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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천 목사 준비중

가시가 주는 은혜! (고후 12:1-10)

by 【고동엽】 2022. 1. 22.

가시가 주는 은혜! (고후 12:1-10)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보다 깊은 신앙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보다 깊고, 보다 내용 있는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보시기 바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을 음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깊이가 있고 내용이 있는 신앙 인이 되면 이 세상은 그렇게 살기가 어려운 세상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부터 확신에 찬 신앙 인들은 세상을 자신만만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체험적인 신앙이 중요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주님을 구체적으로 아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의 신앙의 핵심을 교훈 삼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자랑거리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지적으로 완벽했습니다. 그는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당시 세계의 사상 체계는 헬라 철학이 중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철학 사조에 아주 능통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거기다 혈통이나 가문도 화려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가문이나 족보 그리고 혈통을 굉장히 중시하던 때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나는 이스라엘의 족속이고, 베냐만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조건은 당시 행세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거의 완벽한 조건을 다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기다 학벌로는 당시 가장 명성이 있었던 가말리엘 학파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 학파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명문학파입니다. 거기다 유대인으로서는 드물게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바울의 집안이 명사의 가문에 속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사실은 그가 영적인 체험을 깊이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계시라는 계시는 다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삼층천 즉 낙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셋째 하늘까지 갔다 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한 사람의 신앙 인으로서 거의 완벽한 조건을 다 갖춘 인물입니다. 학식, 명예, 학벌, 혈통, 가문, 열심, 정열 등 한 가지도 나무랄 데가 없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아주 완벽한 사람입니다.

 

둘째 그에게도 한 가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몸에 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랑거리가 많으면 우쭐대기가 쉽습니다. 교만하고 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부러워하는 조건을 많이 갖추었다는 사람 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적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모르는 사람 치고 자만에 빠지지 않는 사람도 적습니다. 모두 자기 과신에 빠져 있고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 같은 의식을 지니고 살아가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에게 실패를 주시고, 좌절을 맛보게도 하시고, 재수하게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 세상에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위인들의 전기를 보면 대개는 이 같은 실패의 경험과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는 쓰라린 순간들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위인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랑거리가 많았고, 교만의 소지도 많았고, 영적으로, 지적으로 가문의 배경으로 볼 때 너무나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도 인간이니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만해지고 자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몸 깊은 곳에 가시를 박아 놓습니다. 가시라는 말은 stolops라는 말입니다. 말뚝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고대 사회에서 야만인들은 적을 사로잡으면 말뚝을 몸에 쳐 박아서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바울의 몸 속에 이 말뚝을 쳐 박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말뚝은 질병을 말하는데 그것이 어떤 이는 우울증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간질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안질이라고도 했는데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여간에 사도 바울이 굉장히 아픈 질병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고는 그가 교만해지려고 하면 이 질병의 가시가 몸 속에서 사정없이 찔러 댑니다. "나는 완벽하다."하는 마음이 생기려고 하면 이 가시가 몸 속에서 꿈틀거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바울을 꼼짝 못하게 잡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울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보면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몸에 가시 한 가지씩은 다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환경도 좋고 돈도 있고 잘 생기고 학벌도 좋고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인데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것이 가시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도 좋고 환경도 좋고 다 좋은데 돈이 없습니다. 돈을 벌려고 노력은 많이 하는데도 좀처럼 잘 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돈이 부족해서 가난한 것이 가시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돈도 있고, 건강도 있고 명예도 있고 다 있는데 자식이 말썽을 피웁니다. 탈선을 하고, 나가서 싸우고 들어오고, 공부를 안하고, 부모 체면을 망쳐 놓습니다. 이게 가시입니다. 이것만 없으면 이 세상을 훨훨 날 것 같은데 이것들이 발목을 꼭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가시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가시가 그를 놓아 주지를 않습니다. 꼭 붙잡고는 몸 속에서 욕망이 올라오려고 하면 이것이 사정없이 찔러 대고, 교만한 마음이 솟아나려고 하면 또 이것이 쑤셔 대는데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찔리지 않기 위해서 그는 매일같이 자신을 죽이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하기를 "나는 매일 죽노라"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셋째 그러나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서 바울이 하나님께 이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내 몸에서 이 질병을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하고 세 번을 진지하게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어서 병을 고쳐 주실 만도 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기도하기 전에 고쳐 주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서 인생도 바치고, 젊음도 송두리째 바치고, 가정도 포기하며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고통스러워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쾌히 응답해 주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9절을 보면 "그 상태로 만족하라"하시고는 고쳐 주지 않고 참고 살라고 하십니다. 대신 하나님은 주치 의사인 누가를 그의 옆에 붙여 주시고는 다니면서 전도나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보면 좀 심하신 것 같습니다. 모두 버리고 당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에게 그렇게 인색하실 수가 있습니까? 고쳐 주시면 간단할 일을 가지고 주치의를 대동시키면서도 고쳐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그 가시를 몸 속에 지닌 채 살아갑니다.
여기서 바울은 굉장히 서운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랬습니다. 새벽기도도 했고, 십일조 헌금도 충실히 했고, 열심히 봉사도 하느라고 했는데, 그러면 아들 대학에 붙여 주시면 어때서, 안 들어 주십니다.
할 만큼 했으면 사업도 좀 도와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런데도 안 들어 주십니다. 이 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서운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기도가 나오게도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도 인간인데 그런 생각 안 들었겠습니까?
여러분, 너무 완벽 좋아하지 마십시오. 완벽하다고 하는 사람들, 병자 아닌 사람 없습니다. 모두 자만하고 교만하고 스스로 된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KS라는 사람들, 인간 관계가 서툽니다. 너무 과신합니다. 지독한 이기주의고, 너그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대화해 보면 역겹습니다. 그 완벽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을 그렇게 교만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완벽한 상태로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매번 이기고, 성공하고, 항상 형통하게 놓아두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어딘가에 한 가지씩 부족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 부족한 부분이 그를 붙잡아서 겸손하게 만들어 주고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에게 가시를 주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넷째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교만해질까봐서. 신비주의로 빠질까봐서, 그를 묶어 놓기 위해서 일부러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바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상태로 족해, 더 이상 조르지 마라, 내 은혜는 약한 데서 온전해지는 능력이 있어, 참고 지내거라." 그러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다시는 그 병을 위해서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바울은 몸 속에 있는 가시가 아픔을 줄 때마다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9)"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주께서 내 속에 임재하심을 확인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는 오히려 아픈 것을 더 큰 축복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주님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몸이 아플 때에는 주님이 내 몸 속에 임재하신 것을 알고 더 머물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0년, 20년을 고쳐 달라고 기도해도 한 고쳐지는 병을 지니고 계십니까? 이제는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로 알고 오히려 아플 때마다 더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이것이 가시가 주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다가 언제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까? 그것은 기쁠 때가 아니고 일이 잘 될 때도 아닙니다. 그 때는 눈앞이 캄캄하고 암담해서 정신이 없을 때, 바로 그 때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 언제 기도가 가장 잘 되는가 하면 어려운 일을 겪는 과정에서입니다. 그 때는 정말 기도가 잘 됩니다. 힘이 있습니다. 정신이 번뜩입니다. 간절합니다. 뜨겁습니다.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다급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은 우리 목회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인데 언제 설교가 가장 잘 되는가 하면 준비를 아주 잘한 날이 아닙니다. 준비가 잘 되었다고 마음놓고 있을 때는 거의가 죽을 쑬 때입니다. 마음을 놓고 방심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묵상을 해도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시간은 자꾸만 가고, 토요일 저녁이 되었는데도 마무리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피가 마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됩니다.
그러고는 준비하기를 포기하고 할 수 없이 준비가 부족한 채 그냥 강단에 올라갑니다. 이 때는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날은 대 성공을 하는 날입니다. 어디서 영감이 숨어 있다가 그 때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지 힘있게 나와 줍니다. 이것은 설교자라면 누구나 겪어 보는 소중한 체험이고 경험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다. 기독교를 박해하지 말라. 기독교는 수난을 당할수록 더 강해지고, 더 위대해진다. 기독교를 박멸하려면 무한한 자유를 주라. 그렇게 되면 스스로 부패해서 무너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살아가시는 동안에 가시가 없기를 바랍니다. 실패도 없고, 넘어지는 일도 없고, 아플 일도 없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처럼 가시가 있음으로 해서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만 있다면, 신앙이 사도 바울처럼 "더 기뻐하였더라"하는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험산 준령 같은 산길을 헤매듯 암담한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손에 더 굳게 잡혀지는 축복이 있다면, 여러분 생활 속에 나타나는 가시들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가시가 내게 주어지는 것이 더 큰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몸에 가시를 가지고도 그 누구보다도 기쁘게 세상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새 약속의 체험입니다. 이것이 가시가 주는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면 이 같은 은혜를 통해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효과적으로 주님의 길을 따를 수가 있고, 십자가의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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