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과 이단
- ‘하나 되는 기쁨’: 성경에 대한 왜곡된 태도를 보며 -
이광호(실로암교회)
1. 측은함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교회의 이단은 일반적인 인격의 좋고 나쁨에 달려 있지 않다. 나아가 사회적 신망이나 학문적인 연구업적의 분량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아 아무리 정의롭고 착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경해석에 있어서 근본적인 오류를 주장하며 선전한다면 이단이라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양승훈 교수가 쓴 ‘하나 되는 기쁨’(서울: 예영 커뮤니케이션, 2005)을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오래전 그 책의 서평을 부탁받고 읽으면서 분노가 일다가 점차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 그 책을 접했을 당시 실명을 밝히지 않은 가명(최희열)의 저자와 그 책에 대한 실명(정동섭 교수)의 추천사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출판사가 한국교회에서 신뢰를 받는 ‘예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맨 처음 나는 그 책의 서평을 쓰기를 주저했었다. 기독교 서적을 빙자한 섹스교본과 같은 참람한 내용과 용어들로 가득 찬 책을 자칫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해 홍보하는 역기능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주장과 내용에 현혹되는 교인들이 염려되는 상황에서 서평을 쓰고 소견을 피력한 바 있다.1)
나중 해당 출판사에서 그 책의 출판을 중지하고 서점에 판매되고 있는 책들을 전량 회수하겠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뼈아픈 과정을 통해 다시는 그런 외설이 가득한 주장이 교회 안에 펼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런 와중에 그 책의 저자와 추천인을 중심으로 한 지지자들이 지난 1월 21일 ‘한국가정사역협회’(회장 이희범 목사) 주최로 서울 ‘지구촌가정훈련원’에서 <'하나 되는 기쁨'에 대한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날 ‘한국가정사역협회’는 그 책의 저자를 공개하며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복음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으므로 하등의 오류나 잘못이 없다는 주장과 더불어 입장을 정리해 발표했다.
또한 동 협회에는 40여개의 소속 단체들 가운데 거의 모든 회원단체들이 그 내용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저자와 추천인뿐 아니라 기독교 사역단체인 한국가정사역협에서 그 책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그 책과 저자, 그리고 추천인 보다 오히려 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2) 이는 부분적이나마 기독교 내부의 공적인 지지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가정사역협회가 주관한 기자회견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책의 저자는, 그에 힘입어 그 책을 비판하는 자들은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3) 또한 추천인 정동섭 교수는 그 책을 다시 출간할 것을 고려중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성경해석을 포함하여 그 책에 서술된 모든 내용이 너무 탁월하기 때문에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의사가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책은 단순히 불건전한 비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서적임이 명백하다. 그런 책을 한국 기독교 내부의 많은 목사와 교수, 나아가 소위 가정사역전문가들이라는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권장할 만한 훌륭한 책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4) 그 책의 편에 선 자들은 지난 수년간 그 책이 아무런 문제없이 판매되고 읽혀져 왔는데 왜 이제까지 가만있었느냐며 어처구니없는 항변을 하고 있다.
하기야 소위 가정사역이라는 명분 아래 보수적인 교파의 교회들을 비롯한 전국의 수많은 교인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팔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5) 하지만 성경의 교훈을 본질적으로 왜곡한 채 교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는 그 음란서적을 보고 분노하는 음성이 없었다는 점은 한국교회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 교회와 성경
(1) 하나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책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위해 특별히 계시하신 거룩한 책이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모독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말씀을 참람한 인간의 언어를 동원해 모독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고하며 행동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상은 하나님을 욕되게 했던 사악한 유대인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성경해석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즉 인간의 욕망을 염두에 둔 목적추구를 위한 성경해석은 곤란하다. 그러나 ‘하나 되는 기쁨’의 저자는 신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남녀와 부부 사랑에 관계되는 모든 내용을 부부간의 성관계와 연관 지어 해석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남녀의 성적인 사랑과 전혀 무관한 성경 본문조차도 성관계에 연관 짓고 있다. 참된 성도라면 이를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성관계에 연관 짓는 것은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의 순결한 삶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역사적 교회의 고백 가운데 공적인 의미와 더불어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으면 이단이 아니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오늘날 수많은 이단 종파와 그에 속한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주장을 한다. 문제는 그들이 성경에 계시된 내용을,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감과 더불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고백하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어떤 이단도 스스로 이단이라 주장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이다. 본인이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이단이 아닌 것이 아니다. 설령 주변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 아니라 옹호한다고 할지라도 이단은 어디까지나 이단일 따름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 아가서를 비롯한 성경전체에 대한 모독적 해석
‘하나 되는 기쁨’의 저자는 성행위에 관한 담론과 부부관계에 연관된 일상적이지 않은 묘사와 서술은 신학적 문제와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저자와 추천인, 그리고 한국가정사역협회에서는 그 책의 모든 내용이 신학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아가서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부부의 성관계 및 쾌락추구에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가정사역협의회는 그 책에 묘사된 아가서를 비롯한 관련 성경구절들에 대한 해석이 복음주의적 해석을 견지하고 있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들이 그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을 정당한 성경해석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협하는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책 서문의 맨 앞줄에서 거룩함, 순결, 경건, 신앙, 예배, 제자훈련 등을 성교, 전희, 체위, 오르가즘, 로맨스, 성적 만족과 조화되는 용어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첫날밤의 부부관계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비유하는 것을 불경하게 보는 입장을 영지주의 이단들의 사상으로 단정 짓고 있다(‘하나 되는 기쁨’, p.10,11). 이 말은 그런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을 도리어 이단사상을 가진 자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6)
‘하나 되는 기쁨’의 저자는 성경 전체에 기록된 남녀의 사랑에 연관된 모든 본문들을 성관계를 통한 쾌락추구와 연관 지어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직접적인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책 가운데서 아가서를 남녀 간의 성적인 진한 사랑과 육체적인 관계를 강조하지 않는 주석은 심각한 성경해석의 오류라 지적했다(p.11). 그러면서 아가서에 나타나는 ‘샘과 우물’, ‘동산’은 ‘여성의 성기’와 ‘성행위 장소’를 의미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과연 그런 것인가? 그들은 국내외의 복음주의 사상을 가진 상당수 학자들이 아가서를 성적인 내용에 관련지어 해석한다고 하며 그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 계열의 어느 정통 신학자들이 그런 식의 성경해석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건전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라면 결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빗대어 그런 식의 참람한 주장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아가서를 통해 부부간의 성생활과 쾌락추구에 대한 지침을 주고자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떻게 아가서 본분이 성적인 쾌락을 위한 테크닉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그 책의 외설적인 표현보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성경에 대한 모독과 본문을 왜곡하는 이단적인 사상이다:
‘성경(聖經)은 성경(性經)이라는 말이 있다’, ‘성교가 창조주의 창조 중심에 있음은 남녀의 성기의 구조로부터도 볼 수 있다’, ‘거룩한 성교의 축복, 하나 됨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책임이자 사명이다’, ‘창조주의 명령과 축복은 바로 남녀의 성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성의 질은 성(性)과 성(聖)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남녀의 결합을 통해 성기(性器)가 성기(聖器)가 되고 성교(性交)는 성교(聖交)가 된다’, ‘육체적 쾌락이 창조주와 만나는 순간이요 가장 강렬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거룩함과 공존하는 순간이다’. 이는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충격적인 내용들 가운데 일부분이다.
저자의 이러한 말들은 단순한 사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단자들의 종교적인 표현과 연관되어 있다. 성적인 쾌락을 예찬하며 ‘성교영성’(性交靈性)이라는 희한한 개념(p.197)을 만들어낸 자와 그것을 지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자들이 어떻게 기독교 신학자이며 목회자일 수 있다는 말인가?
나아가 책의 저자는 모독적 성경해석을 배경으로 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성적인 쾌락추구를 위해 황당한 적용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오럴섹스를 즐기라’7) ‘팬티를 벗은 채 자동차를 타고 카섹스를 즐기라’ ‘야외섹스를 즐기라’ ‘사람들이 붐비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은밀하게 시도하는 성 유희를 즐기라’ ‘이상야릇한 체위를 즐기라’ ‘촛불을 켜고 나체로 블루스를 추며 즐기라’. 저자는 이러한 역겨운 주장들을 성경의 교훈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인 아가서는 결코 그런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성관계를 통한 쾌락을 위해 그런 교훈을 주고 있는 예가 없다. 만일 성적인 쾌락이 천국을 가불하여 미리 맛보는 것이라면 불신자들도 동일한 천국을 맛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더러운 간음을 통해서 성적인 쾌감을 맛보며 쾌락을 누리게 된다면 그것은 천국을 맛보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미혼자나 독신으로 살면서 성적인 정절을 지키는 형제자매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제대로 맛볼 수 없는 것인가?
성경은 더러운 것들은 입에도 담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고 교훈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여 참람한 해석을 하지 말아야 하며 입에 담을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가서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 자신과 사랑하는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시고자 하셨다. 즉 부부사이와 같이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고 계신다. 저자가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가서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을 부부간의 성행위를 통한 쾌락과 기교를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아가서의 교훈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관계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부부사이와 같이 긴밀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지 ‘부부간의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독특한 테크닉으로 성관계를 가지라’고 설명한 것이 아니다.
3.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 되는 기쁨’이 복음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주장은 참된 복음주의자들을 위해 철회되어야 한다. 부부간의 성생활에 대한 쾌락추구 자체가 성도들의 가정생활의 근본이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도 성생활을 즐기며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데 그들의 성생활과 기독교인들의 성생활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책의 저자와 추천인을 비롯한 그 책의 지지자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고자 하는 성경의 본질을 망각한 채 성경을 왜곡하여 해석함으로써 성관계에 대한 지극히 편향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생활이 왕성한 부부의 성적인 쾌락을 논의의 중심에 두고 있다. 참된 교회와 성생활을 하지 않는 성도들에 대한 고려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고 있는 열악한 형편에 처한 선교지의 어린 성도들에게도 이와 같은 성경해석으로 동일한 성적인 테크닉을 권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그 내용이 복음적이고 정당한 것이라면 설교에도 거리낌 없이 인용되고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앞에서 공개적이지 않고 감추어져야 할 내용이라면 결코 공공성을 띤 건전한 내용이라 할 수 없다.
교회에 속한 어린이들과 혼인하지 않은 자들을, 저들이 말하는 성생활과 연관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미완성 인간들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혼인을 하지 않은 미혼자들과 혼자 살고 있는 독신자들은 천국의 맛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부부 가운데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성욕이 감퇴한 노인들은 더 이상 그 천국을 맛보는데서 점차 멀어진다는 말인가?
기독교 가정사역의 근본은, 지상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을 위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가정이 되도록 삶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 책에 관련된 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사사로운 감정은 전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런 식으로 참람한 해석을 하고 주장하며 퍼뜨린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것은 건전한 성도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무서운 누룩이자 명백한 이단사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아가 저자와 추천인보다 더 위험한 부류는 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가정사역자나 이단전문가, 혹은 기독교 윤리실천을 위해 애쓰며 교회개혁을 위한 활동을 하는 자들은 대개 기독교 지도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아무런 분별없이 저들에게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동료를 위한 참된 사랑의 표현이 아니다.
가정 사역에 참여하는 단체들은 이미 공개적으로 그 책과 저자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다.8) 그런데 ‘이단대책’을 위한 기독교 사역을 한다는 수많은 전문가들과 단체들은 이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실천에 연관된 단체들 역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한국에서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여러 단체와 언론들도 이 사안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침묵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회피로서 여간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9)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것 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이단 대책기구가 이단사상의 심각한 발흥을 보면서도 침묵한다면 근본부터 이단을 분별하는데 진정한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참람한 주장에 대해 침묵하면서 기독교 윤리실천을 외치고 교회개혁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입술로 이단 척결과 기독교 윤리실천을 부르짖고 교회개혁을 외치면서 이런 중대한 사안을 외면한다면 저들의 활동은 형식적인 것일 뿐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한 참된 개혁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참람한 성경해석을 하는 그들의 왜곡된 주장과 홍보를 통해 왜곡된 이단 사상에 오염되어 가는 여러 성도들이 염려된다. 이미 지난 수년간 많은 교인들이 그 책과 강의를 통해 교육을 받았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기독교계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교수, 목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말과 처신을 듣고 보면서 아무런 분별력 없이 저들의 주장에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최고의 지성인 대열에 선 저자와 추천인,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자들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단사상으로써 신앙이 어린 교인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속한 교회들에서는 절차를 밟아 교회를 위해 그들을 정당하게 권징해야 한다. 이단 서적을 신앙이 미숙한 교인들에게 배포하고 그 사상을 유포하는 자들을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 해당 교회들은 그런 자들을 권징하는 것이 곧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란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책의 저자는 내용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여성들이 입어서 더러워진 팬티를 위문품 주머니에 넣어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낸 예를 소개하고 있다(p.91). 더러운 여성의 팬티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 맡으며 성적인 자극을 받으라는 말인가? 정상적인 성도라면 이 책을 읽으며 성적인 흥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참람한 주장으로 인해 신앙양심으로부터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야 한다.
어떻게 하다가 한국교회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무지로 인해 그런 참람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면 이제 그들은 저들의 주장과 행위가 얼마나 많은 교회들을 어지럽히며 성도들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절실히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에 연관된 당사자들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는 단순히 사과하고 반성할 문제가 아니라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해야할 문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저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하나 되는 기쁨’: 성경에 대한 왜곡된 태도를 보며 -
이광호(실로암교회)
1. 측은함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교회의 이단은 일반적인 인격의 좋고 나쁨에 달려 있지 않다. 나아가 사회적 신망이나 학문적인 연구업적의 분량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아 아무리 정의롭고 착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경해석에 있어서 근본적인 오류를 주장하며 선전한다면 이단이라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양승훈 교수가 쓴 ‘하나 되는 기쁨’(서울: 예영 커뮤니케이션, 2005)을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오래전 그 책의 서평을 부탁받고 읽으면서 분노가 일다가 점차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 그 책을 접했을 당시 실명을 밝히지 않은 가명(최희열)의 저자와 그 책에 대한 실명(정동섭 교수)의 추천사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출판사가 한국교회에서 신뢰를 받는 ‘예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맨 처음 나는 그 책의 서평을 쓰기를 주저했었다. 기독교 서적을 빙자한 섹스교본과 같은 참람한 내용과 용어들로 가득 찬 책을 자칫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해 홍보하는 역기능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주장과 내용에 현혹되는 교인들이 염려되는 상황에서 서평을 쓰고 소견을 피력한 바 있다.1)
나중 해당 출판사에서 그 책의 출판을 중지하고 서점에 판매되고 있는 책들을 전량 회수하겠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뼈아픈 과정을 통해 다시는 그런 외설이 가득한 주장이 교회 안에 펼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런 와중에 그 책의 저자와 추천인을 중심으로 한 지지자들이 지난 1월 21일 ‘한국가정사역협회’(회장 이희범 목사) 주최로 서울 ‘지구촌가정훈련원’에서 <'하나 되는 기쁨'에 대한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날 ‘한국가정사역협회’는 그 책의 저자를 공개하며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복음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으므로 하등의 오류나 잘못이 없다는 주장과 더불어 입장을 정리해 발표했다.
또한 동 협회에는 40여개의 소속 단체들 가운데 거의 모든 회원단체들이 그 내용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저자와 추천인뿐 아니라 기독교 사역단체인 한국가정사역협에서 그 책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그 책과 저자, 그리고 추천인 보다 오히려 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2) 이는 부분적이나마 기독교 내부의 공적인 지지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가정사역협회가 주관한 기자회견은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책의 저자는, 그에 힘입어 그 책을 비판하는 자들은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3) 또한 추천인 정동섭 교수는 그 책을 다시 출간할 것을 고려중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성경해석을 포함하여 그 책에 서술된 모든 내용이 너무 탁월하기 때문에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의사가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책은 단순히 불건전한 비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서적임이 명백하다. 그런 책을 한국 기독교 내부의 많은 목사와 교수, 나아가 소위 가정사역전문가들이라는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권장할 만한 훌륭한 책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4) 그 책의 편에 선 자들은 지난 수년간 그 책이 아무런 문제없이 판매되고 읽혀져 왔는데 왜 이제까지 가만있었느냐며 어처구니없는 항변을 하고 있다.
하기야 소위 가정사역이라는 명분 아래 보수적인 교파의 교회들을 비롯한 전국의 수많은 교인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팔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5) 하지만 성경의 교훈을 본질적으로 왜곡한 채 교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는 그 음란서적을 보고 분노하는 음성이 없었다는 점은 한국교회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 교회와 성경
(1) 하나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책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위해 특별히 계시하신 거룩한 책이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모독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말씀을 참람한 인간의 언어를 동원해 모독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고하며 행동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상은 하나님을 욕되게 했던 사악한 유대인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성경해석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즉 인간의 욕망을 염두에 둔 목적추구를 위한 성경해석은 곤란하다. 그러나 ‘하나 되는 기쁨’의 저자는 신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남녀와 부부 사랑에 관계되는 모든 내용을 부부간의 성관계와 연관 지어 해석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남녀의 성적인 사랑과 전혀 무관한 성경 본문조차도 성관계에 연관 짓고 있다. 참된 성도라면 이를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성관계에 연관 짓는 것은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의 순결한 삶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역사적 교회의 고백 가운데 공적인 의미와 더불어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으면 이단이 아니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오늘날 수많은 이단 종파와 그에 속한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주장을 한다. 문제는 그들이 성경에 계시된 내용을,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감과 더불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고백하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어떤 이단도 스스로 이단이라 주장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이다. 본인이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이단이 아닌 것이 아니다. 설령 주변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 아니라 옹호한다고 할지라도 이단은 어디까지나 이단일 따름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 아가서를 비롯한 성경전체에 대한 모독적 해석
‘하나 되는 기쁨’의 저자는 성행위에 관한 담론과 부부관계에 연관된 일상적이지 않은 묘사와 서술은 신학적 문제와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저자와 추천인, 그리고 한국가정사역협회에서는 그 책의 모든 내용이 신학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아가서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부부의 성관계 및 쾌락추구에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가정사역협의회는 그 책에 묘사된 아가서를 비롯한 관련 성경구절들에 대한 해석이 복음주의적 해석을 견지하고 있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들이 그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을 정당한 성경해석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협하는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책 서문의 맨 앞줄에서 거룩함, 순결, 경건, 신앙, 예배, 제자훈련 등을 성교, 전희, 체위, 오르가즘, 로맨스, 성적 만족과 조화되는 용어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첫날밤의 부부관계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비유하는 것을 불경하게 보는 입장을 영지주의 이단들의 사상으로 단정 짓고 있다(‘하나 되는 기쁨’, p.10,11). 이 말은 그런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을 도리어 이단사상을 가진 자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6)
‘하나 되는 기쁨’의 저자는 성경 전체에 기록된 남녀의 사랑에 연관된 모든 본문들을 성관계를 통한 쾌락추구와 연관 지어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직접적인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책 가운데서 아가서를 남녀 간의 성적인 진한 사랑과 육체적인 관계를 강조하지 않는 주석은 심각한 성경해석의 오류라 지적했다(p.11). 그러면서 아가서에 나타나는 ‘샘과 우물’, ‘동산’은 ‘여성의 성기’와 ‘성행위 장소’를 의미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과연 그런 것인가? 그들은 국내외의 복음주의 사상을 가진 상당수 학자들이 아가서를 성적인 내용에 관련지어 해석한다고 하며 그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 계열의 어느 정통 신학자들이 그런 식의 성경해석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건전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라면 결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빗대어 그런 식의 참람한 주장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아가서를 통해 부부간의 성생활과 쾌락추구에 대한 지침을 주고자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떻게 아가서 본분이 성적인 쾌락을 위한 테크닉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그 책의 외설적인 표현보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성경에 대한 모독과 본문을 왜곡하는 이단적인 사상이다:
‘성경(聖經)은 성경(性經)이라는 말이 있다’, ‘성교가 창조주의 창조 중심에 있음은 남녀의 성기의 구조로부터도 볼 수 있다’, ‘거룩한 성교의 축복, 하나 됨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책임이자 사명이다’, ‘창조주의 명령과 축복은 바로 남녀의 성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성의 질은 성(性)과 성(聖)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남녀의 결합을 통해 성기(性器)가 성기(聖器)가 되고 성교(性交)는 성교(聖交)가 된다’, ‘육체적 쾌락이 창조주와 만나는 순간이요 가장 강렬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거룩함과 공존하는 순간이다’. 이는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충격적인 내용들 가운데 일부분이다.
저자의 이러한 말들은 단순한 사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단자들의 종교적인 표현과 연관되어 있다. 성적인 쾌락을 예찬하며 ‘성교영성’(性交靈性)이라는 희한한 개념(p.197)을 만들어낸 자와 그것을 지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자들이 어떻게 기독교 신학자이며 목회자일 수 있다는 말인가?
나아가 책의 저자는 모독적 성경해석을 배경으로 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성적인 쾌락추구를 위해 황당한 적용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오럴섹스를 즐기라’7) ‘팬티를 벗은 채 자동차를 타고 카섹스를 즐기라’ ‘야외섹스를 즐기라’ ‘사람들이 붐비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은밀하게 시도하는 성 유희를 즐기라’ ‘이상야릇한 체위를 즐기라’ ‘촛불을 켜고 나체로 블루스를 추며 즐기라’. 저자는 이러한 역겨운 주장들을 성경의 교훈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인 아가서는 결코 그런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성관계를 통한 쾌락을 위해 그런 교훈을 주고 있는 예가 없다. 만일 성적인 쾌락이 천국을 가불하여 미리 맛보는 것이라면 불신자들도 동일한 천국을 맛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더러운 간음을 통해서 성적인 쾌감을 맛보며 쾌락을 누리게 된다면 그것은 천국을 맛보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미혼자나 독신으로 살면서 성적인 정절을 지키는 형제자매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제대로 맛볼 수 없는 것인가?
성경은 더러운 것들은 입에도 담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고 교훈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여 참람한 해석을 하지 말아야 하며 입에 담을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가서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 자신과 사랑하는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시고자 하셨다. 즉 부부사이와 같이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고 계신다. 저자가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가서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을 부부간의 성행위를 통한 쾌락과 기교를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아가서의 교훈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관계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부부사이와 같이 긴밀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지 ‘부부간의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독특한 테크닉으로 성관계를 가지라’고 설명한 것이 아니다.
3.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 되는 기쁨’이 복음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주장은 참된 복음주의자들을 위해 철회되어야 한다. 부부간의 성생활에 대한 쾌락추구 자체가 성도들의 가정생활의 근본이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도 성생활을 즐기며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데 그들의 성생활과 기독교인들의 성생활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책의 저자와 추천인을 비롯한 그 책의 지지자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고자 하는 성경의 본질을 망각한 채 성경을 왜곡하여 해석함으로써 성관계에 대한 지극히 편향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생활이 왕성한 부부의 성적인 쾌락을 논의의 중심에 두고 있다. 참된 교회와 성생활을 하지 않는 성도들에 대한 고려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고 있는 열악한 형편에 처한 선교지의 어린 성도들에게도 이와 같은 성경해석으로 동일한 성적인 테크닉을 권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그 내용이 복음적이고 정당한 것이라면 설교에도 거리낌 없이 인용되고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앞에서 공개적이지 않고 감추어져야 할 내용이라면 결코 공공성을 띤 건전한 내용이라 할 수 없다.
교회에 속한 어린이들과 혼인하지 않은 자들을, 저들이 말하는 성생활과 연관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미완성 인간들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혼인을 하지 않은 미혼자들과 혼자 살고 있는 독신자들은 천국의 맛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부부 가운데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성욕이 감퇴한 노인들은 더 이상 그 천국을 맛보는데서 점차 멀어진다는 말인가?
기독교 가정사역의 근본은, 지상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을 위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가정이 되도록 삶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 책에 관련된 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사사로운 감정은 전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런 식으로 참람한 해석을 하고 주장하며 퍼뜨린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것은 건전한 성도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무서운 누룩이자 명백한 이단사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아가 저자와 추천인보다 더 위험한 부류는 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가정사역자나 이단전문가, 혹은 기독교 윤리실천을 위해 애쓰며 교회개혁을 위한 활동을 하는 자들은 대개 기독교 지도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아무런 분별없이 저들에게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동료를 위한 참된 사랑의 표현이 아니다.
가정 사역에 참여하는 단체들은 이미 공개적으로 그 책과 저자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다.8) 그런데 ‘이단대책’을 위한 기독교 사역을 한다는 수많은 전문가들과 단체들은 이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실천에 연관된 단체들 역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한국에서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여러 단체와 언론들도 이 사안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침묵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회피로서 여간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9)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것 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이단 대책기구가 이단사상의 심각한 발흥을 보면서도 침묵한다면 근본부터 이단을 분별하는데 진정한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참람한 주장에 대해 침묵하면서 기독교 윤리실천을 외치고 교회개혁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입술로 이단 척결과 기독교 윤리실천을 부르짖고 교회개혁을 외치면서 이런 중대한 사안을 외면한다면 저들의 활동은 형식적인 것일 뿐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한 참된 개혁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참람한 성경해석을 하는 그들의 왜곡된 주장과 홍보를 통해 왜곡된 이단 사상에 오염되어 가는 여러 성도들이 염려된다. 이미 지난 수년간 많은 교인들이 그 책과 강의를 통해 교육을 받았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기독교계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교수, 목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말과 처신을 듣고 보면서 아무런 분별력 없이 저들의 주장에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최고의 지성인 대열에 선 저자와 추천인,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자들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단사상으로써 신앙이 어린 교인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속한 교회들에서는 절차를 밟아 교회를 위해 그들을 정당하게 권징해야 한다. 이단 서적을 신앙이 미숙한 교인들에게 배포하고 그 사상을 유포하는 자들을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 해당 교회들은 그런 자들을 권징하는 것이 곧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란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책의 저자는 내용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여성들이 입어서 더러워진 팬티를 위문품 주머니에 넣어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낸 예를 소개하고 있다(p.91). 더러운 여성의 팬티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 맡으며 성적인 자극을 받으라는 말인가? 정상적인 성도라면 이 책을 읽으며 성적인 흥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참람한 주장으로 인해 신앙양심으로부터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야 한다.
어떻게 하다가 한국교회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무지로 인해 그런 참람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면 이제 그들은 저들의 주장과 행위가 얼마나 많은 교회들을 어지럽히며 성도들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절실히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에 연관된 당사자들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는 단순히 사과하고 반성할 문제가 아니라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해야할 문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저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보에 내포된 고백적 의미 (0) | 2022.01.28 |
---|---|
술과 담배, 교회와 신앙 (0) | 2022.01.28 |
빛과 소금을 상실한 한국교회 (0) | 2022.01.28 |
부자와 천국문, 낙타와 바늘귀 (0) | 2022.01.28 |
참과 거짓(이단, 거짓 선지자)을 구별하는 법 (0) | 2022.01.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