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종말! (사 38:1-6)
여러분, 우리의 인생 중에서 가장 쓸쓸하고 외로운 시간이 있다면 그것이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종말의 시간, 죽음의 시간일 것입니다. 그 시간은 엄숙하고 두렵고 떨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아주 심각한 시간이고 무지막지한 시간입니다. 정답게 살던 붑 사이를 사정없이 갈라놓고, 부모와 자식 사이를, 형제와 형제 사이를 무지막지하게 갈라놓는 시간입니다.
거기에는 용서도 없고, 정상 참작도 없고, 인정 사정도 없습니다. 가정으로부터, 처자식들로부터, 이웃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 사정없이 갈라놓습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해서 아예 생가하기조차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나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타조 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타조는 날개가 있으면서도 날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그 대신 힘이 세고 다리가 길어서 그 뛰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동물입니다. 타조는 사냥꾼들에게 쫓길 때는 아주 빠른 속도로 도망을 간다고 합니다. 도망 가다가 힘이 빠지고 지치면 머리만 모래 속에 묻고는 그 큰 덩치를 세우고 꼼짝도 않고 사냥꾼들이 와서 잡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는다고 합니다. 머리만 처 박고 있으면 위험이 오지 않는다고 믿어서 그럴 것입니다. 당면한 종말과 죽음을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히스기야왕은 유다왕으로서 29년 동안 통치한 역대 임금 중에서도 칭송을 받았던 임금입니다. 그는 청교도적인 깨끗한 신앙인으로 왕이 되자마자 선왕들이 세워 놓은 우상들부터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쇄신하고 기강을 바로잡고 신앙을 정화하는 데 우선했습니다.
그 결과 히스기야는 정치 군사적인 면에서 다윗에 버금 가는 역대왕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재임 때 비로소 백성들은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나라를 든든하게 세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종말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마침내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 죽을 날이 임박해 왔습니다. 본문 "(사38:1) 그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라고 했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입니다. 이제 히스기야는 죽어야 합니다. 별 방법이 없습니다.
병에도 사람이 일시적으로 고치면 낫는 병이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해서 발생하는 몸살이라든지, 불결해서 발생한 전염병은 고치면 낫습니다. 쉬든지 약을 먹으면 곧 낫습니다. 그리고 몸속에서 발생하는 병의 경우는 수술하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병 중에도 죽을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 히스기야가 바로 이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여기에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는 죽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이쯤 되면 정신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막연했던 신앙들도 이쯤 되면 다급한 신앙으로 바뀌어지기 시작합니다.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도 이쯤 되면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별소리를 다하고 우습게 굴던 사람들도 이쯤 되면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사람들을 이 같은 막다른 처지로 몰아놓기도 하십니다. 그래야 자만하고 교만하던 마음을 거두어 들이기 때문입니다.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대처하는 방법이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1.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몸에 좋다는 약이 있으면 값이 아무리 비싸도 아낌없이 사다가 먹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에 의지해 보려는 속성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이는 답답하니까 무당에게 찾아가 보기도 합니다.
어떤 권사님은 하도 답답하니까 점쟁이한테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가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니까 점쟁이가 쳐다보지도 않고 하는 말이 예수나 믿지 여기는 왜 왔느냐고 핀잔을 줘서 혼나기만 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을 지경이 되면 이렇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쓰게 됩니다.
또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당을 찾아갈 만한 용기도 없습니다. 무슨 종다는 약을 먹어 보려고 하는 의지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지자마자 지레 죽습니다. 대처해 보려는 의지가 전혀 없습니다. 처음부터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병명을 미리 알려 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더 살것도 며칠 못 가서 죽고 맙니다.
2. 그런가 하면 똑같은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힘은 바로 이런 때에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신앙은 이때를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건 노이스라는 사람은 "신앙은 마치 공채와 같다"고 했습니다. 공채는 분명히 재산이지만 그러나 어느 시간이 지나기까지는 돈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어느 시간이 지나야만 재산으로서의 값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 공채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때는 신앙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고 힘이 있고 먹을 것이 있어서 평안할 때에는 신앙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 가서는 신앙이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힘은 그때에 무한한 힘과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때가 종말의 때입니다. 사람이 종말을 맞이하고 위기를 만났을 때는 이 신앙이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종말의 시간이 다가올 때 좋은 악도 좋지만 먼저 기도할 줄 압니다. 이제는 약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신앙으로 종말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신앙인은 종말 때 가서 보아야 진실된 신앙의 모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히스기야가 병에 걸렸습니다. 지금 한창 외롭고 고독하며 두려움마저 엄습해 왔습니다. 그때 히스기야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히스기야는 한가닥 희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자기를 찾아왔으니 혹시 살려 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때 찾아온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38: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종말 통고입니다. 이제 히스기야는 별 방법이 없습니다. 선지자가 와서 죽어야 한다고 했으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사형선고입니다. 사람이 이쯤 되면 참 암담할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대체적으로 죽음의 형태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갑자기 죽는 죽음입니다. 여기에 장점이 있다면 고통 없이 죽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오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빨리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연세가 70이셨는데 전날밤까지 잘 지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잠자리에서 운명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여기에도 단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고통이 없어서 좋기는 한데 준비 없이 죽는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립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한다면 모를 일이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죽는 거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그만 마음이 아찔해집니다. 그렇다고 하면 순식간에 죽는 죽음도 그렇게 큰 축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가지의 죽음의 형태는 좀 고생을 하다가 죽는 형태입니다. 여기에는 단점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고생을 너무 많이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암에 걸려서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진단이 나왔다면 그 3개월의 아픔은 말로는 표현이 안 될 것입니다. 그 고난은 누가 함께 나누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혼자서만 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더 무겁고 아프고 고독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장점도 많습니다. 그 3개월의 기간이 진정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죽음을 준비하고, 생을 정리하고, 신앙을 분명하고 뜨겁게 하고, 하나님 앞에 갈 준비를 충분히 해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그 3개월의 기간은 유예 기간인 셈입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인생을 정리하고 나서 갈 때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하고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있는 종말입니까? 바로 이 같은 고백이 승전가요, 성공을 노래하는 환호일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슬픔이나 미련이나 유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완전한 승리자의 노래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결혼을 해서 자식을 여럿 낳고, 돈도 많이 벌고, 많은 업적도 남기고, 죽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죽어야 성공이라고들 말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외형적인 삶의 화려함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 그 앞에서야 할 일에 대해서 준비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내면적인 신앙의 모습을 준비한 후에 초연하게 맞이하는 죽음도 성공적이고 복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라는 것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 중요한 법입니다. 사람이 평생을 허송 세월하면서 살았으면서도 마지막 죽는 순간에 나라를 위해서 죽었으면 그의 죽음을 순국이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신앙이 별로 좋지 않았던 사람도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을 위해서 죽었으면 그를 순교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선하게 살았던 사람도 마지막에 가서 돈 때문에 명예스럽지 않게 죽었다면 그는 수전노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그 시작도 중요하지만 그 마지막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이렇게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스기야왕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너는 죽는다고 하셨다. 그러니 너는 유언이나 하라." 이 통고를 받고 나서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2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에다 대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사38:3)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왕이 벽에다 얼굴을 대고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솔직한 모습입니다. 죽음 앞에서 왕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 체면이 어디 있습니까? 체면은 배가 부를 때 세우는 것이고, 여유가 있을 때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배가 부를 때 하나님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시간이 없다 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다급해 보십시오. 체면이 어디 있고 어디라고 바쁘다는 소리가 나옵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신앙 점검을 잘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 때고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용상에서 내려앚아 체면도 버리고, 체통도 버리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통곡의 기도가 효험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통곡의 기도가 후에는 반드시 응답이 주어졌던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나서 너무나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지니까 나가서 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잊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위로를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한나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성전에서 날마다 눈물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 기도 때문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그에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한때 기고 만장하다가 살인을 하고는 전과자가 되어서 미디안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40년 동안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까? 끝내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그를 다시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모두 눈물의 효과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한 번쯤 눈물을 흘려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나의 체면도 다 걷어 치우고, 나의 그 알량한 자존심도 모두 걷어 내고, 꼭 기도원에 가야만 기도가 된다는 자만스런 편견도 버리고, 낮아지고 또 낮아져서 히스기야처럼 벽을 향해 앉아서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축복입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문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풀리지 않을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히스기야왕이 그렇게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체통도 걷어 치우고, 체면도 모두 버리고,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벽을 향해서 통곡을 하면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나를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고 주 앞에서 선하게 살아온 것을 추억하옵소서." 그렇게 통곡을 했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왕입니까?
어지간 하면 체면 때문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지간 하면 그 체통 때문에 문을 꼭 걸어 잠그고 혼자서 소리 죽이고 울기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히스기야왕은 선지자로부터 죽으리라는 통고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돌아 앉아서 통곡을 하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순전하다는 것이 축복이고, 그렇게 하나님께 즉시 돌아 앉아서 통곡을 하면서 울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풀 길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 이렇게 붙잡고 울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 내게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 앞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어린아이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체면에나 체통이나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그것이 바로 불행인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런 면에서 아주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통곡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다시 히스기야왕에게로 보내십니다. 이사야가 와서 전한 말이 5절 말씀입니다. "(사38:5)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사38: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
여러분, 세상을 살다 보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풀 길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이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방법으로 풀겠습니까? 그때는 히스기야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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