결단일 뿐 회심이 아닙니다. 다음 주일에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레이븐힐이 종종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수 많은 교회들에서 한 번만 설교하는 이유를 이제 이해하실 겁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성경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그리스도가 형상화 될 때까지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를 계속해 살펴보았습니다.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읽고, 또 한 시간이 갔습니다. 시간이 늦었을 때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머물겠습니다. 이 사람은 죽어갑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인 요3:16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다리에 제 성경과 그의 큰 손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구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여러 번 읽지 않았나요.”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의 생명이 여기 달려 있습니다.” 그 큰 노인은 아래를 내려보며 계속 했습니다. “좋아요. 하나님이…세상을…이처럼…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오!...나는 구원 받았어….나는 구원 받았어…내 모든 죄가 사라졌어! 내 손이…깨끗해. 나에겐 영생이 있어…영생이 있어…나는 천국에 갈꺼야!”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그걸 아시나요?” “전에 이 구절을 읽어본 일이 없단 말이요?”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차이가 뭔지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저에게 제가 복음전도에 반대하냐고 묻습니다. 예이기도 하고 아니오 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는 식의 복음전도에 반대합니다. 그것을 증오합니다. 그런 전도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작은 표딱지를 붙들고는 관청에 앉아 면허갱신을 위해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표를 붙들고 천국에 가십시오. 우리가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저는 설교할 때 강단 초청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마음을 만지신다면 저에게 나오십시오. 우리는 여기에 밤새 앉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어떻게 할까요? “오, 당신은 구원 받았어요. 구원 받았어요”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들으세요. 만일 오늘 밤 당신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렀다면 당신은 구원을 향해 계속해서 회개할 것이고 회개 가운데 자라날 것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믿었다면 계속해서 믿을 것입니다.” 이건 예방주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10년 뒤 경건치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가 복음을 전할 때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아, 걱정 마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지 않소. 설교자 양반, 내 걱정 마쇼. 나 옛날에 다 했어.” 뭘 했다는 말인가요? 예방 주사를 맞았단 말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을 위해 수고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식사하러 가게 하십시오. 수고하고 기도하십시오. 복음의 다양한 약속들과 다양한 경고들을 가지고 그들과 상담하십시오. 저는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마치 진드기 한 마리가 세상이라는 바위를 향해 머리를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 없이 결단으로 인도되는 것에 신물이 나고 지쳤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보다는 결단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믿습니다. 어떤 복음주의 지도자가 그렇게 말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거의 완전하게 복음을 듣는 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그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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