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갱신되어야 하는 신앙! (히 11:1-6)

by 【고동엽】 2022. 1. 27.

갱신되어야 하는 신앙! (히 11:1-6)


10월 31일은 개혁의 날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부터 481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날 정오를 기해서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그 유명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 붙인 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이 한창 면죄부를 발매하고 있을 때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신학 교수였으며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나서서 용기 있게 "아니요"하고 나섬으로써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심정적으로 모두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 마침 루터가 용기 있게 나서 줌으로써 독일 전역은 순식간에 소용돌이치면서 종교 개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기독교는 신파와 구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루터를 따르는 개혁파를 가리켜서 사람들은 신교, 혹은 개신교라고 불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개혁교회라고도 불렀습니다. 대개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릅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프로테스트 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반대하는 사람, 항거하는 사람, 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4년 후인 1521년 4월 17일날 루터는 당시 독일 황제인 찰스 5세의 소환을 받고 보름스 의회에 출두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는 루터가 말하기에 따라서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는 마지막 증언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때 많은 친구들이 그곳에 가면 죽으니까 가지 말라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래도 루터는 운명의 증언대에 서서 당당하게 증언하기 위해서 집을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귀가 비텐베르크 성의 기왓장처럼 많을지라도 나는 간다."
그날 생살 여탈권이 부여된 자리에서 루터는 황제로부터 몇 가지를 강요받습니다. 그것은 교회 문앞에 써 붙인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철회할 것과 그 동안 펴낸 모든 책들을 소각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하면 용서를 받게 될 것이라는 요구였습니다. 그것은 루터 입장에서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 요구들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쓴 글들은 성령이 증거하시는 것들이며 분명한 이성을 가지고 쓴 싱앙 고백적인 성령이 증거하시는 것들이며 분명한 이성을 가지고 쓴 신앙 고백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에 취소하거나 포기할 수가 없다. 이 요구는 내 요구가 아니고 하나님의 요구이며 교회의 요구이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 아멘." 그리고 당당하게 그 자리에서 증언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때 루터가 써 붙인 95개 조항이라는 것을 압축해 보면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우리 신앙인들이 유념해야 할 조건들입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반드시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반성하고 늘 갱신하는 데는 이 회개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95개 조항 가운데서 제 1조에서 말하기를 "회개는 기독교인의 전적인 삶을 내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이 회개의 생활이 없으면 신앙이 자꾸만 굳어져 갑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형식 신앙이 되고, 생명력이 고갈되어 가는 신앙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나중에는 그 신앙이 모양만 있고 껍데기만 남은 채 내용은 아주 빈약한 신앙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방금 갈아 엎은 밭을 보십시오. 그 흙이 얼마나 부드럽습니까? 거기서 흙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그 상태면 거기다 무슨 씨를 뿌리더라도 금방 싹이 나서 잘 자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흙도 그냥 놔두면 얼마 가지 못해서 굳어지고 딱딱해져서 잡초만 무성한 쓸모없는 땅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밭은 되도록 자주 갈아 엎어야 합니다. 그래야 흙이 여전히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고 잡초가 살아 남지를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마음도 자주 갈아 엎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마음 밭을 갈아 엎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내 신앙이 늘 새로움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신앙도 바리새인들 신앙처럼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해 버리기 쉽습니다. 사실 신앙이 이렇게 형식 신앙이 된다고 하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처음에 신앙 생활할 때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그때는 기쁨이 있었고, 감사가 있었고, 눈물이 있었습니다. 또 그때는 감격도 있었고, 마음이 늘 풍성하고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10년이 가고, 20년이 지나는 동안 얼마나 굳어졌습니까?
지금 20년 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지금 그 마음에 그 감격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구원받은 삶에 대한 감사함과 감격과 머리만 숙이면 흘러내리던 그때 흘렸던 그 뜨겁던 눈물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까? 지금 그 기쁨과 감격과 눈물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매일같이 회개하는 삶을 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매일같이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갱신시키고 바로잡고 새롭게 하려고 하는 그런 삶이 없어져서 그렇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부드럽던 나의 마음 밭이 가만 굳어져 버려서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 동안 마음 밭을 갈아 엎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교회들이 얼마나 참신했습니까? 얼마나 뜨거운 전도열과 구원받음에 대해서 감격하며 기뻐했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그 참신하던 교회의 신앙들이 제도화되고 형식화되고 관료화되고 안주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500년대 중세기에 와서는 교회가 세속의 권력을 한손에 쥐면서부터 결정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면죄부를 팔아 먹으면서까지 재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돈은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모다 못해서 마침내 수도사였던 루터가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신앙이 습관화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신앙이 습관화되면 그 신앙에는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생활에 변화가 없고 내용도 없어지고 구체적인 삶도 없어지고 그래서 나중에는 껍데기와 형식만 남게 됩니다.
예수 믿은 지 3년이 되는 어느 여성도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요즘 시집에서 반대가 많아서 예수를 못 믿겠다고 호소를 했습니다. 예수를 계속 믿으려면 차라리 이혼을 하라고 한답니다. 여러분, 왜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예수 믿은 지 3년이나 지난 후에 와서 믿지 말라고 야단을 하겠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신앙은 매일같이 갱신시키고 변화되어야 하고 마음 밭을 엎는 생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신앙도 별수없이 형식 신앙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알고 보면 생명력 없는 신앙처럼 하나님 앞에 죄송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굳어져 가는 내 마음 밭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자꾸만 나태해지려고 하는 내 마음을 갈아 엎고, 자꾸만 잠만 자려고 하는 내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서 힘쓰고, 감격도 없어지고, 눈물도 없어지고, 형식의 껍데기만 남아 있는 나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자꾸만 갈아 엎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별수없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개혁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자꾸만 세속화되고 무력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턱가 강조한 것이 바로 이 회개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본질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길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의 길로만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그 길에서 이탈하게 되면, 수단이 개입되고 인위적인 것이 개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본질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가 지적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세 기독교가 교황을 너무 강조하고 인위적인 것을 강조하다가 마침내는 면죄부까지 팔아 먹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면죄부를 사면 죽어서 춘국에 가지 못하고 연옥에 가 있는 영혼들에게까지도 영향이 주어진다고 하면서 팔았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얼마나 타락했었습니까?
그때 루터가 신앙의 본질을 강조했습니다. 그때 강조한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오직 성경으로"이고, 두 번째는 "오직 믿음으로"이고, 세 번째는 "오직 은총으로"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교회의 진정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한창 면죄부를 팔고 사는 사람들에게 루터는 강조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는 길은 행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면죄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경이고, 오직 믿음이고, 오직 은총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리 선행을 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살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성경이고, 오직 믿음이고, 오직 은총일뿐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얼마나 분명한 신앙 고백입니까? 그래서 루터의 신학의 중심은 십자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만이 하나님께 나갈 수가 있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고,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쌓은 공적이나 선행이나 돈이나 면죄부로는 어림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루터는 강력하게 요구하기를 면죄부 판매를 당장 중지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 주제가 "오직 믿음"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움을 받았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무수한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을 가리켜서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신앙, 믿음이 없는 기도, 믿음이 없는 교회, 믿음이 없는 선해, 이것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교회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오늘과 같은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그래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그 교회가 구원받는 교회로 살아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전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루터는 끊임 없는 변화된 삶을 요구했습니다. 생활은 모두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서는 면죄부만 사면 용서받고 사함받는 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삶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95개 조항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의 덕목을 제시했습니다.
"교회는 먼저 정체되지 말고, 형식화되지 말고, 형제간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죄를 슬퍼하고, 세상의 곤경에 대해서 연민을 가지며, 어떤 특정 분야만 개혁될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이 함께 개혁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루터는 이것을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고, 사회의 변혁에도 민감해야 합니다.
엊그제 어느 교회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으니 한 번 만나서 상담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만났습니다. 만나 보니까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민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들이 너무나 자기 변화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하고 있으며, 모두들 안주 의식만 가지고 평안하게만 살아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신자들이나 교회들이 하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고민하려는 마음도 없고, 여전히 구태 의연하기만 하다고 개탄을 했습니다.
저는 그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이 시대를 보고 외롭게 고민하는 세례 요한의 고민 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고민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그런 고민이었습니다. 루터가 당시에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오늘은 교회나 개인을 막론하고 자꾸만 변화하고 갱신되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신앙도, 내 마음도, 내 교회도 자꾸만 굳어지게 되고 그러면 나중에는 그 신앙이 형식만 남게 되고 껍데기만 남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모양은 있으나 내용이 없는 눈물도, 감격도, 기쁨도 없는 무감각하고 허울 좋은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무감각이 저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무감각입니다. 문둥병이 무서운 것은 무감각 때문입니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아픔이 없습니다. 암이 무서운 것도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몸 속에서 암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감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저주스런 일입니까?
그런 면에서 종교 개혁은 이렇게 무감각하게 살아가던 그 시대에 일대 아픔을 주어 정신을 일깨운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아가던 그 시대에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삶을 살자, 신앙의 본질을 상실하지 말자, 그리고 변화의 삶을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이미 481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 개혁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이 과제는 이 땅에 성도가 있고 교회가 있는 한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