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을 품으라! (빌 2:5-11)
소크라테스의 부인 이름은 크산티페입니다. 이 여인은 철학자인 남편에 비해서 상당히 고상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여인은 수다스러웠다고 합니다. 수다를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그 수다를 어떻게 다 들어주느냐고 물으니까 대답하기를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들을 만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또 이 여인은 마음도 고약했다고 합니다. 수다를 떨 때 남편이 대꾸를 하지 않으면 나가서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머리에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참느냐고 물으면 말하기를 "천둥친 다음에는 비가 오는 법"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부인을 악처라고 불렀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악처 덕분에 소크라테스가 철학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옛날이나 되니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00년경에 살았던 그 옛날의 사람이지만 오늘 현대인들이 그를 통해서 인간의 멋을 느끼게 되고 깊이를 느끼면서 그를 좋아하고 있지 않습니까?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사람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서로 반비례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인내심도 잃었고, 희생정신도 잃었고, 그렇게 풍성하던 감정들도 잃어버렸고, 예의도 잃고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주 삭막하고 메마른 마음들만 남았습니다.
1.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참 인간다운 인간상은 어떤 것이냐"하는 질문입니다.
"참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냐"하고 질문할 수 있다면 그 질문은 참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그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마음이냐 하면 "예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종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종 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그 예수를 높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다움"의 요소는 종의 마음을 갖는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세라고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이 마음을 품어 보려고 애를 썼던 분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비를 두 아들 대신 양자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그 마음이 아마 이 마음일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도 이 마음을 품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고문과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참았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풀리캅이라는 사람도 로마 황제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 주겠다"는 말로 심문받을 때 말하기를 "내 80평생 동안 주님이 나를 한번도 서운하게 하신 일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께 서운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나는 깨끗하게 죽음을 택하겠다"고 해서 마침내 화형을 당해서 죽었습니다. 얼마나 당당하고 멋이 있고 수양된 모습입니까?
오늘 이 시대는 자꾸만 이 같은 인간의 멋이나 당당함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하고 그래서 세상이 삭막해지고 메마르고 포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를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오늘날의 교육이 자꾸만 사람을 기능인이나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그리고 유능한 사람만을 길러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뽑을 때는 소위 지력이나 판단력이나 재치나 기지를 말하는 IQ가 얼마냐를 많이 따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교육 지향점을 보면 기능인을 만들어 내고 유능인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말할 때 보면 "너희는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기능인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기능인이 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이 같은 교육은 참 위험한 교육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육받은 학생들이 커서 잘 풀리게 되면 참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그 번뜩이는 지혜와 재치,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이 사회에 나아가 아주 필요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잘 풀릴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잘못 풀리게 되면 큰일입니다. 번뜩이는 지혜와 재주와 기술은 악용되기가 쉽고 불성실한 인간으로 전락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사기꾼을 보십시오. 사기꾼들은 한결같이 IQ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재주가 있고 번뜩이는 기지와 지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잘못 풀려서 그렇습니다. 인간과 인성과 품성은 무시되고 기능적 인간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육부가 새로 발표한 교육 개혁안을 보면, 이제는 지식위주의 교육에서 인간 위주의 교육으로 목적을 전환한다고 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 동안 우리 교육은 너무나 지식 위주의 교육에 치중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가는 곳마다 IQ 높은 사람만을 우대했습니다. 이를테면 기능적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었습니다.
2. 그런데 사람이 사람 됨에 있어서 IQ가 전부는 아닙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플러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EQ라고 하는 것입니다. IQ는 판단력, 재치, 기지를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머리 회전 능력이 빠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성이 부족한 사람이 머리 회전만 빠르게 되면 불성실해지기 때문에 여기에 소위 EQ라는 것이 하나 더 풀러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Q는 감정, 정서, 풍성한 인성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가장 인간답고 사람다워지려고 하면 감서이 있어야 하고, 인성이 있어야 하고,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머리 회전만 빠르고 인간미가 없으면 사기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눈물이 있고, 따뜻함이 있고, 정서가 있고,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인간미가 없는 시대입니다. 정서가 없고 눈물이 없고 따뜻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 사회가 IQ를 너무 중요시한 결과입니다. 감성이나 인간미나 정서 따위는 무관심하고 경시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식을 너무 중시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만 가르쳐 놓아서 그렇습니다.
강릉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강릉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의 학생 하나가 전교에서 항상 1등만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확실하게 서울의 일류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학생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그 학생이 언제나 1등만을 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도 아들이 1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고 학생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이 학생은 한동안 공부하는 기계 노릇을 충실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 입시 한 달 전에 이 학생이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잠적해 버렸습니다. 편지에 '나는 누구입니까? 나도 2등을 할 수 있고 3등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써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도 인간인데 왜 나를 공부하는 도구로만 알고 있습니까?"라는 항변입니다. 그 학생은 참 인간다운 학생입니다. 대다수 학생들은 그런 생각도 못하고 그냥 공부만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유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잘 길들여진 인간으로 감정이 아주 메말라진 채로 공부에만 여념이 없이 커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밖에서 흰눈이 내리면 환호하고 기뻐하고 뛰어보고 싶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도 그렇지만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밖에 비가 오면 여느 때와는 감정과 느낌이 달라지고 뭔가 분위기에 젖어 보고 싶어져야 합니다. 누가 슬픈 일을 당하게 되면 울고 싶고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감각이 없습니다. 눈물이 없습니다. 가슴이 따뜻하지 않습니다. 우애와 우정과 인정은 자꾸만 메말라 가고 있고,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만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사람다워지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인간다움에 가장 가까이 근접하려면 지극히 예의 바르고 도덕에 가까워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장수촌을 찾아가서 그곳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왜 그렇게 오래 장수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장수한 사람 50명의 생활 습관을 면밀히 살펴보았더니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은 예의가 아주 바르더랍니다. 서로 인사를 할 때는 노인들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인사하려고 엎드릴 때 몸에 있는 모든 힘은 복부로 모이는데 그것이 몸의 균형을 잘 이루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장수하는 비결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뻣뻣이 서 있는 때는 배에서 힘이 다 빠지고 힘을 잃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많이 엎드리는 생활을 하십시오.
또 물건을 건넬 때는 한 손이 아니고 두 손으로 건네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건을 상대방에게 줄 때 한 손으로 주면 몸의 균형이 깨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손으로 주면 몸에 균형이 생기고 배에 힘이 모아져서 사람이 건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손을 드어 보십시오. 배에 힘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손을 함께 들으면 배에 힘이 모아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말을 하는데 친구 사이에도 서로 존재말을 하더랍니다. 사람이 반말을 사용하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에서 객기가 발동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나쁜 마음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로가 존재말을 사용하게 되면 스스로가 기쁨을 느끼게 되고 마음이 차분하게 되고 만족한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장수촌의 사람들이 장수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IQ가 높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라, 거기에 EQ라고 하는 인성, 인정, 감정, 따뜻한 마음이 풀러스되어야 비로소 사람답게 된다고 합니다.
3.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사람이 완성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으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신앙인으로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완벽한 요소가 하나 더 풀러스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소위 SQ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영성입니다.
사람이 가장 인간답고 사람다워지려고 하면 IQ와 EQ가 잘 조화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이상적인 사람은 거기에 SQ, 즉 영성까지도 포함되어 잘 조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눈물이 있고, 인정이 있고, 지혜가 있고, 희생이 있고, 종으로 살 수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신앙적으로 잘조화된 이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종으로 살도록 희생 정신을 갖게 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해줍니다. 또 영광보다는 자기 희생을 더 큰 기쁨으로 수용하게 되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사람은 IQ가 주는 지력과 EQ가 주는 인간미와 SQ가 주는 의지적이고 영적인 힘을 함께 지녀야 그것이 소위 가장 이상적인 신앙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어느 미군 소령 한 분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폴 토머스라는 군인인데, 미국 군인으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국의 고아를 입양해서 기르고 있습니다. 저는 남의 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사람을 보면 참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같은 피를 나눈 내 나라 사람이 아닌 남의 나라 사람을 데려다 기르고 있으니 얼마나 위대한 생각입니까? 거기다 이 사람은 온전한 아이도 아닌 장애아를 데려다 기르고 있습니다. 참 이해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 넓고 뜨거운 가슴과 인류애를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중령 진급 예정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은 장래가 총망되는 미국의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를 나온 직업군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장애아인 입양아의 치료를 위해서 그리고 이 아이가 앞으로 살라가려면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미국에 데리고 가서 사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그만 전역 원서를 제출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그 사람의 인간됨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이 사람이 바로 IQ와 EQ와 SQ가 잘 조화된 건전한 정신을 지닌 인간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가장 건전하고 건강하고 인정이 있고 거기에 의지까지 겸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어떤 마음인가하면 "예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하면 "낮아지는 마음이고, 종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조건 없이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말하자면 이 군인이 그런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IQ나 EQ만 가지고는 어렵습니다. 거기에 바로 SQ인 영적이고 의지적인 신앙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간상입니까? 우리들이 잘 조화된 인간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소중하고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칠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토록 미련을 가지고 기대하고 계신 것도 알고 보면 인간이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이렇게 혼탁하고 부정직하고 극단의 이기주의가 난무하는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대로 이렇게 운영되고 지탱되고 유지되어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니님이시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이 마음을 품고 사십시오. 그리고 나는 할 수 없다고만 하지 말고 이 같은 의지적인 삶을 한번 살아 보십시오. 우리들이 조금만 더 용기를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조금만 더 열고 생각하고 살면 이 세상에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인간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문을 열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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