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교리의 재인식
김영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역사신학)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에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양태론적인 이해가 일반화되어 있다. 그래서 윗트니스 리 같은 이가 큰 소리를 질러 사람들로 하여금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 데 혼란스럽게 만든다. 한국 교회에 왜 양태론적인 이해가 만연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한편, 올바른 정통적인 삼위일체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며, 삼위일체 교리를 실제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논하기로 한다.
유일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세계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어서 제각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말하고 있으나, 창조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유일하게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즉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하거나 만들어낸 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런 뜻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시나 단일신(單一神)은 아니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유일신’이란 뜻을 ‘단일신’으로 이해하여 홀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부인한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성부), 아들 하나님(성자), 성령 하나님(성령) 세 분이시나 한 하나님이시며, 한 하나님이시나 세 분으로 계시며 일하신다. ‘삼위일체’란 단어는 성경에는 없으나, 교회는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위(persons)가 한 하나님이신 진리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회 역사에서 제일 처음 삼위일체라는 말을 한 이는 터툴리안이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물으면서, 아들이시면 아버지와 같이 동등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신지를 묻는 물음에 답하는 데서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하게 된 교리이다. 사도들을 계승한 속사도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 정통교리를 확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재확인하기까지 교부들이 많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변증하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교회가 교의로 받아들이게 된 교리이다.
이단의 전형: 양자설과 가현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잘못 가르친 초기의 이단은 영지주의와 에비온주의였다. 영지주의는 헬라의 철학과 동방의 여러 종교의 혼합 사상이며, 에비온주의는 유대교적 배경에서 나온 사상이었다. 영지주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났다는 뜻에서 그렇다고 말했다. 이러한 가르침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한다. 가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고 역사적인 인물로 사신 것을 부인하거나 그런 역사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에비온주의는 예수는 단지 인간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양자(養子)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가르쳤다. 가현설과 양자설, 이 두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단설을 대변하는,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전형적인 이단설이다.
사도들을 계승한 속사도 교부들이나 그 다음 세대의 변증가들은 나사렛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나신 분으로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도들의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다소 표현상 미흡한 점은 있었으나 그 진리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항하여 정통적인 신앙을 변증하며 전수하였다. 미흡한 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들 하나님을 헬레니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로고스’ 사상으로 설명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로고스’는 순수한 신과 물질 세계를 중계하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아들을 ‘로고스’로 설명하자니까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한가지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양태론의 생성과 파급
3세기에 이르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삼위일체를 결과적으로 부인하는 단일신론(單一神論)이 대두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양자로 이해하는 소위 동적(動的) 단일신론과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이었다. 동적 단일신론은 에비온적 양자론에 가깝고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영지주의적 가현설에 유사한 것이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그냥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이라고도 하고, 그것을 사벨리우스가 처음 말했다고 해서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도 한다.
3세기 중반에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과 교회 시대의 세 시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들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단자(單子, monad)로서 하나님의 존재 내에서 구별이 없으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세 가지 이름과 양식으로 구별될 뿐이라고 하였다. 태양과 빛과 열을 비유로 사용하여 로고스를 통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면 장차는 로고스가 다시금 흡수되고 하나님은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사벨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무시하였으므로 그에게서 성육(成肉)의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물론 이단설로 정죄를 받았으나, 교회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경향은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래 삼위일체 교리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이 그 교리를 논할 경우에는 양태론을 말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신학자들은 역사적인 예수를 찾느라 예수전 연구에 헛되게 열을 올렸다. 유니테리안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따르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표방하는 합리주의적인 신자들의 그룹이다.
한국 기독교장로교회가 1972년에 내 놓은 신앙선언서 제 1장 1절에 보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 이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것을 작성한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로 나타나셨고 계시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들로 나타나셨고, 또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성령으로 나타나셨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에서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만난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이 양태론을 말하는 것은 알 만한 일로 여기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자에게서도 양태론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어서 자못 긴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느 보수적인 신학자의 글에서도 “이 세 위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적으로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 위는 하나님의 본체(本體)가 존재하고 있는 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표현을 본다.
이러한 양태론적 이해는 부흥사들이나 일반 목회자의 설교에서도 흔히 듣는 것이다. 일반 목사들의 경우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해, 햇빛, 열, 혹은 물, 얼음, 수증기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로 설명한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양태론에 빠지게 된다. 신학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하여 유신론적으로 논증을 하다가 그러한 논증의 잣대를 삼위일체론에까지 적용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양태론적 이해가 만연되고 있는데다가 그냥 주관적인 성경공부에만 열을 올리고 교리 교육에는 대체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 교회이다 보니까 신자들은 이단들의 가르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까 잘못된 양태론을 가르치는 윗트니스 리도 많은 추종자를 얻고 있는가 보다.
1996년부터 98년의 기간에 월간지 <교회와신앙>의 발행인 최삼경 목사는 윗트니스 리측과 벌인 논쟁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변형된 양태론으로 규정한다. 필자는 최삼경 목사의 말에 동감한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양태론”이라고 말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양태론은 합리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는 삼위일체 이해로 나름대로의 전제와 논리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경우는 논리성을 결여한 채로 겁없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전혀 부적합하고 불경스런 비유를 들면서 조잡한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신학적으로 논쟁할 가치조차 없음을 발견한다. 윗트니스 리는 너무 많은 비유와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대꾸하고 논쟁을 한 최삼경 목사의 노고를 치하한다.
삼위일체는 경외심을 가지고 신중히 논해야 한다
교리사를 보면 교부들이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거나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때 어휘 선택을 하는 데도 얼마나 신중을 기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니케아 공의회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 본질(homoousios)이신 한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동 본질이란 말이 사벨리우스가 쓴 말이므로 사용하기를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삼위가 한 하나님이심을 그런 대로 가장 적절하게 이해하게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사용하였다.
목회자가 성경에 충실하다가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과 교리사적(敎理史的)인 지식을 동원하기보다는 자연의 비유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어거스틴을 포함한 많은 교부들도 그랬으나 그러나 그것은 양태론에 문을 여는 것이므로 바람직한 시도가 못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체를 비유로 설명하는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말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답하시는 말씀,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ehyeh asher ehyeh, 출 3:14)하는 말씀을 발견할 뿐이다. 그밖에, 예컨대, 이사야 9장 6절에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는 이름이나 유추들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역할과 능력을 묘사하는 말일 뿐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시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은 신학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철학적인 막연한 신관이나 다신론적인 혹은 범신론적인 신관이나 다른 종교적인 신관으로 성경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물질 세계를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당신이 지으신 자연계의 유추를 통한 설명으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한 설명은 약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 같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의문을 일으키게 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만들 뿐이다. 즉,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이해로 오도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삼각형을 그려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안 될 말이다. 그런 설명은 불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본체의 오묘한 것을 도식화함으로써 쉽게 이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비신학적인 발상이다.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 하는 의문을 그대로 받아, 그 원리를 수적으로 혹은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설명이 옳게 되지를 않는다. 그것은 예정론을 이해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치시키면서 해결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예정을 바로 이해하고 찬양할 수 있다.
우리는 속사도 시대 이후 로고스를 우주구조론(cosmogony)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오던 것을 이레니우스(∼202년)가 구속론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확립에 전기(轉機)를 마련한 사실을 기억한다. 이레니우스는 당시까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로써 설명하려는 것을 지양하여 그리스도로써 로고스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로고스, 즉 그리스도의 이해가 철학이 말하는 로고스 개념보다 선행하며 더 명확함을 인식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고백하며 예배하는 교리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은 무슨 사색으로나 비유를 사용하는 설명을 통하여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을 따라 논구하고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자들만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해하기를 시도해야 하는 현학적인 논리의 희롱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평신도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면서 난해한 교리라든지 신비 중의 신비라고 말함으로써 미리 겁을 주는 것은 그들이 교리를 배우는 일에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는 초절적(超絶的)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지식이지만,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으므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자이면 누구나 다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는 교리일 뿐 아니라, 또한 실제로 믿고 있는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면서부터 있게 된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교리 작성을 위하여 연구하고 논의하기 이전에 이미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이고, 교회가 세례식을 행할 때 예수의 명령을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베풀었으며, 수세자로 하여금 사도신경을 따라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였다. 그리고 예배에서 기도와 찬송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세로 고백해야 하는 교리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 교리를 두고 논의할 때, 논의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냐 하는 것이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아버지와 같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비록 만족할 만하게 설명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든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따라, 혹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하는 도마의 고백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는 실제로 삼위일체 교리를 믿고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를 먼저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시인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모든 이단은 단일신론적 신학을 지지한다.
초대 교회의 유대교적 에비온주의적 양자론(養子論)과 영지주의적 가현설(假現說)은 반 기독교적인 이단의 전형(典型)이다. 영지주의는 희랍적 철학 사상과 동방의 신비주의적 종교 사상이 혼합된 사상이었다. 양태론은 인간의 육체를 옷 입듯 입으셔서 사람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가현설과 통한다. 합리주의적인 그리스도 이해나 신비주의적 그리스도 이해가 서로 통한다.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 안에 사람으로 나셨음을 믿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사람으로 나신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종교적인 체험을 위하여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이로 생각할 뿐이다.
신비주의자들은 금식과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접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각자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에 양태론적 삼위일체 이해가 보수적인 교회에까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양태론적 이해는 신비주의 운동이 준동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한다.
“그리스도 중심 신학”을 떠나서 “신 중심 신학”을 거점으로 한다는 종교다원주의자에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완전히 폐기될 수밖에 없는 교리이다.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의 핵심을 떠나 단일신론적인 신관을 견지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이제 기독교적 신학 세계를 벗어나 “우주론적 기독론”이란 말에 걸맞게 종교다원주의의 무중력 세계로 접어들어 표류한다. “우주론적 기독론”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상적 근거를 두려는 비역사적인 기독론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능력임은 일찍부터 알았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격이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을 확정하고 난 이후에, 즉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인식하게 되었다.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교리만 해도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말씀을 깨닫고 보면, 그것이 진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parakletos, 위로자)라고 하심으로써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말씀하신다(요 14:26, 15:27, 16:7, 17:13~14, 참조: 롬 8:26~27).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즉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에서 출발한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신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17). 즉,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요 14:6).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롬 8:9, 요 3:5).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 전에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이 기독교 서방 교회의 전통적인 고백이다. 동방 교회는 성령은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고백하는 점에서 다소 다르다. 그러나 삼위 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다.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말씀한다(요일 4:9, 16).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좋게 여기시면서 사랑하기 시작하셔서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시며,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과 더불어 사랑으로 교제(communion)하고 계심을 말씀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함축한다(요 15:9, 17:24).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신다. 사람을 지으시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며 서로 사랑하게 하신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희생하셨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음을 믿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살아 구원을 이루게 하신다.
맺는 말
유신론적(有神論的) 논증은 철학과 종교에서 성경의 계시의 말씀을 접어 둔 채 신의 존재를 논의하는 논증이다. 즉, 자연 만물을 보아서 신(神)이 존재함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논증이다. 유신론적 논증을 통하여서는 신의 존재를 막연히 추측할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이러한 지극히 제한된 일반적인 유신론적 논증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일에 더 연장하여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아주 불합리한 논리의 비약을 감행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 안에서,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교리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부수적(附隨的)인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논의할 경우와 같이 술어(述語)나 보어(補語)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변함이 없는 주어(主語)로서 의미를 가진다. 즉, 우리의 신앙고백과 예배를 받으시는 주격이신 하나님 자신에 관한 교리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논증할 수 있거나 논증을 감행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며, 필요 없이 많은 말로 설명해야 하는 교리가 아니고 신앙고백과 예배로 응답해야 하는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거나 설명함에 있어서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나 우리의 언어의 취약성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쉽게 양태론이나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빠지게 마련이다. 한국 교회는 양태론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점을 충분히 인식하는 가운데 당치않은 논리의 비약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는, 아니 모든 교리는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재삼 인식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사람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관한 교리이기 때문이다(졸고: “한국교회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과 성령론> 차영배외, 태백사, 1999. 235~253 참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며, 우주와 만물을 운행하시고, 당신이 지으신 땅 위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땅 위의 모든 것을 돌보도록 하는 직임을 맡기시고 권위를 부여해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범하여 타락하였다. 타락하여 죄와 죽음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셔서 우리는 그 진리를 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신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마 11:17).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다(요 14:6).
그래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재확인한 신조는 이러하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며 천지와 가시적이며 불가시적인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우리가 믿사오며,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요, 나셨으며 창조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동질이시며, 그를 통하여 만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이 되시고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중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으니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예배와 찬송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고백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을 믿습니다.”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한 마디로 말씀합니다(요일 4:9, 16).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만물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좋게 여기시면서 비로소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은 아님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님과 더불어 사랑 안에 계심을, 교제(communion)하고 계심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영원전부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함축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므로 영원전부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아들은 자신을 희생으로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서 우리 죄인을 회개케 하시며, 정하게 하시고 의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독생자가 누리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때까지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심으로 기도하시고 성화시키시며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양이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란 보다 더 큰 믿음을 준비하라! (시 10:1-18) (0) | 2022.01.29 |
---|---|
백(1)53cm의 대통령 (0) | 2022.01.28 |
개혁신학과 개혁파 목사에 대한 논고 (0) | 2022.01.28 |
중생인가 결단인가. (0) | 2022.01.28 |
성경적 역사적 부흥의 이해와 미래 (0) | 2022.01.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